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한국은 ‘대륙 국가’보다 ‘태평양 국가’ 편에 서야”

  • 글: 박권상 언론인·경원대 석좌교수 정리: 이홍천/일본 게이오대 정책미디어대학원 박사과정

    입력2004-06-30 15:3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신동아’는 이번 호부터 ‘박권상의 21세기 일본인 탐험’을 연재한다.
    • 일본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집중 인터뷰, 새 시대를 향해 가는 ‘일본號’의 저력을 파헤친다. 첫 번째 주인공은 1947년 정계 입문 이래 중의원 20선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고 지난해 은퇴를 선언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 동서냉전 막바지 6년간 총리로 재임하며 여러 업적을 남긴 그는 일본 총리로서는 최초로 한국을 공식 방문하기도 했다. 그에게 새로운 동북아시아 질서와 한일관계, 북핵 해법, 일본 헌법 개정논란 등에 대해 고견을 청했다. 필자인 박권상 경원대 석좌교수는 동아일보 고문, KBS 사장을 지낸 원로 언론인으로 ‘자유언론의 명제’ ‘영국을 생각한다’ ‘미국을 생각한다’ 등의 저서를 펴냈다. <편집자>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한국은 ‘대륙 국가’보다 ‘태평양 국가’ 편에 서야”
    지난 5월27일, 일본 도쿄 한복판에 자리한 아카사카 프린스호텔 지하 1층 ‘오색 신록의 방’에선 ‘나카소네 야스히로님의 탄생일을 축하는 모임’이 열렸다. 행사 시작 10분 전인 5시50분에 식장으로 들어서자 100평이 넘어 보이는 대형 식장은 이미 술잔을 들고 오가기 어려울 만큼 손님들로 들어차 있었다. 500명이 넘는 하객들이 일찌감치 모여든 것이다. 대개 일본의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일류 명사들이었다.

    6시가 좀 넘자 행사가 시작됐다. 주최측의 꽤 긴 인사말과 꽃다발 증정 등에 이어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86) 전 총리가 연단에 올랐다. 그의 답사가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 우레 같은 박수갈채 속에 등단한 주인공은 장장 35분간 연설을 했다. 그건 형식적인 답례인사가 아니었다. 주먹을 휘두르고 목청을 드높이는 사자후도 아니었다. 고명한 노학자가 잔잔히 흘러가는 냇물 같은 명강의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1980년대 중반, 동서냉전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일본을 일류국가로 만든 지도자, 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총리직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륜가다웠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일본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일본이 선택해야 할 대안을 일러줬다. 예컨대 총론격으로 “일본 외교는 세계의 큰 흐름을 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다음의 네 가지 기본 원칙을 외교의 기조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자기 힘 이상의 일을 벌여서는 안 되니 실력대로 할 것 ▲도박심리로 외교를 해서 안 되니 모험주의를 경계할 것 ▲내정과 외교를 혼동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 것 ▲세계의 정통적 조류를 탈 것.

    이 4원칙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제국주의 시대에 겁없이 전쟁의 길을 택했다가 처참하게 망한 역사적 교훈을 상기시키는 것일까. 전후 어려운 여건에서 미국의 눈치를 보며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한 경험과 지혜를 말하는 것일까. 동서냉전 막바지 6년간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이른바 ‘론-야스관계’를 맺어 일본의 국위를 높이 세운 스스로의 영광을 되뇌이는 것일까.

    그는 이렇듯 원론적인 얘기를 마친 후 각론에 들어가 화급한 몇 가지 현안을 열거했다. 북한에 대한 일본의 대응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외교에서는 서두르는 측이 손해를 보게 돼 있으니 너무 서두르지 말라”는 게 고이즈미 총리에게 보내는 그의 충고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랬다.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 ▲일본인 납치 문제가 중요하지만 반드시 북핵 문제 해결과 연계해서 진행한다 ▲한국과 맺은 수준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타결한다 ▲북한에 대한 경제협력은 협상의 마지막 순서로 미룬다 ▲일·미·한 3국간 협조체제를 확고히 다지고 지속한다.



