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장사의 至尊 닝보방, 중국의 유대인 원저우상인

손님을 부모처럼 모시는 상술 낯 두꺼운 배짱이 최대 무기

  • 글: 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법학 khb@khu.ac.kr

    입력2004-07-01 14: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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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저장성 동부에 있는 닝보(寧波)는 ‘장사의 신(神)’들이 사는 고장이다. 그들은 항저우상인과 정반대로 고향에 죽치고 있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다. 그래서 드넓은 외지로 나가 창업을 하고 아무리 작은 이익이라도 놓치지 않고 벌어들인다. 저장성 남부에는 상업 게릴라 원저우(溫州)상인들이 버티고 있다. 감귤처럼 새콤달콤한 화술을 구사하는 그들은 감정보다 계산을 앞세우는 협상술로 중국 상권을 장악했다.
    장사의 至尊 닝보방, 중국의 유대인 원저우상인

    노키아, 모토로라를 제치고 중국 최대 휴대전화 생산업체로 떠오른 닝보버드의 공장.

    지난호에 이어 닝보방이 어떻게 중국상인의 꽃 중의 꽃이 됐는지 9가지 특징과 장점을 꼽아보려 한다. 이는 단순히 닝보방의 상술에 감탄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중국시장을 공략할 때 반드시 알아둬야 할 지침으로 삼고자 함이다.

    첫째, 닝보상인은 돈 벌 기회를 잘 잡는다. 그들은 경영방침을 조정하는 데 능수능란하다. 조정 시기를 기막히게 포착한다. 바로 이 장점 하나만 가지고도 닝보상인은 치열한 상업전쟁에서 능히 승리를 거두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들은 낡을 틀에 매달리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과감하다. 시기를 놓치지 않고 경영책략과 프로젝트를 조절한다. 닝보상인의 융통성과 변화에 능한 천성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일례로 해방 전 닝보 출신의 거상 위챠칭(虞洽卿)은 상하이의 번화가가 북쪽으로 뻗어나갈 것을 미리 내다보았다. 그는 당시 황량한 갯벌이었던 바오산루(寶山路)와 하이닝루(海寧路)의 광대한 벌판을 사들였다. 같이 간 부동산 전문업자들조차 속으로는 위챠칭을 비웃었을 정도였다. 누구도 그곳이 개발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상하이 정부는 그 외딴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 일대의 지가는 급속히 치솟았고 위챠칭은 엄청난 액수의 돈을 쓸어 담았다.

    닝보상인은 눈으로 육방(六方)을 보고 귀로 팔방(八方)의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시기와 형세를 정확히 판단하는 재주로 그들은 중국상인의 사철 푸르른 적송(赤松)으로 우뚝 섰다. 그들은 오늘날 유대상인을 비롯한 세계적인 상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닝보상인과 거래할 때에는 먼저 그들의 속성을 살펴보고 그들 못지않게 민첩하고 교묘하게 대응해야 한다. 또한 닝보시장을 파악해야 한다. 시장은 상인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곳이지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시장에서 승리하려면 정국의 변동, 자연재해, 국제정치정세, 거시경제 상황 등 객관적인 환경의 변화와 동종업자간 경쟁, 라이벌의 경영수단 변화, 소비자 수요의 변화 등 직·간접적으로 사업의 성패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잘 읽어야만 한다. 적시에 변화로써 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이 변하면 나도 변하고, 남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변함으로써 그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닝보시장의 맥을 정확히 짚어내며 그에 맞게 경영책략을 조정하되 때로는 선수를 쳐서 상대방을 제압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중국 상권에 뿌리내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관건이다.

    신용과 성실, 외향적 성격

    둘째, 닝보상인은 고객관리의 명수다. 손님이 누구더냐? 그들에게 “손님은 왕이 아니다. 손님은 옷과 먹을 것을 주는 부모(衣食父母)”이다. 오직 손님만이 나의 상술과 돈 버는 ‘오페라’에 감동하여 물건과 서비스를 사간다. 손님에게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나의 의식주를 영위할 수 있으니 손님은 나를 길러주는 부모나 매한가지다. 친부모는 나를 낳고 길러주셨지만 내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아름답고 착한 아내를 맞게 하고 가업을 일으켜주신 분은 손님이다. 이처럼 친부모 못지않게 고마운 손님을 받들고 공경함은 상인이기 이전에 인간이 지녀야 할 근본 도리가 아니겠는가!

