2004년 5월호

“엄마, 나 이제 아버지 용서해도 되는 거지?”|손숙

  • 글: 손숙 연극배우

    입력2004-04-29 19: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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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혼식장에서 나는 결심했다.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아버지는 우리 3남매와 어머니를 버렸다. 그러나 아버지를 모시고 50년을 산 일본인 새어머니 앞에서 나는 결국 무너져버렸다.
    “엄마, 나 이제 아버지 용서해도 되는 거지?”|손숙

    아버지는 ‘손태목’이라는 한국 이름과 하라 에이사쿠(原英作)라는 일본 이름을 함께 갖고 있다.

    올케한테서 전화가 왔다.“아버님이 많이 편찮으셔서 병원으로 모시고 왔어요. 입원실이 없다고 해서 응급실로 왔는데 형님이 빨리 좀 와주시면 좋겠어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 뵈야지, 가 뵈야지’ 벼르기만 하고 몇 달 동안 한번도 찾아가 뵙지를 못했는데 무슨 일이 나기라도 하면 이 불효를 어찌한단 말인가.

    허겁지겁 아는 의사에게 연락해 사정사정해서 입원실을 부탁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병실이 있는 8층 안내소에 가서 아무리 아버지 이름을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저기, 방금 입원하신 손태목 환자를 뵈러 왔는데요.”

    그러나 열심히 이름을 찾아보던 간호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방금 입원한 환자는 일본인 한 분뿐인데요.”

    ‘하라 에이사쿠(原英作)’. 그렇다. 아버지는 분명히 ‘하라 에이사쿠’라는 일본 이름으로 환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들어서니 침대에 아주 조그만 체구의 노인 한 분이 팔에 링거를 꽂고 누워계셨다. 아버지는 날 보시더니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셨다.

    “바쁜데 뭣하러 왔어? 며칠 있으면 괜찮아질 텐데.”

    “아버지 이름이 없다”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시는 아버지 옆에서 일본인 어머니가 덥석 내 손을 잡으며 반가워했다.

    “너무 놀랐어. 돌아가시는 줄 알고. 갑자기 어지럽다며 쓰러지시는 바람에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아버지가 이 병원으로 가자고 하시더라구. 숙상이 다닌 대학의 부속병원이라고.”

    일본말과 한국말을 반씩 섞어가며 더듬더듬 상황 설명을 하는 어머니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가득 고였다. 침대에 누운 아버지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흐르고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평생 무슨 잘못을 그렇게 하셨길래 나만 보면 저토록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시는 걸까.

    저 조그만 체구의 노인이 옛날 그토록 화려했고 그토록 많은 사람을 울리고 가슴 아프게 했던 내 아버지가 맞는 걸까. 그런데 정작 내 아버지 손태목은 어디로 가고 하라 에이사쿠라는 일본 노인이 내 앞에 누워 있는 걸까. 그리고 옆에 계신 이분, 이 일본 여인은 또 무슨 인연으로 50여년 동안 내 아버지 곁에 계시는가.

    올해로 여든여덟이 되신 아버지는 경남 밀양에서 천석꾼의 3대 독자로 태어나셨다. 워낙 자손이 귀했던 안동 손씨 종가에서 아버지는 큰댁으로 양자를 들어 종손이 된 뒤 금지옥엽, 귀하디 귀한 종손으로 온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열다섯 살, 그러니까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던 해 집안에서 정해준 대로 동갑내기인 경북 상주 양반집 규수와 혼례를 치르셨다.

    “가마에서 내리는데 어찌나 단아하고 예쁘던지 부처 새끼가 내리는 줄 알았다니까.”

    친척 할머니 한 분은 처음 시집 오실때 내 어머님의 고운 모습을 두고두고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곱고 나무랄 데 없는 어머니의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때 이미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공부를 하셨던 아버지는 방학이 되어서야 겨우 두어 번 집에 들르셨을 뿐이었고, 그렇게 집에 오더라도 층층시하 시집살이 때문에 두 분이 오붓이 만날 기회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고 한다.

    그뿐인가. 어쩌다 할머니가 합방을 시키는 날에도 어머니는 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도 못하셔서 결국 몇 년이 지나도록 두 분은 서로 얼굴도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부부 아닌 부부생활을 하실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나이 열아홉에 언니를 낳았는데 그 해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시게 되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밤 늦게 사랑에서 건너오신 아버지가 어머니 손을 잡고 함께 동경으로 떠나자고 사정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층층시하 시집살이에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신부가 신랑을 따라 야반도주할 배짱이 있었겠는가. 게다가 갓 태어난 어린아이까지 딸린 형편이니. 결국 어머니는 눈물로 그 애원을 뿌리쳤고 그날 이후 두 분의 애틋한 인연도 어긋나기 시작한게 아닌가 싶다.

    일본으로 가신 아버지는 새로운 문화, 새로운 세상에서 나날이 변화하셨다. 세월이 흐를수록 시골에서 어른들과 함께 4대에 걸친 제사를 모시면서 사는 어머니와는 점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결국 동경에서 새로 만난, 이른바 신여성과 살림을 차렸고 일년에 두어 번 오던 고향집 나들이도 이 핑계 저 핑계로 건너뛰는 일이 잦아졌다.

