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위기의 대한민국, ‘强小國’ 핀란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냉철한 실용주의, 창의력 개발, 지속적 개혁으로 국가경쟁력 키워라

  • 글: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 전 駐핀란드·러시아 대사 posolee@hotmail.com

    입력2004-06-30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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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핀란드는 한반도 크기의 1.5배, 인구 510만명의 조그만 나라다. 그러나 국가경쟁력은 세계 최상급.
    • 2001년엔 종합적 복지지수 면에서 세계 2위로 평가받기도 했다. 1999년 국가경쟁력이 38위로 떨어졌다 2003년 겨우 25위에 턱걸이한 한국이 핀란드에서 배울 교훈은 무엇인가.
    • 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의 성공비결을 분석했다.
    위기의 대한민국, ‘强小國’ 핀란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핀란드는 주어진 환경의 열악함을 딛고 일어서 세계 최상급의 국가경쟁력을 일궈냈다.

    북구에서도 가장 동쪽, 러시아 접경지대에 위치한 핀란드는 한반도의 1.5배 크기에 510만의 인구를 가진 작은 나라다. 하지만 국가경쟁력으로는 여러 영역에서 이미 세계 최상급에 속한다. 특히 종합적 복지지수로 볼 때는 2001년 유엔개발계획(UNDP)이 마련한 인간개발보고서에서 세계 2위로 평가받았다. 그만큼 핀란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안정되었으며 희망찬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스웨덴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세력 사이, 북극권에 가까워 농업조건이 불리하고 아름다운 호수와 삼림 이외엔 특별한 부존자원도 없는 땅에 자리잡은 핀란드인의 삶이 처음부터 그렇게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우리 민족 못잖게 많은 역경을 극복해야 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쟁 초기 나치 독일과 연합했던 대가로 소련에 카렐리야의 절반을 빼앗기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따라서 1970년대까지도 국민의 일부가 간호사 등 일자리를 찾아 취업이민을 떠나는 사례가 없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핀란드는 드디어 산업화된 복지국가로 변신해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지만, 1990년대 초 소련의 갑작스런 붕괴 여파로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률이 20% 이상 치솟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았고, 수년에 걸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1995년 당시 핀란드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가 넘고 국가경쟁력은 18위였으나, 국가경쟁력은 비록 26위로 그들보다 낮지만 세계 13위의 경제규모와 높은 성장률로 바짝 추격해오는 한국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의 성공비결을 알아내려 대학 총장단이 문교부 장관 인솔 아래 한국을 방문하는가 하면 그때까지 애써 이룩해놓은 복지국가체제를 대폭 수정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후 몇 년 사이 핀란드는 다시 한번 위기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활용하는 데 성공해 세계 1등국 수준으로 발돋움했다. 사회주의의 이상을 혁명 없이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리의 성실한 수용을 통해 달성한 것이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우리는 마치 국민소득 1만달러의 덫에 걸리기라도 한 듯 10년 넘게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1999년 38위로 떨어졌다 2003년 25위로 겨우 회복한 국가경쟁력 순위나마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핀란드인의 불굴의 정신



    그렇다면 핀란드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찾는 일은 우리와 별 관계도 없는 듯한 먼 나라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무엇인가 배울 것을 제공하는 상대를 연구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학문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유익할 뿐 아니라 절대 필요한 일이다. 이제부터 핀란드인의 사고방식과 일처리 방식을 한국인의 그것과 비교 관찰해볼 기회를 가졌던 상식인의 견지에서 핀란드의 발전경로를 살펴보기로 하자.

    위기의 대한민국, ‘强小國’ 핀란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지식기반경제로 국가간 승부가 가려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어느 나라에서고 인적자원 이상으로 중요한 자원은 없다. 인구 500만명을 겨우 넘는 핀란드가 세계 1등 복지국가를 건설했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된 것은 적은 수의 국민이 각기 제 나름의 능력을 최대한 발굴해내고 그것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회·문화·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밟아온 역사적 경로와 그 결과 형성된 정신적 풍토, 곧 종교적·도덕적 자질, 사회의식, 정치적 이상 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설명되기 어렵다.

