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호

세조 따라 걸으니 견훤이 막아서고… 긴 세월 켜켜이 쌓인 역사와 전설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입력2004-04-30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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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에서부터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 지 6개월. 이제 절반쯤 북으로 거슬러 올랐을까.
    • 수많은 고개와 재, 봉우리를 넘으니 또 하나의 명산이 반긴다. 역사와 전설이 살아 숨쉬는 속리산. 그 우두머리 천황봉에 오르니 동으로 낙동강이오, 남으로 금강이오, 서로 남한강이다.
    세조 따라 걸으니 견훤이 막아서고… 긴 세월 켜켜이 쌓인 역사와 전설

    조선 후기 임경업 장군이 누워있던 바위를 일으켜 세웠다는 전설을 간직한 입석대.

    19세기에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서부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무렵, 한 탐험대가 옐로스톤 지역에서 놀라운 자연현상을 목격했다. 그러자 당시 미국에서는 이 지역의 토지소유권을 두고 논쟁이 일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1872년 옐로스톤을 국가 재산으로 귀속시켰다. 신비로운 자연환경을 국민 모두가 소유함으로써 쾌락을 극대화하자는 취지였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물론 미국에서도 국립공원에 대한 관점은 수차례 수정됐지만, ‘자연환경의 공동소유’라는 기본개념은 변함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은 지리산으로, 1967년 지정됐다. 하지만 국가가 직접 국립공원을 관리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1980년 중반까지는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다가 1987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설립되면서 전국적인 통합시스템이 갖춰졌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는 국립공원의 관광상품화가 더딜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환경의 파괴가 빠르게 진행됐던 것이다.

    2004년 4월 현재 한국에는 모두 20개의 국립공원이 있는데 이 가운데 15개가 산이다. 국립공원이 국가를 대표하는 자연자원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새삼 한국에서 산이 차지하는 절대적 비중을 엿볼 수 있다. 지리산, 덕유산, 속리산, 소백산, 오대산, 설악산 등 한국을 대표하는 산이 모두 백두대간에 자리잡은 국립공원이다. 결국 백두대간은 한국 관광산업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셈이다. 다행스러운 건 백두대간을 둘러본 외국인들이 한 목소리로 “세계시장에 내놓아도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한다는 점이다.

    작점고개에서 만난 중학생들

    세조 따라 걸으니 견훤이 막아서고… 긴 세월 켜켜이 쌓인 역사와 전설
    3월20일 오전. 김천역에서 1시간을 기다려 시내버스를 타고 추풍령으로 향했다. 버스에 탄 10여명의 승객은 남녀로 갈라져 왼편에는 아저씨들이, 오른편에는 아주머니들이 앉았다. 아저씨들은 이날 저녁 서울에서 열리는 탄핵반대 촛불집회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아주머니들은 길가에 새롭게 들어서는 아파트를 바라보며 옛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필자의 귀는 아저씨 쪽에서 차츰 아주머니 쪽으로 옮아갔다. “우리가 자랄 때는 저기가 다 논바닥이었는데” “우리 엄니가 나를 촌구석으로 보내면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다고” “농촌 총각 장가보내고 자식들 대학공부까지 시켰으니, 니는 큰일을 한 기다. 부처님도 복을 주실 기다” “내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안 믿는다. 내는 남편과 아들만 믿는다”….



    추풍령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작점고개에 내리니 30명쯤 될까, 학생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교사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은 차례로 대간에 붙었다. 맨 앞에서 대열을 이끄는 학생에게 물으니 경기도 파주중학교에서 온 백두대간 종주대란다. 이 학교의 백두대간 동아리 ‘파주마루’는 3주에 한 번씩 대간에 오른다고 했다. 신입생 때부터 그렇게 걷다 보면 졸업할 때까지 백두대간을 모두 밟게 된다는 것이다.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소년에게 “산보다 재미있는 게 많은데 왜 하필 산이냐”고 묻자,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지요”고 응수한다.

