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禪舞’ 창시자 이선옥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4-07-01 15: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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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禪舞’ 창시자 이선옥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나는 또 누구인가. 이모꼬. 이것이 무엇인가. what is this? 이 한 생각만을 골똘히 되풀이한다. 다른 모든 생각은 잘라버린다.

    호흡은 단전에 모은다. 숨을 내쉬면서 단전·회음부·항문(이를 ‘단회항’이라 부른다)을 수축하고 숨을 들이쉬면서 단회항을 이완시킨다. 이모꼬와 단회항 수축을 병행한다. 손과 발은 천천히 움직인다. 동작의 교본은 전혀 없다. 제 몸이 원하는 대로, 팔다리가 가고 싶은 대로 완전히 내맡긴다. 오직 이모꼬와 단회항 수축에만 정신을 집중한다.

    이것이 선무(禪舞)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선무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단전호흡, 이모꼬, 그리고 수인. ‘수인’이란 열 손가락을 서로 얽거나 당겨 무드라를 만드는 동작이다. 수인을 위아래 좌우로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머리로는 이모꼬, 손은 수인, 단회항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그러면서 줄곧 움직이는 제 몸을 보아야 한다. 느리고 단순한 동작, 골똘히 한 생각에 잠긴 머리, 우주의 기(氣)를 들이쉬고 내뱉는 호흡. 명상과 해탈과 참선이 따로 있지 않고 건강과 쾌락과 예술이 둘로 나뉘지 않는다. 이것이 지난 몇 달 내가 지켜본 선무의 이론과 실제다.

    이선옥은 ‘선무’라는 새로운 춤을 만든 무용가다. 춤으로 명상하며 춤으로 마음속 번뇌와 즐거움을 풀어내는 동작을 만들었다. 몸은 마음을 끌고 다니고 마음은 몸 안에 있으니 춤으로 몸이 풀리면 마음에 맺힌 번뇌도 덩달아 풀린다. 반대로 마음에 쌓인 울화가 풀리면 몸에 맺힌 울혈도 함께 풀려나간다. 선무는 춤이되 약이다. 예술이되 의학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에 똑같이 작용해 맺힌 의식을 해방한다.



    동양여자의 美는 어깨와 목 선

    현대무용과 한국무용의 전과정을 마스터하고 세계의 온갖 예술이 모여 용광로처럼 들끓는 뉴욕 한가운데에 던져진 이선옥은 온갖 공연예술을 몸으로 느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선무라는 낯선 장르의 춤이 제 마음속에 이글이글 고이고 발효하고 숙성하여 그는 선무의 숙주가 되었다. 결코 ‘저절로’라고 말할 순 없다. 그는 탐구하고 고민했다. 세계무대에서 동양여자의 몸을 가진 내가 찾아내야 할 동작은? 세계인을 매료시킬 춤의 에센스는? 그게 무엇일까. 그는 엄청난 열정으로 궁구(窮究)했다.

    “뉴욕에서 춤추는 서양애들 보니까 하나같이 쭉쭉빵빵이야. 동작을 할 필요도 없는 거예요. 보고 있는 것만으로 너무나 아름다우니까. 보시다시피 나는 키가 작잖아. 다리도 짧지. 가슴은 크지만, 하하. 서양애들에 비해 섹스어필이 없잖아. 춤이란 결국 얼마나 섹시하냐가 관건이거든. 섹시하게 관객을 사로잡아야 하거든. 걔들하고 같은 무대에 서면 도무지 게임이 안 돼. 어떻게 쟤들을 따라잡나? 어떻게 오버컴할까? 그게 내 화두였어. 자나깨나 그것만 생각했어요.”

    전람회나 연극, 연주회를 빠지지 않고 찾아 다녔다. 그러면서 마음속 화두를 풀어낼 감각을 곤두세웠다. 물론 춤을 추면서.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이매방 선생에게 배운 살풀이와 한영숙 선생에게 배운 승무를 췄다.

    “한국에 있을 때도 나만큼 살풀이를 추는 사람이 없다고 했거든. 살풀이는 팔 한번 크게 펴지 못하고 애끊는 한으로 엉겨 있다가 나중에 그걸 훨훨 풀어내는 춤이거든. 춤 중에서 단연 최고의 춤이지.”