    핀란드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의 정체성을 S자로 시작하는 3개의 낱말, 즉 시수, 사우나, 시벨리우스(Sisu, Sauna, Sibelius)로 표현한다. 그 중에서 길고 음산한 겨울을 지내는데 필수적인 사우나나 핀란드인의 애국정서를 가장 잘 담아낸 시벨리우스의 음악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에게도 생소하지 않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시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시수는 핀란드 국민 특유의 불굴의 정신을 말하는 것으로, 순탄치 않은 역사를 거치면서 단련된 외유내강의 기질, 무쇠와도 같은 정직과 강건함이라 할 수 있다.

    언어와 종족으로 보아 핀란드인의 조상은 바이킹족이나 동슬라브족과 확연히 구분되는 원시적 산림족이었다. 그러나 13세기경부터 핀란드는 스웨덴의 행정체제 속으로 흡수됐고, 19세기초 러시아제국내 핀란드공국으로 그 지위가 바뀌기 전까지 약 600년간 스웨덴의 일부였다. 언어와 종족이 다른 스웨덴인의 지배구조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변경지대의 이민족으로 차별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했다. 오늘날에도 정치적·문화적으로 핀란드와 가장 가까운 나라는 스웨덴이지만 운동경기에서 결코 져서는 안 되는 상대로 인식되는 것 또한 스웨덴인 것은 이런 역사적 관계가 남긴 정서적 유산이다.

    하지만 핀란드인은 스웨덴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문화적 유산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핀족은 스웨덴의 군사력과 발달된 법제도의 보호를 받으며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법치주의와 지방자치 전통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1734년에 채택된 스웨덴 법전의 내용 일부가 오늘날까지도 핀란드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핀란드인 사이에서 민족의식이 싹트고 독립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1695∼97년 대기근으로 핀족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고, 18세기 들어 두 차례나 러시아가 핀란드를 침략해도 세력이 약해진 스웨덴 왕이 이를 막아주려 하지 않으면서부터였다. 핀란드인이 자구책으로 독립을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핀란드가 스웨덴과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된 것은 핀란드인의 항거가 아닌 러시아의 힘에 의해서였다. 1809년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 사이에 유럽 분할에 관한 합의가 이뤄지고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대륙봉쇄 작전에 협조를 거부한 스웨덴에 대한 응징으로 핀란드를 장악할 수 있는 구실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정말기 혁명운동의 확산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 전제정권은 19세기말부터 탄압적인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핀란드도 완전독립 아니면 완전예속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알게 됐다.

    독립의 쟁취와 수호

    1917년 11월 러시아 전제체제가 두 차례의 혁명으로 무너지고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한 직후 핀란드는 볼셰비키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 당시 핀란드는 사실상 독립이라는 형식만 못 갖췄을뿐 국민정신, 민족문화, 시민사회 자치의 경험, 법치전통 등 모든 면에서 독립국가로서 기능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레닌도 핀란드의 경우는 독립을 인정하여 우호적 방벽국가로 활용하는 것이 강압적으로 공산화시켜 러시아에 통합하려는 시도보다 현명한 정책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핀란드는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1932년에는 그것을 상호불가침조약으로 대체하여 중립국가로서 독자적 노선을 지켜나갈 것을 다짐했다. 그러한 조약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1939년 독일과 비밀리에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후 핀란드를 침공했다. 국토의 12%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4개월 만에 전쟁을 끝냈던 핀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히틀러와 동맹함으로써 소련으로부터 실지(失地)를 회복하려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 카렐리야의 절반을 빼앗기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핀란드는 독립을 지키는 데 성공했으며 전후 어려운 사정 속에서도 미국이 제시하는 마셜플랜도 사양하며 다시 중립국 지위를 고집함으로써 공산화되는 위험을 막아낼 수 있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핀란드의 처지가 동구의 위성국가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는 뜻에서 ‘핀란드화(Finlandiza tion)’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오늘의 중소국가 중 핀란드는 1918년에 채택한 헌법을 지금까지 지니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이며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공산당의 득세를 막고 시장경제의 이점을 활용하여 사회주의적 이상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 나라라는 사실은 그러한 해석이 타당성 없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작은 나라로서 주변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여 신속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은 오랜 역사적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핀란드인들이 터득한 귀한 지혜였다. 그것은 또한 민의를 이끌고 수렴하여 성실하게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도층의 존재, 신뢰받는 정치지도층을 선출해낼 수 있는 정치제도의 구축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