    1949년 중화민국 성립 이후 중앙정부가 내건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나 서구에서 흔히 하는 ‘손님을 왕처럼 모시자’는 말은 사실 중국의 전통문화와는 맞지 않는다. 하물며 손님을 부모처럼 모셔온 닝보상인들에게는 허무맹랑한 구호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중국의 여타 지방에서는 목청만 높이고 실행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닝보상인들은 오래 전부터 해오고 있는 터였다.

    셋째, 닝보상인은 신용을 철저히 지키고 성실하다. 신용과 성실은 서구 자본주의의 핵심내용이기도 하다. 동서양 문화를 골고루 받아들이고 저축해온 닝보상인들은 상업거래에서 신용과 성실의 원칙을 잘 지킴으로써 고객의 호감을 사고 칭송을 받아왔다. 닝보 출신으로 ‘철물점 대왕(五金大王)’으로 일컬어지는 예청중(葉澄衷)이 성공한 것도 신용 때문이었다.

    예청중은 상하이 황푸강에서 나룻배를 저으면서 받은 뱃삯과 손님에게 군것질과 잡화를 판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소년 뱃사공이었다. 어느 날 한 영국상인이 그의 나룻배를 타고 황푸강 동편, 즉 푸둥으로 건너갔는데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그만 돈가방을 배에 놓고 내렸다. 예청중은 배 안에서 가방을 발견하고는 방금 내린 손님에게 돌려주려 했으나 손님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예청중이 가방을 열어보니 수천 달러와 다이아몬드 반지, 수표와 어음 등 그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거액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가방 소유자의 신분을 증명할 만한 어떠한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예청중은 그날 장사를 포기하고 나루터에서 코 크고 눈 푸른 서양인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한편 사업자금뿐 아니라 영국으로 돌아갈 차비조차 잃어버린 영국상인은 황푸강에 몸을 던지고 싶을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가 힘없이 터덜터덜 나루터로 돌아왔을 때 뱃사공 소년이 자신의 돈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방 속의 돈과 물건도 그대로였다. 영국상인은 감격한 나머지 소년의 손을 꼭 잡고 사례금으로 1000달러를 건네주려 했으나 소년은 한사코 받기를 거부했다.

    나중에 그 영국상인은 예청중을 상하이 최대의 철물점을 경영할 파트너로 초빙했다. 그 후에도 예청중은 변함없이 고상한 상덕(商德)과 상도(商道)를 발휘해 사람들의 환영과 존경을 받았으며 나아가 ‘철물점 대왕’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중국상인들은 손님을 끌 때 “화진가실(貨眞價實)”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이 말에는 “물건도 진짜고 값도 진짜니 믿고 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닝보상인은 말뿐만 아니라 이를 실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여간해서 사기나 협잡을 부리지 않는다. 그래서 외지인들이 닝보상인과 거래하거나 동업할 경우 비교적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낀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상하이는 닝보상인의 본부

    넷째, 닝보상인은 외향적이다. 손발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활동영역을 부단히 넓히고 새로운 시장 개척에 능하다. 중국 제일의 경제도시 상하이는 닝보상인의 본부다. 어디 상하이뿐이겠는가. 베이징과 톈진, 선양, 쑤저우, 항저우에도 거대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깊은 산골과 농촌이라고 해서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건 물론 아니다. 바다 건너 일본이나 동남아 유럽 북미 등 세계 곳곳에도 이미 그들의 발자취가 묻어 있다.

    닝보상인은 항저우상인과 정반대로 고향에 죽치고 있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외지로 나가 창업을 하고 사해(四海)를 집 삼아 모험을 즐긴다. 19세기 말에서 1940년대에 걸쳐 120만명의 닝보상인이 해외로 떠났다고 한다.