    ‘The Grand Old Man’

    그가 연설을 마치자 축사가 이어졌다.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츠네오 회장은 “나카소네씨가 57년간의 긴긴 정치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이제 보다 자유로운 평론가, 언론인으로 입문한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1918년생이니 올해로 만 86세인데, 80이 넘은 나이에 직업을 바꿨다고 하니 재미있다. 여전히 건강하고 당당한 풍채다. 그는 명문 도쿄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해군 중위로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 내무부에 근무하다 1947년 정치에 입문, 57년간 20회에 걸쳐 중의원을 역임하다 지난해 11월 총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며 현역정치에서 손을 뗀 백전노장이다.

    생일 모임에서 그는 ‘인생극장 의원편’이 끝나고 ‘자유인·평론가편’이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그를 보면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한 맥아더 장군이 생각난다. 오늘날 일본사회에서 나카소네 전 총리만큼 많은 이가 이념과 입장을 떠나 따르고 존경하는 인물이 있을까.

    오래 전 영국에 있을 때 그곳 친구로부터 ‘The Grand Old Man’이란 말을 배운 것이 생각난다. 줄여서 그냥 ‘GOM’이라고도 한다. 처음엔 그저 ‘나이가 든 위대한 인물’ 정도의 뜻으로 알았는데, ‘GOM’에는 고유명사에 가까운 뜻이 있다고 했다.

    ‘GOM’은 19세기 말 자유당 당수로 4차례나 수상을 지낸 윌리엄 글래드스턴의 별명이다. 글래드스턴은 대영제국의 절정기에 개혁적 보수주의자였던 벤자민 디즈레일리와 호적수였다. 영국 민주주의에 획기적 이정표를 세운 선거제도 개혁을 주도했고, 특히 선거부패를 뿌리뽑는 계기가 된 1883년의 선거반부패법을 제정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당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후대에도 존경을 받았으며, 심지어 정적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변천기 영국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위대한 지도자로서 그에게 붙여진 준(準)고유명사가 바로 ‘GOM’이다. 한참 후배이지만 윈스턴 처칠도 ‘GOM’ 대열에 끼인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밤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을 나오면서 현대 일본에서 ‘GOM’ 호칭을 받을 만한 큰 정치 지도자가 있는지, 만일 있다면 나카소네 전 총리야말로 제1후보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선? ‘원로’라는 호칭이 붙은 분들이 없는 것은 아닌데….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한국은 ‘대륙 국가’보다 ‘태평양 국가’ 편에 서야”

    中曾根康弘<br>●1918년 일본 군마(群馬)현 다카사키(高崎) 출생 ●도쿄대 법학부 정치학과 졸업 ●방위청 장관, 과기청 장관, 운수상, 통산상, 행정관리청 장관 ●자민당 간사장·총무회장·중의원(20선), 한일협력위원회장 ●총리대신(1982∼87년) ●저서 : ‘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 ‘정치와 인생’ ‘일본인들에게 말해두고 싶은 것’ 등

    나카소네 전 총리의 생일 파티 며칠 후인 6월1일 오후 3시, 일본 국회에서 멀지 않은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둘러보니 4면의 벽을 장식한 크고 작은 기념사진들이 그의 눈부신 활약상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특히 얼마 전 고인이 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띈다. 그 중에서도 그의 고향에 지은 ‘론-야스 기념관’ 앞에서 찍은 사진이 이채롭다. 그밖의 사진들도 평범한 정치가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것들이다. 가령 덩샤오핑과의 다정한 포즈라든가 마거릿 대처,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과의 어울림 등 대단한 족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곧이어 그의 아담한 집무실로 안내됐다. 간단하게 인사를 교환하고 바로 문답에 들어갔다. 첫 번째 화제는 냉전 종식 후 변모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전망하느냐는 것이었다. 일본·한국·중국 3국 정상이 해마다 한두 번씩 만나 협조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그의 평소 주장을 평가하고, 특히 중국의 미래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었다.