    어느 날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하다가 ‘에로틱 아트’라는 장르를 알게 됐다. 동양여자들이 그려진 춘화집을 구했다. 그는 중국과 일본의 여자들이 주로 등장하는 ‘운우(雲雨)’라는 춘화집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옛 그림에 나오는 동양여자들 몸의 선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거야. 그 포인트는 목과 손과 어깨의 선이더라고. 서양여자처럼 다리와 가슴과 엉덩이가 아니더란 말이지. 아하, 동양여자의 아름다움은 아랫도리가 아니라 어깨 위에 있구나! 이걸 발견한 거지. 미국여자는 섹스어필을 다리에서 얻어요. 프랑스 여자는 가슴이고 이탈리아여자는 엉덩이죠. 그런데 일본여자는 목선이에요. 게이샤들이 기모노를 뒤로 한껏 젖혀 입는 걸 보라구! 중국여자도 어깨와 목이야. 아랫도리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발이거든. 우리 풍속화 속의 여자들도 반달 같은 눈썹에 크게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가늘고 염염한 어깨와 목선을 드러내잖아. 그게 엉덩이와 다리를 덜렁 드러내놓는 것보다 훨씬 섹시하다는 걸 깨닫게 된 거지.”

    그리고 손가락의 선, 고요하게 정교하게 움직이는 하얀 손가락의 신비. 그는 그걸 느끼면서 매혹적인 선무의 기본동작들을 머릿속에 좌르륵 저장했다. 직관으로, 어쩌면 자신조차 구체적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불교는 선험(先驗)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자장가를 독송(讀誦)으로 불러줬다. 늦게 얻은 막내인 그를 신묘장구대라니 같은 주력(呪力)으로 재웠다. “세상 천지에 독송만한 자장가가 어디 또 있겠어요.” 무의식, 혹은 전생에 이미 불교와의 인연이 밀접했다. 그는 할 얘기가 무진장한 사람이다. 제 인생의 비밀과 깨달음을 꽁하고 가슴속에 묶어두지 않는다. 자유자재, 무장무애하게 털어낸다. 드러난 제 삶에 애착하지도, 항변하지도 않는다. 저만치 떠밀어내고 하하 웃으며 바라볼 줄 안다. 그는 춤추는 사람이다. 춤 안에 참선과 명상을 버무려놓은 사람이다. 버무린다, 이것은 혼합물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춤이 곧 선(禪)이었다. 춤으로써 그 어렵다는 참선에 드는 디딤돌을 놓은 것이다.

    이선옥의 이야기는 듣고 또 들어도 새롭다. 제 삶을 치열하게 살고 난 뒤 그걸 윤색도 포장도 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열어두는 사람만이 갖는 풍요라며 나는 감탄했다.

    “사람들은 감정을 돌에 새겨요. ‘I hate you’라고. 집착이죠. 그러니 크게 얽매일 수밖에 없어요. 수행을 한 사람은 모래 위에 글씨를 써요. 파도가 밀려오면 글씨는 곧 쓸려나갑니다. 그만큼 자유로워지는 거지요. 도인은 물 위에 글씨를 씁니다. 쓰는 순간 지워지죠. 부처요? 부처는 허공에 씁니다. 부처라도 아예 쓰지 않는 것은 아니죠. 쓰더라도 아무런 자취가 남지 않는 것일 뿐.”

    인간의 마음 안에 떠도는 희로애락애오욕과 탐진치를 이토록 탁월한 메타포에 담아내다니.

    그의 어머니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전생을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힘을 가진 분이셨다. 그는 그런 어머니가 나이 마흔여섯에 얻은 늦둥이였다.

    “며느리 볼 나이에 아이를 가진 게 남부끄럽다고 날 떼어내려 모진 한약을 꽤나 들이켰답니다. 그런데도 안 떨어졌으니 내가 더 지독했던 거지. 출산할 때 다리가 먼저 나왔대. 그래서 ‘서있다’고 선옥이라 이름지은 거래요, 하하. 그렇게 낳은 지 1년 동안 사경을 헤맸대요. 어머니가 날 안고 백일기도를 했답니다. 백일째 되니까 드디어 미음을 먹더래요.”

    이선옥은 개성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아버지는 전쟁중에 지병이던 천식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어머니는 “내일 11시에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이라며 침착하게 수의를 지으셨다.

    피난처 부산에서 이매방 만나

    아버지를 개성에 묻고 부산으로 내려간 건 1·4후퇴 때였다. 그의 말투를 가만히 들어보면 서울말씨에 이북말투와 경상도 억양이 살짝살짝 묻어난다. 한때 살았던 땅의 기억은 발음의 습관으로 남아 혀끝을 끝끝내 질기게 휘감는구나. 우리를 훑고 지나간 모든 감각이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듯.

