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國手 정운창|오묘한 棋理 깨우쳐 八道 호령한 진정한 프로기사

  • 글: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 ahnhoi@yumail.ac.kr

    입력2004-07-01 18: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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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갖고 있는 통념 하나. 양반 사대부는 독서와 정치에 몰두하며, 여자들은 집에 들어앉아 살림하고, 그들이 읽는 책은 사서삼경, 그들의 학문은 주자학뿐이며, 직업이래야 사농공상(士農工商)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통념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나 500년간 한결같을 수는 없다. 조선후기엔 다양한 직업군이 등장하고 새로운 지식과 취미, 경험을 찾아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을 통해 정형화된 사회와 학문, 이념, 인생을 벗어던지고 열정적으로 새 길을 개척한 조선후기 인간승리를 엿볼 수 있다.
    國手 정운창|오묘한  棋理  깨우쳐 八道 호령한 진정한 프로기사
    한국 바둑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동호인 수억 명을 거느린 바둑 최강국으로 한·중·일 삼국이 벌이는 각종 기전(棋戰)에서 무패 행진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인터넷 바둑 사이트의 기술이나 운영도 세계 최고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 바둑 애호가와 쟁쟁한 고수가 많다. 현재의 수준은 바로 조선시대와 긴밀히 연결되는데, 과연 그 시절 바둑판은 어땠을까. 또 그 시대에 명성을 한 손에 쥔 기사는 누구일까.

    조선사회는 바둑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저 여기(餘技), 소기(小技)로 간주하는 이율배반적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 보니 조선 500년을 통해 국수(國手)로 불린 사람은 많지 않다. 국수가 있었지만 굳이 그 이름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국수의 사회적 위상이 낮았으니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접어들면 그런 관행이 바뀌어 바둑과 국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높아진다. 바둑에 대한 대접이 달라진 것은 이른바 국수에 대해,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나 받을 수 있는 전(傳)을 써준 데서 발견할 수 있다.

    국수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시기는 조선 후기다. 국수의 인명을 제법 많이 기록한 책으로 장지연의 ‘일사유사’가 있는데 여기에는 현종·숙종 연간에 활동한 덕원군과 유찬홍, 윤홍임 같은 국수가 소개됐고, 그 뒤로 최북, 지석관(池錫觀), 이필(李馝), 김종귀, 김한흥, 고동, 이학술이 나온다. 근대의 국수로는 지우연(池遇淵), 김만수(金萬秀) 등이 거론된다. 이외에 이런저런 자료에 산발적으로 국수가 등장한다.

    국수 이야기는 바둑 그 자체가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심심찮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바둑의 속성이 승부를 겨루는 것이므로 이기고 지는 판가름의 긴장이라든지, 수 읽기의 오묘함 등 사람들을 사로잡을 만한 요소가 충분했다. 판세를 일거에 뒤집은 역전의 드라마는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그 가운데 당대 최고수의 자리를 두고 바둑계 고수들이 벌인 쟁투는 단연 화젯거리였다. 유명한 승부는 뒷날 전기나 야담에 기록돼 하나의 전설이 됐다. 특히 야담에는 조선 제일의 국수가 무명의 신진 기사에게 무참하게 진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흔치 않은 사건이 주는 충격과 흥미로움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아냈기 때문이리라. 이런 사건의 서술 속에 조선시대 바둑계의 실상과 국수의 계보가 숨어 있다.

    시골뜨기, 세상에 나오다

    이제 이 글의 주인공, 시골뜨기 신출내기에서 조선 최고의 기사 반열에 오른 정운창이 살았던 삶과 시대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최근 귀중한 사료가 발굴됐다. 18세기 후반에 활약한 국수의 존재와 그들의 구체적 활동을 사실에 가깝게 묘사한 자료다.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면 필자 같은 한문학자는 천리를 멀다 않고 뛰어다닌다. 그 가운데 눈에 ‘쏙’ 들어온 것이 정조 연간에 활약한 바둑 명인 정운창에 관한 자료다.