    학생들에게 자극받은 탓인지 발걸음이 빨라졌다. 숨도 고르지 않고 내달아 473m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한 중년남성이 봄소풍을 즐기듯 돗자리를 펴고 누워 있다. 그는 설악산에서부터 역종주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가 내미는 술잔을 마다하고 용문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섰다. 봄기운이 완연해 따스한 햇볕과 탁 트인 시야에 바람마저 시원했다. 용문산을 넘어서자 오른편 능선 아래쪽으로 용문산기도원이 눈에 들어왔다. 용문산기도원은 1950년 나운몽 목사가 건립한 한국 최초의 기도원으로 최근 이곳에는 실버타운이 조성되고 있다.

    안부를 지나 국수봉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이다. 힘들게 고개를 넘어서자 시원한 바람이 반겼다. 휴식을 취할 만한 곳을 찾는데 왼편으로 넉넉한 자리가 보였다. 보통 산속에서 보는 시멘트 구조물은 흉물스럽기 십상인데 이 물건은 달랐다. 바위에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앉으면 식사하기에 적당하고, 올라서면 서부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누군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배려해 만든 자리처럼 느껴졌다.

    국수봉에서 큰재로 가는 길에는 겨울과 봄이 공존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한 오솔길이지만 낙엽 밑에는 아직도 얼음이 붙어 있었다. 몇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비탈길을 내려서니 아낙네들이 포도 과수원에 두엄을 뿌리고 있다. 푹 썩은 두엄 냄새는 언제 맡아도 싫지가 않다. 마치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집을 다시 찾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과수원을 왼쪽으로 흘려보내고 도로변으로 나왔다. 이곳이 바로 920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신곡리로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길가의 농가에 들어가 물을 구하니 귀가 어두운 할머니가 손짓으로 답하며 가마솥을 열어젖혔다. 할머니는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실 물만 조금 가져가.” 가마솥을 들여다보니 검은 먼지가 둥둥 떠다니는 물이 반쯤 담겨 있다. 입으로 후후 불어가며 바가지에 물을 담아 바짝 말라붙은 목을 축였다. 이런 물을 두고 꿀맛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쓰레기로 뒤덮인 생태학교

    920번 도로를 건너서자 부산녹색연합생태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원래 이곳은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가 있었는데 1997년 폐교되면서 생태교육장이 들어섰다. 백두대간과 생태교육이면 궁합이 제대로 맞는 셈이다. 알림판의 글씨도 꽤 의미심장했다. ‘우리의 미래와 통일을 위해 민족정기 및 환경교육을 할 귀중한 교육장을 우리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도록 합시다.’ 하지만 운동장을 지나 교실쪽으로 들어서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창은 여기저기 깨져 있고 화단에는 쓰레기가 가득했다.

    마음이 울적해지니 몸도 무거워졌다. 야트막한 산지를 따라 회룡재까지는 가볍게 넘었으나 회룡재에서 개터재로 가는 동안 다리가 풀렸다. 이 구간에서 그나마 위안이 돼준 것은 서편 능선을 붉게 물들인 노을이었다. 개터재에서 윗왕실까지는 고즈넉한 산길. 어둠 속에서 마을이 가까워지자 경운기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마을 어귀에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버스정류소 옆에 작은 누각이 하나 보였다. 랜턴을 비춰 읽어보니 ‘최만개 효자각’이라 쓰여 있다. 조선시대 최만재라는 사람의 효행을 기리는 비각이었다. 중병에 걸린 어머니를 위해 뒷산에 단을 쌓아 천일기도를 올리자 어머니의 병이 깨끗이 낫고, 한겨울에 어머니가 참외를 먹고 싶어해 정성껏 기도하니 꿈에 노인이 나타나 참외 있는 곳을 알려주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묘살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3년간 곁에서 그를 지켜주었다고 한다.

    3월21일 새벽. 경북 상주시 공성면 윗왕실 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백학산까지는 긴 오르막. 잡목과 소나무 숲길을 지나자 길게 뻗은 과수원이 나타나고 일찍부터 거름을 내는 농부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행여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들의 심기를 건드릴세라 잰 걸음으로 통과했다. 높은 산이 없어 힘은 덜 들었지만 수차례나 독도에 애를 먹었다. 백두대간은 49번 지방도로를 건너 지기재동 마을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산줄기로 이어지는데 하마터면 엉뚱한 곳으로 들어갈 뻔했던 것이다.