    삶은 우연이 아니라 엄연한 법칙에 의해 운행되는 철저한 질서인지도 모르겠다. 피난살이를 하던 부산집 2층에 이매방 춤연구소가 있었다는 것은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매방은 살풀이에 일가를 이룬 춤꾼이었다.

    아이 이선옥은 매일 창문 너머 춤연구소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제 집으로 내려와 춤을 흉내냈다. 엄마 치마저고리를 뒤집어쓰고 춤동작을 따라했다. 그에겐 오빠가 셋 있었다. 오빠들은 막내동생이 춤추는 것에 질색했다. 종아리를 걷어 회초리를 들었다. “기생이 되려고 그러냐, 무당이 되려고 그러냐”며 오빠들은 그를 꾸짖었다. 그러나 이선옥은 항복하지 않았다. 매를 맞은 후 다시 춤을 흉내냈다.

    “어머니만은 말리지 않았어요. 얘는 이런 걸 해야할 아이이니 그냥 놔두라고 오빠들을 막아줬어요. 하긴, 그때 춤추는 사람은 기생 아니면 무당이었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나중에 먼 나라에 가서 여러 사람의 박수를 받으면서 섬에서 살 것이라고 예견하셨지요.”

    “섬이라고요?”

    “맨해튼이 섬이잖아요.”

    4학년 때 서울로 올라온 이선옥은 을지로에 있는 김백초 무용연구소에 다녔다. 어린애가 선생을 찾아가 당차게 협상했다. “나는 돈이 없다. 대신 최고로 열심히 하겠다.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는 걸로 교습비를 대신하겠다”고.

    10원 한 장 내지 않고 김백초 선생에게 현대무용과 한국무용을 고루 배웠다. 김백초 선생은 최승희의 제자로 1953년 미국에 건너가 마사 그레이엄에게 현대무용을 배운 이였다. “너무 아까운 분이야. 1963년에 집안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거든.”

    그는 인복을 타고났다. 늘 최고의 스승이 인생 길목에서 우연한 듯 서 있곤 했다. 김백초 선생이 그랬고, 나중에 다시 만나 살풀이춤을 전수해준 이매방 선생이 그랬다. 창을 가르쳐준 김소희 선생, 승무를 가르쳐준 한영숙 선생도 그랬다. 남들이 도시락을 싸서 찾아다닐 만한 대스승들이었다.

    초립동춤을 추는 귀여운 용산초등학교 여학생을 눈여겨본 사람은 상명학교의 배상명 교장이었다. 그는 이선옥을 유난히 예뻐했다. 당시 이화여고가 무용으로 가장 유명했지만 이선옥은 배상명 선생이 계시는 상명학교에 장학생으로 뽑혀갔다.

    중학생 때 이미 안무를 직접 했다. 촛불을 켜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어린 나이에 가당찮게도 죽음을 명상했다. 죽음을 주제로 한 안무로 이선옥은 서라벌예대 콩쿠르에서 특등상을 탔다.

    ‘禪舞’ 창시자 이선옥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1985년 딸과 함께 미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

    중학교 2학년 때 한 무용 콩쿠르에서 한 아이가 추는 살풀이춤을 봤다. 처음 보는 춤이었다. 한승서라는, 그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며칠동안 그 춤동작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승서의 선생을 알아내기 위해 수소문을 했다. 그 옛날 부산 피난시절, 무작정 시늉하던 바로 그 이매방 선생이 한승서의 선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매방 선생에게 절을 하고 살풀이춤을 배웠다. 열댓 살의 이선옥은 이미 프로 춤꾼이었다.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춤을 췄고 용돈을 벌었다. 동년배 소녀들은 단발머리를 해도 이선옥만은 긴 머리를 구불구불하게 땋아 정수리에 말아올린 헤어스타일을 하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춤 외에는 아무것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탤런트 박주아와 선우용녀 언니가 우리 무용반 선배였어요. 선우용녀 언니는 정말 예뻤어. 난 춤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어. 해가 어두워질 때까지 무용반에서 춤만 췄으니까. 가끔 한강에 스케이트 타러 가는 게 유일한 외출이었어. 동화백화점 뒤편 극장에서 외국영화를 엄청 봤지. 그때 본 영화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는 당차고 진취적이었다. 매사를 완벽하게 처리했고, 끊임없이 상승의욕에 불타는 인간형이었다. 그가 대학을 옮겨다닌 내력을 보면 그 기질을 짐작할 만하다. 아니 한자리에 뿌리내리는 것을 못 견뎌하는, 방랑벽의 소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애초에 숙명여대 보건체육과에 입학했다.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도중에 어떤 이유로 틀어져버렸다. 그는 얼른 수도사대 체육학과로 옮긴다. 그러나 체육학과에는 무용보다 원반던지기나 기계체조 같은 커리큘럼이 많았다. 미국유학을 꿈꾸던 이선옥은 ‘이럴 바에야 영문학을 하자’는 생각에 숭실대 영문학과로 다시 학교를 옮겼다.