    바로 이서구의 ‘자문시하인언’ 속에 실린 ‘기객소전’과 이옥이 지은 ‘정운창전’은 한 명기사의 인생을 기록한 전기다(그 가운데 이서구가 쓴 정운창 전기는 계명대 김윤조 교수가 발굴했다). 유본학의 ‘바둑에 능한 김석신에게 주는 글(贈善棋者金錫信序)’에도 정운창의 사연이 기록돼 있어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케 한다. 이를 통해 그동안 잊혀졌던 국수의 생애가 되살아난다.

    이서구는 정운창을 직접 만난 20대의 젊은 시절에 그의 전기를 썼다.

    정운창은 전라도 보성 출신이다. 다른 바둑 명인과 달리 그에게는 보성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 이서구를 비롯하여 이옥, 유본학 모두 그가 보성 사람이라는 점을 빠트리지 않았다. 왜 그럴까. 이 점은 아무래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서울은 인재가 모이는 중심이다. 당연히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한양. 그런데 정운창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남해 바닷가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한 시대 바둑계를 지배했다. 이서구가 그를 일러 비천한 사람이었다고 쓴 것으로 보아 양반은 아니다. 그런 그가 혜성처럼 바둑계에 등장하였으니 출신지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 국수가 많이 나온 지역이 바로 전라도다. 중국인이 기록한 ‘북사(北史)-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 사람이 특히 바둑과 장기를 숭상했다고 기록해놓았다. 조선후기 학자들은 대체로 호남에 지관(地官), 점쟁이, 바둑 잘 두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 동의했다. 현재 한국의 유명 기사 가운데 조훈현은 전남 목포 사람이고, 이세돌은 신안 출신이며, 조남철은 전북 부안, 이창호는 전주 사람이다. 국수의 맥이 백제 이래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맥이 닿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운창은 바둑을 어떻게 배웠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정생은 처음에는 사촌형인 아무개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5~6년 동안 문밖으로 발이 나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날마다 자고 먹는 것을 잊기 일쑤였다. 사촌형은 늘 “이보게 아우!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세상을 휘어잡기에 넉넉하다네”라고 만류했으나, 정생은 여전히 한층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정운창의 사촌형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세상을 휘어잡기에 넉넉하다”고 혀를 끌끌 찼다는 표현에서 바둑을 향한 그의 집념을 읽을 수 있다. 이옥은 그가 어려서 자주 병에 걸렸고, 오로지 바둑으로 10년을 보낸 뒤 어느 날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다고 적었다. 보성에서 보낸 그의 수업과정은 곤고함의 연속이었다.

    실력을 갈고닦은 정운창은 시골에서는 더 상대할 사람도 없어 답답했다. 그는 서울로 진출하여 국수의 명성을 누리는 자들과 대국할 것을 결심하고 보성에서 한양까지 걸어서 올라왔다. 그러나 이 이름 없는 시골뜨기 바둑꾼을 누가 상대나 하였겠는가.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유명한 문인인 이옥은 “처음 서울에서 노닐 적에 그의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썼다. 당연한 사실이다. 당시 한양에서 국수(國手)로 명성을 날리는 자들은 김종귀, 양익분, 변흥평 등이었다. 이들은 전문기사였다. 또 전문기사는 아니더라도 뛰어난 바둑 실력을 인정받던 사대부로 대장 이장오(李章吾)와 현령 정박(鄭樸)이 있었다. 아무리 정운창이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라 해도 처음부터 최상의 고수들과 상대할 수는 없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때 정운창은 꾀를 내어 정박과 한번 솜씨를 겨룬다. 그가 생각해낸 꾀가 이옥의 ‘정운창전’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당시 금성현령인 정박이 바둑으로 소문이 났었다. 운창은 정박이 남산에서 바둑두기 모임을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구경하였다. 정박이 실수를 하자 운창이 옆에서 훈수를 두었다. 정박이 되돌아보며, “객도 바둑을 잘 두오?”라고 묻자 운창이 “시골 사람으로 일찍부터 바둑 둘 줄을 알아 밥을 먹지요”라고 답했다. 정박이 운창의 용모가 몹시 촌스러운 것을 보고서 가장 하등의 기사(棋士)를 나오라 하여 대국하게 하였다. 10여착(着)을 두자 정박이 “네 적수가 아니다” 하고 그 다음으로 센 사람에게 두게 하였다. 겨우 반국(半局)을 두자 “네 적수가 아니다” 했고, 또 자기 다음으로 잘 두는 사람을 시켜 두게 하였다. 하지만 집을 계산할 정도가 되지 않았는 데도 정박은 “네 적수가 아니다” 하고 분연히 바둑판을 당겨서 자기가 직접 두었다. 그러나 세 판을 두어 세 판 내리 졌다. 그러자 좌우에 늘어선 모든 사람이 “당신은 누구요? 국기(國棋)일세”라고 입을 모았다. 이리하여 운창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서울 장안에 퍼졌다.]

