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호

시게미쓰 오장(伍長)에게 취조당한 항일운동가의 피맺힌 증언

“생매장, 주리틀기, 물고문으로 나를 불구자 만든 친일 헌병 시게미쓰(重光)”

  • 글 : 김한국

    입력2004-09-22 1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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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게미쓰 오장(伍長)에게 취조당한 항일운동가의 피맺힌 증언

    고(故) 김주석씨가 1944년 진해 일본군 헌병대에서 한국인 출신 시게미쓰 헌병 오장에게 고문받는 장면을 묘사한 삽화.

    《“친일 일본군 헌병 오장 시게미쓰(重光)에게 끔찍한 고문을 당한 항일운동가 고(故) 김주석(金周錫·1927∼93)씨의 통한(痛恨)을 알리고 싶다”며 김씨의 아들 김한국(金漢國·58·제조업)씨가 ‘신동아’에 투고 해 이를 정리, 소개한다.김한국씨에 따르면 부친 김주석씨는 1993년 세상을 떠나기 전, 1944년 경남 진해헌병대에서 한국인 출신 일본군 헌병 오장 시게미쓰에게 40일 동안 고문당하던 상황을 20여장의 삽화와 100여쪽에 이르는 증언록으로 자세히 기술했다. 김한국씨는 “아버지를 고문한 헌병 오장은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부친 신상묵(重光國雄·시게미쓰 구니오)씨”라고 주장했다.이에 앞서 부친의 친일 경력을 강력히 부인해오던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은 “신 의장 부친 신상묵씨는 일본군 헌병 오장(하사)”이라는 ‘신동아’ 9월호 보도 직후 “수 년 전 부친이 일제시대 군인이었음을 알았다”고 시인했다. 이어 항일운동가 차익환, 김장룡씨가 “경남 진해헌병대에서 일본군 헌병 군조(중사)였던 신 전 의장 부친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연좌제가 아닌, ‘정치인의 거짓말’ 등 도덕성을 문제삼아 사퇴 여론이 쏟아지자 신기남씨는 의장직에서 물러났다.‘신동아’는 신기남 전 의장측에 “당시 ‘진해헌병대에서 신상묵씨가 항일운동가들을 고문했다’는 증언을 사실이라고 보는 지 등에 대한 입장을 듣고 싶다”며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열흘이 넘도록 응답이 없었다.김주석씨의 자서전은 일본 제국주의의 반인륜적 범죄를 피해 당사자가 직접 기술해 사실적으로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사 규명의 참고 자료일 수 있다. 한국인 출신 시게미쓰 헌병오장은 생전에 일본제국주의의 범죄에 협력한 행위를 고백하고 사과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또한 김주석씨가 겪은 고통은 사회구성원이 공유할 가치가 있고, 그가 시게미쓰를 용서한 의미도 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보여져 김씨 자서전과 아들의 투고를 게재하기로 했다.열린우리당은 9월8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을 상정하면서 헌병 등을 진상규명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편집자’》

    이글을 쓸 것인가를 놓고 많이 망설였다. 내 아버지를 고문한 친일 인사를 고발하는 행위로 비쳐져 자칫 죄없는 그의 후손에게 커다란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겪은 일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과거사 규명 차원에서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결심했다. 또한 항일운동을 한 죄로 고통의 나날을 보낸 아버지의 삶을 더함과 뺌 없이 공개하는 일이 잘못된 행동은 아니라고 믿는다.

    나의 아버지 김주석씨는 17세이던 1944년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경남 진해 일본군 헌병대에서 한국인 출신 일본군 헌병에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후유증으로 1993년 12월31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는 지팡이에 의지하고도 얼마 걷지 못하는 하반신 장애인으로 생활했다. 17세의 나이에 만신창이의 몸이 되어 평생을 살아야 했다니! 그것도 항일운동을 한 죄로 같은 동포의 손에 의해 그렇게 됐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아버지는 헌병대 유치장에서 고문당하며 피부병, 심장병까지 얻어 평생 병을 안고 사셨다. 아버지는 결국 “차라리 다리를 절단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도 있을 정도로 매일 다리의 통증을 겪으시다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는 생전 한시도 당신을 그렇게 만든 친일 헌병을 잊지 못했다. 평생 그의 소재를 수소문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 8월 나는 아버지가 그토록 다시 만나고자 했던 그 헌병을 찾을 수 있었다.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의장 부친 신상묵씨였다.

