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호

참여정부 향한 진중권의 직격탄

개혁 팔아 집권했으면 제발 개혁 좀 해라

  • 글: 진중권 칼럼니스트·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com

    입력2004-07-28 14: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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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정부 향한 진중권의 직격탄
    과거에는 정권을 비판하면 정권이 나서서 손을 봐주었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요즘은 정권 지지자들이 그 험한 일을 대신 떠맡나 보다. 정권을 비판하면, 사이버 공간에서는 일단 개혁의 적으로 몰린다. 실제로 이 사회에는 개혁의 적들이 있다. 그들은 ‘개혁’이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들과는 좀 다른 이유에서 정권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정권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대통령을 비판하면 곧바로 ‘개혁의 적’으로 몰아버린다. 참 피곤한 현실이다.

    비판의 근거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대통령은 곧 개혁의 화신이다. 그리하여 ‘대통령도 때로 비(非)개혁적 내지 반개혁적일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가 그들에게는 ‘네모난 동그라미’와 같은 형용모순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대통령이 곧 개혁이라면,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개혁에 대한 비난이 될 수밖에. 그러다 보니 대통령에게 제발 개혁 좀 하라고 다그치는 목소리마저 졸지에 ‘개혁의 적’으로 몰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대통령을 비판하면 ‘대통령의 실패를 바라는 자’란다. 물론 이 사회에는 대통령의 실패를 정말로 바라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과 대통령은 이제까지 사이좋게 잘 지내왔다. 취임 후 노 대통령이 추진한 대부분의 정책은 보수 야당과 언론의 입맛에 잘 맞았다. 파병, 대미외교, 노동, 자유무역협정(FTA),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환경 문제 등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안에서 대통령은 늘 그들 편이었다. 아닌가?

    도대체 누가 대통령의 실패를 바라는가. 개혁의 약속을 배반한 대통령 자신이다. 내 기억에 따르면 지금의 대통령은 ‘개혁’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므로 대통령으로서 그의 성패는 개혁을 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개혁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이미 현실감각을 잃은 일부 열광적 지지자들을 빼면, 그렇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통령은 진심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는가. 그럼 자신이 약속한 대로 개혁을 하면 된다. 왜 안 하는가. 이해할 수가 없다.



    권력은 선출되지 않는다

    이게 혹시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기대에서 나오는 실망일까. 그렇지 않다. 대선 전에 노무현 후보의 지지자에게서 원고를 청탁받은 적이 있다. 노 후보에 관한 책을 내는데 글을 기고해달라는 것이다. 그 청탁을 완곡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내가 글을 쓰면 당신들이 노 후보에 관해 가진 환상을 무참히 깨뜨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당신들이 가진 환상이 정치적으로 필요하다고 보기에, 굳이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

    흔히 ‘권력 창출’이니 ‘권력 재창출’이니 하지만, 현실을 모르는 가소로운 소리다. 대통령은 선출해도, 권력은 결코 선출되지 않는 법이다. 진정한 권력이란 정계, 재계, 관계를 이루는 엘리트 사이의 망(網)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그렇게 이루어진 권력의 함수에 불과하다. 때문에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곧 천지개벽에 준하는 일대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실은 문학적 의인법에 기초한 유아적 ‘환상’에 불과하다.

    대선자금 수사를 생각해보자.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큰돈 나오는 구멍은 똑같지 않던가. 기업이 한 쪽에 돈을 줘도 다른 쪽에 보험을 들어둬야 하는 처지. ‘노사모’의 어느 시인은 ‘희망돼지’를 추억하며 정치의 본질은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여당이나 야당이나 돈 나오는 구멍은 하나. 어차피 자기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는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고, 발언하고, 법을 만들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대통령이 바뀌어도 권력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 메커니즘의 물적 토대다.

    이를 알고 있기에 내가 대통령에게 건 기대는 그 지지자들의 것보다는 훨씬 소박하고, 내가 한 요구는 그들의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

    문제는 취임 후 대통령의 행보가 이 소박한 기대, 이 현실적 요구마저 배반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통령의 직위를 가지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마저 하지 않았다. 그가 특유의 승부사 근성을 가지고 한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쓸데없는 일에 ‘정권의 명운’을 거는 일뿐이었다. 그 각오로 개혁을 했더라면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노무현 정권의 등장으로 외려 이 사회에 보수성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가령 파병문제를 보자. 만약 이회창씨가 대통령이 되어 파병을 결정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거리는 파병반대 물결로 넘실거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어 파병을 결정하니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 당연히 파병에 반대해야 할 지지자의 절반 이상이 대통령의 발자취를 따라서 파병찬성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렇게 개혁정권 덕분에 사회 분위기가 외려 보수화하는 역설이 발생하고 있다.

