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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 ⑤

치열한 비극적 서정의 화신 진산

삶의 결핍 속에서 감정의 진실 찾기

  • 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치열한 비극적 서정의 화신 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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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비극적 서정의 화신 진산

진산의 초기 작품들. 삶의 근본적 결핍에 대한 탐색이 특징적이다.

진산의 비극성은 ‘색마열전’ ‘대사형’에서 운명의 색채가 옅어지는 대신 근본적 결핍이라는 삶의 조건이 부각되면서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운명이든 아니든 근본적 결핍에 직면하고, 그 조건 속에서 어떤 진정한 가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진산 소설의 주제적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운명의 색채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 ‘홍엽만리’에서 진정한 가치는 한편으로는 비극적 유토피아주의라 불릴 만한 정치적 전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과 재생이라는 신화적 구조와 결합된다. 그러나 ‘색마열전’ ‘대사형’ 이후로는 주로 감정의 진실 획득이 구체화된다.

나는 진산의 소설 중 ‘대사형’을 가장 좋아한다. 이 소설에는 두 명의 대사형이 나온다. 첫 번째 대사형 검룡은 장백쾌검문의 일곱 제자 중 맏이이며 용모, 능력, 인품 등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나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무협소설 주인공에 부합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강호에의 첫 출도에서 좌절, 유골이 되어 돌아온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검룡의 이야기가 아니라 검룡이 죽은 뒤에 남은 여섯 사형제들의 이야기가 된다. 검호는 원래 일곱 제자 중 둘째였으나 대사형 검룡이 죽은 후 새로운 대사형이 된다.

이 작품은 어느 모로 보나 전혀 대사형답지 못한 검호(검룡의 존재가 검호로 하여금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는 측면이 있다)가 여러 곡절을 겪은 뒤에 명실상부한 대사형이 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렇다고 검호의 성격이 바뀐다거나 능력이 크게 발전하여 천하의 고수가 되는 것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천비록(天秘錄)을 둘러싼 무림의 음모와 암투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뒤에도 검호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 진정한 대사형이 된다. 오히려 그는 무공을 상실하고 적어도 10년 이상 다른 이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된다.

이 작품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숨겨진 비밀은, 원래 사부가 한 아이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 여섯 아이를 함께 키웠다는 것이다. 검호는 ‘매의 후예’이며 천비록의 소유자인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았지만 발설하지 않는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가 이 작품에서 조금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호소력을 위해서는 오히려 그 아이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아야 한다. 전통적인 무협소설이라면 그 아이가 주인공이 되어 복수하고 성공하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다른 여섯 아이는 조연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사형’은 여섯 아이, 그중에서도 가장 못난(못남 속에 나름대로의 현명함을 감추고 있지만) 아이의 이야기를 통해 결핍을 조건으로 하는 삶에서 가능한 진정한 가치를 모색한다.



‘정과 검’은 진산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그러나 그보다 ‘감정의 진실’이라는 주제가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작품이란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이 작품은 주인공 설서영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무정검 이결의 제자가 되기 위해 유주로 오는 데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변방인 유주는 도망자들의 최후의 거처이다(이 장소는 ‘대사형’에도 나온다).

천하제일검의 제자이자 아들인 무정검 이결은 사부인 아버지로부터 파문당하고 그 상처를 안은 채 유주에서 자폐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모든 관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유인이 되기는커녕 자폐증에 빠지고 말았다. 그가 추구한 관계로부터의 해방은 관계의 거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제자로 삼아달라고 요구하는 설서영으로 인해 이결은 거짓된 자유인의 전망에서 벗어나 감정의 진실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제 설서영과 이결,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감정의 진실이다. 그들에게 감정의 진실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주는 필요충분조건이며 진정한 자유인의 징표이다. 대부분의 무협소설에서 목적, 혹은 가치가 되는 복수, 신의, 정의, 무도의 완성 등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가령,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이 치솟아올랐다. 생전 처음, 인생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음을 그는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야 비로소 자신이 진짜 자유로워졌음도 그는 느꼈다. 지금까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던 가장 큰 족쇄는 바로 자기 자신의 손이었던 것이다.

라고 서술되는 자에게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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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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