    지난 8월 신문에서 “신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가 일제 시대 전북 출생-대구사범학교 졸업-교사 출신 일본군 헌병 오장 시게미쓰 구니오며 진해 일본군 헌병대에 근무하면서 항일운동가 두 사람을 고문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버지는 1983년 혹독하게 고문당한 상황을 100여쪽의 삽화와 글로 생생하게 묘사한 자서전을 남겼다. 그 자서전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아버지를 고문한 한국인 출신 일본군 헌병 오장이 바로 시게미쓰다.



    치안유지법 위반 기록

    아버지는 자서전과 함께 1944년 치안유지법, 군사보호법 위반으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됐음을 입증하는 교도소 기록을 남겼다. 그 교도소 기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인 1998년 내가 부산교도소측으로부터 확인받은 것이다. 교도소측은 겉장에 치안유지법 위반 사실만 기록했는데, 뒤에 첨부된 일제시대 기록을 보면 치안유지법 외에 군사보호법도 위반한 것으로 돼 있다. 이 자료를 아버지 생전에 구해드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1944년 당시 아버지에게 적용된 치안유지법, 군사보호법은 일본제국주의에 반기를 들고 반(反) 국가활동을 한 시국사범을 잡아들일 때 사용되던 것이었다.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치안유지법은 1925년 3월 일본 귀족원을 통과해 일본 본토와 식민지 한국에서 시행된 법으로, 주요 골자는 ‘국체(國體)를 변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결사를 조직하거나 사정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하며 협의 선동한 자도 중형에 처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당시의 치안유지법은 요즘의 국가보안법과 성격이 비슷한 법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은 아버지가 항일운동을 했다는 중요한 증거다. 아버지가 자서전에서 ‘함께 항일운동을 하다 붙잡혔다’고 밝힌 다른 동지들이 같은 죄목으로 처벌받은 교도소 기록도 구했다. 아버지와 동지들은 ‘학인동우회’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 항일 활동을 한 혐의로 치안유지법에 따라 처벌받게 된 것이다.

    당시 시국사범은 일본군 헌병대가 취조했다. 아버지의 공범이 먼저 진해헌병대에 붙잡혔으므로 아버지는 경성에서 체포돼 관할인 진해 일본군 헌병대로 압송되어, 취조·고문당한 것이다. 취조가 끝난 뒤 아버지의 신병은 진해 일본군 헌병대에서 관할인 부산형무소로 넘겨져 수감됐다.

    자서전에서 아버지는 당신을 고문한 일본군 헌병의 이름(시게미쓰), 근무처 및 계급(진해주둔 일본군 헌병대 소속 헌병 오장), 민족(조선인), 출신지(전라도), 경력(사범학교 졸업 후 4∼5년 교사)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신기남 전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와 인적사항이 일치했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1944년 진해 일본군 헌병대엔 한국인 출신 일본군 헌병이 100여명 있었는데 절대다수는 사병이었으며 오장 이상의 한국인은 시게미쓰와 오니시(大西) 두 사람뿐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10년 전인 1983년 자서전을 쓰셨다. 그 시기 같은 자서전을 국가기관에도 보내셨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자서전 내용은 1983년 당시 아버지가 쓴 것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다. 신상묵씨의 친일해위가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1983년에 신상묵씨의 신상명세를 자세히 묘사했다는 것은 아버지가 신씨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아버지가 고문 당하던 시기(1944년 중순), 장소(진해 일본군 헌병대)에서 아버지가 기록한 것과 이름, 계급, 출신지, 학교, 경력이 같은 시게미쓰로부터 고문 당했다는 다른 두 사람(차익환, 김장룡)의 증언이 신문에 실린 것을 봤다.

    이들은 신상묵씨의 사진을 확인한 끝에, 자신을 고문한 시게미쓰가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부친 신상묵(시게미쓰 구니오)씨라고 증언했으며, 신 전 의장도 이들의 증언을 받아들여 의장직사퇴입장으로 돌아섰다는 보도를 봤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나는 아버지를 고문한 진해헌병대의 일본군 헌병 오장 시게미쓰가 신 전 의장의 부친 신상묵씨임을 알게 됐다.