    어디 파병문제뿐인가. 이른바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의 상당수가 대통령의 뒤를 따라 함께 보수화하고 있다. 대통령의 행보를 옹호하다가 거의 도착증세를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토록 믿었던 “노 대통령마저 못 하는 개혁이라면, 그것은 애초에 실현이 불가능한 꿈”이라는 식이다. 하긴, 그리스도도 못 하는 일이라면 그 누군들 할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교리나 다름없던 개혁의 가능성을 스스로 믿지 않기로 했다. 개혁의 사도들이 가장 열심히 개혁의 불가능을 주장하는 역설. 초현실주의적 상황이다.

    노무현씨는 그야말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커다란 기대를 안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지만 취임 몇 달 만에 지지율은 바닥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새 지지자의 절반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파병, 대미외교, 노동, 환경 등 주요 사안에서 대통령이 보여준 태도는 반대자들도 놀랄 만큼 수구적이었다.

    이때 노무현 지지자들은 “소수 정권의 한계”와 “소수 정당의 비애”를 논했다. 대통령의 반개혁적 행보는 다수당인 한나라당에 발목이 잡혀 있기 때문이므로 진정으로 개혁하기를 바란다면 열린우리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유권자를 향해 “국민 여러분, 민주개혁을 위해 다수 의석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했다. 탄핵 역풍을 타고 열린우리당은 잃었던 지지층을 일거에 재결집할 수 있었다. 여당은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이제 기다리던 개혁이 올 것인가?

    하지만 이번에도 개혁은 오지 않았다. 총선에서 승리한 직후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선거 때에 써먹은 개혁의 플래카드를 걷어치우고, 간판을 새로 달았다. 열린우리당은 자칭 ‘중도보수 실용주의 정당’이란다. 이 나라에서 유권자는 선거가 끝나야 비로소 자기가 표를 던진 정당의 실체를 알게 된다. 어쨌든 국민이 몰아준 다수 의석을 가지고 열린우리당이 힘차게 밀어붙인 ‘민주개혁’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추가파병 결정, 아파트분양원가 공개 철회,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텅 빈 개혁의 레토릭이 그 정체를 들키지 않고 유지될 수 있던 것은 전적으로 보수야당과 언론의 공이다. 특히 탄핵사태는 이미 거덜난 개혁의 레토릭을 정치적으로 부활시킨 악수(惡手)였다. 솔직히 정치권에서 탄핵 얘기가 오갈 때만 해도 “설마 의결까지 가겠느냐”고 생각했다. 의결을 강행하면 거대한 역풍이 불 것이 틀림없고, 설사 가결되더라도 헌법재판소가 탄핵 결정을 내릴 리 없기 때문이다. 제 몫 챙기는 데 도가 튼 이들이 어떻게 이토록 현실감각을 잃을 수 있을까.

    탄핵의 도화선은 한 일간지가 실시한 이른바 ‘전문가 여론조사’였다. 어떤 근거인지 모르지만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라 불리는 이들 사이에서 탄핵 찬반 견해가 50 대 50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처음에는 다소 반발이 있겠지만, 그 냄비들이 얼마나 오래 뜨겁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탄핵을 저지른 것이다. 덕분에 이제까지 부진한 개혁은 여당 탓이 아니라 야당의 발목 잡기 탓이라는 가설이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졌다. 개혁이라는 빈 깡통은 이렇게 야당과 언론의 미련함으로 채워진다.

    정신분열증과 편의적 망각

    후보 시절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에 사진 찍으러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미국에 가서 사진 찍는 것 외에 특별히 한 일이 있던가. 차라리 사진만 찍고 돌아왔으면 나았을 것이다. “반미(反美) 좀 하면 어떠냐”고 했던 그가, 정작 미국에 가서는 “미국이 아니었다면 강제수용소에 있을 것”이라고 아부를 했다. 반미 안 해도 좋고, 자주 안 해도 좋다. 한 나라의 국가원수라면, 최소한 이런 유치한 화법으로 나라 망신은 시키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의 행보는 어떤가. 그는 불과 몇 달 전 정부 외교와 안보 라인의 숭미(崇美)주의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정작 미국에 가서는 어떻게 했는가. 김선일씨 사건과 같은 일이 다시 벌어져도, 대한민국 정부는 신속하게 파병방침 불변을 천명할 것이라고 했다. 압권은 동포들을 만난 자리에서 했다는 부친 자랑. “아버지가 빨치산 때려잡던 토벌대장이었다.” 도대체 이게 자랑거리인가.