    홍콩 거주민의 원적지를 살펴보면 광둥 다음으로 저장이 많고 저장에서도 닝보가 으뜸이다. 적지 않은 닝보상인이 홍콩에 자리를 잡고 기업을 창업했고 세계 각지에 지사를 설립하여 다국적기업으로 성장시켰다.

    1949년 공산화 이후에도 닝보방들은 홍콩, 일본, 타이완, 동남아, 유럽, 북미, 호주, 심지어 중동과 아프리카에까지 퍼져나갔다. 해외의 닝보방은 화상(華商)이라 불리며 만방에 그 힘을 떨치고 있다.

    세계 선박왕 바오위강(包玉剛)과 퉁하오윈(董浩雲), 상하이 대형 위락장 다스졔(大世界)의 창설자 황추쥬(黃楚九), 홍콩 극장계의 대부 샤오이푸(邵逸夫), 20세기 전반 기업대왕 류훙성(劉鴻生), 중국 최대의 비누공장을 차린 항쑹마오(項松茂) 등등 유명한 닝보방의 이름은 일일이 말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2002년 현재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닝보출신 화상은 3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돈 버는 일이라면 전천후, 전방위

    다섯째, 닝보상인이 취급하는 업종은 무척 다양하다. 돈이 벌리는 일이라면 무엇에라도 손을 대기 때문이다. 닝보상인은 의류업 금은방 해산물 한약재 등 전통 업종에서도 명성을 떨쳤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속하게 업종전환을 해왔다.

    아편전쟁 후 서구의 문물이 도입되는 등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자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흐름에 적응해 신흥산업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해운업, 대외무역, 시계와 안경업, 일용품, 양약업, 보험업, 금융업뿐만 아니라 호텔과 사진관, 오락장, 택시사업 같은 서비스업 등 이 시기에 닝보상인이 손대지 않은 업종이 없었을 정도였다.

    21세기인 지금도 닝보상인은 거의 모든 생활필수품과 생산재료를 취급하고 있다. 소비재는 농수산물에서 화섬원단, 복장, 실크, 신발과 가죽 등 소상품과 가전제품, 자전거, 가구, 장식재, 통신, 컴퓨터 등 공업품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가히 전방위 전천후라 할 만하다.

    여섯째, 닝보상인은 하찮은 이익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파리머리처럼 작은 이익(蠅頭小利)이라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자고 이래로 상인은 이익을 추구한다. ‘관자(管子)’에서 말하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달려가는 상인이 돈을 잘 번다”고 했다. ‘사기(史記)’에도 누구나 이로운 일을 보면 좋아서 모여들고 이익이 없으면 저절로 떠나간다고 했다.

    무릇 상인이라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일상용품은 가격이 싸지만 그 수요는 거대하고 이윤은 박하지만 하나둘 쌓이면 거액이 된다. 닝보상인은 작고도 세세한 이윤까지 따지기로 유명하다. 지금 중국에서 몇 전, 몇 푼 하며 소수점 이하의 이익까지 따지는 상인은 닝보상인뿐이라고 한다. 일례로 장화(張華)라는 이름의 닝보 출신 청년이 거둔 성공 이야기를 들어보자.

    장사의 至尊 닝보방, 중국의 유대인 원저우상인

    중국 제일의 컨테이너 전용 항구 닝보항(왼쪽)과 그림같이 아름다운 닝보해변의 주택가.

    장화는 간쑤성의 빈곤지역 학교들을 상대로 배지(교표) 장사를 했다. 간쑤성의 황량한 황무지를 몇 달씩 헤맸지만 별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곳 사람들이 개당 2쟈오(2角-0.2위안)인 배지를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한 데다 배지를 다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화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외딴 산중턱에 있는 어느 소학교에서 작은 행운이 찾아왔다. 교사를 포함해 전교생이 고작 13명인 이 학교에서 배지를 사겠다고 한 것이다. 장화는 배지를 개당 1쟈오2펀(0.12위안)에 팔기로 했다. 엄청 밑지는 장사였지만 장화는 이를 악물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장화는 배지 제조업자에게 3일 내에 배지 13개를 만들어 그 시골학교로 보내달라고 급전을 쳤다. 전보 치는 값 3.6위안에다 배지 형을 뜨는 비용, 제작비용, 운송료까지 모두 70위안 정도가 들었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은 고작 2.06위안이었다. 밑져도 이렇게 밑지는 장사가 없었다.