    인적이 드문 숲길에 퍼질러 앉아 우유와 빵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소나무 향기에 취해 1시간 남짓 걷다 보니 널찍한 아스파트길이 나왔다. 여기가 바로 신의터재. 본래 지명이 신은현이었던 이곳은 임진왜란 때 김준신이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뒤부터 신의터재로 불렸다. 하지만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로 그 이름을 ‘어산재’로 바꾸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에야 신의터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신의터재 인근 화동면 판곡리에는 낙화담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김준신의 가족들이 왜병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이곳에 몸을 던졌다고 전해진다.

    신의터재에서 무지개산까지 완만하게 이어지던 백두대간은 윤지미산에서 한껏 치켜 오른다. 윤지미산 정상에는 쉬어가기에 무난한 공터가 있지만 조망은 그리 뛰어나지 않다. 오히려 윤지미산 못미쳐 왼쪽으로 바라다보이는 판곡저수지가 추천할 만하다. 윤지미산에서 화령재까지는 급한 내리막. 화령재는 6·25전쟁 당시 격전지로 유명하며 현재 전적비가 남아 있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수도사단 제17연대(연대장 김희준)가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에 매복해 있다가 인민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승리해 국군은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했다.

    세조 따라 걸으니 견훤이 막아서고… 긴 세월 켜켜이 쌓인 역사와 전설

    개터재에서 바라본 일몰. 서편 능선을 붉게 물들인 석양이 아름답다.

    3월27일 새벽.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상주행 시외버스를 탔다. 청주 보은을 경유해 화령까지는 4시간 남짓 걸렸다. 화령은 경북 상주시 화남면의 면사무소 소재지로, 상주시에는 화령재를 중심으로 화동 화서 화남 화북면이 있다. 화령터미널 근처 김밥집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대간으로 붙었다. 비지땀을 쏟으며 긴 오르막을 통과하자 산불감시초소가 보였다. 초소 안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한 분이 열심히 무전을 받고 있었다. 산속에서 고생하는 할아버지께 목례를 하고 봉황산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멀리 속리산 자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봉황산 정상에는 서울에서 왔다는 두 남자가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이미 백두대간 종주를 끝낸 그들은 개인일정 때문에 빼먹은 구간을 채우는 중이라고 했다. 화령재-형제봉 구간이 초행인 필자는 서울 아저씨들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필자와는 체급이 달랐다. 처음에는 가볍게 걷더니 속도가 붙자 산악마라톤을 하듯이 날아갔다. 필자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40분 남짓 바짝 붙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결국 49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비재에 이르러서 그들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비재에서 대간으로 올라서는 철계단 위에서 또 다른 서울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그는 필자와 비슷한 시기에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는데 얼마 전부터 무릎통증이 생겨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그의 백두대간 종주 방식은 특이했다. 필자처럼 지리산에서부터 차례대로 구간을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순서 없이 마음에 드는 구간을 오르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지도에는 짧은 선들이 띄엄띄엄 설악산까지 이어져 있었다. 계절마다 풍광이 다른 백두대간을 입맛에 따라 즐길 수 있다면 남다른 재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재에서 갈령으로 가는 길에는 백두대간의 유일한 습지대인 못제가 있고, 이곳을 지나면 고만고만한 암릉구간이 펼쳐진다. 그다지 버겁지 않은 바위를 상대로 숨바꼭질을 하다가 고갯마루를 살짝 내려서면 텐트를 몇 동 칠 만한 공터가 나오는데 여기가 갈령삼거리다. 이곳에서 오른쪽 산길로 20여분을 내려서면 갈령이 나오고 왼쪽길로 계속 달리면 속리산 능선이 시작되는 형제봉(828m)을 만날 수 있다. 필자는 갈령삼거리에서 뒤따라오던 서울아저씨를 기다렸지만 30분이 지나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암릉구간에서 무릎 때문에 고생하는 모양이다.