    ‘리틀 노무현’ 유시민 의원은 어떤가.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파병반대로 대통령에게 힘을 몰아주자”고 주장했다. 그러던 그가 최근에는 “파병찬성으로 대통령에게 힘을 몰아주자”고 외치고 있다. 한 사람이 파병반대와 파병찬성을 동시에 하려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인격이 분열되어야 한다. 그러잖아도 피곤한 세상, 참 고단하게 산다.

    서로 모순되는 저 두 발언에서 상수(常數)는 “대통령에게 힘을 몰아주자”는 것. 이것이 분열의 고통 속에서도 그를 지탱해 주는 인생의 일관성이다.

    민생 문제로 돌아가 보자. 노동자가 줄줄이 분신하는 것은 사회문제가 안 되고, 농민이 줄줄이 음독해도 경제문제가 안 되고, 서민이 줄줄이 투신해도 정치문제가 안 되는 게 이 나라의 현실이다. 노동자가 분신하는 것은 ‘욱하는 성격’ 탓이고, 농민이 음독하는 것은 부족한 경영 마인드 탓이며, 서민이 투신하는 것은 무분별한 과소비 탓 아닌가. 본디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 하는 법. 게다가 이 모든 문제가 어디서 비롯되는가. 나라 경제를 좀먹는 ‘노동귀족들’의 폐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따라서 이 분야에 관해서는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하지만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는 어떤가. 이것은 자기들 스스로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 아닌가. 선거에 실컷 써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시장원리에 위배’된단다.

    아니, 시장원리에 위배되는 것을 왜 버젓이 공약으로 내세우는가. 대통령의 개인적 ‘소신’이란다. 그래서 당의 공식 방침은 아니란다. 당의 공식방침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대통령이 그런 소신을 뭐 하러 흘리고 다니겠는가.

    참여정부 향한 진중권의 직격탄

    6월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후 환하게 웃는 한나라당 박창달 의원(가운데).

    건설업을 했다는 한나라당 의원은 요 몇 년간 아파트 건설업자들이 폭리를 취해왔다고 폭로했다. 듣자 하니 평당 최고 200만원이 부풀려졌단다. 24평 아파트면 4800만원, 30평이면 6000만원이다. 이게 고스란히 서민의 지갑에서 건설업자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 속내야 알 수 없지만 표면적으로는 한나라당도 아파트 분양원가의 공개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서민의 정당이라는 열린우리당의 대통령이 일을 뒤틀고 나선다. 업자들을 위하는 것이 곧 서민을 위하는 길이라는 얘길까.

    여당의 지지율을 절반으로 꺾은 또 하나의 사건은 박창달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이었다. 사안으로 보면 죄질이 그리 무겁지 않고, 이해해줄 만한 정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민은 16대 국회에서 비리를 저지른 국회의원 7명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부결되는 사태를 눈뜨고 지켜봤던 불쾌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적어도 의원들은 국민에게 ‘이해’를 구할 처지가 아니다. 범법은 어디까지나 범법, 그 법은 누가 만들었는가. 자기들이 만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국회의원 스스로 엄격하게 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한나라당은 용케 비난을 면했다. 그렇다고 좋아할 것 없다. 한나라당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아예 비난할 가치조차 없다고 보는 게 국민 다수의 심리다. 열린우리당은 억울할 것 없다. 절도범을 잡겠다고 나선 경찰관이 남의 물건에 손대면 원래 비난이 쏟아지는 법이다.

    참고로, 16대 국회에서 비리의원들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일괄 부결됐을 때,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을 이렇게 비난한 바 있다. “한나라당은 지하실,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 모금 범죄에 대해 전혀 반성의 빛이 없다.”

    이 사안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열린우리당이 그 동안 ‘정치개혁’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온 사정과 관계가 있다.