    -미군이 한국에서 물러가고 난 직후 한국전쟁이 일어나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싸운 바 있습니다. 지금도 미군의 부분적 철수가 거론되고 있으나 국제적인 역학관계는 크게 달라진 것 같습니다. 중국이 지역 평화와 질서확립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하거든요. 중국이 현재와 같은 유연성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 선생께서 자주 말씀하신 일본·한국·중국의 밀접한 관계를 어떻게 추진해갈 것인지부터 여쭤볼까요.

    “중국에서는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에 따른 개방화가 2006년 완료되고, 2008년에는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며, 2010년엔 상하이 만국박람회가 열립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2010년까지는 현재의 기조를 유지하는 정책을 펼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경제성장과 내정을 충실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주변국의 평화와 질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때문에 중국은 생각보다 유연한 평화적 대외정책을 취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만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만이 유엔 가입이나 독립선포 등 중국을 자극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리라 봅니다. 2020년에는 중국의 GDP가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한국은 ‘대륙 국가’보다 ‘태평양 국가’ 편에 서야”

    朴 權 相<br>●1929년 전북 부안 출생 ●서울대 영문학과·미국 노스웨스턴대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 논설위원·편집국장·영국특파원·논설주간·고문 ●시사저널 편집인 겸 주필, KBS 사장 ●경원대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 일본 세이케이대 객원연구원 ●저서 : ‘자유언론의 명제’ ‘영국을 생각한다’ ‘미국을 생각한다’ 등

    -중국 경제가 일본보다 세 배 빨리 성장한다고 들었습니다.

    “3.5배 정도라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 와중에 중국이 지닌 내부적 모순이 어떤 형태로 해결될 것인가 등을 고려하면 그 같은 급성장이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도 2010년까지는 동아시아의 안정적 질서체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관계국들이 협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도 그런 관계국의 일원으로서 노력할 것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무엇보다 일·한·중 3국이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게 당면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안전보장은 경제협력에 수반

    -그렇게 되기까지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적지 않을 텐데요.

    “동북아시아 문제에는 일·한·중 외에도 미국이 관련돼 있어 일·한·중·미 4개국 관계가 성립됩니다. 더욱이 지금 북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6개국 관계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러시아도 들어가 있죠. 따라서 일·한·중 3국 관계, 미국이 포함된 4국 관계, 러시아·북한까지 포함하는 6국 관계 등 3개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중층적 관계가 성립돼 가는 거죠.

    그런데 문화적 체질이 비슷한 나라들의 연합인 EU(유럽연합)와는 달리 여기에는 중국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있어 관계 설정이 그리 간단치는 않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국제사회가 경제발전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측면에서 중국이 의외로 적극적일 수도 있어요.

    안전보장이라는 것도 경제적 협력관계가 성립되면 가능해진다고 봅니다. 우선 일·한·중이, 그리고 여기에다 아세안 10개국과의 관계가 어우러지면 FTA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경제협력기구 형태가 구축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FTA와 더불어 그런 기구가 만들어져 경제협력체제가 조성되면 안전보장은 자연스럽게 뒤따르리라 봅니다.”

    아시아에, 아니 동북아시아에라도 EU 같은 공동체가 생겨 국경 없는 지역으로 발전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꿈은 얼마든지 꿔볼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가 않다. EU는 서유럽 6개국이 석탄·철강협력체를 구성하면서 출발해 반세기가 지나서야 오늘의 25개국 연합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또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요즘 중국이 시장경제에 열중해 1960∼70년대의 일본, 1970∼80년대의 한국이나 대만처럼 불꽃을 튀기고 있긴 하지만, 이런 열기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중국은 벌써부터 과잉투자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시장경제 도입으로 살기가 나아져 중국에도 자유민주주의가 뒤따르고, 그래서 정치체제에 관한 한 ‘역사의 끝’이 와야 안보공동체, 나아가 정치적 연합체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 “한국은 ‘대륙 국가’보다 ‘태평양 국가’ 편에 서야”

    지난 6월1일 일본 국회 근처의 사무실에서 대담하는 나카소네 전 총리(왼쪽)와 박권상 전 KBS 사장.