    갈령삼거리에서 형제봉으로 가는 길은 숨이 턱까지 차는 가파른 오르막이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나서야 형제봉에 오를 수 있었다. 정상에서 바라본 속리산 주능선은 과연 명성대로였다. 북쪽으로는 천황봉(1057.7.m)에서 문장대(1029m)를 잇는 능선이 시원스럽고, 좌우로는 충북 보은땅의 오밀조밀한 산세와 경북 상주땅의 선 굵은 산세가 묘한 대조를 이뤘다. 이곳이 바로 충북과 경북의 도 경계선이다.

    형제봉부터는 가볍게 뛰어갈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잘 나 있다. 피앗재에서 만수동계곡으로 내려설까 하다가 해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전진했는데 그것이 그만 화를 부르고 말았다. 도중에 표지를 잃는 바람에 하산지점을 놓친 것이다. 또 다시 야간산행. 당초 계획은 보은의 만수동계곡으로 물러설 생각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물소리를 따라 정신없이 걷다 보니 상주땅의 장각폭포 쪽으로 떨어졌다. 새옹지마라던가. 속리산 구간을 통과하면서 장각폭포를 지나치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우여곡절 끝에 상주 사람들의 자랑거리를 구경할 수 있었다.

    최치원과 임경업의 전설

    3월28일 새벽. 화북면사무소가 있는 곳에서 택시를 타고 장각폭포 입구인 상오리 마을까지 갔다. 상오리 산기슭에는 보물로 지정된 7층 석탑이 있는데, 새벽안개에 파묻혀 운치를 더했다. 장닭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대간에 붙자 지난 밤 바삐 내려온 길이 선명하게 보였다. 동쪽 하늘에서 일출이 시작되면서 속리산 정상인 천황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왔다. 하지만 천황봉까지는 1시간 이상 씨름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거리.

    속리산 정상. 과연 천황봉이었다. 동으로 낙동강, 남으로 금강, 서로 남한강이 시작돼 조선시대로부터 삼파수의 분기점으로 불리던 곳이 바로 이 곳이 아닌가. 정상에 서자 보은과 상주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햇볕과 그림자의 농도가 연출하는 주능선의 바위 빛깔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정상 마루에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산세를 감상하는데 현수막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1대간 9정맥 종주산행, 서울에 사는 이철우 정해순 부부’. 그 아래 쓰인 문구대로라면 이들은 2000년 6월부터 2004년 1월까지 총 156회에 걸쳐 남한의 대간과 정맥을 모두 주파한 셈이다. 게다가 백두대간을 불과 3개월여 만에 38회 산행으로 종주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조 따라 걸으니 견훤이 막아서고… 긴 세월 켜켜이 쌓인 역사와 전설

    1893년 동학교도 수만 명이 ‘보국안민’과 ‘척왜양의’의 기치를 내걸고 집회를 열었던 충북 보은 외속리면 장내리. 남은 건 장승뿐이다.

    천황봉에서 비로봉을 거쳐 입석대-신선대-문장대로 이어지는 능선은 속리산에서 경치가 가장 빼어난 구간이다.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속리산의 화강암 절리 암석은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됐다고 하는데, 산세가 험하지 않아 편안하게 걸으면서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지리산이나 덕유산과 달리 속리산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버글거리는 장소였다.

    그런가 하면 속리산은 세속의 명예를 버린 지식인들의 은거지이기도 했다. 조선 명종 때의 학자 대곡 성운이 대표적이 인물인데,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 등이 성운을 만나기 위해 속리사를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렇듯 속리산이 도학자들의 정신적 고향이 된 데는 최치원의 영향이 크다. 방랑자 최치원은 지리산 청학동에 들기 이전 이곳 속리사에 이르러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이를 멀리하고(道不遠人 人遠道),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떠나네(山不離俗 俗離山)’라고 읊었다. 결국 속리산이라는 이름은 최치원 때문에 생긴 셈이다.

