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취미는 어떻게 교양이 됐나

고상하고 우아한 것, 저급하고 속된 것의 갈등

  • 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eutekom@hanmir.com

    입력2004-07-01 18: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아이들에게 공일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산책을 가는 일,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연극과 활동사진을 보는 일, 책을 읽거나 악기 같은 것을 사랑하여 고적한 때와 피곤한 때 위안을 얻는 일.
    • 1920년대 도회인들은 새로운 취미를 발견하고, 가정생활 개조론을 부르짖었다.
    취미는 어떻게 교양이 됐나

    1925년 ‘조선극장’에서 개봉된 무성영화 ‘심청전’의 한 장면. 이 무렵 ‘활동사진’은 도시인들의 새로운 취미거리가 됐다.

    “취미가 뭐예요?” 미팅이나 맞선자리에서 여지없이 하게 되는 가장 고전적인, 그러나 썰렁하기 그지없는 질문. 그리고 겨우 “독서요” 혹은 “음악 감상이요”라고 대답해야 했던 모든 남녀에게 이 글을 바친다. 한국인은 왜, 언제부터 “취미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하게 됐을까. 영화 보기, 책 읽기, 음악 감상, 무대공연 관람과 같은 취미가 생겨나고 생활의 한 부분이 된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딱 80년 전인 1924년 1월. 새해를 맞아 ‘동아일보’가 신년기획을 마련했다. 지금으로 치면 ‘잘’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웰빙’ 특집이었다. 동아일보는 각계 인사들에게 “생활개선의 제일보로 새해부터 조선인이 실행할 새 결심”이 무엇인지 물었다. 계몽운동가의 한 사람이자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월남 이상재, 천도교 도령이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 덕성여대의 설립자인 여성운동가 김미리사,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잡지 ‘개벽’의 편집인 이돈화 등이 이 설문조사에 답했다.

    ‘생활개선’항목은 비단 생활적 ‘웰빙’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사회·문화 각 방면에서 20여가지 과제가 제시됐다. 여기에는 근대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인간과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우리 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들의 고민이 집약돼 있다. 먼저 ‘시기와 당파(黨派)’ ‘비관과 부실’ ‘공덕심(公德心) 없음’ ‘자존허욕(自尊虛慾)’ ‘표리부동’ 등을 고쳐야 한다고 했다. 이는 모두 추상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인데, 민족성과 관계된 항목들이다.

    1910∼20년대 한국인은 우리가 ‘나쁜’ 민족성을 가지고 있다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왜 우리 엽전들은 이다지도 게으르고, 시기심이 많아 단결이 안 되고, 허영과 허식을 좋아하는지?” 그 고민의 시작은 일본의 영향 탓도 있고 근대 초기의 서구과학이 지니고 있던 인종주의에 물든 탓도 있다. 그것이 애당초 잘못된 문제인식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고민은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다음으로 ‘불결한 우리 집안을 잘 청소하자’ ‘신체를 정결히 하자’ ‘흰옷은 불결하기 쉬우니 염색된 옷을 잘 빨아서 입자’ ‘생식하지 말자’와 같은 기초생활 위생 항목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집회시간을 잘 지키자’ ‘낭비하지 말고 저축을 하자’ ‘시간 절약에 힘쓰자’ 등의 항목이 있다. 이 또한 그 의미가 간단치 않다. 당시는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가 형성됐고,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의 덕목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시간을 절약하고 지키며, 돈을 아껴 저축하는 것은 모두 ‘미래’를 위한 시민적 덕목이다. 그리고 내면화하여 항상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수입이 일정하지 않거나 예측할 수 없을 때, 또 타인과 어울려 해야 할 ‘업무’가 없다면 돈과 시간을 아낄 이유가 없다. 요즘에야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치고 실천하는 항목들이지만 그때는 다 새롭기만 한 가치였다.