    독립의 쟁취와 수호과정에서 핀란드 국민이 보인 지혜로운 현실대응양식은 경제선진국으로 발돋움하며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도 적용됐다. 핀란드는 스스로 작은 국가임을 자각하고 국제적 정세 변화, 특히 강대국과 선진국들의 정책동향과 국제적 협력관계를 면밀히 분석해 자신을 둘러싼 국제적 환경변화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며 새로운 추세에 신속히 대응함으로써 자국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는 일을 국정의 최우선과제로 삼았다. 또한 경제사회적 여건이 어렵고 사회갈등의 첨예화 가능성이 높은 때일수록 사회안전망 구축에 박차를 가해 국가 권위를 강화하고 사회통합의 도덕적 기반을 공고히 다진 일은 민주정치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한 핀란드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다.

    복지국가 건설을 향한 핀란드의 노력은 독립을 성취하기 전부터 시작됐다.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사회주의에 대한 대응책으로 과감한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 데 자극받은 핀란드는 이미 1895년에 재해보험제도를 도입했다. 그후 새로운 의회의 탄생과 독립으로 지속적 개혁이 가능해졌다. 8시간 노동제가1917년 여름 유럽 최초로 도입됐고, 1918년엔 토지상환법의 통과로 거의 10만명의 소작인이 독립농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의무교육법도 1921년에 통과됐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마련된 가장 획기적인 사회보장대책은 1937년의 국민연금법이었다. 일반재해와 퇴직보험을 골간으로 한 이 법의 통과는 국민의 복지에 대한 책임을 국가가 진다는 복지국가 이념의 본격적 수용을 의미하는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

    위기의 대한민국, ‘强小國’ 핀란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핀란드의 대학들은 산학 공동 연구와 인재 양성을 위해 교수, 기업인, 정부 관계자 등이 모여 정기적으로 회의를 갖는다.

    핀란드의 발전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경제사회적 여건이 어려운 때일수록 과감한 개혁이 추진되고 복지국가 건설을 향한 노력이 가속화됐다는 점이다. 1939∼44년의 긴 전쟁기간, 그리고 전체인구의 12%에 해당하는 카렐리야 난민과 퇴역군인을 정착시키는 동시에 소련에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던 전후 몇 년간은 핀란드가 경제적으로 극도로 궁핍했을 뿐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시련에 직면했던 시기였다. 핀란드인들의 시수(Sisu)가 발동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전시산업을 민수산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실용주의적 구조조정을 통해 핀란드는 이미 1946년에 전쟁 전의 생산수준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고 그때 시작된 연 5% 수준의 높은 경쟁성장률을 1970년대 중엽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복지국가의 기본 틀을 갖추는 개혁이 추진된 것도 바로 그 시기였다.

    난민과 퇴역군인들에 대한 구호대책은 종전 직후부터 마련되기 시작했지만 1948년에는 세계의 이목을 끌 만한 획기적 내용의 상이군인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1946년에는 그동안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던 노동자 집단협의법이 개편됐고 연 3주 유급휴가가 법제화됐다. 전후 출산율이 높아가는 추세에서 특히 주목받은 것이 가족보호대책이었다. 1948년에 통과된 아동수당법에 따라 17세 미만 어린이는 부모의 능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경제적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고 이듬해에는 산모보호법도 통과됐다. 1949년엔 국가지원으로 주택건설과 매입을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법들이 통과됐다. 1957년에는 국민연금법이 개정됐고 5년 후 직장인연금법 개정이 뒤따랐다. 국민연금보험의 경우 고정액이 지급되지만 직장인연금은 소득에 따라 차별 지급된다.

    핀란드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복지국가 건설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데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세계공산화를 도모하는 두려운 이웃 소련의 이념적·정치적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사회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길밖에 없음을 핀란드의 지도자들은 일찍이 깨달았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 건설은 혁명적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대응책이었다.