    결국 그곳에서도 아이가 태어났고 어머니는 속절없이 그저 멀리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긴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집안에선 물론 난리가 났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친가와 외가의 할머니들은 매일 장문의 편지를 일본의 아버지에게 보내셨고, 결국에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데리러 일본으로 가셨다. 그 후 강제로 끌려나온 아버지에게 추상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네가 열 계집을 보든 스무 계집을 보든 상관하지 않겠다. 그러나 조상의 제사를 서자에게 받들게 할 수는 없으니 아들 하나는 낳고 떠나거라.”

    양가 할머니의 엄명으로 아버지는 사랑 없는 어머니와 합방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게 바로 나였다. 비록 어처구니없고 기막히게 나를 낳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열 달 내내 행복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바람처럼 다시 일본으로 떠나셨지만 8년 만에 아기를 가진 어머니는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셨다. 집안에 경사가 났다고 동네 전체가 매일같이 잔칫집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나는 모두가 원하던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났다.

    “이 일을 우짜노, 이 일을 우짜노.”

    산바라지를 해주셨던 이웃 할머니가 혀를 차자 어머니는 울기 시작했다. 마루에서, 안방에서, 사랑방에서 사내아이 소식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집안 어른들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셨다. 할아버지는 두루마기를 챙겨 입으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가셨다고 한다. 산모가 미역국도 먹지 않고 아이에게 젖도 물리지 않은 채 내내 흐느끼기만 하자 아이는 그때부터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목놓아 기다리던 아들 소식

    “그만 울고 애기한테 젖부터 물려요. 온 집안이 이 모양이니 삼신 할머니가 화가 나셨어요. 그렇게 울다간 아이한테 큰일이 나요.”

    이웃 할머니가 버럭 화를 내시면서 아이를 안겨주자 그제서야 아이가 뭘 아는 것처럼 울음을 그치더라고 언젠가 어머니께서 내게 얘기해주셨다.

    나는 그렇게 시끄럽게, 그리고 서럽게 태어났다. 2년 후에 또 한번 난리를 치른 뒤 다행히도 남동생이 태어났고 그 후로 아버지는 우리에게 영원히 잊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안 계셔도 우린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았다. 집안에는 우리를 애지중지 사랑해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고 어디를 가더라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도 풍성해서 아버지가 그립거나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은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아버지는 그 곳에서 만난 한국인 여성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4남매와 함께 서울에서 호텔을 경영하면서 1년에 한두 번씩, 명절이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만 바람같이 다녀가셨다.

    어쩌다 아버지가 고향집에라도 오시는 날이면 할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 3남매를 아버지와 가까이 있게 하려고 애를 쓰셨다.

    “아버지 진지 잡수시라고 해라.”

    “아버지 담배 피우시게 재떨이 갖다 드려라.”

    할머니는 계속해서 우리의 등을 떠밀었지만 우리 3남매는 어색하고 낯설고 부끄러워서 아버지 얼굴조차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어머니는 어른들이 보지 않는 집안 구석에서 자주 눈물을 훔치시곤 했다. 당연히 어린 우리도 집안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집에 오시는 것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머니는 당신의 한을 푸는 일은 우리 3남매를 남부럽지 않게 공부시키는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래서 무작정 우리를 끌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아버지가 계신 서울이었지만 우리는 아버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쪼들리고 스산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그 무렵 사업이 잘 안 되었기 때문인지 아버지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셨다. 잠시 일본에 머무를 작정이었던 아버지의 귀국은 한 해 두 해 늦어졌고, 그러던 어느 날 일본에서 또 다른 일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게 되자 어렵고 힘든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4남매를 데리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또 다른 여인이 서울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능력도 없고 수입도 없이 서울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아마 모를 것이다. 평생 경제적인 어려움을 모르고 살던 우리 가족은 시골에서 보내주는 아주 적은 돈에 의지해 그야말로 고단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생활이 힘들수록 모든 원망은 자연 아버지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창 사춘기였던 나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까지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대책 없는 남편 소식만을 바라고 우리를 고생시키는 어머니가 미워져서 만만한 엄마, 눈앞에 보이는 엄마한테 정말 못되게 굴었다. ‘책임질 능력도 없이 왜 나를 낳았느냐’며 악을 쓰고 덤비기도 했고 일부러 며칠씩 밥을 굶어서 엄마를 애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굴하지 않고 서울을 떠나지 않으셨다. 가슴에 맺힌 한을 풀 길은 우리를 남보다 더 많이 가르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책임도 못 질걸 왜 낳았어?”

    그런데 그런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 생겼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대학 재학중에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학교를 중퇴해버린 것이다. 내 가슴은 늘 아버지에 대한 증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미움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기회만 있으면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던 나는 어머니의 목숨 건 반대를 무릅쓰고 그 남자와 결혼을 감행했다.