    그러나 몇 달 뒤 그 시골학교가 소속된 향(鄕, 우리의 면) 단위 전체 초·중·고등학교 운동회가 열리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교사의 인솔 아래 12명의 산촌 소학교 학생이 가슴에 번쩍거리는 배지를 달고 운동장에 들어서자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학부형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들은 빛나는 배지를 단 소학교 어린이들을 몹시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운동회가 끝나자마자 향 내 모든 학교로부터 배지 주문이 이어졌다. 배지 달기 붐은 현(縣)에서 다른 현으로, 다시 간쑤성 전역으로 확대되어 장화는 수백만 위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훌륭한 기업인은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어서도 안 되지만, 이익이 남는 작은 사업을 무시해도 안 될 것이다. 파리머리가 소머리를 부른다. 닝보상인에게는 사소한 것이나 큰 것이나 이득이라면 다 좋은 것이다.

    촘촘한 네트워크

    일곱째, 닝보상인들은 잘 뭉친다. 또 네트워킹 자체를 즐긴다. 닝보방은 고향의 정서와 우의로 끈끈하게 연결된 매우 긴밀한 상업집단이다. 그들은 상조회를 설립하여 동향인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고 노인과 가난한 자를 돕고 동향 상인들의 어려운 문제를 서로 도와 해결한다.

    유통상들의 주문, 상품의 종류와 매매현황을 통해 단시간 내에 습득한 고급정보를 혼자만 갖고 있지 않고 동향상인들과 나눈다. 그들은 지역별로 구분된 중국시장은 물론 전세계 시장 상황을 토론하고 공동의 이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닝보상인은 크고 작은 전문 도매시장과 전국 각지의 시장들과 탄탄하게 연결된 ‘닝보마켓 네트워크’를 통해 거의 모든 것을 팔고 있다.

    여덟째, 닝보상인은 정치권력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광둥상인처럼 정치를 지나치게 배척하지도, 베이징상인처럼 정치에 열중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국가의 운명에 결부시키고 민족의 흥망과 운명을 같이하는 자세로 기업을 경영한다. 이것이 세월이 흘러도 닝보방이 늙거나 죽기는커녕 갈수록 젊어지고 강해지는 비결 중 하나다.

    그들은 국가에 충성하고 (집권)정부의 방침에 적절히 순응해왔다. 그 때문에 중국의 국부(國父) 쑨원을 위시하여 국민당 정부 수반 장제스, 중국공산당 3대 지도자로 꼽히는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장쩌민의 지지와 애호를 변함없이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마을 하나가 있다. 바로 장제스의 고향인 닝보시 펑화(奉化)현의 시커우(溪口)다. 중국정부는 시커우에 있는 장제스의 모친과 선조의 묘 등 장제스 가문과 관련한 모든 유적을 성지에 준하는 관광지로 꾸며놓았다. 장제스 고택 앞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항일 영웅 장제스 중국국민당 위원장은 마오쩌둥 중국공산당 주석의 위대한 맞수였다”라고.

    타이완을 비롯한 해외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시커우의 장제스 유적지에서 벌어들이는 관광 수입은 닝보시 전체 관광수입의 절반을 넘는 거액이다.

    끝으로 닝보상인은 중국상인의 장점들만 한데 모아놓은 이른바 ‘모듬상인’이다. 그들은 신용과 명예를 중시하되 뛰어난 상술을 구사한다. 그들은 박리다매를 추구해 상품 품질에 비해 가격도 적당하다.

