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호

또 하나의 잊혀진 과거사, ‘4·19 교원노조’ 사건

혁명군 군화에 짓밟힌 교육 민주화의 싹

  • 글: 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4-09-22 1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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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잊혀진 과거사, ‘4·19 교원노조’ 사건

    ▲1960년 4·19 교원노조 대구지부의 출범식 광경.<br>▶1961년 11월16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4·19 교원노조’ 관련 기사. 이날 교원노조 교사들은 용공 세력으로 몰려 10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7대 국회 개원일인 지난 6월7일. 삼엄한 경비 태세의 국회 정문 앞에서 한 노인이 1인 시위를 벌였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꼿꼿한 자세는 좀처럼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안경 너머로 비친 단단한 눈빛이 세월의 풍상을 짐작케 할 뿐이다.

    ‘17대 국회는 군사문화의 뿌리 5·16 군사쿠데타 진상규명 특별조사위원회를 즉각 구성하라! 4·19 한국교원노동조합 총연합회 대표자.’ 그의 목에 걸린 피켓을 뒤로한 채 국회의원들은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올 여름은 유난히 뜨거운 햇살이 아스팔트를 달궜다. 그러나 불볕더위도 매일 1인 시위에 나선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의 이름은 강기철(79). 4·19 한국교원노동조합(이하 4·19 교원노조) 총연합회의 대표자다. 44년 전 교원노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오래 전 이야기를 꺼내고자 하는 이유는 무얼까. 어떤 분노가 그를 이토록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는 호기심. 4·19 교원노조와의 첫 대면이었다.

    4·19 교원노조는 4·19혁명 직후 학원 민주화를 열망하던 교사들에 의해 탄생했다. 그러나 교원노조 1500명 교사들은 5 ·16 군사정권에 의해 용공세력으로 몰려 일제히 해직됐다. 졸지에 ‘수괴’가 된 노조 간부급 교사들은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교육 자주화와 학원 민주화를 꿈꾸던 교사들의 순수한 열망은 1년 만에 철저히 파괴됐다

    강씨는 4·19 교원노조 총연합회의 대표자로, 혁명재판부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후에도 사회안전법이란 족쇄에 묶여 10년이 넘도록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1960년 당시 국학대학 사학과 강사로 재직하던 그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매일같이 옥바라지를 하던 아내는 그가 옥에 갇힌 지 4년 만에 심장 마비로 숨졌다. 아들은 ‘연좌제’의 적용을 받아 군 장교에 지원할 수 없었다. 가족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가장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진실 규명’ 의지는 강해졌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4·19 교원노조 사건은 아직도 정치적으로 살아 있는 역사요. 정치적 음해와 조작으로 수십 년간 그 진상이 밝혀지지 못했지. 나는 몸이 아플 틈이 없소. 뒤늦게나마 용공조작된 교원노조 사건을 알리고 동지들의 명예를 회복해야 하니까. 갈 길이 멉니다.”

    ‘신동아’가 4·19 교원노조에 몸담았던 이들의 삶을 추적하기로 한 것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의 마지막 증언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4·19 교원노조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역시 “이목(82·‘4·19 교원노조’ 사무국장·전교조 자문위원)씨 외에 연락이 닿는 관련자가 없다”고 했다. 군사정권 시절 ‘빨갱이’란 멍에를 지고 살아온 교원노조 관계자들은 자신의 이력을 감추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일부 노조 관련자들은 ‘진실 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제도적·정치적 한계 때문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신동아’는 40년 전 혁명재판부의 공소장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옥고를 치른 교원노조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을 찾아냈다. 이들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기억하는 사무치는 아픔의 흔적들이었다. 다음은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4·19 교원노조사(史)다.

    “내한테 그렇게 말해도 싸다”

    1960년 2월28일 대구. 자유당과 야당의 선거전이 한창인 일요일이었다. 야당의 선거유세(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예정된 이날, 각급 학교의 학생들은 환경미화나 잡초 뽑기를 한다는 명목으로 모두 학교에 등교해야 했다. 당시 경북여고 교사였던 여학룡(80)씨는 그때를 잊지 못한다. 초롱거리는 눈망울로 “진실이 무엇이냐”고 묻는 학생들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선생님, 질문 있습니데이. 하필 야당의 강연회가 있는 일요일에 모든 학생들을 등교시킨 이유가 뭡니꺼. 거짓말은 하지 마이소. 우리한테는 정의를 말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 이율배반 아닙니까. 선생님, 비겁합니더.”