    취미 없는 살림은 꽃 없는 동산

    그런데 특집 마지막에 1930년대 만문(漫文)만화로 유명한 문인이며 화가인 안석주의 글이 실려 있다. 제목이 ‘무미건조, 우리 생활은 너무도 취미 없다. 새해부터 잘살자’였다. 안석주는 ‘잘살’ 조건으로 취미를 제시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무엇이 취미인가’가 문제지만 당시 조선인은 취미가 아예 없어서 문제였다. 없는 취미를 새롭게 만들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 하니…. 안석주는 “취미가 없는 살림은 꽃이 없는 동산과 같아 그 건조무미한 살림에는 자연 화증(火症)과 트림밖에 날 것이 없을 것이”라 했다. 안석주뿐만이 아니었다. 1920년대 사람들에게 취미란 남는 시간을 활용한 과외활동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 1921년 4월 동아일보에도 같은 맥락의 취미론이 실렸다. 김기영이라는 의사가 쓴 글로 제목이 ‘참 사람다운 삶을 하려면 모든 일에 취미를 양성하라’였다.

    김기영은 “조선사람만큼 취미 없는 생활을 하는 민족은 세계에 드물 것”이라면서 “단순무미하고 살풍경한 냉랭한 살림으로 그날그날을 무의식하게” “그저 남 하는 대로, 살아 내려오는 모든 관습대로 그럭저럭 사는 것”이 조선사람의 삶이라 진단했다. 이어 “개조시대에 처한 우리는 생존함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올시다. 다만 생존한다는 것이 사람의 목적은 아닐 것이올시다”라고 했다. ‘존재가 아니라 실존이 문제’라는 실존주의 철학의 명제를 연상시키는 마지막 말에서 취미가 인간 조건의 하나로서, 개조의 한 과제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취미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김기영은 보다 근본적으로 취미라는 가치가 아예 의식주 같은 기본적 삶의 영역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조선사람의 ‘취미 없음’은 “조선인이 먹는 음식은 아침저녁이 한가지요, 어제 먹던 것을 또 오늘 또 내일 연속하여 먹으며, 조리의 방법도 그저 이왕 하던 대로 관습대로”만 한다든지, 또한 집도 보다 “미술적 위생적으로 건축하며 땅에 화초 같은 것을 심어 눈을 즐겁게 하며 방안의 장식도 될 수 있는 대로 아름답고 품위 있게 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데서 드러난다.

    김기영의 취미 개념은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는 약간 다르다. 그에게 취미는 의식주 같은 삶의 필수 부분으로부터 시작하고, 나아가 음악이나 사교를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뜻있는 삶(살림)을 위해 작동해야 할 미적인 취향 전반을 뜻한다고 하겠다.

    이처럼 1920년대 취미라는 말은 지금보다 좀더 복잡한 함의를 갖고 있었다. ‘현대부인으로는 경제에 취미를 두라’(1930년 12월19일 동아일보)처럼 ‘관심’ 또는 ‘흥미’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취미 진진한 유희’(1921년 10월4일자, 또는 1928년 1월27일자 동아일보)처럼 ‘흥미’ 또는 재미(자미)와 동의어로 사용된 경우도 많았다. 또한 취미는 자체로 ‘오락’ 혹은 ‘오락물’과 동의어였고 교양과 오락, 또는 오락과 실용 사이에 있는 어떤 상태나 가치를 의미하기도 했다. 1925년 10월6일자 동아일보는 “현재의 활동사진(영화)은 악영향을 준다, 사진 전부가 오락과 취미뿐 예술에 관한 것은 하나 없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경우 취미(오락)는 고급 혹은 본격 예술의 대립항이다.

    다취미는 일등 신부감의 요건

    그런가 하면 동아일보는 1926년 11월16일 출판계 동향을 보도하면서 “족보·문집이 최고 수위”이고 “소설·전기 등 취미가 기차(其次), 정치와 과학 방면은 효두(曉頭)의 잔성(殘星)”이라 썼다. 가장 많이 출판되는 책은 족보나 개인문집류이고 그 다음이 소설과 전기이며 정치나 과학서적은 드물다는 것인데, 여기서 소설과 전기류를 취미로 분류했다. 이때 취미는 교양과 오락 사이의 어떤 것이다.

    1920∼30년대에는 ‘취미 독물’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됐다. 일본에서 건너온 독물(讀物), 즉 요미모노(よみもの) 자체가 가벼운 읽을거리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취미 잡지’는 일본의 ‘강담구락부’나 1927년 국내에서 창간된 ‘별건곤’ 같은 대중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때론 취미가 교양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1929년 10월9일 동아일보 가정란에는 ‘내가 사위 자부를 고른다면’이란 제목의 독자투고가 실렸다. ‘서울 PZ생’이라는 이니셜의 투고자는 며느리감의 요건 중 세 번째와 네 번째를 다음과 같이 썼다.