    어차피 열린우리당에게 자주외교를 할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할 의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돈 안들이고 생색낼 수 있는 게 정치개혁. 그런데 그 첫 작품이 고작 동업자에게 방탄조끼나 입히는 구태의연한 행태가 아닌가. 이 대목에서 유권자들은 열린우리당에서 말하는 개혁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현 정권은 자신을 ‘참여정부’라 부르기를 즐긴다. 실제로 현 정권은 네티즌의 적극적인 참여로 만들어졌다. 물론 네티즌의 힘을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 사이에 존재한 표차(票差) 정도는 인터넷이 만들어냈을 것이다. 지지자들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정치적 네트워크를 결성해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진보적 현상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나라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꾸어가고 있음을 우리 모두 의식하고 있다. 이 현상의 의의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제는 그 참여 방식에 있다. 대선 전 노무현 후보는 노사모 회원들에게 “내가 대통령이 되면 여러분은 뭘 하실 겁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노사모 회원들은 일제히 “감시! 감시!”하고 외쳤다. 이 약속만 제대로 지켰더라도 큰 문제 없을 뻔했다.

    동원으로 전락한 참여정치

    노사모는 대선 이후에도 해체되지 않았다. 큰 소리로 약속했던 ‘감시’를 실천하기는커녕 그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대통령의 친위대 비슷한 조직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여기서 ‘참여’는 사실상 자발적 ‘동원’의 성격을 띤다.

    노무현을 지지했던 네티즌들은 지금 ‘서프라이즈’라는 이름의 정치토론 사이트에 집결해 있다. 작년에 거기서 활동하던 네티즌들이 청와대 비서실에 불려가 밥을 얻어먹은 이른바 ‘밥 게이트’ 사건이 터졌다.

    그러다가 얼마 전 서프라이즈 서영석 대표의 청탁 사건이 터졌다. 네티즌들의 ‘참여’를 조직해준 대가로 현직 차관을 통해 제 부인의 교수직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동원으로 전락한 ‘참여’ 정치의 처참한 말로다.

    사건을 일으킨 서영석 대표도 늘 ‘개혁’을 외쳐댔다. 제 스스로 청탁하는 것을 보니, 청탁 문화는 척결해야 할 개혁의 대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그가 말하는 개혁은 뭘까? 재미있게도 그는 사건 직후에 가진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 사회의 도덕성 수준을 높였다”고 말했다. 청탁도 자신이 하면 사회의 도덕성 수준을 높이는가 보다. 그렇다면 사회의 도덕성을 높이는 청탁이야말로 온 국민이 힘써 이뤄야 할 개혁이 아니겠는가.

    이 발언이 나가자 인터넷 공간에는 패러디의 봇물이 터졌다. 청탁이 도덕성의 수준을 높였다면 “강도들은 우리 사회의 보안 수준을 높였다” “사기범들은 우리 사회 지적 수준을 높였다” “성 추행범들은 여권 신장에 도움을 줬다” “IMF를 부른 김영삼은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강화했다” “김정일은 대한민국의 안보의식을 높였다” 등등.

    노무현 대통령은 “청탁을 하는 사람은 패가망신하게 해주겠다”고 한 것으로 기억한다. 대통령께서 정말 이 약속을 지키실까.

    문화부 차관은 “가벼운 마음으로” 청탁을 했다고 했다. 유시민 의원은 “교수되기 위해 전화 안 하는 사람도 있냐?”고 반문했다. 몰라서 묻는가. 그런 사람 많다. 자기야 주위에서 늘 보는 게 정치인이겠지만, 보통사람 중에서 청탁을 할 만한 위치에 있는 정치인과 끈 닿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아니, 그 이전에 대체 사립대학에서 교수를 임용하는데 정치인을 통해 압력을 넣겠다는 대담한 발상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쨌든 이게 청탁사건으로 드높아진 개혁주체들의 도덕성 수준이다.

    정치와 인터넷의 만남은 진보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만남이 어그러지면 참으로 볼썽사나운 광경이 벌어진다. 가령 친노(親盧) 네티즌이 집결한 ‘서프라이즈’를 보자. 이 사이트는 명색이 정치토론 사이트인데 실은 정치를 팔아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주의 기업이다. 지난 총선에서는 여당 후보들 인터뷰해주고, 그 대가로 선거용 홍보자료를 만들어주는 식으로 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한마디로 서프라이즈는 공론 형성의 장이 아니라, 정부여당의 인터넷 친위대 노릇을 해주며 금전적 이득을 추구하는 사기업인 셈이다.