    시게미쓰의 ‘태극무공훈장’

    지난 8월 시게미쓰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나는 그토록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했던 아버지가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날마다 망가진 몸을 부여잡고 끙끙 앓으며 시게미쓰에게 고문당한 기억을 평생의 한으로 삼아 가슴에 묻고 지낸 게 아버지의 삶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리를 주물러달라고 할까봐 방과 후 아버지를 피해다녔던 내 어린 시절이 부끄럽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신상묵씨는 광복 후 경찰 고위직에 올라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태극무공훈장’. 이 말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대한민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받는 유공자가 되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었다. 그래서 나를 시켜 서울의 정부기관에 당신의 자서전을 보내게 했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부산형무소 자료를 소각해 아버지에 대한 판결문도 없다는 통보를 들었다. 그 때는 아버지가 치안유지법, 군사보호법 위반으로 복역한 기록도 못 구했을 때였다. 결국 아버지는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고 하자 아버지는 별 말씀이 없었지만 상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버지는 1927년 경남 진해에서 부유한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941년 서울로 유학, 경성전기학교 토목부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혈기 넘치고 구김살 없는 성격이셨다고 한다. 그러나 1942년 11월 일본 국경일인 명치절 때 한국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에 격분, 학교 교관으로 파견나온 일본군 헌병 집단구타에 가담하면서 아버지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됐다. 비록 일제의 강압에 의해 ‘김(金)’씨 성을 ‘가네와(金和)’로 창씨개명했지만 헌병구타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는 타교생 8명과 함께 항일활동 자금 조달, 조선어 보급, 문맹퇴치, 요인 암살 등을 목적으로 하는 ‘학우동인회’를 결성해 1년여 간 항일 활동을 했다. 학우동인회 회원인 이춘삼씨가 진해에서 헌병에 붙잡히면서 1944년 1월 아버지도 서울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2월 진해헌병대로 이송됐다.

    아버지는 헌병 하급자들에게 수 차례 고문당한 뒤 이들 헌병을 지휘하는 오장 시게미쓰(重光)와 대면했다. 시게미쓰 오장은 학우동인회 사건을 취조해 조서를 작성하는 업무의 총책임자로서, 아버지 일행 7~8명에 대한 고문은 모두 그의 지휘하에서 이뤄졌으며, 시게미쓰 본인이 직접 고문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시게미쓰 취조반의 갖은 고문을 참고 견뎠으나 물고문은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취조에 응하게 됐다. 물고문 때 아버지에게 물을 부은 사람은 다른 헌병이었지만, 시게미쓰 오장이 지시한 것이라고 아버지는 자서전에 썼다. 시게미쓰 등 취조반이 아버지와 동료들에게 행한 그 밖의 고문도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게미쓰 오장 등 취조관이 그렇게 한 것은 공을 세워 진급을 빨리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시게미쓰 오장(伍長)에게 취조당한 항일운동가의 피맺힌 증언

    고(故) 김주석씨의 생전 모습. 미술교사였던 그는 일본군 헌병대에서 고문당했던 상황을 삽화와 글로 자세히 남겼다.

    아버지가 감금, 고문당한 진해헌병대는 한국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길에서 아무 조선인이나 잡아와 고문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잡혀온 사람들에겐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사만 제공한 채 고문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진해헌병대에서의 감금생활이 지옥과 같았다고 회고했다(김한국씨의 글 중간에 들어간 굵은 체의 글은 김한국씨가 함께 보내온 부친 김주석씨 자서전의 관련 부분을 편집실에서 발췌한 것. 김주석씨가 쓴 글은 일부 지나치게 잔혹한 부분은 빼고 가능한 한 원문 그대로 싣는다-편집자).

    [서울에서 체포되어 진해로 온 대원들이 가설 유치장에 감금됐다. 진해헌병대에서 학우동인회 사건의 취조 수사는 친일파 중광(重光) 오장이 맡았다. 갑자기 도어가 열렸다. “가네와 수우샤꾸(金和周錫·김주석씨의 창씨개명 이름), 고찌 데데고이!(이리 나와!).” 무서운 눈초리로 고함치면서 불러댄다. 취조실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고노야로 혼마노 고도 이와나이도 코로시데 시까우(요놈 참말을 아니하면 죽여버릴 테다).” 일본 헌병은 고함을 지르며 긴 일본도를 높이 든 뒤 “얏”이라고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며 내리쳤다. 그 순간 나는 목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 어느 대원 할 것 없이 이런 식으로 위협을 가했다. 권총을 뽑아들어 실탄을 쏘아 보였다. 벽 창문을 뚫고 피융 하면서 실탄이 날아갔다.