    돈을 중시하나 광둥상인처럼 지나치지 않고, 정직하고 성실한 편이나 산둥상인처럼 우직하지 않으며, 품격에 신경을 쓰나 베이징상인처럼 관료적이지 않다. 중국상인의 지존이라 불리지만 외지인을 깔보고 지나치게 영악스럽다는 혹평을 듣는 상하이상인보다 오히려 친절하면서도 영민하게, 소리 소문 없이 짭짤한 재미를 보는 게 닝보상인들이다.

    착실한 안정 속에 쾌속의 성장을 추구하는 닝보상인. 돈을 잘 버는 가운데서도 중용과 조화의 상술을 적절히 구사할 줄 아는 그들과의 거래에서 과도한 투기성 사업으로 유혹하는 일은 금물이다. 그보다는 온당하고 듬직한 인상을 주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장사의 至尊 닝보방, 중국의 유대인 원저우상인

    닝보시 펑화현 시커우에 있는 장제스의 고택.

    리스크가 비교적 큰 사업을 그들과 같이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그들의 온건한 상술과 듬직한 태도가 리스크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품질경쟁력 저하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산둥상인과 달리 신기술 개발에 재빠른 닝보상인과는 될 수 있으면 장기계약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손님, 원저우 사람이죠?

    “손님, 손님은 틀림없이 원저우(溫州)사람일 것 같군요.”

    상하이의 재래시장에서 필자가 좀 부티 나는 옷차림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가격을 악착같이 깎으려들라치면 으레 듣던 소리다. 그럴 때마다 “허허허” 너털웃음으로 응수하곤 했지만 속으로는 ‘한국토종인 날보고 원저우 사람이라니…대관절 원저우가 어디기에?’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하여 필자는 실제 원저우에 가보았다. 한번은 봄, 또 한번은 가을이었다. 봄에는 새하얀 귤꽃이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가을에는 알맞게 익은 황금빛 감귤이 운치를 더하며 나그네를 맞아주었다. 현지를 가보고서야 필자는 ‘이곳 저장성의 원저우는 바로 우리나라 제주도 감귤의 주품종인 온주밀감의 원산지’임을 생각해냈다.

    매년 11월 원저우 북쪽의 황옌(黃岩)에서는 ‘국제감귤축제’가 열린다. 기후가 온화하고 토양이 비옥한 저장성은 복숭아와 감귤의 명산지다. 복숭아는 닝보에서, 감귤은 원저우에서 난다. 그런데 상술이 뛰어나기로 중국에서 쌍벽을 이루는 이 두 곳 상인의 기질과 상술이 어찌 그리 각각 탐스런 복숭아와 싱그런 감귤을 닮았는지….

    원저우상인은 감귤처럼 달콤새콤한 화술을 구사하며 감귤나무처럼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란다. 그들은 어떤 환경에도 재빨리 순응한다. 닝보상인에 비해 덜렁거리는 편이며 신경이 예민하지 않고 너글너글한 낙천가가 많다. 매사 샛노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감귤처럼 둥글둥글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지라 별로 걱정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말보다 행동을 중시하며 현실적 감각이 뛰어나고 앞에 나서길 좋아한다. 한마디로 정열적으로 일하는, 감귤빛처럼 선명한 기질을 지녔다. 유연하고 즙이 많은 감귤의 과육같이 적극적이며 능란한 사교술로 여기저기를 누빈다.

    그러나 웃음 띤 그들의 얼굴은 감귤 겉껍질만큼 두껍고, 배짱은 감귤 속껍질처럼 두둑하다.

    이런 기질을 지닌 사람은 무엇을 해서 먹고 사는 게 가장 적당할까? 물론 장사가 제일이지만 장사 중에서도 세일즈맨이 안성맞춤이라 하겠다. 실제로 원저우상인은 천하 제일의 세일즈맨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들은 밝은 성격과 매끄러운 화술로 사람을 끌어당겨서 자신의 페이스로 이끄는 데 능숙하다. 협상에 실패해도 ‘내일이 있다’며 곧 재기하는 배짱도 있다.

    원저우상인은 꿋꿋하게 물류매매의 최전방에서 활동하며 강인한 상인정신의 숨결을 퍼뜨린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매개하고 천하의 공간적 장벽을 무너뜨리며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중간상을 자처한다.