    숭실대에서 이선옥은 영어웅변대회, 영시낭송대회 등을 휩쓸어 지도교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 지도교수가 건국대로 자리를 옮기자 이선옥은 지도교수를 따라가 결국 건국대에서 졸업을 했다.

    “국립무용단이나 국악원이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에 나라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춤추러 불려다녔어요. 이생강, 서용석 선생이 우리 같은 어린 계집애들을 위해 연주해줬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대학생 때 약수동에 집 한 채를 샀지요.”

    사람들은 춤을 추는 그에게 혹했다. 어쩜 저렇게 예쁘냐며 감탄했다. 몸놀림과 머리카락이 딱 기생같다고 했다. 기생이라고? 그러나 이선옥은 ‘오우케이!’하며 그 말을 받아들였다. ‘오우케이’는 지금도 여전하다. 낙관과 긍정의 대단한 힘을 가진 ‘오우케이’이다.

    “오우케이,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황진이가 혁명적인 예술가라는 것을 책을 보고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난 기껏해야 금강산 기행이나 한 황진이와 다르다, 세계를 누비는 혁명적인 예술가가 될거다, 그랬습니다.”

    뉴욕에서 부딪친 삶에 대한 질문들

    ‘禪舞’ 창시자 이선옥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1994년 파리 공연 포스터.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등록을 마친 1969년, 이선옥은 미국으로 떠났다. 처음부터 미국이 목적지는 아니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세계무역박람회 직원으로 한국 땅을 떠났다. 그러니 비행기 값과 숙식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6개월 후 캐나다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다.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세계적인 춤꾼이 되겠다는 목적만 뚜렷했을 뿐.

    이선옥은 일단 국제연합(UN)의 안내원이 되었다. 선발기준이 까다로웠지만 영어에 능통하고 얼굴이 고운 그는 쉽게 합격했다. 그는 욕심이 많았다. 디자인스쿨에도 등록하고, 보석디자인학원에도 나갔다. 아예 보석 연마 기계까지 하나 사들였다.

    “내가 사치하기를 좋아하거든요. 멋쟁이를 만나면 옷과 보석, 화장을 뜯어봐요. 샛물이 모여 바다로 흘러 들어가듯 그게 다 춤으로 귀결되거든요.”

    1972년, 미국에 도착한 지 4년 만에 카네기 리사이틀홀에서 이선옥은 첫 발표회를 가졌다. 연일 공연이 이어졌다. ‘뉴욕타임스’가 그에 대해 호평을 썼다. 성공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미진했다. 환호 속에서 무대를 내려와 빈방으로 돌아오면 ‘너는 누구지?’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생겼다. 거울 앞에 혼자 앉아 ‘지금 뭘 하고 있지? 왜 이렇게 멀리 와 있는 거지?’라는 질문에 매달렸다. 외로웠다. 허망했다. 질문들은 거울 안의 자그맣고 어린 여자에게 벌침처럼 아프게 날아갔다.

    ‘禪舞’ 창시자 이선옥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너는 왜 화장했지? 지금 뭘 하는 거지? 너는 누구지?”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삶의 답을 찾고 싶었다. 마침 뉴욕에 ‘원각사’라는 절이 생겼다. 숭산스님이 오셨다. 그는 찾아가 엎드렸다.

    “고통 없는 피안의 언덕이란 것이 정말 있습니까?”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스님은 그걸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안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너는 그걸 하면 돌아버릴 거다”라고 했다. 스님이 된다면 나도 안될 리 없지 않느냐고 매달렸다.

    “머리를 깎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너는 춤을 춰야지 머리를 깎으면 안 된대. 우선 독송을 열심히 하래. 주력을 외기만 하래.”

    그래서 그는 앉으나 서나 경(經)을 외고 다녔다. 맨해튼 거리의 모든 간판, 펼치는 책과 신문,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로 보였다. 그는 무섭게 집중하는 스타일의 사람이다. 불경과 다라니 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땐 정말 미쳤지. 그렇게도 경이 좋았어. 그것만 하고 살면 다른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지.”