    취조실에 들어가자마자 심한 고문을 받은 나는 정신을 잃었다. 아픔을 견디지 못해 무어라 대답했다. 그러자 헌병은 군용 사쿠라담배를 내밀면서 피우라고 권했다. 별로 피우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그러자 “피워” 하면서 큰 소리로 명령한다. 하는 수 없어 담배를 받아들었다. 조용히 몇 가지를 묻는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헌병은 손가락 사이에 막대를 끼워 조였다. 너무 아파서 못 견딜 정도였다.

    “소꼬니 스위치오 히네레”

    매일 고문에 시달리던 어느 날이었다. 헌병이 “김군 이리 나와”라고 말해 고랑쇄에 묶인 채 나갔다. 문 밖에는 2명의 졸병이 완전무장을 한 채 총검을 들고 서있었다. 중광 오장은 일본도를 빼 들고서 “네 놈은 보통 놈이 아니라 이 사건의 주모되는 악질 놈이다. 이리 따라 와”라고 말했다. 중광은 칼을 들고 앞서 가고 있었고 내 뒤로는 무장군인 2명이 따르고 있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엉뚱한 곳으로 몰고간다.

    중광은 “네놈을 이제 묻어버리려 하니 순순하게 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창고로 데리고 가더니 사람이 죽으면 넣는 관에 들어가라고 명했다. 나는 관에 들어갔다.

    중광 : “이놈을 저 구덩이에 넣어버려.”

    졸병 : “핫!”

    졸병들이 관을 구덩이에 넣었다.

    중광 : “바른 대로 말 못해. 순순히 말하면 살려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생매장할 것이다. 어때.”

    김주석 : “….”

    중광 : “안 되겠다. 묻어버려!”

    졸병 : “핫!”

    삽으로 흙 뜨는 소리에 이어 관 뚜껑에 흙 퍼붓는 소리가 계속 났다. 호흡이 점점 거칠고 급해졌으며 질식할 것 같았다. 나는 죽음의 일보직전까지 갔다. 실신했다.

    눈을 뜨니 온 몸이 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지켜보던 보초가 고함을 지르자 2명의 군인이 들것을 가져와 나를 들고서 유치장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리고는 담요 한 장을 덮어놓고 나갔다. 조금 있으니까 복도에서 군홧발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내가 누워 있는 곳으로 누군가 들어와 얼굴과 가슴을 만져보고는 “음, 아직 죽지는 않았군” 하면서 나가버렸다. 그 모습은 친일파 重光, 전라도 출생 한국인, 일본헌병 고쪼(오장)였다. 이런 참상을 한 번 더 당했다.

    나는 관속에 세 번째 들어갔다.

    헌병 : “오이, 소꼬니 스위치오 히네레(여봐, 거기에 있는 스위치를 돌려라).”

    그러자 관 안으로 물이 들어와 고이기 시작했다. 호스를 관 속으로 넣은 뒤 수도꼭지를 틀어 수장시키는 방법이었다. 코 위까지 물이 올라왔다. 헌병은 “요놈, 이래도 참말을 않을 테냐”고 고함을 쳤다. 관 속에서 물을 계속 들이켰다.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일단은 이 관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물밑에서 관 뚜껑을 두드렸다.

    헌병 : “관 뚜껑을 빨리 열어.”

    못을 박을 때는 장시간이 걸렸는데 뚜껑을 뗄 때는 잠깐이었다. 일어서자마자 마셨던 물을 토해냈다. 정신이 아찔했다. 헌병은 일본도를 배에 겨누면서 “이제 바른말을 하겠다고? 좋았어. 그럼 가자”며 나를 취조실로 몰고가는 것이었다. 나에 대한 물 고문은 한국인 친일파 重光이 일본인 헌병을 시켜서 집행한 것이었다. 내가 취조실에 들어갔을 때 벽에는 몽둥이, 막대기, 판자, 각목, 수막줄, 고랑쇄, 가죽혁띠, 집게, 송곳, 주전자, 물통 등이 걸려있고 피투성이가 된 채 묶여 있는 대원도 있었다.

    헌병 : “이번엔 바른 대로 말한다고 했으니 거짓은 안 하겠지.”

    나는 아무런 반항도 없이 묻는 것마다 무조건 “네”라고 답했다. 그리하여 우리 사건의 조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결말이 났다.

    어느 날 내가 의자에 묶여 취조 심문을 받고 있을 때였다. 내 곁에 힘이 세어 보이는 20대의 건강한 청년이 마루 바닥에 구부린 채 앉아 있었다. 헌병은 고문실에서 두께 6cm의 각목을 들고 와 그 청년의 무릎 사이에 끼운 뒤 무릎 위엔 널빤지를 걸친 다음 그 위에 의자를 얹어 타서 압력을 가해 눌러버리는 것이다. 앉아 있는 청년은 한마디도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눈, 코, 귀에 빠알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는 것이다.”