    그들은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돈을 주울 수 없다” “노력한 만큼 번다”는 중국 전통의 상술기본에 충실하다. 또 무자본으로 고수익을 얻는 무점포 사업의 전형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용기와 배짱, 은근과 끈기로 사업을 수행하는 그들에게 상인정신은 그렇게 살아 숨쉰다.

    140만 세일즈맨 군단

    보따리장사로는 원저우상인을 당할 재간이 없다. 원저우상인은 개미군단이다. 1980년대 중국을 풍미했던 원저우식 장사는 한마디로 인해전술이었다. 원저우 세일즈맨 군단은 지금도 중국에 약 100만명, 해외에 40여만명이 활약중이다.

    영리하고 재치가 넘치는 저장상인 중에서도 무엇을 하든 활력과 웃음이 넘치고 일을 잘 벌이고 잘 수습하며 말이나 행동이 소탈하면서도 강인하고 좀처럼 실망하지 않는 원저우상인. 그들은 개혁개방 이후 무리를 지어 전국 방방곡곡을 휩쓸고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아니었다. 부자가 되기 전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강철 같은 신념을 품은 상업 게릴라였다.

    원저우상인은 대개 소량 다품종을 취급하며 한번 박으면 절대 빼지 않는 임전불퇴와 적은 이윤으로 많이 파는 박리다매 전략을 구사한다. 특기할 것은 영업사원은 아무리 말단 신참이라도 부사장급 이상이라는 점. 원저우의 한 유통회사는 사장 1명에 부사장 2000여명, 평사원은 0명이다. 그 회사 모 부사장 말은 이렇다.

    “엄밀히 말해 사장 한 명 외에는 전부 사원 아닙니까. 물건 파는 데 무슨 계장, 과장, 부장 따위의 중간계층이 필요합니까. 외지에 나가 부사장 명함 내밀어보세요. 알아주니 기분이 좋아지죠.”

    원저우의 세일즈맨은 한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2개 이상 회사에서 일한다. 즉 그들은 독립적·전문적으로 판매만 하는 사회집단이다. 수입은 기업이 주는 월급이나 보너스가 아니다. 상품을 판 총액에서 일정 비율을 떼낸 공제금, 즉 상품판매에 따른 커미션이 전부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한 중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 각자가 수많은 원저우의 상품을 전시하고 소개하는 움직이는 상점인 것이다. 무자본, 무설비, 무자산의 그 ‘뻔뻔스러운 중간상’의 무기는 입 하나와 발 두 개가 전부다.

    원저우상인은 일천 봉우리의 산을 넘고 일만 갈래의 물줄기를 건넌다. 물건을 팔기 위해 천만 마디의 말도 마다하지 않는다. 저지대의 온화한 기후에서 나고 자랐지만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티베트의 라싸(해발 4000여m)에도 상가를 운영하고 있는 게 원저우상인이다.

    장사의 至尊 닝보방, 중국의 유대인 원저우상인

    2002년 10월 국제경공업박람회가 열렸던 원저우 박람회장 조감도(왼쪽)와 원저우 특산품인 감귤.

    시장이 있는 곳에 원저우상인이 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등등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 원저우상인의 발자국이 있다. 파리에는 원저우 거리가 있을 정도다. 파리 13구와 14구에 사는 중국인은 모두 원저우 출신이다. 그곳 언어는 원저우 사투리이고 현지 경찰조차 원저우 사투리를 할 줄 안다.

    원저우상인은 베이징상인이나 산둥상인처럼 큰 상품을 생산하는 대규모 사업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유대상인처럼 소규모, 저비용, 초경량, 다용도의 기동성 높은 비즈니스를 즐긴다.