    한참 후 큰스님을 뵙고 물었다. “참선은 꼭 앉아서만 해야 합니까?” 그는 어릴 적 다리를 다친 적이 있어 가부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님이 답하셨다. “아니지. 선에는 좌선도 있지만 행선도 있다. 걷는 주(走), 말하는 어(語), 눕는 와(臥), 빨리 움직이는 동(動), 입을 다무는 묵(默)이 다 선이 될 수 있다.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자리를 관(觀)할 수 있으면 그게 뭐든 다 행선이다.”

    그 대답이 깨달음이었다. ‘그렇다, 춤도 곧 선이 될 수 있다. 춤선!’

    선무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진작부터 자신 안에 싹을 틔웠던 동작들에 단전호흡과 명상, 나중에는 손가락을 사용하는 무드라를 도입했다. 1975년에는 뉴욕예술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한국무용을 가르쳤는데, 그때 학생들을 중심으로 ‘젠 댄스’ 무용단을 만들었다. 소호에 200평짜리 공장건물도 하나 샀다. 국제연합에서 받은 퇴직금 4000달러로 골동품을 사고 팔아 돈을 10배로 늘린 덕분이었다. 공장 터 절반에 아파트를 지어 팔았고 나머지 절반에 선무를 상설공연하는 소극장을 지었다. 1976년의 일이었다.

    ‘춤도 곧 선이 될 수 있다’

    “미국은 내게 행운을 가져다줬어요. 노력했지만 그게 노력인 줄도 모르고 그저 좋아서 했거든요.”

    1978년에는 뉴욕대학에서 한국무용을 강의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뉴욕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1984년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이모꼬 3회 전개, 선무의 안무법’. 혈혈단신 빈손으로 미국에 온 지 15년 만에 그는 박사학위와 뉴욕대학 교수직과 맨해튼에 있는 커다란 집을 가진 부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몹시 바빠졌다. 여기저기 공연이 많았다. 온갖 잡지가 그에 대한 찬사의 글을 썼다. 예술가로서 뉴욕무대에서 뚜렷하게 자리잡았다. 1986년 만든 작품 ‘로터스 1∼6’이 프랑스에서 큰 찬사를 받았고, ‘바라밀다 1∼3’이 객석으로부터 숨죽인 찬탄을 끌어냈다. 이선옥은 2000년부터 현재까지 ‘색즉시공’ 시리즈를 계속 공연하고 있다.

    그는 선무를 만들면서도 최고의 스승을 적재적소에서 만났다. 숭산스님에게서 주력을 배웠고, 송담스님에게서 화두에 드는 법과 단전호흡을 배웠다. 범어사 양익스님에게서는 밀교의 수인법을 배웠다.

    “이모꼬는 생각이 끊어지는 수행법이에요. 명상하는 주체가 성성적적하게 살아있되 아무 잡념 없이 마음을 텅 비워놓는 거지요. 단전호흡은 우주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몸안의 노폐물과 격한 감정을 바깥으로 내뱉는 것이며 수인법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척추와 골반, 목의 균형과 유연성을 잡아주는 작용을 합니다. 몸을 비틀어 빨래 짜듯 몸안의 나쁜 기운을 짜버릴 수 있게 도와주죠.”

    1995년 뉴욕타임스는 그의 선무 작품 ‘바라밀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선옥은 서양 현대무용과 현대음악, 그리고 참선의 수행법에 새로운 패션감각을 덧입혀 경탄할 만한 창작력, 그녀만의 춤 의류, 춤의 세계를 웨딩마치의 발맞춤처럼 누볐다. 비록 종교무용은 아니지만 그녀의 작품은 단순한 감정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선불교를 향한 사상을 표출한 것이다.

    이선옥의 작품세계는 극적이며 실험적인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 선무 무용수들은 안무가와 똑같은 집중력으로 관중을 매료시킨다. 그녀들의 천천히 움직이는 동작들(밑으로 내려가는 동작, 한 발로 서있는 동작, 또는 꺾은 발동작)과 불교 수인법(손가락을 바깥으로 보이게 하고 엄지손가락을 둘째손가락에 붙이는 동작)은 다리와 팔을 쭉 펴는 동작보다 더한 긴장감을 준다.