    “그래. 느그들이 내한테 그렇게 말해도 싸다.”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는 여씨에게 학생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변명하기 급급한 다른 교사들과 달리 솔직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경북여고,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등에 재학중인 수천 명의 학생들은 일제히 ‘일요일 등교지시 거부투쟁’에 들어갔다. 반면 교사들은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을 막아서는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해야 했다. ‘대구 2·28 학생시위’로 불리는 이날의 궐기는 교사들의 양심에 파문을 일으킨 신호탄이 됐다.

    이후 치러진 3·15 부정선거는 교사들을 더욱 자괴감에 빠뜨렸다. 전국의 교사들은 정권 유지를 위해 조직적으로 동원됐다. 교실 환경 정리를 선거에 이용해 이승만, 이기붕의 사진을 게시해야 했고 수업참관 명목으로 학부모를 동원, 자유당 시책을 선전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심지어 일부 교사가 ‘3인조·5인조 공개투표’ 등 부정선거의 보조 요원으로 가담하기도 했다.

    4·19 교원노조는 이렇듯 교사들의 치욕스런 경험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했다. 4·19혁명은 교원노조 탄생의 기폭제가 됐고, “교육이 정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교사들의 열망은 한층 강해졌다. “4·19의거로 희생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교사들의 결의가 자연스레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의 당면과제는 교원 권익 향상이 아니라 교육 민주화였다.

    1960년 5월4일자 ‘영남일보’에 실린 ‘한국 교원동지의 분기를 촉구함’이란 격문은 교원노조 태동의 의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생님! 정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는 정의와 생명을 받쳐 싸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읍니까?’ 하고 정열에 불타던 그 눈동자! ‘비겁합니다’ 외치던 그들의 울부짖음! 우리에게 어찌 양심의 가책과 자괴가 없을소냐. 전국의 교원동지들이여! … 강철 같은 조직과 정열과 투쟁으로써 민주학원을 쟁취하자!”(대구지역 교원노동조합결성위원회)

    2만명 동시다발 가입

    5월7일 대구를 신호탄으로 전국 각 지역의 교원노조가 동시다발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대구 부산 서울 전주 등으로 교원노조 조직이 확대됐고, 7월29일에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확보, 교육 자주성 회복과 학원 민주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국학대 강기철 강사가 4·19 교원노조 총연합회의 수석부위원장에 올랐고, 경북사대부고 이목 교사는 총연합회 사무국장으로 추대됐다. 경북지부의 김문심 위원장과 신우영 부위원장, 전남지부의 나철주 위원장, 충남지부의 서창선 위원장, 전주지부의 천건 위원장, 경기지부의 이동걸 위원장 등 각 지역의 대의원들도 뜻을 모았다.

    당시 4·19 교원노조 본부가 파악한 전국의 조합원은 2만명에 이른다. 강기철씨는 “정부 탄압이 본격화된 이후, 노조 회원의 수에 대해 공식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 수가 한때 4만여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당시 초·중·고교사와 대학교수 등 전체 교원 수가 10만 명이 채 안 됐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규모다.

    정확한 숫자를 확인할 수 없더라도, 4·19 교원노조의 기세는 대한교육연합회(이하 대한교련·‘한국교총’의 전신)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조는 당시 대한교련의 해체를 요구한 바 있다. ‘교원노조로부터 어용단체로 몰린 교총은 일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8만2000명이었던 교총 회원은 4·19혁명 이후 5만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교총 40년사’) 교총을 탈퇴한 교사들의 상당수가 교원노조에 가담했음을 짐작케 하는 자료다.

    수업 거르지 않고 임한 단식투쟁

    그러나 4·19 교원노조는 이내 ‘합법성과 필요성’이란 논란의 도마에 오르게 된다. 당시 노동조합법에 교사들의 노조 결성을 막는 조항은 없었지만 “신성한 교사들이 어찌 노동자를 자처하느냐”는 보수진영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만만치 않았다. 1960년 7월5일자 ‘동아일보’는 ‘교원노조는 필요 없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현재 교원노조의 동향을 정찰한다면 교원들의 복지향상에 목적을 둔 것처럼 위장하고 실인즉 모 정당의 학생조직의 전위로 되어 정치적 도구화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학계 대표 이종하 대구대 교수나 민주당 조재천 의원 등은 이구동성으로 교원노조의 합법성을 주장하며 ‘교원노조의 필요성’을 설파하기도 했다. 조 의원은 “현행법상 충분히 교원노조를 결성할 수 있고, 교사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노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교원노조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 역시 교원노조의 활동을 끊임없이 막아섰다. 민주당 장면 정권은 노동조합법을 개정, 교사의 노조 설립을 금지하고자 했다. “제복 근무를 하는 소방관·형무관·경찰관 등은 노조를 결성할 수 없다”고 못박은 노동조합법 제6조에 ‘교사’라는 항목을 끼워넣고자 했던 것.