    자식에게 걸었던 마지막 희망조차 물거품이 된 뒤 어머니는 초췌한 모습으로 결혼식에 참석하셨다. 아버지 없이 할아버지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날 보자 어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셨다. 그러자 그만 신부인 나도 울고 온 가족이 울기 시작해서 결혼식장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날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내가 죽는 날까지 절대로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1968년. 언니와 나는 아버지가 일본으로 되돌아가신 지 10여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러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비행기가 이륙해서 하네다(羽田)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내 가슴은 내내 뛰었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어쩌다 한 번씩 바람처럼 다녀가시는 아버지를 먼발치에서 본 기억밖에 없어 공항에서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다.

    세관 검사대를 빠져나오자 아버지가 보였다. 한 중년 신사가 목을 빼고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눈에 아버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어서 다시 아버지를 만났다.

    영화배우 출신의 새어머니

    아버지 옆에는 너무도 세련되고 멋진 30대 여성이 웃고 있었다. 스무 살 때 아버지를 처음 만났다는 일본인 새어머니였다. 송죽영화사의 신인 여배우였던 새어머니는 한 모임에서 만난 매너 좋고 세련된 중년의 한국 남성에게 홀딱 반했고, 한국에서 어떤 인생을 살다 왔는지는 묻지도 않은 채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미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고 평화롭게 살고 있던 새어머니에게 우리 자매의 등장은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 그러나 그분은 모든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아버지 역시 우리에게 미안해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당당했다. 나름대로 당신의 인생에 대해 우리에게 이해를 구하려 애쓰시기도 했다.

    당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바람둥이가 아니라는 것, 일본에서 만난 신여성과 정말로 사랑했지만 당시 상황으로는 어머니와의 이혼이 불가능해서 부득이 두 집 살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 후 일본으로 올 수밖에 없었고 귀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인 어머니를 만나 다시 사랑이 싹텄고 이제는 도저히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 등등.

    우리는 아버지와 온천으로 여행도 가서 밤 늦도록 옛날 얘기를 하면서 조금씩 가슴을 열었다. 늘 일본 쪽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기다리다 돌아가신 할머니 얘기를 하다가는 서로 부여안고 울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아버지를 미워하고 증오한 건 지독히도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기다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먼곳이긴 하지만 이렇게 내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함께 깨달았다.

    그 후로 우리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남북 이산가족이 상봉하듯 아버지를 만났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면서 아버지와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드디어 어느 날 아버지는 일본인 새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오셨고 가족 모두와 만나게 되었다. 새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어머니께 큰절을 올렸고 물끄러미 일본 새어머니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짧게 한 말씀을 하셨다.

    “네가 무슨 죄가 있겠나.”

    며칠 후 일본으로 돌아가시면서 아버지는 쓸쓸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너희 어머니가 평생 마음 고생 하고 살았지만 말년은 나보다 훨씬 나아 보인다. 다 너희 3남매가 이렇게 잘 모시고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아버지에게 매몰차게 대꾸했다.

    “그야 너무도 당연하죠. 아버진 지은 죄값이 너무 커서 말년은 엄마보다 행복하시면 안 돼요.”

    말이 씨가 되었을까. 결국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고 남동생이 아버지를 한국으로 모셔오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서 돌아가실 순 없잖아요. 이제 어머니도 돌아가셨으니까 마음 편하게 귀국하세요.”

    못 이기는 척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물론 일본 어머니도 따라오셔서 정성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 올해로 두 분이 만나신 지 꼭 50년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념이 될 만한 일을 한가지라도 만들어 드려야지’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덜컥 병이 나신 것이다.

    “괜찮다. 바쁜데 오지 마라.”

    아버지는 늘 나만 보면 쩔쩔매면서 이 말씀만 하신다. 가슴이 아리다. 저러고 말걸, 저렇게 마무리될 인생인데 왜 그렇게 모든 가족들에게 한을 남기셨을까.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아무 걱정 마세요, 아버지. 저희가 다 알아서 잘할 테니까 모두 맡기세요”라고.

    “엄마, 나 잘하는 거죠?”

    그러다 때로 엄마에게 미안해지면 하늘을 쳐다보고 얘기한다.

    “엄마, 나 잘하는 거죠? 내가 지금 아버지에게 잘 못하면 엄마도 속상하실 거야, 그렇죠?”

    7년 동안 아버지를 모시고 낯선 서울에서 살면서 일본 어머니는 틈틈이 그림을 그리셨다. 가슴에 쌓이는 답답함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얼마 전 우리는 그 그림을 모아 조그만 전시회를 열었다. 나는 전시회를 찾아준 손님들에게 말했다.



    “어떤 연유이든 한 남자를 만나서 50년을 함께 산 건 존경받을 만합니다. 어머니는 50년을 한결같이 지성으로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분은 저희들의 어머니십니다.”

    이제 늙고 병든 노인이 되어 돌아오신 아버지가 남은 생애에 편안하시길 바란다. 그게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바라시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두 다 용서하고 화해해라.”

    어머니는 지금도 늘 내 가슴속을 향해 속삭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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