    ‘보시’라는 춤에서 이선옥은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소리로 염불을 하며 나타난다. 오보에는 콧소리를 내고, 징과 거문고는 가늘게 울리고, 이선옥은 예식의 진행처럼 천천히 움직인다. ‘지계’에서는 무대 중앙에 횡으로 화선지를 펼쳐두고 임형택이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 무용수 상체와 옷에도 먹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인욕’에서는 불교무술 금강승을 익힌 젊은 남자가 합장한 자세로 튀어나오면서 주먹과 손으로 허공을 치고 다리를 꼰 채 생명감 넘치고 신비스런 동작으로 하늘 위로 높이 튀어오른다.’

    ‘禪舞’ 창시자 이선옥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선무의 장면 ‘연꽃 2’(1987)

    1986년 파리의 ‘롱 포엥’ 극장에서 ‘로터스 1’을 초연할 때 이선옥은 상체를 완전히 벗어젖힌 채 무대에 섰다. 반쯤 돌아선 채로 도톰한 제 젖가슴을 화선지로 내놓았다. 그 가슴 위에 머리를 깎은 젊은 남자가 먹으로 그림을 그렸다. 벗은 어깨의 수줍은 선, 목에서 얼굴로 올라가는 가련하고 슬픈 선, 위로 쳐든 흰 손가락이 그리는 간절한 선…. 그 몇 개의 선만으로도 무대가 꽉 찼다.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거의 있는 듯 마는 듯한 동작이 끊일 듯 이어졌다. 아쟁이 쟁쟁 울었다. 붓이 흰 살 속에 깊이, 강렬하고도 두려운 먹빛을 선연하게 새겼다.

    이선옥은 허리를 약간 꼰 채 손가락을 더 높이 쳐들었다. 부처와 지옥, 고뇌와 황홀, 인욕과 해탈이 거기에 말없이 담겨 있었다. 객석에서는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종이 한 장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릴 것 같은 긴장된 무대였다. 그는 관객의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 자유자재로 요리할 줄 알았다.

    당시 이항성 화백이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 화백은 언제나 선무 공연장으로 찾아왔다. “자네는 손가락 끝으로 우주를 뱅뱅 돌리는구먼.”

    “이 선생님이 우리 단원들을 집으로 초대해 고기도 구워주시면서 멋지게 대접해주셨지. 그러면서 현대적인 그림을 그리라고 충고해주셨어.”

    ‘禪舞’ 창시자 이선옥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바라밀다’(1994).

    이항성 화백은 자신도 춤판에 낄 수 없느냐고 물어왔다. 대환영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두고 이 화백은 밤을 새워 선무단을 위한 대작을 그려주었다. 이 화백이 그린 그림을 무대에 깔고 ‘연꽃 2’를 공연했다. 그림 한가운데 관세음보살의 자세를 한 이선옥의 사진을 박아넣은, 신비한 분위기를 띠는 먹그림이었다. 이 그림의 캔버스는 당연히 조선의 창호지였다. 이선옥은 창호지를 찢으며 무용수들을 등장시켰다. 창호지는 재생과 해탈을 상징하는 최상의 메타포였다. 대성공이었다.

    “내가 조선종이를 무척 좋아하니까 이 선생님이 염색한 조선종이 몇 다발을 내놓으셨어. 그 전까지는 무용수들의 옷을 값싼 중국산 실크로 해입었거든요. 조명에 반사되고 미끈거려서 영 좋지 않았어. 조선종이로 옷을 만들면 어떨까 싶었지. 조선종이를 풀로 붙이고 접고 하니까 훌륭한 의상이 되는 거야. 뉴욕에서 의상 공부한 게 큰 도움이 됐어. 값은 실크보다 훨씬 비쌌지만….”

    선무는 이렇게 종이 의상으로 인해 더욱 신비롭고 다채로운 상징의 옷을 입게 된다.

    “우리 종이는 질감이 부드럽고 질기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찢을 수도 있잖아. 삶과 죽음의 경계, 집착을 끊는 수행의 표현으로 그만한 상징이 어디 있겠어.”

    그때 이항성 선생이 그려준 작품은 현재 서울 평창동 이선옥 선무센터 연습실 벽면에 압도적인 기운을 내뿜으며 걸려 있다.

    앞서 말했듯 선무는 춤이면서 명상이고, 예술이면서 치료이다. 동작, 음악, 호흡, 화두를 통해 개인에 잠재해 있는 무한한 힘을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춤동작을 반복하는 중에 절로 심신의 평정을 얻고 삶에 대한 새로운 의욕과 활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결혼하지 않고 아이 낳아

    ‘禪舞’ 창시자 이선옥  “난 기생이다, 황진이다, 혁명적 예술가다”

    ‘바라밀다’(1994).