    비로봉에서 문장대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널찍한 판자 같은 바위가 절벽 위에 꼿꼿이 서 있는데 이곳이 바로 입석대다. 입석대라는 이름은 조선 후기의 장군 임경업이 7년간 수도를 끝낸 뒤 자신의 힘을 자랑하기 위해 누워 있던 바윗덩어리를 일으켜 세웠다는 데서 나왔다. 실제로 입석대 바로 밑에는 임경업 장군이 독보대사로부터 무술을 배웠다는 경업대가 있다. 또한 이곳에서 산길을 돌아 나와 암벽을 타고 들어가면 관음암이라는 암자가 나오는데, 임경업 장군은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인 장군수를 마셨다고 한다.

    사람들이 흔히 문장대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는 문장대가 속리산 정상이라고 알고 있는 점이다. 문장대는 천황봉보다 28.7m가 낮다. 둘째는 문장대가 충북 보은땅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데, 행정구역상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문장대를 충청도 땅이라고 생각하게 됐을까. 아무래도 지리적 요건을 빼놓을 수 없다. 속리산은 서쪽의 대전이나 청주에서 접근하기 쉽고 서울에서도 비교적 멀지 않은 명산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충청도 보은땅을 거쳐 문장대에 올랐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장대=충청북도 보은’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철계단을 타고 올라설 수 있는 문장대의 전망은 언제 봐도 시원스럽다.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문장대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10여 차례 풍광을 감상했는데, 압권은 역시 비갠 뒤 산을 겹겹이 둘러치는 운해다. 문장대(文藏臺)라는 이름도 본래는 운장대(雲藏臺)였는데, 조선시대 세조가 이곳에서 시를 읊으면서 문장대로 바뀌었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세인들 사이에서는 ‘문장대에 세 번 오르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속리산에는 조선왕조 세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보은에서 속리산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말티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말티고개라는 이름은 세조가 가마에서 내려 말로 갈아탔다는 데서 유래했다. 또한 내속리면 상판리 도로변에 있는 천연기념물 정이품송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세조의 가마가 지나갈 때 가지를 들어올려 길을 내어주었다는 정이품송. 세조가 얼마나 감격했으면 소나무에 정이품의 벼슬까지 내렸을까. 아무튼 정이품송은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벼슬을 제수받은 나무다.

    정이품송과 관련해 최근 안타까운 소식이 하나 있다. 2004년 2월 충청도 지역에는 100년 만의 폭설이 내렸는데, 가지에 쌓인 눈의 무게를 못이겨 그만 정이품송의 한쪽 날개가 부러졌다. 흥미로운 건 정이품송에서 남서쪽으로 7km 떨어져 있는 정부인송도 비슷한 시각에 참변을 당했다는 사실. 보은 사람들은 예로부터 정이품송과 정부인송을 내외간으로 여겨왔기에 이번 사태를 남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600여년을 꼿꼿하게 버텨온 정이품송도 생로병사의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 최근에는 정이품송의 대를 이를 아들나무가 지인들의 보살핌 속에 자라나고 있다.

    문장대에서 밤티재로 내려가는 코스는 백두대간 전 구간에서도 험난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겨울철에는 등반 자체가 불가능한 난코스다. 이곳에 긴 암릉구간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덩치가 큰 사람들은 바위구멍으로 몸을 밀어넣기가 힘들고, 근력이 약한 사람은 로프를 타고 내려가는데 애를 먹는다. 필자는 최대한 몸을 낮추며 조심스럽게 내려갔지만, 얼음이 남아 있는 경사면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백두대간을 밟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피를 보는 순간이었다. 큰 상처가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잠시나마 자만했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암릉구간을 통과하고 나면 편안한 산길이다. 밤티재에 도달할 무렵 오른편으로 ‘견훤산성 가는 길’이라는 표지가 보였다. 완산주(현재의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해 후삼국의 통일을 시도한 견훤의 고향은 상주 가은현(현재의 경북 문경)이다. 후삼국시대의 상주는 전략적 요충지였는데, 야사에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상주를 다스렸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후삼국을 기록한 역사책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견훤이 후삼국을 통일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아버지가 지키던 상주를 수중에 넣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밤티재에서 늘재로 가는 길은 속리산 구간을 마감하는 코스다. 밤티재는 현재 개발중인 문장대 온천을 연결하는 도로인데, 이곳에서는 최근 백두대간 훼손구간 복구공사가 한창이다. 이 때문에 밤티재 절개지에서 696.2m봉으로 오르려면 발이 흙속으로 깊숙이 빠지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696.2m봉 정상 직전에는 짧은 암릉구간이 있는데, 신발끈을 동여매고 올라서면 속리산 주능선을 정면에서 감상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늘재까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달려갈 수 있는 편안한 능선이다. 늘재 위로는 경북 상주와 충북 충주를 연결하는 도로가 지나간다.