    진급 위해 항일인사 더 탄압

    헌병은 고문 광경을 보여주거나 고문 끝에 죽인 시체를 보여주면서 “너도 저렇게 죽인다”고 공갈했다. 고문의 종류로는 손가락 사이 막대를 꽂아 압축하는 방법, 양팔을 등 뒤로 넘겨 묶어서 매달아 놓는 방법(이렇게 하면 팔이 탈골되어 장애인이 되어 버린다), 주전자에 물을 담아와서 입과 코에 부어서 물을 마시게 하여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되면 헨조카(군화)로 배를 밟아 코와 입으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 방법, 옷을 벗긴 뒤 가죽끈으로 후려쳐 온 몸에 붉은 피멍 자국을 만들어 실신시키는 방법, 난롯 불에 철근을 붉게 달구어 피부를 지지는 방법, 기둥에 매단 뒤 몽둥이로 패는 방법, 의자에 앉혀놓고 전기감전을 시키는 방법, 일본도로 온 몸을 그어 칼자국을 남기는 방법 등이 있다. 만약 죽으면 여기선 재판도 법도 없고 누구에게 항의할 곳도 없다. 죽어도 그것으로 그만이다.

    모욕적 언사도 하는데, 한국인들이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여보’를 일본인들은 발음하지 못한다. 그래서 일본군 헌병들은 우리를 향해 ‘요보’라고 발음하고 ‘余亡’이라는 한자로 쓰는데 ‘망하다 만 민족’이라는 뜻이다.

    담당 취조관은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네들의 공을 높이 세우려는 야욕에서 고문 취조를 많이 했다. 실제로 한 사실도 개인 자격으로 당할 형벌 같으면 대담하게 말할 수 있지만 남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초래할 언사는 아니하니 고문도 무지무지하게 했다. 담당 취조관계의 헌병은 24시간 연속 취조 고문의 작업이니 교대로 잠을 자면서 고문하고 또 조서를 꾸미고 했다. 구속된 용의자는 생명만 붙여놓고 갖은 행패를 마음대로 하다가 만약 죽어버리면 보고서 정도로서 그치고 아무런 문제시도 안 한다. 일단 구속된 이는 몇 번씩 죽음의 고초를 당하여 바로 불구자가 되어버린다. 이리하여 진해헌병대 유치장 생활을 한 달 열흘을 더 하고 겨우 고문당하는 조사를 끝마친 뒤 군함에 태워져 부산형무소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사건은 중광 오장이 맡았고 진해-창원 일대의 소년항공대 사건은 친일파 대서(오니시) 오장이 맡았다. 백성들을 무차별 체포, 살상극을 일삼고 한국의 젊은이들을 희생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진해시설창 공작부에 근무하는 16~20세의 젊은 남자 직공이 출근하는 길가에 진해헌병대가 있었다. 손톱만큼의 의심을 받는 용의자는 무조건 출근하는 길목에서 일본 헌병에게 잡혀 헌병대 안에 감금됐다. 하루에 보통 15명 이상이 영문도 모르고 체포되어 고역에 고역을 치른 뒤 석방됐다.

    하루 3회 주먹밥과 다꾸앙 한쪽을 손에다 바로 주는데 그 양이 얼마나 적은지 20일이 지나도록 용변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겪은 헌병대 유치장 생활은 맞아서 아플 대로 아팠고 공갈협박에는 감각조차 없어져버렸으며 죽음과 삶은 생각조차 안 나고 괴로울 때는 어서 죽여달라고 몇 번을 외쳤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치안유지법, 국방보안법 위반죄로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44년 8월1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결혼을 하고 나를 낳았다. 아버지를 잡아가둔 부산형무소의 한국인 간수는 광복 후 부산교도소장이 됐다고 한다. 춧날 육군 장교가 된 학인동우회 사건 공범의 아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다.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된 아버지의 절망감은 매우 컸다. 아버지는 이를 이겨내고 광복후 교사임용시험에 당당히 합격해 미술교사가 됐다. 토목학을 전공한 아버지는 평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부산형무소에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놀랍게도 진해헌병대의 시게미쓰였다. 동포로서 당신을 고문한 시게미쓰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던 것이다. 아버지가 다시 만난 시게미쓰는 몇 달 사이(1944년 3~8월) 오장(하사)에서 군조(중사)로 승진해 있었다. 나는 지난 8월 신문에서 “1944년 7월 진해헌병대에서 대구사범 출신 시게미쓰 구니오 ‘군조’로부터 고문당했다”는 고문피해자들의 얘기를 읽었다. 이는 1983년 아버지가 자서전에 기록한 시게미쓰의 진급과정과 일치한다.