    [“3. 학식은 여고보 졸업생이라야 장차 모성이 되어 자녀교육의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4. 독서열이 있는 여자. 다취미한 여자. 현대 여성은 사치만 할 줄 알지 도무지 집에 들어가면 신문 한 장 들여다보지 아니하여 사회가 어떻게 되는 줄을 전혀 모르는 고로.”]

    여기서 취미는 학식과 구별해 책을 읽고자 하는 열의, 즉 ‘독서열(讀書熱)’을 뜻한다. 즉 ‘여고보 졸업’이라는 학벌과 별도로 필요한 자질이자 소양이 취미인 것이다. 그것은 ‘신문쯤은 보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정도의 교양인데, 이를 ‘다취미’로 규정했다. 현대의 국어사전에서도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은 취미라는 표제어의 한 뜻이라고 정의한다. 이 힘이란 교양과 다르지 않다.

    어쨌든 며느리의 조건으로 여고보 졸업, 독서열, 다취미를 꼽은 것을 보면 투고자는 당시 어른들 가운데서도 비교적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편이라고 짐작된다. 여성이 여고 졸업의 학력을 갖기도 어려웠지만, 그보다는 아예 여자는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학생’이라는 존재가 여급, 기생, 여배우와 동렬에 놓이던 시대였다. 개중에는 여성이 책을 읽는 것 자체를 백안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 여성의 문맹률이 90%나 되던 시대에도 하여간 책 읽기는 결혼 조건에 오를 만큼 꽤나 중요한 덕목이었다.

    이처럼 1920∼30년대에는 ‘취미가 있다’ ‘취미가 없다’ 혹은 ‘취미가 많다’는 말이 많이 쓰였는데 이는 ‘교양이 있다’ ‘교양이 없다’와 같은 의미였다. 이때 취미는 교양의 한 영역이거나 유사한 덕목으로 개발되고 보급됐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힘

    그렇게 1920년대 사람들에게 인간개조의 한 요건일 수 있었던 취미는 자본주의적 근대와 긴밀히 결부된 가치다. 그리고 취미는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적 가치다. 그래서 취미는 두 가지 차원의 실현공간을 필요로 한다. 하나는 개인이 새롭게 소속될 근대적 핵가족이며, 또 하나는 극히 사적이며 개인주의적인 내면의 공간이다.

    1924년 안석주가 쓴 글에 의하면 “아이들에게 공일마다 ‘자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산보를 같이 가는 일, 경제 사정이 허락하면 부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연극과 활동사진을 보는 일” 그리고 “개인으로는 책을 읽거나 악기 같은 것을 사랑하여 고적한 때와 피곤한 때의 한 위안을 얻는” 일이 취미다.

    안석주의 글은 근대적 핵가족의 남성가장을 대상으로 씌어졌다. 시간이 날 때 아이와 부인을 데리고 공원이나 극장에 갈 수 있는 가장은 도시에 거주하는 부르주아 시민이거나 화이트칼라 노동자다. 그들은 일주일 단위로 쪼개진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샐러리맨과 중간계층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농촌에 사는 농민이나 선비는 가족을 데리고 일요일에 극장이나 공원에 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엿새를 근무하고 하루를 ‘공일’로 하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에서와 달리 하루 몇 시간, 일주일에 몇 시간씩 일하기로 정해놓자 비로소 ‘여가’가 생겨났다.

    취미는 이러한 여가를 즐기는 여러 활동을 일컫는다. 또 이 글의 대상이 되는 가족은 조부모, 삼촌, 사촌이 함께 사는 대가족이 아니다. 한 쌍의 부부를 중심으로 둘, 셋 정도의 자녀가 있는 근대적(부르주아) ‘정상가족’만이 가족단위 여가활동이 가능하다.

    취미는 어떻게 교양이 됐나

    1934년 경주의 책 노점상. 인쇄술의 발달로 독서인구가 크게 늘었다.

    의사 김기영의 취미론도 ‘가정생활 개조’라는 제목이 붙은 기획기사 중의 하나였다. 전통적인 조선 가정을 근대적 가정생활로 개조하기 위해 취미가 중요했던 것이다. 단 김기영은 안석주와 달리 여성의 취미론을 폈다. 취미 있는 생활을 하려면 “남자에게도 책임이 있겠지만 주부 되시는 이들이 특별히 주의하”여야 한다고 했다. 취미가 발현되는 곳이 가정이기 때문이다.