    전세계가 원저우 시장

    원저우 동북쪽 웨칭(樂淸)현 류스(柳市)의 철물과 전기용품 상점을 살펴보자. 류스는 예로부터 상업을 위주로 하는 마을로 인구는 약 30만평이다. 이 정도 인구면 중국에선 도시로 치지도 않는다. 그런 류스에 거주하는 30만 주민이 장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다. 그러니까 농촌이 아니라 상촌(商村)이라고 할 수 있다. 류스라는 지명도 한 그루 버드나무 고목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 곡식과 과채류를 팔던 게 점차 상설시장으로 발전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니, 류스의 ‘市’는 도회지가 아니라 시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류스는 개혁개방 이전에는 목기나 유기를 만들어 내다파는 가내수공업이 발전했으나 1979년 이후 철물과 전기용품 전문시장으로 탈바꿈했다. 류스 주민들은 각종 모델의 전기용접기 계량기 변압기 신호등 표시등 착암기 등 광산용 부품과 전동펌프 자동차부품 기계밸브 스위치 등등을 만들어 파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집 앞에는 점포를, 집 뒤에는 공장을 꾸려 점포 겸 공장을 경영해 1대에 1000위안짜리 대형 스위치보드부터 몇 푼짜리 나사까지 약 1000여종의 전기용품을 판다.

    지금 류스 시장의 전문화는 국제수준에 도달했다. 한두 종류의 부속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가내공장이 시장과 긴밀하게 연결돼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만약 단추장사를 하려면 원저우 서북쪽 융자(永嘉)현의 챠오터우(橋頭)진으로 가라. 챠오터우에서 단추를 만들어 팔던 예야오린(葉堯林), 예야오칭(葉堯靑) 형제는 조그만 단추공장을 인수해 직접 만든 단추를 재래시장에 내놓아 단 하루 만에 400위안어치나 팔았다. 이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마을사람들은 너도나도 단추장사에 나섰다. 1981년 챠오터우에 단추가게만 100여개가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1983년 2월 정식으로 단추전문시장이 열리고 챠오터우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단추거래 중심지가 됐다. 홍콩의 ‘원훼이바오(文匯報)’는 ‘동방제일단추시장 챠오터우’라는 특집기사를 싣기도 했다. 2002년 현재 챠오터우의 상점은 1000여개로 그중 800여개가 단추가게이며 나머지는 벨트, 지퍼, 액세서리 등 소상품을 취급하는 가게다. 또 챠오터우의 400여개 가내공장에서는 1800여종의 단추가 생산돼 중국 전체로 쏟아져나온다.

    어디 그뿐인가. 원저우시 근교에는 약 500개의 라이터 제조회사가 밀집해있다. 여기서 연간 약 5억개의 라이터가 팔려나가며 전세계 라이터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원저우산 라이터는 오랫동안 라이터 최대 수출국이던 일본을 라이터 최대 수입국으로 전락시킨 주역이다. 또 한국, 일본, 타이완의 라이터 제조회사 중 80%가 원저우 때문에 문을 닫았다.

    원저우의 6대 산업은 제화, 의류, 전등, 전기용품, 표찰, 가구, 플라스틱제품이다. 신발 관련 기업만도 4000여개사나 되고 그들이 연간 50억위안을 벌어들인다. 2001년 말 기준으로 원저우에는 철물과 전기용품시장, 단추시장, 라이터시장 등 10여개의 전문시장을 비롯해 600여개의 크고 작은 시장이 밀집해 있다.

    원저우 전체가 마치 기름이 반지르르 흐르는 고속 컨베이어벨트로 연결된 하나의 초대형 시장처럼 보인다. 원저우 도처에 감귤나무들이 다닥다닥 붙은 감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까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듯.

    오렌지 유대인, 감귤 원저우인

    이스라엘과 원저우는 두 가지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째, 이스라엘은 세계적인 오렌지 산지이고 중국 원저우는 감귤 원산지다. 둘째, 이 두 곳이 바로 세계 최고 세일즈맨들의 양대 본산지라는 사실이다.

    원저우상인의 눈에는 직업의 상하귀천이 없다. 돈을 잘 버는 직업이 제일이다. 사방팔방 떠돌아다니고 외지인이 하찮게 여기는 업종을 점거하고, 소리소문 없이 부자가 된다.