    이옥의 글을 읽으면 시골뜨기 청년이 하루아침에 서울 바둑계에 찬란하게 등장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정박으로 하여금 “네 적수가 아니다”라고 세 번이나 말하게끔 하고는 마지막에 정박을 내리 세 판 이기는 장면은 드라마틱하다. 이후 정운창은 명인들과 계속 바둑을 둬서 내리 이겼던 모양이다. 정박을 비롯해 명성이 자자하던 대장 이장오(李章吾) 등은 정운창을 보기만 하면 손가락을 문지르며 물러나서 감히 바둑알을 가지고 맞먹으려 들지 않았다고 하니 말이다. 이제 정운창은 서울 장안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 바둑계의 최고봉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장안에 대적할 사람 없으니

    그러나 당대에는 김종귀가 최고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의 승부가 최고를 가르는 분수령이었다. 하지만 정운창은 그와 대국하지 못하였다. 김종귀는 우연한 일로 평양에 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정운창이 한창 김종귀와 자웅을 겨뤄보고 싶어하던 무렵에 평양감사가 된 한 고관이 김종귀를 데려가 휘하에 두었기 때문이다. 정운창은 반드시 그와 자웅을 겨루려 별렀지만,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했던 김종귀는 오지 않았다. 김종귀는 이때 평양에 머물면서 일부러 서울로 돌아올 날짜를 늦추었다. 그가 정운창의 소식을 접하고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자웅을 겨룰 사람이 없어서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정운창은 마침내 평양까지 찾아가 김종귀와 대국하고자 했다. 평양에 이르른 정운창은 김종귀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감영(監營)의 포정문(布政門)에서 사흘을 머물렀으나 감영의 아전은 이 시골뜨기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사흘을 기다리다 지친 정운창은 탄식했다.

    [재능을 소유한 선비가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불운이 그래 이런 정도란 말인가? 내 차마 걸음을 되돌릴 수가 없구나! 내가 떠나온 고향 땅에서 평양까지의 거리가 거의 수천 리다. 고갯길의 험준함과 나그네의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어렵사리 여기까지 이르른 이유는 한 가지 기예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자웅을 겨뤄서 잠깐 사이의 상쾌한 기분을 맛보자는 심사이다. 그러나 끝끝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어찌 기구하지 않으랴.]

    ‘재능을 소유한 선비가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불운’을 말하는 대목엔 비장미가 감돈다. 고수와 겨루는 목적을 부나 명예가 아니라 잠깐 사이의 즐거움을 얻기 위함이라 했으니 그의 강한 승부욕을 점칠 수 있다.

    정운창은 포기하지 않고 또 사흘 동안 감영 문밖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 사연을 들은 감사가 뭔가 낌새를 채고 김종귀에게 “이 자는 대체 무엇 하는 사람일까. 특이한 점이 있는 것이 분명해. 자네는 물러나서 내 하명을 기다리게”라고 한 뒤 사람을 시켜 정운창을 들어오라고 했다. 정운창과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감사가 “내가 듣기에 자네는 남쪽 지방에 산다고 하던데 이제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이곳까지 와 종귀를 한번 보려는 것을 보니 종귀와 구면식인가 보구만”했더니 정운창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그제서야 감사는 김종귀와 대국하려는 그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國手 정운창|오묘한  棋理  깨우쳐 八道 호령한 진정한 프로기사
    감사는 이때 재미있는 일을 꾸몄다. 감사는 말을 이었다. “정녕 그렇다면 자네가 김종귀를 만나려는 이유를 내 짐작하겠네. 그러나 그 김종귀가 지금 여기에 없으니 어쩐다? 그래도 그만두지 않겠다면 이곳에는 김종귀보다는 약간 모자라지만 그와 더불어 상하를 다툴 자가 있으니 시험삼아 먼저 두는 것이 그래 어떻겠는가?” 이에 정운창은 “황공합니다. 삼가 말씀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꾸했다. 감사는 김종귀를 그 자리로 불렀다. “저 사람이 김종귀와 더불어 기예를 다투고 싶어하지만 지금 그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자네가 그를 대신하여 바둑을 두게나!”