    전후에 닥친 시련을 복지국가체제 강화를 통해 정면돌파하는 길을 선택한 핀란드가 경제발전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돌이켜보면 복지국가체제 운영에 소요된 비용은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경제회복이 시작돼 5% 정도의 성장률을 보이던 1950년에 사회복지비용으로 쓴 돈은 국민총생산의 8% 정도였다. 그러나 사회평등과 통합이 가져온 케인스적 효과는 핀란드를 머지않아 경제부국의 대열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26년 만에 산업사회로 전환

    유럽의 기준으로 볼 때 핀란드는 분명 경제적 후진국이었으나 후진국의 이점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데 성공했다. 사실 핀란드의 산업화는 이미 19세기 후반에 시작됐지만 1946년 당시까지도 국민의 50%는 농업과 임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전체 인구의 10%를 넘는 난민들과 제대군인들, 게다가 불구가 된 많은 상이군인들까지 부양하면서 소련에 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지게 됐다. 경제발전의 새로운 동력은 혹독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독립을 유지했다는 자긍심과, 물자와 자금이 모두 동난 상태에서 전시사업을 민수산업으로 신속히 전환하는 구조조정을 통해 기아와 빈곤을 퇴치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에서 발생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머리를 써서 생산성을 높이는 길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국민 전체가 단합해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배상금 지급을 기간내 완료했을 뿐 아니라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에 대한 전시 부채까지도 완불한(1952년) 나라가 됐다. 냉전이 격화되는 속에서도 국민적 자부심을 갖고 중립국으로서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폭을 그만큼 넓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1946년 50%였던 1차산업 종사자의 비중이 1972년에는 15%로 줄었다. 스웨덴에서는 1909년에서 1959년까지 반세기가 걸렸던 산업사회로의 전환이 핀란드에서는 26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전후에 시작된 연 5%의 고속성장은 1970년대까지 계속됐다. 1990년대에 이르면 1차산업 종사자의 비중은 6%로 더욱 줄어든 반면 2차산업 종사 인구는 11%에서 27%로, 3차산업 인구는 13%에서 65%로 증가했다. 이러한 산업구조의 변화는 무역과 국내수요의 증가 및 기술의 변화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1980년대 이후의 급속한 변화는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집중적 투자에 힘입은 바 컸다. 1차산업에서 2차산업으로의 전환과 거의 동시에 3차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한 핀란드는 짧은 산업화 단계를 거쳐 농업사회에서 후기산업사회로 직진한 셈이었다.

    산업구조의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도 1인당 생산성의 증가를 의미했다. 생산성의 급속한 증가는 역사적 도전의 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강하게 발동하는 핀란드 국민 특유의 시수 정신과 경제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중장기적 계획, 그리고 개인의 창의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정치제도와 사회문화적 분위기의 복합적 작용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높은 교육수준과 근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직하고 성실한 국민성이었다.

    위기의 대한민국, ‘强小國’ 핀란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국토의 75%를 뒤덮은 삼림은 핀란드의 몇 안 되는 부존자원 중 하나다.

    핀란드인의 교육중시 태도는 16세기 교회교육으로 소급하는 뿌리 깊은 현상이다. 독립 이전부터 핀란드 서민층의 교육과 사회의식 수준은 유럽에서도 높은 편이었으며 자구적인 주민운동단체들의 활동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중등학교까지가 무상의무교육이고 대학교육에도 학비가 없으며 대학원생들은 약간의 봉급까지 받는다. 청년 실업자를 위한 대책 가운데 하나인 실업수당 지급의 조건에는 반드시 취업을 위한 교육과 훈련이 들어 있다. 1998년 핀란드의 1인당 공적 교육비는 1790달러로 세계 6위였다. 이는 한국의 371달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이다.

    그러나 대학은 전국에 20개뿐이고 매년 대학에 등록하여 수학하는 학생수는 2만명으로, 같은 연령층의 31%에 불과하다. 신입생 선발은 고등학교 졸업시험성적과 입학시험성적에 따라 경쟁적으로 이뤄지며 이들 소수정예가 핀란드의 지식기반 사회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국가경쟁력 최상위권의 나라들은 대체로 1인당 교육비 수준이 높은 데 비해 대학진학률은 그리 높지 않은 반면, 국민소득 1만달러 수준 나라들의 경우 대학진학률은 높은 반면 학생 1인당 투자 교육비가 낮다는 것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다.

    6년 연한의 초등학교 교육목표는 국가가 정한다. 9학년까지 계속되는 중학교 과정까지는 계열의 분화가 필요없지만 12학년까지 계속되는 고등학교 교육은 진학 초기부터 인문계와 실업계로 구분되는 점에서 핀란드의 교육제도는 유럽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중등학교 졸업생의 약 50% 정도가 대학교육으로 연결되는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머지는 실업계열로 진학하며, 그 과정을 마친 후 취업하거나 고등전문학교에 가서 보다 높은 수준의 직능훈련을 받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도 고등전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으나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생은 일반 대학에 진학할 수 없다.