    -말씀하신 대로 EU 국가들은 경제수준은 서로 달랐지만 생활양식과 정치체제는 비교적 동질적이어서 연합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아시아의 경우 당장 북한 문제도 불거져 있거니와 체제의 차이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 구축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현 시점에는 북한과 대만 문제가 고민거리지만 극복해가야죠. 3개국, 4개국 정상들이 장래를 함께 생각하면서 이런 여러 난관들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그와 같은 체계는 반드시 필요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체제는 다르지만 우선 경제 분야에서는 제휴가 가능할 것입니다. 중국이 경제우선정책을 쓰고 있으니까요. 주룽지 전 총리도 그렇게 말했고, 후진타오 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중국 공산주의 체제도 변화하지 않을까요? 경제라는 하부구조가 변하면 상부구조인 정치체제도 변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3국이 ‘압력과 대화’ 분담해야

    -북한 문제는 어떻게 전망합니까.

    “일단은 올해 미국 대통령선거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언젠가는 해결될 것이라고 봅니다.”

    -부시 대통령이 재선되든 존 케리 후보가 당선되든 근본적인 차이는 없을 것으로 봅니다만, 북한의 생존을 인정하고 국제사회로 끌어낼 수 있는 고도의 외교가 필요할 텐데요.

    “그렇게 풀려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그렇지만 북한은 6자 회담에서 대량살상무기 등과 관련한 내용을 합의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완전폐기와 제한 없는 사찰을 받아들여야겠죠. 북한이 일본, 미국과 국교를 수립한다면 동아시아의 일원으로서 국제사회에 참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현재 경제적으로 워낙 절박한 상황인 데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가 억제돼 있기 때문에 이를 개선하는 것이 그 다음 단계에서 중대한 문제로 떠오를 것입니다. 북한이 핵문제를 해결하고 보통국가로 갈 경우 일·한·중이 협조하면서 북한의 경제 및 사회 문제를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대북정책에 있어 일본은 ‘당근’과 ‘채찍’ 중 정확히 어떤 입장입니까. 가령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 구상)에 적극 나서 이번 국회에서 특정국가 선박 입항금지법을 통과시킨다든가 하는 채찍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미·일·한 3국이 ‘압력과 대화’라는 방식을 확립해 서로 분담하는 형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노무현 정부는 압력보다는 대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이런 점에서 미국이나 일본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북한이 6개국-북한을 빼면 5개국입니다만-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정상적인 관계가 수립될 것입니다. 물론 북한의 내부 개혁이 요구되지만요. 따라서 그런 긴장을 유지한 상태에서 안정된 질서체계가 자리잡힐 것이고, 이 과정은 장기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봅니다.”

    -부시 정권 일각에서는 북한이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관측하기도 합니다. 핵을 갖고 있으면 안전도 확보되고 돈까지 생기는데 왜 그런 좋은 카드를 버리겠느냐는 거죠. 만약 그런 입장을 표면화한다면 심각한 위기로 악화될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갖고 마셜 플랜과 같은 것을 만들어서 북한을 설득해 나간다면 실마리가 풀리지 않겠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안정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북한이 상당한 수준의 경제협력을 요구할 것으로 봅니다.”

    -그 과정에서 대규모 경제지원 등 일본의 역할이 필요할 듯합니다.

    “일·조 국교정상화가 바로 그 대목에서 등장하게 되는 거죠.”

    -일본이 대북정책에서 취해야 할 원칙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죠?

    “부분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포괄적으로 해결할 것, 핵과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우선 매듭지을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마 일본인 납치문제가 첫 번째 관문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배상문제에 있어서는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이상의 조건을 북한에 제공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협력은 맨 마지막에 다뤄야 하고, 일·한·미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5원칙’인데, 이미 5년 전에 제시한 것입니다.”