    감사가 진짜 김종귀에게 눈을 꿈쩍 하니 그가 거짓으로 “황공합니다. 삼가 말씀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드디어 바둑시합. 감사의 좌우에서 시종하는 자들이 바둑판을 가져다 진설하고 바둑알을 내어왔다. 정운창과 김종귀는 진을 치고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알 두 알 희고 검은 바둑알이 판에 오르면서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김종귀는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다. 반면 정운창은 처음과 다름없이 여유만만했다. 옆에서 숨죽이고 보고 있던 감사는 판세를 읽고서 성을 냈다. “지난날에는 장기 두는 종놈들과 대국하며 곧잘 손뼉을 치고 기세를 올리며 온 나라 안에 짝할 이가 없다고 큰소리치더니만, 오늘에는 실의한 사람모양 움츠러들어 손놀림이 시원스럽지 않으니 무슨 까닭이냐?”

    그렇게 바둑을 둔 지 한참을 지나자 김종귀는 갈수록 두려움이 밀려와 벌벌 떨며 도무지 어떻게 두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정운창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그때껏 긴장해서 바둑을 두던 정운창도 앞에 있는 자를 대수롭잖게 여기고 “조금 쉬었다 할까요?”하고 여유를 부리며 “댁은 김종귀와 비교해서 어느 정도 수준인가요? 또 지금 종귀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자 김종귀는 운창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 채 얼굴만 벌겋게 달아올랐다.

    김종귀의 완패였다. 조선 제일의 기사인 김종귀가 시골뜨기 기사에게 참담하게 완패를 당하는 순간이다.

    조선 최고의 기사를 휘하에 두었다고 자부한 감사는 더욱 더 분통을 터트리고 성을 내었지만 정운창이 이긴 사실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결국 감사는 대국한 자가 김종귀라는 사실을 밝히고 백금 20냥을 꺼내 운창에게 상금으로 주었다. 조선의 바둑계는 새로운 영웅을 맞이했다.

    빈틈 보이지 않는 명승부

    정운창은 이렇게 보성에서 한양으로, 한양에서 평양으로 다니며 조선 바둑계의 최고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 과정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니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 뒤로 정운창이 바둑계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를 두고 이서구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출신의 비천한 정운창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덕원령을 능가하였다고” 말했다. 덕원령이 누구인가. 신혁(神?)으로 통하는 전설적인 인물이 아닌가! 덕원령이 사라진 이후 유찬홍, 변흥평(卞興平), 최기상(崔奇祥), 신환(申宦) 등이 국수로 거명되었는데 그 전설적 명성을 정운창이 이었다는 평을 듣게 된 것이다.

    더구나 정운창은 차곡차곡 계통을 밟아서 국수의 지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당시 최고의 지위에 있던 사람을 단번에 묵사발 냄으로써 명예를 거머쥐었다. 무명의 신인에서 어느 날 챔피언 타이틀을 따는 요즘의 스포츠 스타와 다를 바 없다.

    정운창이 단번에 제압한 김종귀는 정운창의 전기에선 패배자의 행색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초라하고 실력 없는 기사가 아니다. 그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한 국수로서 대중의 존경을 받은 기사였다. 조희룡이 쓴 ‘호산외기(壺山外記)’에는 김종귀(金鍾貴)란 이름으로, 이옥의 전에서는 김종기(金鍾基)란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80세를 넘겨 장수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긴 전설적인 국기(國棋)였다.

    일거에 김종귀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최고의 국수로 인정받은 정운창의 이후 종적이 궁금하다. 과연 어떠했을까. 이서구의 글에는 승부를 결정짓고 난 후일담이 소개되어 있다.

