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군부독재 위해 일하는 그 날부터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김정원

  • 글: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 kimjw02@sejong.ac.kr

    입력2004-07-02 10:3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 아버지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국 생활 중에는 박정희 정권에 반대해 백악관 앞 시위를 주도했고 80년 신군부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타고난 시인이자 낭만주의자였다.
    “군부독재 위해 일하는 그 날부터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김정원

    5남2녀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가운데 앉은 이가 아버지 김순현씨. 뒷줄 맨 오른쪽이 필자.

    “아버지.”원고 청탁을 받고 20년 만에 소리 내어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지금이라도 저 문을 열고 당당하게 걸어들어오실 것 같은 아버지. 순(順)자, 현(鉉)자를 쓰시는 나의 아버지는 자구마한 체구지만 태산 같은 정신력을 지닌 분이었다. 교육자, 언론인, 시인이자 민주화운동가로 한평생을 용감하게 살아가신 분이셨다.

    증조부께서 충청도를 떠나 전라도 군수로 부임하시면서 우리 집안은 잠시 전라도 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아버지는 경술국치의 해인 1910년에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전라도에서 유년기를 보내셨다. 친구분들에 따르면 아버지는 학창시절 축구선수와 달리기선수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스피드와 투지가 뛰어나 상대편을 교란시키는 능력이 대단했다는 것이다. 내가 올림픽 국가대표 빙상선수 후보로 선발되었을 때 아버님 친구들은 모두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1929년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광주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아버지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광주학생운동은 일본인 중학생의 한국 여고생 희롱사건을 계기로 격투가 벌어진 데 대해 경찰과 일본 신문이 일방적으로 일본 학생을 편든 데서 비롯되었다. 11월3일, 일본 국경일인 명치절에 신사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일본인 학생과 한국 학생들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고, 한국 학생들이 광주일보사를 포위,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는 등 왜곡보도에 항의하면서 운동은 본격화되었다.

    ‘국가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

    시위는 곧 광주 역전으로 번져 그곳에 모여 있던 한·일 학생간, 교사간의 충돌로 이어졌고 마침내 한국인 대 일본인의 조직적인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일제당국은 임시 휴교조치를 내리고 주동자 체포에 나서 수십 명을 검거했다. 아버지도 수배대상이 되어 상당기간 도피 생활을 했다. ‘국가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는 아버지의 가치관이 형성된 것도 이때였다. 아버지는 이후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혈혈단신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 중앙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돌아오셨다.



    귀국 후 어머니를 만나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신 아버지는 엄격한 가정교육이 자녀교육의 토대라는 신념을 갖고 이를 직접 실천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덕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상시간을 지켜야 했다. 물론 늦잠도 허용되지 않았다. 종로에 있는 교동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야 했다. 조금이라도 늦잠을 잘라치면 아버지께선 내 방문을 열어젖히고 “이 녀석, 어서 일어나지 않고 무얼 하느냐”시며 이불을 걷어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엄동설한에도 아침 6시 기상원칙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와 동생들은 기상과 동시에 이불을 개고 차가운 물에 걸레를 빨아 책상을 닦았다. 그리고 방 청소를 깨끗하게 마치고 세수를 한 다음에야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우물물이 얼어 있어 두레박으로 얼음을 깬 뒤 얼음조각이 둥둥 떠 있는 물을 길어 걸레를 빨기도 했다. 그럴 때면 추운 겨울날 일찍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러나 청소를 마치고 나면 장남이었던 나는 아버지와 단둘이 겸상을 하고 아침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인두 들고 달려온 아버지

    예나 지금이나 고등학교 3학년들은 졸업 때가 되면 머리도 기르고 학생티를 벗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기고 3학년 당시 졸업이 다가오면서 머리를 약간 기른 적이 있었다. 물론 학교에서도 문제 삼지 않았고 모자를 쓰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께선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 학생이면 졸업하는 순간까지 학교 규정을 지켜야 하는데 규칙을 어기고 머리카락을 기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벌겋게 달구어진 인두를 들고 와서 머리를 밀어버리겠다고 호통을 치시던 아버지. 나는 곧바로 이발소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늘 원칙을 강조하셨다. 규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지식이 많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되풀이하셨다.

