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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잊혀진 과거사, ‘4·19 교원노조’ 사건

혁명군 군화에 짓밟힌 교육 민주화의 싹

  • 글: 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또 하나의 잊혀진 과거사, ‘4·19 교원노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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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치러진 3·15 부정선거는 교사들을 더욱 자괴감에 빠뜨렸다. 전국의 교사들은 정권 유지를 위해 조직적으로 동원됐다. 교실 환경 정리를 선거에 이용해 이승만, 이기붕의 사진을 게시해야 했고 수업참관 명목으로 학부모를 동원, 자유당 시책을 선전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심지어 일부 교사가 ‘3인조·5인조 공개투표’ 등 부정선거의 보조 요원으로 가담하기도 했다.

4·19 교원노조는 이렇듯 교사들의 치욕스런 경험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했다. 4·19혁명은 교원노조 탄생의 기폭제가 됐고, “교육이 정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교사들의 열망은 한층 강해졌다. “4·19의거로 희생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교사들의 결의가 자연스레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당면과제는 교원 권익 향상이 아니라 교육 민주화였다.

1960년 5월4일자 ‘영남일보’에 실린 ‘한국 교원동지의 분기를 촉구함’이란 격문은 교원노조 태동의 의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생님! 정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는 정의와 생명을 받쳐 싸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읍니까?’ 하고 정열에 불타던 그 눈동자! ‘비겁합니다’ 외치던 그들의 울부짖음! 우리에게 어찌 양심의 가책과 자괴가 없을소냐. 전국의 교원동지들이여! … 강철 같은 조직과 정열과 투쟁으로써 민주학원을 쟁취하자!”(대구지역 교원노동조합결성위원회)

2만명 동시다발 가입



5월7일 대구를 신호탄으로 전국 각 지역의 교원노조가 동시다발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대구 부산 서울 전주 등으로 교원노조 조직이 확대됐고, 7월29일에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보, 교육 자주성 회복과 학원 민주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국학대 강기철 강사가 4·19 교원노조 총연합회의 수석부위원장에 올랐고, 경북사대부고 이목 교사는 총연합회 사무국장으로 추대됐다. 경북지부의 김문심 위원장과 신우영 부위원장, 전남지부의 나철주 위원장, 충남지부의 서창선 위원장, 전주지부의 천건 위원장, 경기지부의 이동걸 위원장 등 각 지역의 대의원들도 뜻을 모았다.

당시 4·19 교원노조 본부가 파악한 전국의 조합원은 2만명에 이른다. 강기철씨는 “정부 탄압이 본격화된 이후, 노조 회원의 수에 대해 공식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 수가 한때 4만여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당시 초·중·고교사와 대학교수 등 전체 교원 수가 10만 명이 채 안 됐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규모다.

정확한 숫자를 확인할 수 없더라도, 4·19 교원노조의 기세는 대한교육연합회(이하 대한교련·‘한국교총’의 전신)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조는 당시 대한교련의 해체를 요구한 바 있다. ‘교원노조로부터 어용단체로 몰린 교총은 일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8만2000명이었던 교총 회원은 4·19혁명 이후 5만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교총 40년사’) 교총을 탈퇴한 교사들의 상당수가 교원노조에 가담했음을 짐작케 하는 자료다.

수업 거르지 않고 임한 단식투쟁

그러나 4·19 교원노조는 이내 ‘합법성과 필요성’이란 논란의 도마에 오르게 된다. 당시 노동조합법에 교사들의 노조 결성을 막는 조항은 없었지만 “신성한 교사들이 어찌 노동자를 자처하느냐”는 보수진영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만만치 않았다. 1960년 7월5일자 ‘동아일보’는 ‘교원노조는 필요 없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현재 교원노조의 동향을 정찰한다면 교원들의 복지향상에 목적을 둔 것처럼 위장하고 실인즉 모 정당의 학생조직의 전위로 되어 정치적 도구화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학계 대표 이종하 대구대 교수나 민주당 조재천 의원 등은 이구동성으로 교원노조의 합법성을 주장하며 ‘교원노조의 필요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조 의원은 “현행법상 충분히 교원노조를 결성할 수 있고, 교사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노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교원노조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 역시 교원노조의 활동을 끊임없이 막아섰다. 민주당 장면 정권은 노동조합법을 개정, 교사의 노조 설립을 금지하고자 했다. “제복 근무를 하는 소방관·형무관·경찰관 등은 노조를 결성할 수 없다”고 못박은 노동조합법 제6조에 ‘교사’라는 항목을 끼워넣고자 했던 것.

이에 9월26일 ‘노동조합법 개정안 철회’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이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3일간 이어졌다. 72시간의 단식투쟁 끝에 정부는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폐기처분했다. 당시를 회상하는 이목씨의 말이다.

“우리는 투쟁을 하면서도, 결코 수업을 거르지 않았지요. 수업은 교사의 가장 큰 사명이니까. 요령 피울 줄 모르고 단식을 진행하던 교사들이 쓰러져갔어요. 1300명의 교사 중 74명이 의식불명으로 교단에서 쓰러지고, 이증석 동지는 그 후유증으로 한달 후 숨을 거뒀습니다. 겨우 32세의 나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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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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