    김종귀를 물리치고 정운창은 평양감사의 식객이 됐다. 시일이 흘러 평양감사가 서울로 돌아갈 때 정운창과 김종귀도 함께 왔다. 그들은 서울에서 양익빈, 변흥평 등의 기사들과 어울려서 바둑을 두고 놀았다.

    “지면 회초리로 때리겠다”

    바둑이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이기고 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정운창을 다른 국수가 이기기 힘들었다. 최고의 영예를 누리던 김종귀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과 경외심은 이제 정운창에게로 쏠리고 김종귀는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무시당했다. 그러자 정운창은 무모한 바둑내기를 꺼렸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이옥이 쓴 ‘정운창전’에 기록되어 있다.

    [승상 아무개는 바둑을 몹시 좋아하였다. 그가 운창을 불러 김종귀, 양익빈, 변흥평 등의 무리와 날마다 바둑내기를 하게 하였다. 그런데 운창이 그다지 수준 높지 않았다. 승상은 운창이 바둑 두는 데 힘을 쓰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남원산 상화지(霜華紙) 200번을 상금으로 걸고 다짐을 하였다. “힘을 기울여 열 번을 이기면 이것을 네게 주고, 종기는 회초리로 때리겠다.”

    운창이 이에 바둑돌을 당당하게 두어 만전을 기하는 태도를 보였다. 포위하기는 성벽과 같이, 끊기는 높은 봉우리같이 하고, 세우기는 지팡이를 꽂듯이 하고, 합하기는 천을 꿰매듯하고, 대응하기는 종이 울리듯하고, 솟구치기는 봉우리와 같이 하고, 덮기는 그물을 치듯이 하고, 비추기는 봉홧불과 같이 하고, 빠트리기는 냄비 뒤집듯하고, 변화를 주기는 용과 같이 하고, 모이기는 벌떼와 같이 하였다. 그러자 종기는 땀을 뻘뻘 흘려 이마를 적셨지만 당해내지를 못하였다. 세 판에 이르자 종기는 일어나 측간에 가서는 눈을 꿈적여 운창을 나오라고 하였다. 한참 뒤에 들어가 다시 바둑을 두었는데 운창이 때때로 실수를 하였으니 종기의 구걸 때문이다.]

    이 삽화는 정운창이 당시 기사들 사이에서 최고의 자리를 확고하게 차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또 조정의 최고위직 관리가 상금을 내걸고 경쟁을 시켜서 바둑대회를 여는 당대의 관행도 보여준다. 대회는 대체로 공개적으로 열리고, 승자에겐 명예와 경제적 이익까지 주어졌다. 이 시합에서 이긴 정운창은 남원산 상화지(霜華紙) 200번을 부상으로 받았는데, 당시론 거금이었다. 여기서는 정운창 바둑의 특징이 비유적으로 설명된다. 상대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고 예리하게 공격하는 정운창의 특징을 이옥은 다분히 문학적으로 묘사한다.

    진 사람에겐 회초리를 맞는 모욕이 뒤따랐다. 실제 회초리를 대기야 했겠는가마는 그런 정도의 굴욕을 느껴야 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평소에는 가볍게 두던 정운창도 상금이 걸린 바둑대회에서는 심각하게 바둑을 두었다. 바둑은 명예뿐만 아니라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협기로 승부 양보하기도

    이옥의 글에는 김종귀와 정운창의 타협장면이 나온다. 대선배로서 왕년의 명성을 잃게 된 김종귀가 측간에 가는 척하며 정운창을 불러내어 청탁을 하고, 정운창은 그 청탁을 받아들여 일부러 실수를 저지른다. 이서구의 ‘기객소전’에는 두 사람의 타협이 한결 멋들어지게 묘사된다. 서로 어울려 지내던 정운창과 김종귀에게 어느 날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날이 몹시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종기는 집안사람을 시켜 술상을 성대하게 차리게 한 뒤 밤중에 정생을 초청하여 술을 마셨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자 종기는 몸소 칼을 잡아 고기를 썰고 술잔을 들어 권하며 말을 꺼냈다.