    취미는 사적이며 개인적이다. 새로운 가치로서의 취미는 김기영의 말대로 “남 하는 대로” “전통적 관습 그대로 이어가는” 문화와는 다르다. 즉 취미는 초개인적 혹은 몰개인적 문화양식인 습속(習俗)에 반한다. 누군가 내게 취미를 물을 때 “저희 집안에서는요, 추석날이면 고스톱을 쳐요”라든가 “우리 마을에서는 단옷날 사당패를 불러 공연을 보고 난 뒤 줄다리기를 하지요” 혹은 “저는 마을 농악패에서 꽹과리를 맡아요”라는 식으로 답하지 않는다. 취미는 일상적으로 하는 ‘내 것’이지 계절의 순환주기에 맞춘 특별한 날이나 비일상적 축제일인 명절에 행해지는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의 취미와 내 취미가 다르고, 옆집 삼돌이의 취미와 내 취미가 다르다.

    책 읽기, 우표수집, 음악감상, 영화보기 같은 취미는 누구와 함께하는 일이 아니다. 물론 누군가와 함께 영화관이나 음악회에 가겠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막이 오르면 입을 닫고 혼자 스크린과 무대를 바라본다. 어떤 영화나 음악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도 모두 내 자신에게 달렸다. 그 대상을 혼자서 맞닥뜨리는, 취미란 고독한 활동이다.

    개인주의적인 취미가 생기기 전에는 마을에서 내려오는 전통놀이나 집안 고유의 풍습이 있었다. 공동체적인 세시풍속과 전통놀이는 20세기 초 큰 위협에 처했다. 일제가 하지 못하게 금하기도 했고 조선사람들 스스로 이들을 낡은 것으로 여겼다.

    1933년 이기영이 쓴 소설 ‘서화’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된 근대화와 가난이 농촌사회의 쥐불놀이, 줄다리기, 윷놀이 같은 놀이를 망쳐놓고 도박 같은 절망적인 오락을 심어놓은 과정이 나온다. 골패잡기, 화투, 포커 같은 것을 취미라 볼 수는 없다. 아직 농민들은 도회민 같은 세련된 취미를 가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처세와 사교는 경쟁력

    1920년대 한국인의 취미는 현재와 비슷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김기영의 글에서는 의식주를 ‘미적’으로 꾸려나가는 것 이외에 음악·독서·산보·구경·교제 등이 양성할 만한 고상한 취미라고 했다. 음악, 독서, 구경(영화, 연극 등)이 고상한 취미라는 데 시비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산보와 교제가 취미라는 것은 좀 의외다. 여기서 산보는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에서 벗어난 활동으로 취미가 될 수 있었다. ‘사교(社交)’ 또한 그런 활동의 일환이라 하겠는데, 사람 사귀기인 ‘사교’에는 좀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어느 시대라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중요하지 않았겠는가마는 1920년대 사람들에게 사교는 새로운 과제였다.

    한국에서 근대적 공공영역이 싹트고 개화한 것은 1890년대 후반이다. 일반인 대상의 ‘독립신문’ ‘제국신문’ 같은 일간지가 창간되고 정치와 국가의 앞날이 시민적 논쟁거리가 된 시기다. 1890년대 말부터 연설과 토론, 집회와 같은 시민적·근대적 소통행위가 본격화되고 이 분위기는 1900년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열림’은 곧 일제에 의해 중단됐다. 일제에 의한 조선 병합과 강압적 통치가 자행된 1910년대에는 정치적인 의미를 가진 언론과 출판뿐 아니라 조선인의 모든 정치적 활동 자체가 금지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1920년대가 왔다. 교육과 언론, 출판과 사상이 활짝 열린 새로운 개방의 시대였다. 그리고 자유연애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대 조선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타인을 이성적으로 또 감성적·육체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는 새롭고도 중요한 삶의 과제였다. 처세와 사교는 이런 의미에서 관심거리였다.

    마치 오늘날 직장인들이 조직 내부의 정치학을 익히고 자신을 계발하여 성공하기 위해 ‘설득의 법칙’ ‘설득의 심리학’ ‘협상의 기술’ 같은 책을 읽는 것처럼 1920년대의 조선인들은 남녀간에 ‘홀리는’ 방법, 토론과 웅변 또 문학에서 ‘감격’을 주는 방법을 연구하고 체득하고자 했다.