    反개혁적 인터넷 문화

    열린우리당의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여기에 얼굴을 내민다. 신기남 의장과 유시민 의원은 이 사이트에서 네티즌과 채팅한 적이 있다. 정동영 전(前) 의장을 비롯하여 정계와 관계에 포진한 열린우리당 인사들이 이 사이트와 인터뷰를 한다.

    이 조그만 매체의 막강한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간단하다. 대통령이 즐겨 찾고 기고까지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대외적으로는 별 볼 일 없는 이 사이트가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된 것이다.

    대통령은 왜 이 사이트를 즐겨 찾는가. 명색이 네티즌 대통령에, 이 사이트에 가면 언제나 대통령 찬가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사이트에서 정부여당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조직적으로 삭제된다. 네티즌들이 마이너스 점수를 매겨, 마음에 안 드는 글은 모조리 ‘해우소’로 보내기 때문이다. 이 현대판 도편 추방제 덕분에 이견은 거의 실시간으로 제거되고, 게시판에는 오로지 하나의 목소리만 남는다. 이게 개혁이라는 대의를 내건 이들이 만든 새로운 인터넷 문화다. 이게 민주주의인가?

    참여정부의 네티즌 부대를 이끌어온 서영석 대표는 끝내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청탁을 하면 그 피해는 다른 교수 후보자에게 돌아간다. 또 청탁을 통해 교수가 된 엉터리에게 배워야 할 학생들의 꼴은 뭐가 되는가? 나아가 현직 차관이 청탁에 동원됐다. 그럼 그에게 봉급을 주는 납세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그런데 그가 죄송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누를 끼친 점”뿐이다.

    지난주 파병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광화문에서 해괴한 사건이 있었다. 열렬한 노무현 지지자 몇 명이 파병반대 시위에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시위 현장에서 피켓을 들고 ‘노무현 퇴진’이라는 구호가 나올 때마다 시비를 걸며 항의하기에 바빴다고 한다. 파병에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파병은 비난해도, 파병을 결정한 사람은 비난하지 말라는 얘기다. 파병반대 시위에 나와서도 오직 한마음 ‘노짱’ 생각뿐이다. 이게 정상인가?

    며칠 전 ‘오마이뉴스’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모든 반노(反盧)는 조선으로 통한다.” 이들에게 그 비판이 어떤 근거에서,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행해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노짱’을 비판했느냐 여부다. 이유와 근거를 불문하고 대통령을 비판하면 곧바로 수구세력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3공 시절 반박(反朴)은 북한으로 통했고, 참여정부에서 반노는 수구로 통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음 약한 사람은 겁나서 살겠는가.

    개혁의 실패를 바라는 자들

    누가 개혁의 실패를 바라는가. 대통령 자신이다. 개혁 팔아서 대통령이 됐으면 제발 개혁을 할 일이다. 도대체 뭐 하고 있는가. 나는 대통령이 성공하기를 바란다. 제발 성공 좀 해라. 내가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통령 자신이 후보 시절에 제 입으로 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한 것들이다.

    이제까지 대통령은 중요한 가치들은 골라서 배반해왔다. 그리고 제 밥그릇이 걸리면 부랴부랴 ‘대통령직’을 걸고 승부수를 던지곤 했다. 말이 좋아 승부사지, 절대로 자기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한다.

    누가 개혁의 실패를 바라는가. 열린우리당이다. 선거 때만 되면 온갖 요란한 개혁의 수사를 늘어놓다가, 정작 선거만 끝나면 ‘실용’이 어쩌구 하면서 딴소리나 늘어놓는 정당.

    언제까지 텅 빈 개혁의 내용을 포토제닉의 허구적 이미지로 때울 생각인가. 소수당일 때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지, 소원대로 의회의 다수를 차지한 지금 무슨 핑계를 댈 작정인가. 열린우리당에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표를 합치면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가 된다. 개혁을 하겠다고 했던가. 그럼 하라. 못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누가 개혁의 실패를 바라는가. 친노세력 자신이다. 선거전에 당신들이 ‘노무현’이라는 이름에 투사했던 개혁의 가치들을 생각해 보라. 그중에서 뭐가 남았는가.

    도대체 노 대통령이 집권 후 내린 결정 중에서 이회창 후보라면 도저히 할 수 없었을 개혁적 정책이 어디 있었던가. 솔직히 내게는 단 하나도 떠오르는 게 없다. 도대체 노 대통령의 반개혁적 행태를 극구 옹호하면서 이들이 아직까지 떠들어대는 그 ‘개혁’이란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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