    특히 5남2녀 중 장남인 내게는 유난히 책임감을 강조하셨다. 지방에 계셨던 할아버지가 올라오셨을 때라야 겨우 할아버지 손을 붙잡고 재미있는 구경거리도 보러가고 마음껏 어리광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는 말년에 전재산을 학교에 기부할 정도로 의지가 강한 분이셨지만 나에게만큼은 세상에 둘도 없이 너그럽고 인자한 분이셨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는 해방, 미군정 수립, 대한민국 건국과 같은 역사적 사건이 이어지던 격동의 시기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학교 운동장에서 이승만, 여운형 등 정치인들이 연설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라디오에서도 정치 연설이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께 “왜 저렇게 열심히 연설을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저분들은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하면 훌륭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시곤 했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나라가 부강해야 자손만대가 떳떳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주장이었다.

    1948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선거유세장을 따라다니곤 했다. 구름처럼 모여든 청중 앞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하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나도 저렇게 멋지게 연설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 남모르게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지식을 쌓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목청을 단련하기 위해 남산 꼭대기에 올라 소리도 질러보았다. 친구들과 운동할 때도 일부러 큰소리로 ‘빨리 던져’ 하고 외쳤다. 훈련을 거듭할수록 내 목소리는 크고 힘있게 변모해갔다. 그런 다음엔 내 자신이 머리를 짜내서 감동적인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이런 준비를 거쳐 나는 각종 웅변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경기중·고교 시절에도 웅변대회 출전은 계속 이어져 각종 대회에서 1등상을 12번이나 거머쥘 수 있었다. 당시에는 웅변대회가 아주 유행이었는데 자그마한 체구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웅변하는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사과 반쪽’ 또는 ‘7대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회사일이 바쁘셔서 대회장에는 직접 나오지 못하셨지만, 전국 청년학생웅변대회 서울시 대표로 출마해 상을 받아오자 누구보다도 기뻐하셨다. 축하주를 기울이며 내가 연설한 내용과 인생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던 기억이 난다. 나와 관련한 기사가 신문, 잡지에 실릴 때마다 어머니와 함께 스크랩을 해두는 일도 잊지 않으셨다. 그 덕분에 어린시절에 활동한 사진이나 자료들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기중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아버지는 가족들도 미처 챙기지 못한 채 급하게 인민군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가셨다. 그후 유엔군이 인천 상륙에 성공하여 서울을 탈환할 때까지 아버지와의 연락은 끊어졌다. 말로만 듣던 인공기가 거리에 휘날리고 총을 든 북한군이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학교에는 휴교조치가 내려졌다. 나는 졸지에 어머니와 6명의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소년가장이 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장남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솟았다.