    -통일은 당장 기대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남북한의 경제교류는 급진전할 전망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남한과의 경제협력에 나서면서도 이같은 외풍이 체제변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합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에서도 ‘국론분열’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다양한 주장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한미동맹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민족공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미국보다는 중국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는 불가피한 과정이고, 긴 안목에서 본다면 시간은 결국 우리 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긴 역사를 가진 한국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고, 그에 따른 다양한 지정학적 요구가 대두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경제조건, 다시 말해 WTO나 NAFTA, FTA 같은 것을 고려하면 한국은 태평양 국가로서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륙 국가의 선두에 선다는 입장보다는 태평양 국가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일본은 이미 태평양 국가로서 나아갈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요즘 한국은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개념 때문에 다소 불분명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일본 국내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유달리 일본의 자존심을 강조하는 인물이다. 총리 시절 그는 미국에게도 좀처럼 허리를 굽히지 않는 내셔널리스트의 인상이 강했다. 그래서 그를 ‘일본의 드골’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일본 헌법은 1947년 맥아더 치하에서 제정됐기에 일본 국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된 것이 아니다”면서 1950년대 초부터 헌법 개정을 주장해왔다. 특히 평화국가로서 전쟁을 포기하고 육·해·공군과 기타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헌법 제9조를 반드시 고쳐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또한 총리가 대통령과 같은 힘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정치가다. 내각제이긴 하지만 국민이 직접 총리를 뽑아 힘을 실어주자며 ‘총리공선제’를 주창해온 것이다.

    -그간 여러 차례 강조하신 총리공선제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총리로 있을 때는 의원내각제 하의 총리와 대통령적 총리 기능을 함께 했습니다. 의원내각제 총리는 국회에서 의원들로부터 선출된 총리대신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치적 기능을 할 경우에는 대통령적 총리가 됩니다. 국민의 바람이나,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여론의 압력을 의회에 전달하는 것이죠. 주요 법률 등을 그런 방향에서 성립시킨다는 얘깁니다. 그런 면에서 당을 잘 이용해 당의 주요 인물들을 내각에 기용하거나 당 간부로 임명해서 여러 정책에 대해 동의를 받거나 정책을 입안하도록 합니다. 제가 그런 두 가지 기능을 했기 때문에 국영철도 개혁이나 NTT 민영화 등이 가능했습니다.”

    -시대상황, 정치문화, 총리 개인의 리더십 등에 따라 강한 총리가 될 수도 있겠죠. 예를 들어 영국의 대처 전 총리 같은 이는 선생께서 설명한 대통령적 총리였습니다. 그는 각의에서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니 당신들은 내 결정을 어떻게 실천할지 방안을 마련하시오”라고 호통을 치는 등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했지요. 그래서 ‘총리 독재’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오늘날의 내각제는 더 이상 19세기의 의원내각제가 아니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회가 내각을 좌지우지하는 비능률적 시스템이 아니라 내각이 의회를 제어하는 능률적 내각제라야 하겠지요.

    “그런 체제가 영국적인 정치로 정착됐습니다. 저는 영국의 의원내각제에서와 같은 총리공선제 총리 노릇을 했습니다. 총리의 집행권을 확립해 안정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총리공선제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랬다가 결과가 나쁘면 다시 바꾸면 되니까요.”

    DJ 석방 확인 후 방한

    -일본은 지난 150년간 근대화를 이뤄왔지만, 식민지 침략 같은 부정적인 역사 유산 탓에 동아시아 연합체 구축을 선도해나갈 만한 입지가 넓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일본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면 곧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경제대국답지 않게 무능하고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일반 국민간 교류를 보다 증진시키고 동북아 3국 정상들이 정기적으로 회담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우정을 쌓아서 상호 이해를 깊게 하자는 것이죠. 이는 안전보장과도 직결됩니다. 그래야 ‘아세안 10국+3국’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일·한·중 3국의 융합이 없다면 10+3은 구축될 수 없습니다.”