    이쯤에서 그의 파격적인 개인사를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21세기를 사는 독신 여자들이 혹 꿈꿀 수도 있는 모험적인 일을 그는 이미 지난 세기에 이루어냈다. 그는 남편은 싫었지만 아이는 원했다. 마흔의 나이에 가까워지자 아이를 한번 가져보지 못한다는 것은 미숙한 인생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폐경기가 오기 전에 어머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사귀는 남자는 없고 친한 미국인과는 도무지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지 않았다. 미국남자와는 함께 식사하고 토론하는 정도는 괜찮은데 더 이상의 접근은 절대사절이었다. 연애가 불가능했다. 그는 김치 먹는 한국남자만 좋았다. 그 무렵 그는 태몽 비슷한 꿈을 자주 꾸었다.

    “바닷가를 걸어가는데 저 앞에는 절이 있어. 무지개는 아니지만 뭔가 서기(瑞氣) 같은 것이 내 뱃속으로 쫙 뻗치는 거예요. 꿈을 깨고 나서 이것은 영락없이 태몽이라고 여겼죠. 하루는 공연을 마치고 기진해서 TV를 보고 있는데, 하와이에 있는 절이 나오더군요. 거기에 가고 싶어지더라고. 갔지. 거기서 어떤 남자가 내게 자꾸 말을 걸어요. 수행을 하는 한국남자였지. 그에게 내 고민을 얘기하고 도와달라고 했어.”

    한달 후 남자가 뉴욕으로 왔고 사흘을 함께 지냈다. 테스트를 해봤다. 그러나 임신은 아니었다.

    “이게 다 망상이구나, 하고 잊어버렸어. 늙어서 주책이다, 하고 말았어. 그런데 한달 후 그 남자가 다시 전화를 했어. ‘천하의 이선옥이 한번 해보고 포기를 하느냐. 삼세번은 시도해봐야지’라고 하더라고. 그 말도 맞다 싶어서 다시 그 남자와 닷새를 같이 지냈어. 이번 테스트는 포지티브였어.”

    그는 ‘임신하게 해줘 감사하다. 건강하게 낳아 열심히 기르겠다’고 말하고 남자를 보냈다. 그리고 배가 불러왔다. 뉴욕에서는 미혼 여자의 배가 불러오는 일에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그 남자, 아기의 아빠만은 처음 약속을 어기고 ‘사랑한다, 같이 살자’고 고백해와 그를 신경 쓰이게 했다.

    “남자를 피해 프랑스로 도망갔어. 애 낳을 때쯤 뉴욕으로 돌아왔지.”

    관계에 대해 이렇게 담백할 수가.

    18시간의 산고 끝에 결국 제왕절개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아이 이름은 그의 영어 이름 ‘써니 리’를 딴 ‘허니 리’.

    육아의 경험은 놀라웠다. 무조건적으로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자체가 찬탄이고 경이였다. 젖을 먹이고 똥 냄새를 맡으면서 행복해했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신기했어. 엄마가 된다는 건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지. 예술에 대한 의욕도 더 커지고 삶에 대한 태도도 더욱 진지해졌어요.”

    스물넷의 허니는 지금 미국에서 마케팅을 공부하는 중이다. 혼자 가끔 아빠를 만나고 있지만 엄마에게 자신의 출생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은 적은 없다.

    링컨센터에 영구 소장된 선무

    1996년 드디어 이선옥의 선무 ‘바라밀다’ 시리즈가 링컨센터 라이브러리(공연예술전시관)에 영구 소장되기로 결정됐다. 원하던 목표였다. 그가 만든 춤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것이다.

    그러자 미친 듯이 한국이 그리워졌다. 눈에 익은 산의 능선들, 입에 익은 양념 맛, 특히 콩나물무침과 마늘쫑의 향기, 거친 듯 훈훈한 사람들의 인정과 수다가 그리웠다. 망설이지 않고 허니를 설득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딸의 까다로운 고양이까지 품에 안고. 그게 1997년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그의 기반이 너무도 빈약했다. 우리 예술계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일이기 때문인지 링컨센터 라이브러리 소장 무용가의 업적에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떠돌이 이선옥에게는 학연도 지연도 신통치 않았다. 뽑아낸 뿌리를 다시 내릴 땅이 마땅치 않았다. 외로웠다. 그렇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우케이!” 그는 불공평이나 억울함을 받아들이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늘 그랬으니까.