    뚝섬강변의 얼음냉차 장사

    그러나 공산 치하에서 우리 가족이 먹고 살 길은 막막했다. 이때 시작한 것이 뚝섬강변에서의 얼음냉차 장사였다. 그해 여름 내내 나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동대문으로 달려갔다. 얼음가게에서 얼음을 사다가 등에 지고 전차(일명 기동차)를 타고 뚝섬으로 갔다. 무더운 날씨에 등줄기를 타고 얼음이 줄줄 녹아내렸지만 참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동생 창원과 함께 얼음을 썰고 설탕을 타서 냉차를 팔았다. 웅변대회에서 갈고 닦은 목청으로 ‘시원한 얼음냉차’를 하루 종일 외쳤다. 저녁에 어머니께 돈을 갖다 드릴 때는 내 자신이 한없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9·28 서울수복 이후에도 아버지는 계속 부산에서 근무하셨다. 1951년 1·4 후퇴 때는 가족 모두가 대구로 피난을 갔다.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부산에서 대구로 와서 우리 가족을 돌봐주셨다. 그나마 아버지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에 천막 피난학교라도 마음놓고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공부와 운동은 나의 모든 시름을 잊게 해주는 정신적 육체적 해방구였다. 그렇게 피난중에도 학교생활에 몰두한 결과 나는 대구·서울 피난 연합중학교 학생회장과 학도호국단 대대장에 선출되었다. 덕분에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내려온 피난학교 전체의 학생회 일을 맡아보면서 경복고, 서울고, 중앙고, 양정고, 이화여고, 경기여고, 숙명여고 등에 다니는 친구들을 폭넓게 사귈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 사귄 친구들과 가끔 만나서 옛 추억을 이야기하곤 한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아버지는 한동안 부산에 계셨다. 게다가 전쟁 직후 온 나라가 굶주림에 허덕일 때라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대구 피난 시절에 대구매일신문을 팔았던 경험을 되살려 경향신문사를 찾아가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신문배달을 할 때는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해서 도소매를 겸했다. 신문사 앞에서 신문을 받아 가판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10~30부씩 더 나눠주기도 했는데, 아무리 추운 겨울밤이라도 마지막 한 부가 팔릴 때까지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다 팔아야 이익이 남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나날들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언론인 못지않게 시인으로 불리는 것을 즐겼던 낭만주의자였다. 아버지의 시는 주로 대자연을 노래한 것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본업인 언론사와 출판사 외에 영화사까지 설립하는 등 문화사업에 남다른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윤형남 선생이신데, 두 분은 광주사범 동기시다. 제3대 국회 때부터 내리 3선을 했던 선생은 아버지와 둘도 없는 술친구였다. 취기가 오르면 두 분 모두 문학소년으로 돌아갔다. 시내에서 모임이 있는 날은 늘 2차로 명륜동에 있는 우리집을 찾으셨다.

    아버지는 술 한잔 하실 때마다 창작시 한 수를 읊으시곤 했다. 두 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를 암송하실 때도 있었지만, 감정을 실어 절규하는 목소리로 시를 읊을 때면 온 가족이 잠을 설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하던 동생들과 나는 아버지의 시 낭송 소리에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낭만과 풍류를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어린 마음에 아버지처럼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지금도 주량은 맥주 1~2잔을 넘지 않는다.

    아버지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셨지만, 고등학생인 나에게는 문학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으셨다. 당시 서울신문에 연재되었던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베스트셀러였는데, 교수 부인의 불륜이라는 주제와 함께 과감한 애정묘사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 나도 친구들의 권유로 책을 사서 틈틈이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방에서 그 소설을 읽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내가 공부하는 줄 알고 들어오셨던 아버지 눈에 하필이면 소설책, 그것도 ‘자유부인’이 띄고 말았다. 아버지는 “네가 지금 이런 책을 볼 시기냐”고 호통을 치신 뒤 내가 보는 앞에서 소설책을 모두 찢어버리셨다. 학생 신분에 맞지 않는 소설을 보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원칙 때문에 그날 밤 나는 집에서 쫓겨나 친구 집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늘 우리나라가 살 길은 교육뿐이라고 말씀하셨다. 일본 통치하에서 대다수 국민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문맹률이 높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열심히 지식을 습득해야만 우리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으셨던 것이다. 즉,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바로 애국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보낸 흰 봉투 하나

    그런 소신 때문에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셨다. 치밀한 준비 끝에 나는 하버드, 예일 등 미 동부의 유명 사립대학들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다. 하버드와 예일대는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원래 목표대로 하버드대를 선택했다.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이렇게 파격적인 장학금을 제시한 것은 나의 SAT 성적뿐 아니라 스포츠 활동과 웅변대회 수상 등의 경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하버드대로부터 학비와 생활비까지 지급받았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기숙사의 내 방에는 언제나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고국이 생각나거나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나는 태극기를 보면서 마음을 달랬다.