    -선생께선 총리 시절 한·일 관계를 개선하는 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총리에 오른 직후인 1983년 초 한국을 방문했는데, 한국을 공식 방문한 최초의 일본 총리였죠. 총리가 되면 먼저 미국을 방문하는 관례를 깨고 한국부터 찾았습니다. 그런데 방한 직전인 1982년 12월 하순, 투옥돼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풀려나 미국으로 갔죠. 그의 미국행이 선생의 방한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당시 물밑 교섭을 한 사람이 세지마 류소씨입니다. 그 사람더러 제가 한국을 공식 방문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달라고 한국측에 당부케 했죠. 여기서 환경 조성이란 곧 김대중씨의 석방을 의미했습니다. 그 이전에 미국이 그를 사형시키지 말라고 요구했고, 저는 한국 방문의 조건으로 그의 석방을 요구한 겁니다.”

    -김대중씨도 그런 사실을 압니까.

    “아마 모를 겁니다. 내가 한국을 방문하기 전의 일이고, 저도 방한 직전에야 보고를 받았으니까요. 제가 1월11일 방한했는데, 김대중씨가 미국으로 간 것은 12월 말이거든요.”

    -일본 총리가 공식 방한한 것은 당시 한국과 일본의 차가운 관계에 비춰보면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오른손으로는 한국, 왼손으로는 미국과 손을 맞잡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 보자는 게 그때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한국을 방문했고 그 다음 미국엘 갔죠.”

    한일협력위 이끌며 교류 확대

    -이젠 한·일 양국 정치인들간에도 보다 적극적인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에서는 새로운 세대가 주역으로 등장했는데, 이들은 상당히 내셔널리스틱한 면이 있습니다. 저희 세대는 일본이나 미국에 일종의 컴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젊은 세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좀더 당당하죠. 좀더 대등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내셔널리즘은 어떤 면에서 글로벌리즘에 역행하는 것이라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따라서 두 나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새 역사를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선생께서는 한일협력위원회의 일본측 회장을 맡고 계시죠?

    “해마다 번갈아가며 도쿄와 서울에서 회합을 갖고 있습니다. 서로 솔직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간 친목기구인 한일의원연맹은 사정이 그렇지 못합니다. 지난 4·15 총선에서 한일의원연맹의 한국측 의원 가운데 정몽준 의원 한 사람만 빼고 다 낙선했으니까요.”

    “그랬군요. 그렇다면 의원연맹은 다시 시작해야겠네요.”

    -협력위원회는 의원연맹과 달리 참여 범위가 넓은 친목조직이라 큰 문제는 없는 편이죠.

    “그렇습니다. 정치가, 경제인, 문화인들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교류 모임이니까요.”

    일본, ‘제3의 유신’ 필요

    -선생께서는 “21세기 일본에는 제3의 유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메이지 헌법도 맥아더 헌법도 어느 정도 공적은 있었지만 일본 국민이 자주적으로 만든 헌법은 아니라는 거죠. 일본은 현재 헌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데, 아시아의 이웃나라들은 이를 계기로 일본이 재무장의 길을 열어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일본 지식인들 중에도 걱정하는 이가 많다고 들었는데요.

    “일본이 과거와 같이 강해지지는 않습니다. 국가 또는 내각이라는 민주적 통제제도, 그리고 저널리즘이라는 견제제도가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게 발달되어 있습니다. 국회의 힘도 강해져서 최고 권력이 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집권당인 자민당은 창당 50주년을 맞는 2005년 말까지 개헌안을 마련할 예정이고, 야당인 민주당 역시 2006년 안에 결론을 내릴 예정이다. 현행 일본 헌법은 1946년 맥아더 점령군의 감독하에 제정된 이래 한번도 건드린 적이 없으니 손을 봐야 할 조항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관심의 초점은 이른바 평화헌법의 핵심인 헌법 제9조다. 그 내용은 이렇다. ①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를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한다. ②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및 기타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아니한다.

    무장력을 일절 가질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당시 맥아더 사령관이 지시한 1946년 헌법의 3대 기본 원칙은 ▲천황은 국가의 머리부분으로 존속 ▲전쟁의 포기, 비무장, 교전권의 부정 ▲봉건제의 폐지 등이다. 일본이 군사국가가 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차단한 것이다. 맥아더는 “일본은 극동의 스위스가 되어 장차 어떤 전쟁이 일어나도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스스로 이러한 정책을 수정했고, 일본은 자위대라는 이름의 육·해·공군을 보유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군사비를 많이 쓰는 나라가 됐다. 헌법 제9조는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다. 따라서 아예 헌법을 고쳐 통상적 국가가 되느냐 아니면 위헌이지만 합법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군사력을 유지·강화하느냐를 놓고 택일해야 할 상황이다.