    “선생께서는 참으로 현명하고도 호걸다운 어른입니다. 혹시라도 이 술잔을 올리는 제 의중을 짐작하시는지요? 이 제자가 감히 선생을 귀찮게 하는 말씀을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자 정생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여 감사를 표하며 답했다.

    “운창은 공께서 베푸시는 후의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의 명성은 한 시대를 드날려 당세의 공경 사대부들 가운데 공을 사랑하고 후대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운창이 요행히 공과 더불어 동렬에 끼어 있기에 공께서 이 못난 놈에게 하교(下敎)하실 것이 없으리라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감히 가르침을 청합니다.”

    이에 종기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자가 일찍부터 바둑을 배워 명성을 독점하며 고관들에게 출입한 지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생을 만난 이래로 고관들과 어른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선생을 추대하여 종기와 같은 놈은 제자의 반열에도 끼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제자가 어찌 감히 선생과 대적하려 하겠습니까마는, 바라건대 선생께서는 제게 조금만 양보를 해 주셔서 그저 예전에 누리던 명성을 지니도록 좀 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정생은 “좋습니다”라고 수락하고 드디어 밤새도록 즐겁게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그로부터 정생은 종기와 만나더라도 여러 사람이 자리에 함께 있을 때에는 뒷걸음치면서 맹세코 서로 대적하지 않았다.]

    어느 겨울밤 김종귀가 정운창을 초청하여 고기와 술을 접대하고 가슴속에 품었던 말을 토해내는 장면이다. 핵심은 ‘당신이 등장하여 나를 현격한 솜씨로 이기기 때문에 명성이 사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에 대한 존경과 대우가 달라졌으니 체면을 보아달라’는 것이다. 대국을 피하거나 때로 져주었으면 하는 심정이 녹아있다.

    그 말을 정운창이 이해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정운창은 흔쾌히 수락하고 그 이후 김종귀와 대국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자긍심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화 장면에서는 정운창의 협기(俠氣)가 드러난다. 추한 거래가 아니라 선배 국수를 배려하는 협객의 면모를 강조해 독자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 한다.

    國手 정운창|오묘한  棋理  깨우쳐 八道 호령한 진정한 프로기사

    김홍도의 ‘중국고사도’ 10첩 병풍 중 제2폭에 그려진 바둑 두기.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승리한 자에게 대중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 환호속에 패배한 자는 모욕과 창피를 당하며 소리없이 무대 뒤로 사라진다. 승패의 명암에는 고금에 차이가 없다. 여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단순히 명예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득에까지 결정적인 차별을 낳는다. 대중은 새로운 강자에게 존경과 경제적 대우를 아끼지 않고, 패배한 자는 거들떠도보지 않는다. 김종귀는 세상의 냉혹한 시선을 뼈저리게 느끼고 만회하기 위해 저와 같은 행동을 취한 것이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양보와 타협의 메커니즘은 의리만이 아니라 생활도 중요했음을 말해준다.

    정운창은 조선시대에 명멸한 수많은 국수 가운데 어느 수준일까. 이서구는 정운창의 바둑 실력에 최고라는 찬사를 보냈다. 직접 만나본 바로는 간교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적기는 했지만 바둑 실력은 의심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이옥은 당시 바둑계에 떠도는 평을 이렇게 소개했다. “정운창은 최기상(崔起尙)에게 4점이 부족하고, 최기상은 덕원령에게 4점이 부족하다는 것이 당시의 평이다.” 지금으로서는 실력의 실상에 대해 왈가왈부할 근거가 없다. 아무래도 좋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다. 19세기 초 시인이며 학자인 유본학은 당대 최고수였던 김석신(金錫信)에게 주는 글에서 정운창의 이야기를 꺼냈다. 보성 사람인 정운창이 기법(棋法)에 묘미를 터득하였는데 김석신이 그와 더불어 수천 번의 대국을 통해 단련하고 그 뒤로부터 그 누구도 감히 김석신과 대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풍문이 당시에 유행하였던 모양인데 유본학은 그것이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고 신뢰를 보냈다. 김석신은 정운창의 후세대 사람이다.