    전국 20개 대학 중 10개는 종합대이고 3개는 공과대학, 3개는 상과 및 경영대학, 나머지 4개는 예술전문 대학이다. 그밖에 대학 수준의 교육을 시키는 사관학교가 1개 있다.

    핀란드의 최고학부 진학 인구는 1950∼51년에 1만5000명 미만이었으나 1985∼86년에는 9만2000명을 넘었고 1999∼2000년에는 15만2500명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는 학교교육 체계는 국민 개개인의 진학욕구보다는 국가적 인력수급의 필요에 맞춰 설계되어 있다. 국가가 설정해놓은 고등교육기관 진학 인구 목표는 해당 연령층의 65%이며 그 목표는 이미 거의 달성되고 있다.

    교육에서 핀란드 정부나 사회가 다같이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양적 팽창보다 질적 관리다.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교육과정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하는 문제는 항상 중대한 국민적 관심사이며, 경제발전에 대한 눈에 보이는 기여를 중요시한 나머지 인성교육이나 기초학문 발전에 대한 지원을 등한시하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자격은 전국적으로 며칠에 걸쳐 시행되는 긴 필기시험인 졸업시험(baccalaureate)을 통과하는 사람에게만 준다. 시험과목은 공식 공용어인 핀란드어와 스웨덴어, 또 하나의 외국어가 공통필수이고 제4의 언어와 인문, 사회, 자연과학 분야의 시험이 선택 필수로 부과된다. 오늘날까지도 헬싱키대학의 교수 발탁이나 승진은 전문분야 동료들의 심사와 공개발표 과정을 거쳐 이뤄지며 헬싱키대학 교수의 저서 발간은 거의 국가적 행사로 주목받는다. 또 부모의 무식이나 무관심 때문에 타고난 재능이 유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핀란드 문화재단이 해마다 지방순회를 하며 음악 특기자를 발탁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교양교육과 각종 직능훈련 프로그램이 학교뿐 아니라 지방도시마다 있는 도서관과 박물관, 음악당 등을 통해 시행된다.

    창의력 개발과 지속적 개혁 강조

    핀란드의 교육정책은 교양 및 시민교육과 세계 첨단의 지식창달능력 배양이라는 기본목표를 강조하지만 인력관리를 위한 실질적 방법에서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화도 과감히 수용해왔음을 볼 수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핀란드인들은 학문과 경제생산이 별도의 세계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학자가 경제생산과 관계되는 일에 관여하는 것을 부도덕한 일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또 교육과정을 포함해서 학교교육에 대한 관리는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식기반경제 개념이 등장하고 세계화 추세가 가속화하는 가운데 1995년 드디어 유럽연합(EU)에 가입하면서 핀란드 종래의 의식구조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전통적 유럽식 대학 관리제도를 고집하기보다 개방적인 미국식 운영방식을 도입하는 유럽 전반의 추세에 핀란드도 동참하기 시작했으며 대학은 이제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사령탑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됐다. 핀란드가 EU에 가입하던 바로 그해, 유럽의 경쟁력 저하를 우려한 유럽위원회는 ‘인지적 사회를 항한 교육과 학습’이란 백서를 발표하고 1996년을 ‘유럽의 평생교육과 훈련의 해’로 선포했다. 2000년 리스본 정상회의는 2010년까지 유럽을 가장 경쟁력이 강한 지식기반사회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핀란드는 그러한 지식기반사회 구축에 적극 동참했을 뿐 아니라 견인차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의 수용이 필요함을 인정하면서 교육과 연구에서도 지방화와 국제적 교류 및 협력이 다같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경제활동의 자유를 제약하는 각종 규제를 푸는데 박차를 가했다.

    위기의 대한민국, ‘强小國’ 핀란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통신장비회사 노키아의 눈부신 성장은 핀란드의 과감한 과학기술 투자 때문에 가능했다.