    조선보다 자본주의 발전이 빨랐던 일본에서 이런 책이 수입되어 읽혔다. ‘(사람을 끄는) 좌담의 비결’(일본 진문관, 1926)은 “남녀가 다 알아야 할 대화 잘하는 일체의 비결을 상술”한 책인데 “병인 위문, 담판, 교섭, 대금 수납, 차금 거절, 연회, 집회”에서의 화술뿐만 아니라 “예기(藝妓)·하녀와의 대화법”까지 수록했다. 또한 ‘남의 호감 얻는 교제의 비결’(일본 동흥당, 1925) ‘현대사교의 비밀’(일본 동흥당, 1926) ‘(男女相愛) 생각대로 홀리는 법’(일본사, 1925) 같은 책도 유행했다.

    취미는 개인주의와 새로운 가족관계에 토대를 둔 가치였고, 교양의 의미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1920년대 사람들에게는 계몽의 또 다른 항목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취미라는 말이 ‘보급한다’는 동사와 자주 짝을 이뤘다.

    1921년 5월 외국인 글로브란 사람과 조선인 음악가들이 ‘한양낙영회’를 조직했는데 이는 “일반 조선인에게 음악의 취미를 보급키 위함”이었다. 1922년 12월 초에는 여의도 비행장을 공개하고 안창남이 기념비행을 했다. 대단한 이벤트였기에 지방에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2월9일자 동아일보는 “과학에 관한 취미와 지식을 보급케 하고자” 함이 목적이라 보도했다.

    취미가 취향의 의미를 지닌 것일진대 이는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가치가 아니다. 취미는 개인적으로 실현되지만, 개인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듯 개인이 가진 취미에는 사회적 관계가 아로새겨져 있다.

    미적 가치인 취미도 궁극적으로는 경제에 좌우된다. 헐벗음과 굶주림을 벗어난 우아한 의식주 생활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으며, 고상한 취미를 싫어서 안하겠나. 다만 ‘돈’이 그것을 막을 뿐이다.

    한편 취미는 훈련과 교육에 의해 단련된다.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에 따르면 어떤 취미를 택할 수 있는 마인드, 그리고 그런 마인드의 차이는 전적으로 사회학적 훈련과 학력의 차이다. 처음부터 고상한 취미와 저속한 취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사람은 누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거나 교육받은 서로 다른 오랜 습속과 행동의 양식을 지니게 된다. 이를 ‘아비투스(habitus)’라 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취미판단을 결정짓는다.

    어느날 갑자기 땅값이 올라 졸부가 된 사람이 고상한 취미를 갖기는 어렵다. 돈으로 취미를 사봤자 폼 나기는커녕 남들 눈에 어색하게만 보이는 이유도 이런 데 있다. 내가 클래식 음악에 별로 취미가 없고 서른이 넘도록 골프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해보지 못하는 이유도 모두 내 어린시절로부터 길러진 아비투스 탓이리라. 그러니까 이런 취미의 문제에 ‘출신성분’이 포함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내 아비투스는 우리 부모의 아비투스로부터 후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은 고상, 유산균음료는 천박

    불평등은 취미의 분화를 만들어낸다. 일단 취미가 생겨나서 널리 퍼져나가면 고급하고 우아한 것과 저급하고 속된 것이 생겨난다. 처음에는 ‘고급하고 우아한 것’과 ‘저급하고 속된 것’이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즐기게 되면 ‘고급하고 우아한 것’과 ‘저급하고 속된 것’을 구별하는 인식이 생긴다.

    한국에 처음 신파극이 수입됐을 때도 그랬다. 지금에야 이 양식 자체가 없어졌지만 ‘신파극 같다’는 말은 욕에 가깝다. 울고불고 무리하게 감정을 짜내는 것을 가리켜 ‘신파극 같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욕의 역사도 꽤 오래됐다. 1910년대 이래로 신파극은 저급한 대중적 드라마 양식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신파극이 처음 일본으로부터 수입됐을 때도 그랬을까. 아니다. 당시만 해도 신파건 구파건 무대예술이라는 게 없었고 공연예술도 판소리나 전통연희밖에 없었기에, 신파는 젊고 배움이 있는 신세대들에게 수용된다. 그러다 점점 신파극을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고 관객들 안에 ‘어중이 떠중이’나 ‘저급’한 사람들이 포함된다고 생각되자 평가는 냉정해진다. ‘매일신보’는 처음에 신파극을 새롭고 예술적인 연극이라 칭송하지만 나중에는 그야말로 가장 저급한 예술이라 매도하는 데 앞장섰다.