    세대마다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실력자가 있게 마련인데 김석신의 경우, 그 전 세대의 최고 국수인 정운창과의 대국을 통해 실력을 연마했다. 조선후기, 한 시대의 국수는 선배 국수와의 대국을 통해 새로운 국수로 탄생하며 국수의 계보를 이어간 것이다.

    정운창을 비롯한 바둑의 명인을 묘사한 전기가 등장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조선 사회에 불어닥친 바둑 열기와 바둑 인구의 확산, 바둑인을 지원하는 후견인(패트런)의 등장 등 여러 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하겠다. 앞서 김종귀가 한 말에도 바둑으로 명성을 얻자 고관들의 사랑을 받아 그 집을 출입하였다고 했다. 바둑을 잘 두면 권력자에게까지 바로 통했다.

    그럼 조선 최고의 기사(棋士)로 인정받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사람들은 단연 선조 연간에 활약한 덕원령을 뽑는다. 그에 관해 야담에 신비한 전설이 등장하고, 그 이후 기사의 실력을 평가할 때 덕원령과 비교하여 몇 점을 지느냐가 기준이 된다. 조사한 바로는 기사에 관한 최초의 전기도 덕원령의 것이다. 김도수(金道洙)의 ‘기자전(碁者傳)’이 바로 덕원령의 일생을 기록한 전기다. 지금까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이 자료 역시 매우 귀중한 사료다.

    [바둑은 작은 기예이다. 그러나 오묘하여 신령과 통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므로 비록 작다고 하나 성취하기가 어렵다. 선조 때에 종실 사람 덕원령(德源令)이란 자가 있었는데 바둑을 잘 두었다. 덕원령은 일곱여덟 살 때 바둑 두기를 배웠다. 바둑을 심히 좋아하여 거처하는 방의 사방 벽에 바둑판을 그려놓고 날마다 그 속에 누워서 손으로 벽에 그려진 바둑판을 짚어가며 바둑두는 모양을 지었다. 이윽고 오묘한 경지를 얻어 남들과 바둑을 두니 대적할 자가 없었다. 사람을 마주하여 바둑을 둘 때마다 언제나 술을 통음(痛飮)하였는데 손을 나는 듯이 움직이고 무궁한 기계(奇計)를 내어놓았다. 두리번거리고 번들번들 웃으며 여유를 부리다가도 두기 힘든 경우를 만나면 그제야 골똘히 생각하며 바둑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바둑알을 두면 반드시 적의 지극한 요충지를 적중하였다. 대국하는 자가 마치 쇠못이 뼈에 박히는 듯이 고통스러워 기운을 고르게 하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지극히 강한 자가 아니면 한두 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덕원령과 더불어 바둑을 두려는 사람이 없었다. 덕원령이 노장이 된 이래로 재능을 모두 발휘할 곳이 없어 답답하게 지내자 탄식하며 “형세를 강하게 가져가면 남들이 즐거워하지 않고 형세를 낮추자니 내가 참지를 못하겠다”라 하고는 바둑을 그만두었다. 다만 술을 마시며 날마다 곤드레만드레 취해 신경 쓰는 일이 없었다.

    만력 연간에 명나라 사신 가운데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와서 동국에 제일가는 바둑꾼을 찾았다. 그때 덕원령이 선발되어 그와 바둑을 두게 되었다. 전해오는 말에, 덕원령이 명나라 사신과 바둑을 둘 때 전과 마찬가지로 큰 사발 하나를 마셔 통음하고서 네 다리를 죽 뻗은 채 눈을 내리깔고 두 어깨를 우쭐 솟게 하여 마치 늙은 독수리가 토끼를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였다. “딱” 하고 바둑알 하나를 두자 바둑알이 마치 살아있는 물건처럼 움직이고 빛이 번쩍번쩍하여 벌써 한판의 대세를 장악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크게 놀라 바둑판을 밀어놓고 절하며 묻기를 “바둑알 놓는 법이 어쩌면 그리 신통하십니까?”라고 했다. 덕원령이 웃으며 “용은 지극히 부드러운 동물이지요. 그러나 한번 노해 돌아가는 발꿈치에 큰 바위 위에 못이 생긴답니다. 나도 그 이유를 모르지요”라 했다 한다.