    일본의 헌법 개정 찬성론자 중에는 군국주의의 향수에 젖은 극우세력도 있고, 최소한의 방위력 보유에 그치자며 소극론을 펴는 이들도 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후자에 속한다. 개헌론자 중에서도 침략전쟁을 부인하는 헌법 제9조 1항은 그대로 둬야 한다는 주장이 압도적이다.

    다만 제2조에서 육·해·공군을 일절 보유하지 못하게 해놓고 실제로는 정부의 유권해석으로 얼마든지 확대 해석의 길이 열려 있는 현실을 헌법으로 확실하게 제한하자는 것이 나카소네 전 총리의 지론이다. 메이지 헌법도 군 통수권의 소재를 애매하게 해놓았기 때문에 군부가 정치가를 무시한 채 천황을 업고 군국주의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메이지 헌법의 그런 문제점과 지금의 헌법 개정론이 연결된다고 봐도 됩니까.

    “일본 방위군을 만들자, 그것도 전수방위(자국 영토방위에 전념)를 중심으로 하자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인도적 활동, 평화와 인권 수호를 위해 유엔의 일원으로서 하는 임무와 다국적군 임무에는 자위대도 공헌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조문을 넣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목적으로 유엔이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할 경우 자위대도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는 이런 활동들이 헌법을 무시한 채 행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미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고 일본과 그 주변만 지키는 게 아니라 법을 제정해 유엔의 평화유지군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이라크 부흥지원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자위대를 파견하고 있는데, 새삼스레 헌법을 바꿔서 지금 이상의 뭔가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는 이가 많습니다.

    “아닙니다. 헌법을 개정하면 오히려 안전해집니다. 현행 헌법을 유지하면 확대 해석되기 일쑤입니다.”

    -통수권의 소재 같은 것이 확실하게 규정되는 것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헌법 제9조 1항은 개정되지 않습니까.

    “그 부분은 그대로 둡니다.”

    -국제적인 공헌을 가능케 한다는 집단적 방위권의 개념은 다소 애매하지 않습니까.

    “자위권을 인정한 이상 개별적 자위권과 집단적 자위권을 갖고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보통 국가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됩니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도 안전조약이라는 것이 있는데,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지 않다면 이 조약이 유효하게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현행 안전조약에는 집단적 방위개념이 규정되어 있습니까.

    “정치적 해석이긴 합니다만, 개별적 자위권 행사는 가능해도 집단적 자위권은 행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정부의 해석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지금은 여론도 대부분 행사가 가능하다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렇다면 이라크에서 필요한 경우 일본군과 미군이 함께 전투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전투행위는 헌법상 금지되어 있어 불가능하지만, 그 이외에는 미국에 협력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일본에 공식적으로 방위군이 발족되면 군의 총사령관은 누가 맡게 됩니까.

    “총리가 맡습니다.”

    -천황이 국가원수가 되어도 괜찮다는 논의는 없습니까.

    “천황은 국정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상징적인 원수입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천황이 해야

    나카소네 전 총리는 1985년 8월 종전기념일에 전후 총리로서는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에 공식 참배했다. 그러자 한국과 중국에서 강력한 항의가 빗발쳤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침략전쟁을 이끈 28명의 A급 전범이 합사돼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1978년 A급 전범들이 합사됐는데, 이 때문에 천황도 참배하지 않는다). 이에 나카소네 총리는 이듬해부터 참배를 중단했다.

    그런데 3년 전 고이즈미 준이치로 현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를 재개, 한·중 양국의 반발을 사고 있다. 신사참배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이 많거니와, 일본 법원에서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종교와 정치의 분리원칙에 위배된다고 판시한 일이 있어 매우 민감한 문제로 떠올랐다.