    하급학교 운영과 관리에 대한 책임도 중앙정부가 독점하는 대신 지방행정기구에 대폭 이양했다. 정부가 경제의 지속적 발전과 사회통합에 필요한 법적 재정적 기반을 구축하여 민간의 활동을 격려·지원하는 역할을 하면서 사회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최대한 장려하는 것이 창의성을 이끌어내는 데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 이것이 1990년대 초 핀란드를 강타한 심각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폭적인 구조조정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결론인 듯하다. 창의력 개발과 지속적 개혁 없이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정부가 발행하는 모든 문서에서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에 걸친 노키아의 눈부신 성장으로 가시화된 핀란드의 국가적 도약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과학기술, 특히 정보화 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에서 나온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일수록 미래에 대한 투자를 더욱 강화하는 핀란드 특유의 일처리 방식은 전후 경제 재건기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시련기였던 1990년대 초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정보화와 지식기반 사회의 구축

    핀란드는 국민소득의 7.5%를 교육에 할당하고 있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 이어 네 번째로 교육에 큰 투자를 하는 나라다. 1990~94년 경제위기 초기 정부는 불가피한 재정긴축 때문에 교육제도 운영에 드는 비용을 11% 삭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1998년에야 이전 수준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도 연구개발(R&D)에 대한 투자만은 계속 증가하여 1991년 국민소득 대비 2%선에 머물렀던 비율이 2002년에는 3.5%로 늘어났다. 실질적 규모는 17억1000만유로에서 48억7000만유로로 거의 3배로 늘어났다.

    R&D에 대한 투자에서 투자액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투자전략과 그것을 관리하는 전국적 체계의 구축이었다. 핀란드에서 연구개발은 국가적 전략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 기술, 혁신(innovation)에 관한 정책의 골간은 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핀란드 과학기술정책위원회에서 만들어진다. 그러한 결정에 따라 학술에 관한 부분은 문교부가 책임지고 기술정책에 관한 것은 상공부의 관할하에 놓이는 것. 그밖에 특정 분야의 연구개발은 해당 부서와 그 산하 연구기관에서 이뤄진다.

    연구지원은 주로 핀란드 학술원과 1987년에 설립된 핀란드 테크놀로지 기구(Tekes)를 통해 이뤄진다. 학술원은 주로 대학들을 통해 다방면에 걸친 우수 연구인력의 지속적 배양과 우월성 유지 등 중장기적 목표에 주안점을 두고 연구 프로젝트나 연구자들을 경쟁적 심사를 거쳐 지원하고, Tekes는 산업구조를 다변화하고 수출을 장려하며 새로운 비즈니스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민간 연구기관들도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 기술과 창의적 혁신을 핀란드가 얼마나 중요시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기구로 연구개발을 위한 핀란드 국민기금(Sitra)을 들 수 있는데, 국회에 직속된 독립기구인 이 기금은 하이테크 벤처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데 쓰인다.

    연구의 중심이 되는 것은 20개 대학과 그 산하 연구소들이지만 29개 고등전문학교들의 기여도 빼놓을 수 없다. 그밖에 VTT 기술연구센터, 국립보건연구소, 직업병연구소, 국립보건복지연구개발센터(STAKES), 핀란드 환경연구소 등 정부 산하 연구소들과 200개가 넘는 민간 학술단체들도 연구개발에 참여하며 학술지 발간 등을 통해 사회전반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 수준을 높이는 일을 하고 있다.

    정부의 솔선수범 아래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연구지원 사업은 핀란드를 세계 1위의 정보화사회로 발돋움시키는 데 절대적 공헌을 했다. 그러나 R&D에 큰 투자를 하는 핀란드의 관심이 정보화 부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경제를 다변화하면서 각 부문에서 최첨단 지식과 기술을 개발해내며 끊임없는 변신을 할 수 있는 창의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핵심적인 목표다.

    최근에는 의학과 생명과학 분야가 큰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고 특히 정책과학 분야에선 복지사회 구축의 단계를 넘어 삶의 탈상품화 문제가 새로운 연구와 실험 분야로 주목받고 있다. 즉 경제적 소득에 대한 관심에서 해방될 때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져서 창의력을 무한하게 발휘할 수 있다는 가정 아래 보다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이 그런 식의 해방된 삶을 살 수 있게 하고 사회적 삶이 그러한 삶의 양식을 구축함으로써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이 새로운 연구대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산·관·학 협동체제

    과학기술 연구와 개발을 위한 집중투자의 직접적 목적은 아직도 경제발전을 통한 국가경쟁력 제고에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과 경제 생산을 접목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 현재 각 주마다 하나씩 설치돼 있는 산학협동체, 산업파크(industrial park) 또는 기술소도시(테크노폴리스)들이다. 대학이나 공공연구기관, 기업부설연구소들이 모여 있는 산학협동체에는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입주해서 아이디어를 얻고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무지원 체계, 입주자들이 만나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네트워크를 결성할 수 있도록 중앙에 위치시킨 식당 등이 있다.