    여기서 엉뚱한 질문 하나.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은 고상한 취향인가 아닌가. 1934년 박태원이 발표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보면 당시 서울에 살던 어떤 사람들에게 커피숍에서 아이스크림을 주문해 먹는 것은 세련되며 고상하지만, 유산균 음료수의 일종인 칼피스를 먹는 것은 천박한 짓이었다. 다음에 인용되는 소설에서 주인공 구보는 최고의 학벌과 교양을 갖춘 일본 유학생 출신이고, ‘그’는 전당폿집 둘째아들로 돈 많은 전형적인 속물이다.

    [그는 주문 들으러 온 소녀에게, 나는 가루삐스(칼피스), 그리고 구보를 향하여, 자네두 그걸루 하지. 그러나 구보는 거의 황급하게 고개를 흔들고, 나는 홍차나 커피로 하지. 음료 칼피스를, 구보는 좋아하지 않는다. …구보는 차를 마시며 문득, 끽다점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음료를 가져 그들의 성격, 교양, 취미를 어느 정도까지는 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여자는, 여자는 확실히 어여뻤다.…그뿐 아니다. 남자가 ‘가루삐스’를 먹자고 권하는 것을 물리치고, 한 접시의 아이스크림을 지망할 수 있도록 여자는 총명하였다.]

    이런 평가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고상한가 저속한가. 오늘날 한국에서 ‘저속한 오페라’는 없다. 저속하기는커녕 모든 오페라는 이른바 고급예술에 속한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할 때만 해도 궁정과 귀족의 고상하기만 한 오페라에 맞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오페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페라가 전수되고 세계 각국으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뭔가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고급 헬스클럽에서 땀 흘리며 뛰거나 도정(搗精)을 하다 만 현미밥을 먹는 것이 ‘웰빙’으로 여겨지는 시대지만 100년 전에도 그랬을까. 똥이나 오줌으로 거름을 준 유기농 채소를 먹는 일이 지금은 돈 있고 교양 있는 사람들의 몫이지만 ‘기생충 박멸’이 국가 보건정책의 근간이었던 1970년대까지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취미는 어떻게 교양이 됐나

    1911년 이화학당에서 신무용을 배우는 여학생들.

    아무튼 이런 예는 너무 많다. 우리가 먹고 싸고 사는 모든 문제가 사실 취미와 취향에 달려 있다. 명심할 것은 ‘고급하고 우아한 것’과 ‘저급하고 속된 것’은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매우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감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의 취미나 취향을 함부로 낮춰보거나 괜히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민중잡지 ‘별건곤’과 포르노그래피

    사람들을 구별해주는 가치인 취미 문화가 민중 전체로 퍼져나간 1920년대는 또한 사상의 시대였다. 그래서 ‘민중적 취미’가 논란거리였다. 취미로 표현되는 계급·계층적 분화를 ‘아래쪽’에서 먼저 자각한 것이다. ‘취미를 가져야 인간’이라는 생각이 20세기 초 한국인들에게 공유됐으며 여러 종류의 취미를 보급하기 위해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모았지만 대다수 조선 민중은 너무 가난해서 도무지 취미를 가질 수 없었다.