    1944년 8월1일 밤 8시경 되어서다.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입구 쪽에서 번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 앞에 와 크게 부르면서 문을 딴다. ‘127호367번’ 내 번호인 것이다. 방안의 동료들과 작별의 악수를 나눈 뒤 돌아서서 문을 나서는 순간 다리가 휘청하더니 주저앉고 말았다. 석방이라는 호출에 전신에 힘이 빠져버린 것이다.

    다음날 고향집에 도착했다. 나는 내심 많은 꾸중을 들을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4형제는 나를 칭찬했다. 그 다음날 나는 친일파 헌병의 행처를 알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진해헌병대로 대담하게 찾아갔다. 보초병에게 묻는다.

    “시게미쓰 겐뻬이(헌병) 있습니까.”

    보초병 : “네. 있습니다.”

    나는 사무실에 들어가 중광 헌병을 만났다.

    “시게미쓰 고쪼(오장)상, 안녕하십니까.”

    내가 인사를 하자 중광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니, 김군 아닌가. 언제 나왔어?”

    “네, 덕택으로 엊그제 나왔습니다.”

    약간의 침묵을 지키다가 중광은 “너희들이 이번에 나오게 된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관에서 관대히 본 것이니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중광을 바라보니 친일의 공을 세운 덕으로 오장에서 군조로 승급해 있었다. 이리하여 중광의 위치와 행방을 확인하고는 헌병대를 나왔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중광은 내가 처음 찾은 다음날 부산헌병대로 보직을 옮기고 말았다. 그 뒤에 수소문했지만 나는 기회를 놓쳐버렸고 시일은 흘러갔다. 나는 몸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지팡이를 집고 다녀야 하였으니 행동에 불편이 많았던 까닭도 있었다.]

    “나는 시게미쓰를 용서한다”

    광복 후 시게미쓰는 다시 신상묵으로 이름을 바꿔 한국경찰에 입문, 서남지구전투사령관 등 경찰 고위직에 올랐다고 들었다. 그러나 시게미쓰의 한국 이름을 알 리 없는 아버지는 시게미쓰의 행적을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눈감을 때까지 단 하루, 단 한시도 시게미쓰를 잊은 적이 없다. 시게미쓰는 평생 아버지의 육체와 정신을 괴롭힌 악몽이었다. 원망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아버지는 결국 시게미쓰를 용서했다. 나도 이제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친일파 중광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할지 궁리하고 있던 중 드디어 고대하던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하게 됐다. 그 뒤에도 전혀 중광의 소식과 위치를 몰랐으며 이제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생사조차 모른다. 친일 헌병은 일본에 붙어 납치, 체포, 공갈, 고문, 살인을 자기 소신껏 휘날려 나라 잃은 슬픔의 동족을 더 지옥의 아귀로 몰아넣은 존재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조금만 사색의 공백이 생기면 지난 날 고문받으며 고생했던 것이 떠오른다. 곧이어 병 주고 약 주며 자신의 야욕을 채워버린 친일족 시게미쓰(전라도 출생, 사범과 졸업, 현직 교사직 4~5년 했다) 고쪼(伍長)가 생각난다.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마음속에 파묻은 평생의 골병과 그 사람을 나는 관대히 대하겠다는 자세로 세월을 보냈다. 지금 그를 만나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조용히 말할 것이다. ‘나는 그 지난날의 죄악을 묻지 않는다. 다만 그대가 해방 후에 한국 사람으로서 개심하고 과거를 뉘우쳐 참회의 빛이 보이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이 자리를 떠난다’라고 할 것이다. 나에게 원수는 없다.]

    시게미쓰 오장(伍長)에게 취조당한 항일운동가의 피맺힌 증언
    시게미쓰 오장(伍長)에게 취조당한 항일운동가의 피맺힌 증언

    친일 일본군 헌병 시게미쓰에게 고문당한 고(故) 김주석씨가 자신의 자서전(왼쪽 맨위)에 직접 그린 고문받는 장면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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