    부모님은 학비를 보내주겠다고 여러 차례 전보와 편지를 보냈지만 나는 사양했다. 신문배달을 할 때 만났던 얼굴들,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고학하는 학생들,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한 학생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달러였고 나의 1년 학비는 1400달러였다. 1인당 국민소득의 20배가 넘는 금액을 나의 1년 학비로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부모님께 그 돈으로 최소한 50~100명의 한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그러자 이후 아버지는 정말 단돈 1달러도 송금해주지 않았다. 그 후로는 오로지 장학금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김준현 국회의원이 하버드대를 방문했다. 김준현 의원은 나의 이모부로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정도로 유력한 정치인이었다. UN대표단을 이끌고 뉴욕에 왔다가 나를 보러 온 것이었다. 나는 성심성의껏 일행을 안내해드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이모부께서는 갑자기 작은 봉투 하나를 손에 쥐어 주셨다. “아버지가 보낸 것이니 요긴하게 쓰거라.”

    순간 언제나 근엄하지만 남몰래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졌다.

    미국에서 교수로 일하는 동안 한국 정부로부터 관료로 일해달라는 제의를 여러 차례 받았다. 196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지 13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다. 존스홉킨스 대학원에 다닐 때 공식행사에서 가끔 인사를 나누었던 주미대사 출신의 정일권 국무총리의 배려로 전국시찰 여행에 동행해 꿈에 그리던 조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게 되었다. 여행 도중 제주도에서 윌리엄 포터 주한미국 대사와 셋이서 저녁식사를 하게 됐는데, 그때 정 총리는 나에게 박사학위도 받았으니 이제 조국을 위해 일할 때라면서 국무총리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해주었다.

    1971년 8월, 경향신문에 ‘통한(統韓) 4단계 접근방식’이라는 글을 기고했을 때도 그랬다. 미중관계 해빙에 따른 한국의 안보상황에 관한 글을 관심 있게 본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청와대로 부른 것이다. 박 대통령과 독대하여 국제정세를 논하던 중 대통령이 정부에 들어와 일하라고 권유했다. 내게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내가 박 대통령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1961년 5·16 쿠테타가 일어나면서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던 출판사 등의 사업체는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뇌일혈로 쓰러져 전신마비 증세를 보이셨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치료받으신 끝에 가까스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때부터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독재 타도를 위한 민주화운동에 힘을 쏟았다.

    아버지는 뜻있는 언론인, 전직 교수들과 함께 백악관 앞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노구를 직접 이끌고 ‘미국은 독재자를 돕지 말라.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여야 한다’는 피켓을 들고 백악관 앞에 서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위였기 때문에 이 시위는 현지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기독교에도 귀의했다. 자나깨나 기도의 내용은 ‘독재자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혼자 기도하는 아버님을 보고 있으면 그 간절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곤 했다.

    내가 정부의 입각(入閣) 제안을 놓고 상의할 때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독재자 밑에서 일하려고 유학을 하고 그토록 힘들게 공부했느냐? 군부독재를 위해 일하는 그날부터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의 회초리

    한편으로는 서운했고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웠다. 아버지는 그렇게 여생을 민주화운동으로 보내셨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또다시 신군부에 의해 12·12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자 아버지는 거의 날마다 교회에 나가 대한민국에 진정한 민주주주의가 오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1982년 11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귀천(歸天)하시기 전까지 아버지의 첫째 소원도, 둘째 소원도, 셋째 소원도 대한민국의 민주화였다. 1987년 내가 미국에서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귀국했던 것도 아버지가 몸소 보여주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무관하지 않다.



    내게 있어서 아버지는 드넓은 바다다. 때로는 거대한 파도가 일렁이고 때로는 한없는 침묵이 감돌지만 언제나 도전의식을 키워주는 푸르른 바다다. 아버지에게 부끄러운 아들이 되지는 않았는지, 아버지처럼 위엄 있는 아버지였는지 뒤돌아보게 된다. 세월이 갈수록 아버지의 천둥 같은 목소리 뒤에는 자식과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오늘따라 회초리를 들고 호령하시던 엄하디 엄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립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