    자주와 자립을 추구하는 그들은 그 어떠한 고충도 마다하지 않고 사장이 되고 싶어한다. 강철 같은 심지와 유연한 태세를 겸비한 그들은 적응력이 높을 뿐 아니라 사물을 보는 눈도 넓다.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데가 있는가 하면 중국상인 가운데 그들만큼 낙천적인 상인도 없을 정도다.

    장사의 至尊 닝보방, 중국의 유대인 원저우상인

    세계 라이터시장을 석권한 원저우의 한 라이터 가게(왼쪽)와 환하게 불을 밝힌 원저우 상공회의소.

    그들에겐 시대를 앞선 의식이 있다. 말과 소비를 앞세우기보다 실천과 투자를 앞세운다. 개혁개방 초기 광둥상인을 제외한 여타 중국상인들이 개혁개방의 앞날에 관하여 논쟁을 그치지 않고 관망하면서 망설이고 있을 때 원저우상인은 묵묵히 남보다 앞서 개혁개방에 대비했다.

    원저우상인은 남보다 먼저 먹고 남보다 한 발짝 앞서 전세계로 뻗어나갔다. 포산도호(包産到戶: 토지소유권은 집단에 있고 경영권은 개인이 갖는 농업생산 청부제의 일종), 고분합작(股分合作: 출자금에 따라 이익을 분배하여 합작), 이윤의 연동제, 제2직업, 농민성 등이 모두 원저우상인이 맨 처음 시도한 것들이다. 그들에게는 도처에 돈벌이가 널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곳에서 돈 버는 방법을 귀신처럼 찾아낸다.

    원저우상인이 회사를 차린다면 그 회사는 단지 돈을 버는 도구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회사를 자녀처럼 여겨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여타 지역 상인들과 다르다. 그들은 제때에 냉정히 버릴 줄 안다. 버려야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저우 출신 중에 거부(巨富)는 드물지만 주렁주렁 달려 있는 감귤처럼 고만고만한 알부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감정보다 계산

    원저우상인은 또한 탁월한 협상가다. 중소업체와 세일즈맨이 대부분인 원저우상인은 협상에서 열세에 놓여 있는 약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약자의 협상술이야말로 제일 세련된 협상술이라 할 것이다. 불리한 조건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협상술이라 할 수 있으니, 더 잃을 게 없고 밑져야 본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불리한 협상을 승리로 이끌어내는 비결은 감정보다 계산을 선택하는 데 있다. 협상이 불리할수록 정보를 많이 입수하고 협상하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부드럽게, 서서히 협상을 진행한다. 그들은 협상이 무르익으면 과실을 날름 따먹는다. 이러한 원저우상인과 거래나 협상을 할 때는 아래 사항에 신경을 쓰며 대응하여야 한다.

    첫째, 원저우상인 앞에서 자신이 영리하고 재치 있고 착실하고 수완 좋고 돈 많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돈주머니를 잘 단속해야 한다.

    둘째, 배워야 한다. 배워서 손해 볼 것 없다. 원저우상인의 진취적인 정신과 돈의 바다에 과감히 투신하는 대담성, 허튼소리를 하지 않고 현실의 이익을 추구하는 실용주의, 돈벌이가 된다면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감투정신을 배워야 한다.

    셋째, 의표를 찌르는 그들의 거동에 당하지 않도록 하고 장사판의 변화에 철저한 준비와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 어떤 것을 하든 미리미리 준비하면서 그들의 장점과 우세를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끝으로 그들의 두터운 낯가죽과 배짱에 흔들리지 말고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 원저우상인과 거래하다 보면 자신은 대리인일 뿐이라고 우기면서 상거래에서 까다로운 부분은 모두 위탁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술수를 잘 쓰는 걸 알게 된다. 즉 자기의 이익과 관련해서는 철저하게 요구하고, 상대방의 요구에 대해서는 자신이 판매대리인에 지나지 않다며 오리발을 내미는 수법이다.

    자신이 협상 당사자이면서 실권이 하나도 없는 대리인이라고 속이는 그들의 낯두꺼움과 배짱을 차례로 벗겨내야 한다. 그래야만 달콤하고 싱그러운 ‘성공의 과육’을 맘껏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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