    얼마 전 집에 도둑이 들어 “담요 뒤집어쓰고 있어”라고 명령했다. 그는 싹싹하게 ‘오우케이’라고 말하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도둑은 여자 혼자 살면서 보안장치도 달아놓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자기가 들어오면서 뒷문 유리를 깼으니 새로 갈아끼우라는 말까지 해주고는 현관문으로 유유히 나갔다. 도둑은 집안에 있는 불상을 보고는 ‘당신, 뭐하는 사람이오?’라고 묻기까지 했단다.

    한국에 돌아온 지 7년째. 선무의 가치와 효용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포천중문의대 보건복지학과와 대체의학과에서 대학원 학생들을 가르치며 환자들을 직접 만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연습장과 공연장도 마련했다. 일반인, 특히 불자(佛子)와 그 아이들에게 선무를 가르치려고 사람들을 모으는 중이다.

    “뉴욕에 간 지 7년 만에 맨해튼에서 200평짜리 공연장을 세웠는데, 한국에서는 7년 만에 서울에서 40평짜리 연습장을 만든 셈이죠. 한때는 ‘뉴욕타임스’에 하루걸러 한번씩 공연평이 실리는 아시아아메리칸으로 폼을 잡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무용하는 사람들도 대체의학하는 사람들도 나를 잘 몰라요. 그러나 좋은 예술은 결국 알려지게 마련이에요. 때아닌 강태공 노릇을 하려니 그게 좀 고생이지 다른 건 아무것도 힘들지 않아요. 치유무용으로서 선무는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선무 동작을 이용해 여성암, 요통, 요실금, 갱년기장애 등을 예방·치료하겠다는 시도는, 자기 안에서 우주의 근원을 발견하는 힘을 기르자는 것이다. 그 힘의 근원을 깨닫고 명상하자는 것이다.

    “이건 굳이 불교가 아닙니다. 어느 종교든 명상이 기본이잖아요 미국에서는 가톨릭 신자들도 선무에 전혀 거부감을 갖지 않았는데, 한국에선 배타적이어서 당황스러워요. 그럴 바에야 불교신자들에게라도 적극 알려보고 싶어요.”

    그는 이미 예순의 나이를 넘겼다. 고운 눈매와 야무진 입술선이 전혀 허물어지지 않았어도 스스로를 ‘할머니’라고 칭하는 자격지심을 감추지 못한다. 요즘에 와서야 비로소 외롭다는 걸 느낀다. 혼자인 것이 싫을 때도 있다. 남자, 그토록 천장만장 도망쳤던 남자가 그립기도 하니 별일이긴 별일이다.

    그는 집안에 법당을 꾸미고 송산스님이 정식으로 봉안식을 마친 본조불을 모셔뒀다. 그 앞에 향을 피우고 매일 아침 정식 예불을 올린다. 후불탱화와 산신탱화도 오래 묵은 진품들이다. 벽에는 어머니 사진과 함께 그의 정신적 스승인 경허, 만공, 송담, 정강스님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두었다.

    한 명의 인간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품어 기른 자연일까, 지혜를 준 스승일까. 아니면 만나고 사랑하고 다툰 세상 전체일까. 그는 인간의 한 생이 단순히 현생에서 끝나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꿈에 전생을 두 번 봤어. 내가 티베트 어디쯤의 승려더라고. 도반(桃盤)에게 화를 내며 산을 내려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가만 보니 그 성질머리가 딱 지금의 나더라고요. 사람은 본성만은 삼생 동안 그대로 지니고 다녀요. 전생이 없는데 현생에서 내가 이런 짓을 하고 있겠어? 내생에도 아마 춤과 참선과 무관하지는 못할 거예요. 할 줄 아는 짓이 이것뿐인 걸.”

    “재물도 명예도 다 소용없다. 삼생을 이어가는 건 그저 저 깊은 본성뿐이니 이승에서 가장 열심히 할 일은 마음자리를 맑디맑게 닦는 것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추상적인 그 일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그는 스스로 만들어냈다.



    춤. 천천히 숨쉬고 천천히 팔다리를 움직이고 손을 상하좌우로 오르내리며 이모꼬를 거듭하는 동안, 보는 사람에게 아름답고 추는 사람에게 힘을 주는 신비한 춤. 그 젠 댄스를 이선옥은 삼생을 윤회하며 이렇게 우리 앞에 툭, 던져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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