    이러한 산·관·학의 협동체제를 운영하기 위해서 주지사나 시장, 대학총장, 실업계 대표 등 지역 유지들은 정례화된 주간회의를 통해 입주자들의 활동상황을 점검하고 필요한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한다. 북서부의 중심도시 오울루의 경우를 보면 산학협동파크에 더해 의료도시(메디폴리스)도 건설하여 의학과 생명과학, 공학 분야의 연구가 주민과의 긴밀한 접촉 속에서 추진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교육과 연구개발 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끊임없는 혁신으로 핀란드는 2001년도 유엔의 인간개발보고서 테크놀로지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국가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세계 경쟁성 연감(World Competitiveness Yearbook, 2001)에서는 전반적 경쟁력이 미국과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 3위로 나타났다. 1980∼98년 기간에 R&D분야 생산성이 핀란드보다 더 크게 증가한 나라는 OECD 국가 가운데서도 아일랜드뿐이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핀란드의 생산성 증가는 약간 둔화하기 시작했지만 핀란드의 성공이 결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은 교육과 연구, 혁신을 위한 투자가 계속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핀란드 국민은 자신들이 핀란드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무한한 긍지를 느끼고 있으며 핀란드가 EU에 가입한 지 5년이 지난 2000년까지도 72%의 국민이 국제화, 유럽화를 서두르기보다는 핀란드의 문화적 특성을 지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응답할 정도로 민족 의식이 강하게 살아 있고 정치 지도층에 대한 신뢰도도 높다.

    핀란드사회 특유의 준비성

    그러나 핀란드라고 해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1980년대에 복지국가 구축작업을 마친 정치 지도층은 1990년대의 경제위기를 맞아 유지가능한 복지의 수준이 어떤 것이며 재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정책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매기는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복지사회 유지에 필요한 재원의 계속적 조달과 효율적 집행도 끝나지 않는 숙제이며 출산율 저하에 따른 사회의 고령화, 지역간 격차와 부의 분배구조 악화도 NATO 가입 문제나 EU와의 관계설정과 함께 어려운 정치현안으로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조세의 수준과 제도의 구조적 개혁은 특히 시급한 해결책을 필요로 하는 과제다.

    복지국가체제의 유지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현안들 이외에도 정보화시대, 네오모던(neomodern)시대의 도래가 만들어내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마누엘 카스텔스와 페까 히마넨은 그러한 문제들을 7가지로 정리한다. 경제와 관련된 것으로는 ▲신경제와 구경제 사이의 장벽 ▲세계경제의 요동에 대한 방어력 결여 ▲신경제체제의 새로운 수요와 청년층의 기업가정신 결핍이 있고 사회적, 도덕적 문제로는 ▲새로운 불평등의 발생 ▲정보를 창출하는 사람들의 윤리와 전통적 프로테스탄트 윤리간의 괴리를 들었다. 정치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는 ▲산업시대의 통치구조와 정보화사회간의 괴리 ▲강력한 민족주의와 다문화적 세계와의 융합 필요성 간의 갈등이 꼽힌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어찌 보면 성공의 부산물들이고 핀란드에 국한된 문제만도 아니다. 그런 면에서 역사적 삶의 자연스런 전개과정에서 나오는 현상이며 도전일 뿐 ‘문제’로까지 부를 만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벌써 그러한 ‘문제’들을 지적하고 대안 모색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가 핀란드 사회 특유의 준비성을 반영해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핀란드의 국가적 성공의 실마리는 아무리 큰 도전에 직면해도 삶의 기본가치를 수호해내는 핀란드인의 불굴의 정신 또는 민족정기라고도 부를 수 있는 시수, 국민적 역량을 최대치로 가동할 수 있게 고안된 민주적 정치체제, 구성원 모두에게 소속감과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복지국가체제, 그리고 냉엄한 현실 인식과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체계의 복합작용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연구 개발에 대한 투자와 끊임없는 쇄신에 대한 강조는 결국 냉철한 현실인식과 실용주의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문제해결 습성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많은 시사점을 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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