    덕원령이 죽은 뒤 50년 만에 여항에는 유찬홍이 나타났는데 그도 국기(國棋)로 명성이 있었으나 신비한 이해는 덕원령에게 멀리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술로 바둑 두는 기인 덕원령

    조선왕조 최고의 기사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덕원령에 관한 가장 신빙할 만한 기록이다. 어린 시절부터 바둑을 배우려고 노력하는 장면을 인상깊게 서술하였다.

    덕원령이 바둑을 두는 장면은 더더욱 인상적이다. 기사마다 독특한 개성과 버릇이 있지만 술을 통음(痛飮)하고 대국한 덕원령의 버릇은 광적인 면이 엿보인다. 그의 바둑은 시원시원하면서도 남의 약을 바짝 올리는 스타일로 보인다. 대국자의 심장부를 날카롭게 공격하는 그의 스타일 때문에 대국자가 마치 쇠못이 뼈에 박히는 듯 고통스러워하고 평정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는 서술로 미루어 강력한 공격형 바둑을 둔 기사로 추정된다.

    명나라 사신과의 대국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하다. 그가 아무리 신화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뛰어난 문사인 김도수가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이거나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전문(傳聞)만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신분이다. 그는 왕실 집안인 종실이었다. 벼슬에 나아갈 수 없는 대가로 생계 걱정없이 자기 하고 싶은 예술이나 기예에 한평생 종사할 수 있는 신분이 종실이다. 바둑계 최고의 고수이지만 그를 바둑으로 먹고 산 프로기사로 볼 수는 없다. 그에게 바둑은 어디까지나 여기였다,

    이렇게 덕원령이 활동한 선조 연간 16세기 말엽 이후 바둑인의 위상은 천천히 변화해 이른바 바둑 두는 사람이라는 명칭으로 쓰인 기객(棋客)과 뚜렷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들보다 조금 뒤에 활동한 유찬홍(庾纘洪, 1628~97)은 중인출신으로 신분상 새로운 변화를 보인다.

    바둑, 餘技에서 전문직업으로

    국수 유찬홍은 바둑으로 생계를 유지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18세기 중후반 바둑의 명인으로 통하는 김종귀나 정운창, 김한흥, 김석신 등은 사정이 다르다. 바둑이 전문직업으로 탈바꿈하여 생계의 수단이 됐다.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18세기 중엽 이후에 바둑은 일종의 스포츠처럼 상업적 스타를 만드는 분위기로 진행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바둑을 잘 두면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분이나 인맥, 도농(都農)의 격차가 있을 수 없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최고의 기사가 되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쌓아 국수가 되고자 했다.

    18세기 이후 바둑의 명인을 묘사한 글을 읽으면, 꼭 요즘의 유명 연예인에 대한 기사를 보는 것 같다. 바둑의 명인이 있으면 ‘그를 초빙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특이한 구경거리를 하였다고 자랑을 한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니 이른바 조선 제일이라는 ‘국기(國棋)’에 대한 일반인의 시선이 어떠했을지는 말할 나위가 없다. 바둑에 대한 관심이 계층을 초월하여 광범위하게 확산됐고 그러한 현상이 바탕이 되어 바둑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전문 기사군이 등장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정운창과 대국하며 어울려 지낸 기객 대부분은 바둑으로 생계를 영위했는데 각종 바둑대회에서 기량을 뽐내고 인정을 받았다. 그후 조정 대관이나 부자들의 식객(食客)이 되어 생계비를 지원받거나 각종 대회의 부상으로 생활을 영위했으리라 추정된다. 정운창이 “시골 사람으로 일찍부터 바둑 둘 줄을 알아 밥을 먹지요”라고 답한 데서 그들의 생계가 바둑솜씨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운창의 전기를 통해 조선후기 기객들의 인생을 추적해 보면, 현재의 프로기사와는 차이가 크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오늘날 수준 높은 한국 바둑을 있게 한 선배로서, 그들이 바둑을 수련한 자세와 살아온 모습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백제로부터 조선시대로, 다시 현재로 이어지는 장구한 국수의 계보 속에서 오늘날의 뛰어난 기사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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