    1926년 11월 창간된 잡지 ‘별건곤’은 처음부터 ‘취미 잡지’를 표방했는데 창간호에 벽타(碧朶)라는 필명의 논자가 중요한 취미론을 남겼다. 벽타가 먼저 거론한 것은 ‘사교’였다. 벽타에 따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교적 동물’이다(이 경우 사교란 완연히 ‘사회’를 의미한다). 인간의 ‘사교심리를 만족’시키려면 ‘취미가 많은 도시의 군중생활’이 제격이다. 그러나 조선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조선 민중은 도회가 아닌 자연 속에 산다. 혹자는 ‘자연의 우아(優雅)나 산수의 수려(秀麗)’를 운운하며 ‘자연 취미’를 거론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돈 있는 도회사람이 오래간만에 낯선 시골을 여행할 때나 쓸 배부른 말이다. 사람은 새것을 보고 새것을 듣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는데 오늘날 조선사람 대부분은 이와 같은 취미 생활의 빈핍(貧乏)을 당하고 있다. 잠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 조선에 활동사진관이 몇 개 있지만 그것이 노농대중에게 무슨 위안을 주엇스며 무도(舞蹈), 음악이 유행하지만 그것이 또한 노농대중에게 무슨 취미가 되엿느냐? 박물관, 동물원, 공원, 극장이 다 그러하다. 그것은 다 일부 인사의 독점적 향락 기관이 되고 마랏다.…화류계에 출입하며 가무고취(歌舞鼓吹)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흥겨워 노는 것을 위안으로 하는 사람도 잇지만 돈 업는 사람은 천만부당한 일. 등산, 기차 여행 등을 취미로 아는 사람도 잇스나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도 잇고 그것이 못되는 사람도 만타 하면 민중적 취미는 못될 것이다. 온천, 약수도 또한 그러하다. 삐이오린, 만또린, 오루간, 피어노를 가춰놋코 사이사이 한 곡조 울리는 것을 유일한 취미로 아는 신사숙녀가 잇지만 그는 더욱 유산계급의 향락 소위이고 대중적 취미는 못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1926년 한국 도시인들 중 일부는 여가활동으로 영화관과 박물관, 공원, 동물원에 갔다. 등산과 온천, 약수터 여행도 취미에 포함됐다. 또 화류계의 주지육림을 즐기는 일을 취미로 하거나 바이올린, 만돌린, 오르간, 피아노를 배워 익힌 유산계급 소속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취미들은 노동자 농민인 대다수 한국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글은 ‘민중적 취미 잡지’인 ‘별건곤’의 창간정신을 말하고자 씌어진 것이다. ‘값싼 민중적 취미 인쇄물’에 실린 글과 사진으로 “한 자리 수백 수천의 대군중과 석기여 놀고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말하고 춤추는 감(感)을 이르키여 인간적 취미에 어느 정도의 만족을 줄 것”을 꾀한다는 것이다. 읽고 볼거리로 싸게 대체하고자 한다는 의미다.

    ‘별건곤’은 그러니까 지금은 없어진 1970∼80년대의 ‘선데이 서울’의 큰아버지뻘 되는 잡지이며 스포츠신문의 조상이라 하겠다. 한편 ‘별건곤’은 독서취미의 분화과정을 보여주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독서 취미가 고상한 줄로만 알았던 사람들에게 ‘별건곤’이란 대중적 읽을거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결코 고상하지 않은 내용을 가지고.

    1925년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증면을 단행하고 영화와 스포츠 기사, 부인란을 따로 독립시켰다. 또 이 무렵 우편주문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포르노그래피 인쇄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들은 전체 출판물 시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주로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상업적 출판물에는 춘화와 사진 등 시각 인쇄물, 피임·임신·해부학 등의 ‘의학’과 성교육을 빙자한 서적, 서사적 요소가 있는 패설(悖說)류 따위가 포함된다.

    19세 여가수의 취미도 독서

    독서는 한때 취미의 여왕이었다. 가장 고상하고도 무난해서 남녀노소 누구나가 택할 만한 취미였다. 때맞춰 독서취미를 하는 데 큰돈이 들지 않을 만큼 제지업과 인쇄기술이 발전했고 교육은 널리 보급됐다. 보고 즐길 것이 귀하던 시대에 책이야말로 교양과 오락을 한꺼번에 줄 수 있는 매체였다. 독서가 많이 배운 사람들만의 취미에 머무르지 않게끔 읽을거리는 다양한 형식과 매체를 통해 개발됐다.

    1935년 잡지 ‘삼천리’가 실시한 최고 인기가수 투표에서 1등을 차지한 19세 여가수 왕수복의 취미도 독서였다. 평양기생학교 출신 왕수복은 특히 문학을 좋아하여 문학가의 부인이 되기를 꿈꿨다. 아이돌 스타인 미녀가수가 문학가와 사랑을 한다니, 요즘 감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듯하다. 하지만 왕수복은 꿈을 이룬다. 그녀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연인이 됐고 이효석이 뇌막염으로 사망할 때 임종을 지켰다. 둘 사이에 나이나 학벌 차가 대단했음은 두말 해서 뭣하겠는가.