    -선생께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있어서는 천황이 참배 가능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 바 있습니다. 어떤 뜻으로 한 말씀입니까.

    “야스쿠니 신사에는 메이지 유신시대, 일청전쟁, 일러전쟁 등에서 전사한 사람들이 모두 봉납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천황을 위해서 전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아마 영령들로선 천황이 참배하면 가장 기뻐할 것입니다. 총리대신이 가면 ‘총리대신이 뭐하러…’라고 느낄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총리 시절 공식 참배를 하셨는데요.

    “총리가 된 후 자문간담회를 만들어 헌법 위반 여부를 먼저 검토했습니다. 그런 후 참배해도 위헌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어 공식 참배 한 것입니다. 마침 종전 40주년이었기 때문에 총리대신으로서 그런 역사적인 해에 한 번은 참배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편안하게 잠드십시오’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 무렵 중국의 후야오방 당 총서기가 보수파에게 권력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어요. 그는 동지나 다름없을 만큼 저와 사이가 좋았기에 그가 축출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으로부터 항의가 들어오자 곧 공식 참배를 그만뒀습니다.”

    역사인식에 있어 나카소네 전 총리는 대표적인 보수파이자 내셔널리스트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시(是)는 시, 비(非)는 비라고 시원하게 털어놓는다. 그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는 평화주의 신봉자인 미야자와 전 총리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총리대신 시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황국사관은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맥아더의 도쿄재판사관도 배격한다. 셋째, 대동아전쟁은 미국·영국·프랑스에 대한 보통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중국 또는 아시아 남방의 제국에 대해서는 침략적 요소도 있었다.…한국에 대해서는 국제조약으로서 일한병합이 성립했으나, 그것은 군사적 위협하에서 행해진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후에도 창씨개명, 조선신궁 참배 등으로 한국의 국민감정을 상처내고 명예를 훼손했으며, 그러한 일들에 대해 사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권력에 영합하는 일본 언론

    약속된 면담시간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들어보고 싶은 것은 그의 언론관이다. 정계를 떠났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대한 관심이나 열정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주로 신문, 방송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일종의 평론가로 변신했기에 그가 언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소위 ‘미디어크라시(mediacracy) 시대’의 언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인터넷이나 이동통신 등이 발달해서 그런지 저널리즘도 대중추수(追隨)주의에 지나치게 영합하고 있다고 봅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정치가로서, 국민의 대표로서 자신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즘은 대중에 영합하는 것을 정치로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그것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점입니다. 저희 세대와 고이즈미 세대가 다르고, 김종필 세대와 노무현 세대가 다르듯 말입니다.”

    -케네디가 미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몇몇 선배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는데, 그때 트루먼 전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못난 대통령이라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통치권력을 신문에 빼앗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일본의 경우에는 신문이 권력에 영합하는 풍조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거와 비교한다면 그렇습니다.”

    -‘권력’이란 정치권력을 뜻합니까.

    “내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널리즘은 정부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해요. 언론이 기삿거리를 원하다 보니 그런 결과가 초래됐다고 봅니다. 따라서 신문사 대표는 기자들에게 분명한 원칙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는 정당의 총재가 당원들에게 원칙을 제시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회장과는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간적 동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선의원 시절부터 같이 연구회를 했습니다. 1960년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통령 만들기 1960’(Making of the President 1960)이라는 책이 나왔을 때는 함께 강독하기도 했죠. 당시 저는 케네디가 ‘케네디 머신’을 만든 것처럼, ‘나카소네 머신’을 만들자고 마음 먹었습니다.”

    -정치인의 교묘한 프레스 매니지먼트(press management)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한 시간 남짓 진행된 인터뷰 내내 나카소네 전 총리는 시종 꼿꼿하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였다. 단정한 용모, 근엄한 표정은 단호한 옛 사무라이를 보는 듯했고, 한편으론 고승(高僧)의 자태 같기도 했다. 20선, 57년간의 의정생활을 명예롭게 졸업한 영원한 자유인. 역시 그를 일본의 ‘The Grand Old Man’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