    4월4일 가족과 함께 보은을 찾았다. 속리산 구간을 넘어가면서 보은땅을 밟지 않는다면, 뭔가 허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가장 먼저 찾아간 장소는 외속리면 장내리. 이곳에서는 1893년(고종 30년) 3월11일부터 4월2일까지 동학교도 수만 명이 모여 ‘보국안민’과 ‘척왜양의’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 집회를 계기로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사회개혁과 반외세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보은땅에 집결했을까. 당시 동학의 교주 최제우는 장내리에 머물고 있었으며, 관군에 쫓긴 교도들이 교주를 찾아 이곳으로 몰려들었던 까닭이다. 비록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조선왕조의 회유와 군대의 압력에 못이겨 해산했지만, 보은집회가 뒷날 갑오농민전쟁의 밑거름이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장내리와 법주사 기행

    110여년 전 부패한 조선왕조의 개혁을 꿈꾸었던 혁명의 현장은 지금 들판으로 변했다. 길가의 나그네는 제방에 우뚝 선 장승의 글귀를 통해 역사의 숨결을 느낄 뿐이다. ‘사람이 하늘이니 동학농민혁명만세’.

    필자는 정부인송과 정이품송을 둘러본 뒤 법주사로 향했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창건된 천년고찰이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불경을 탐독한 곳이어서 번성했고, 불교가 억압받던 조선시대에도 태종과 세조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특히 태종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살생의 죄를 씻기 위해 법주사에서 원혼들을 달래는 천도불사를 지내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이전까지 보령으로 불리던 지명을 ‘은혜 갚는다’는 의미의 ‘보은(報恩)’으로 바꾸었다.

    법주사에는 너무나 많은 문화재가 있어 이를 둘러보는 데만도 반나절이 넘게 걸린다. 필자는 이 가운데 해가 떨어질 무렵의 팔상전을 가장 좋아하는데 산 그림자에 범종 소리가 곁들여지면 더욱 운치가 있다. 팔상전이 손맛을 잔뜩 간직한 예술품이라면 경내에 우뚝 솟아 있는 통일호국금동미륵대불은 현대불교의 명품이다. 본래 금동미륵대불은 신라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 동안 조성했는데, 조선 고종 9년(1872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하면서 자금마련을 위해 불상을 몰수했다.



    그 후 1938년 일제 치하에서 시멘트 부처님이 조성되던 중 6·25 전쟁이 터져 중단됐다가 1964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과 이방자 여사(영친왕비)의 시주로 완성됐다. 시멘트 부처는 1986년 붕괴 직전에 해체됐고 4년 뒤 청동미륵부처가 조성됐다가 2000년 개금불사를 단행하게 된 것이다. 높이 33m에 달하는 대형 부처의 개금불사에 들어간 황금이 무려 80kg. 시주한 불자가 3만여명, 연 공사인원은 4500명이다. 한국불교가 또 하나의 상징을 갖게 된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초대형 미륵불로 인해 법주사의 전통적인 가람배치가 흐트러진 점이다. 황금이 빛을 발하는 법주사에서 대웅보전과 팔상전을 축으로 하는 천년고찰의 조형미는 온데간데 없다.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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