    취미는 어떻게 교양이 됐나

    1923년 ‘동아일보’주최로 열린 제1회 ‘조선여자정구대회’ 모습. 선수들의 길게 땋아내린 머리채가 이채롭다.

    왕수복뿐만 아니라 그의 라이벌이던 이난영, ‘삼천만의 연인’이라던 영화계의 문예봉,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주인공 홍도역을 맡았던 연극계의 스타 차홍녀도 다 독서가 취미였다. 그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만약 오늘날 스무 살 안팎의 미녀가수, 영화배우가 인터뷰에서 ‘제 취미는 독서예요’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인터뷰 기사를 본 많은 사람들이 “에이, 설마” 하거나 “보기와 달리 매우 낡았군”이라 생각할 것이다. 여전히 책값이 싸긴 하지만 오늘날 ‘독서가 취미’이기는 쉽지 않다. 볼거리가 너무나 많고, 인터넷과 영화는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이다.

    1935년 ‘삼천리’는 ‘서울 모 여자고보 졸업반 규수’ 30인에게 직접 ‘내가 이상(理想)하는 신랑 후보 조건’을 물었다. 30명 중 12명은 신랑감의 직업이 은행원이나 괜찮은 회사의 샐러리맨이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6명은 의사를 희망했다. 그리고 복수로 답한 ‘남편감의 취미’에 대해 30명 중 14명이 ‘노래를 이해하는 이’를 꼽았다. ‘삼천리’는 “그리고는 문학을 조금이라도 리해하는 이라 함은 아주 답안 쓴 아씨들의 일치하는 의견이시다”라고 적었다. 문학은 실로 중요한 교양이고 독서야말로 중요한 취미였던 것이다.

    “취미가 뭐예요”라고 묻는 이유

    두 세대가 지난 뒤, 이 독서 취미는 어떻게 되었을까. 199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를 보니 우리 국민 중 절반이상이 취미로 ‘독서’를 지목했고 책읽기가 가장 대중적인 취미로 나타났다.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의 조사결과를 인용한 이 기사는 서울 등 5대 도시에 사는 시민 6000명에게 즐기는 취미 및 레저에 대해 물었더니 독서 51%, 영화감상 47%, 등산 45%, 화투 및 고스톱 37%, 음악감상 36%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독서 51%는 믿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취미가 독서이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이라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이다.

    한편 1998년 동아일보에 실린 결혼조건에 대한 기사를 보니(제목이 ‘키 175㎝에 잘생긴 차남이면 찜’이다) 남편감이 가졌으면 하는 취미는 ①스포츠 48.0% ②영화 및 음악감상 20.4% ③기타 레저 13.6% ④등산 10.8% ⑤독서 1.6%였다. 1.6%. 이 또한 실재를 다 반영한 수치는 아니겠지만 두 세대 만에 독서와 영화의 운명은 크게 갈렸다. 상대적으로 음악과 스포츠가 크게 변하지 않은 것과 비교된다.

    이제 처음의 의문에 답할 시간이다. 왜 ‘취미가 뭐예요’라고 묻는가. 취미라는 것이 그저 여가를 지겹지 않게 보내기 위한 도구는 아니다. 취미는 개개인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퍼스낼리티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취미는 교양과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지닌 문화적 성장과 삶의 궤적(아비투스)을 보여준다. 그래서 오늘날 직장에서 작성하는 신상명세서나 인사기록카드에 반드시 취미란이 있고 결혼정보회사의 ‘매칭 시스템(matching sysytem)’에도 취미가 한자리를 차지한다.



    요즘 20대들은 ‘나의 페이버릿(my favorite)’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What’s Your Favorite?’ 완연히 영미식 개인주의에서 비롯된 이 말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 음악 등을 가리킬 때 쓴다. 나로서는 별로 탐탁지 않으나 네 나름의 의의와 미적 가치가 있고, 반대로 네 마음에 안 들지라도 인정해야 할 내 것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나!’ 취향의 상대성과 민주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저급하고 고급한 취미가 따로 있을 수 없으며, 저급한 취미를 버리고 고급한 취미를 가져야 된다고 목울대를 세우는 사람도 없다. 21세기에는 동호회와 마니아 문화도 크게 발전하고 있다. 이 또한 오늘날 취미문화의 개인주의와 수평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