    이에 9월26일 ‘노동조합법 개정안 철회’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이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3일간 이어졌다. 72시간의 단식투쟁 끝에 정부는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폐기처분했다. 당시를 회상하는 이목씨의 말이다.

    “우리는 투쟁을 하면서도, 결코 수업을 거르지 않았지요. 수업은 교사의 가장 큰 사명이니까. 요령 피울 줄 모르고 단식을 진행하던 교사들이 쓰러져갔어요. 1300명의 교사 중 74명이 의식불명으로 교단에서 쓰러지고, 이증석 동지는 그 후유증으로 한달 후 숨을 거뒀습니다. 겨우 32세의 나이였는데….”

    또 하나의 잊혀진 과거사, ‘4·19 교원노조’ 사건

    1960년 9월 ‘노동조합법 개정안 철회’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으로 지친 경북여고 교사들이 교무실에 쓰러져 있다.

    단식 투쟁으로 숨을 거둔 이증석씨의 아들 이원배(51·한반도재단 운영이사)씨는 당시 일곱 살이었다. 이씨의 집안은 선친의 죽음으로 생계에 큰 타격을 받았고, 그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됐다. 1999년 전교조가 합법화되자, 그는 선친의 묘소를 찾아가 “아버지의 못다한 꿈이 30년 만에 이뤄졌노라”며 눈물을 떨궜다고 했다.

    4·19 교원노조는 합법성 수호 투쟁은 물론 독재 정권에 아부하는 교육행정관료 숙청, 사학재단비리 척결 등 학원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2대 악법으로 불리던 ‘반공임시특별법’ ‘집회·시위 운동에 관한 법률(데모 규제법)’의 입법화 움직임에도 적극적인 반대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당당한 기세는 예상치 못한 폭풍을 만나 1년 만에 산산조각나버리고 만다.

    용공분자로 몰린 1500명

    1961년 5·16쿠데타로 출범한 군사정권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 국가권력을 장악하며 여러 혁신계 정당·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각 조직 간부들을 용공분자로 몰아 전격 체포했다. 정치 단체와 관련이 없는 4·19 교원노조의 간부들도 하루아침에 ‘용공 인사’로 둔갑했다.

    5월17일 교원노조 대표 강기철씨의 구속에 이어 전국의 조합간부 1500명이 학교에 들이닥친 경찰에 붙잡혔다. 이 중 ‘수괴급’ 54명이 서대문형무소에 압송돼 혁명재판을 받았다. 당시 치안국에서는 용공분자 2000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는데, 그중 75%가 교원노조소속 교사들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간 노조 간부들이 극심한 고문 끝에 간첩 내지 용공 혐의자로 조작되는 동안 문희석 문교부 장관은 6월8일 “교원노조가 민주당 정부를 전복하고 대한민국을 공산화하려던 음모가 발각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신문 결과 혐의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자 이번에는 월남한 노조 간부들을 대상으로 간첩 혐의를 추궁하는 조사가 벌어졌다.

    당시 경기도연합회 위원장이었던 실향민 이동걸씨는 출옥 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억울함과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평양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한 그는 고초를 당하기 전 인천 수산고의 훈육주임교사로 재직중이었다.

    노조 발목잡은 ‘특별법’

    기본 법률로는 처벌할 근거가 없던 이들에게 새롭게 씌워진 올가미는 ‘특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6조’였다. 제정일로부터 3년6개월 이전까지 적용이 가능한 ‘소급법’이었던 이 법률은 ‘반국가 단체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단체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거나 기타의 행위를 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에 의거해 검찰이 문제삼은 대목은 교원노조가 ‘2대 악법(데모 규제법, 반공임시특별법) 반대투쟁에 참가했다’는 것과 ‘서울대 민통련이 주장한 남북학생회담안을 환영한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기철씨는 “민주당 정권이 제정을 추진한 2대 악법은 4·19 정신을 역행한 반민주 악법이라는 이유에서 다른 정당과 사회단체, 언론단체도 함께 반대했다”고 말한다. 더욱이 남북학생회담에 대해서는 교원노조가 지지하거나 동조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 이 대목에서 강대표의 목소리는 고조됐다.

    “당시 교원노조 강령에는 ‘우리는 4월혁명 정신을 받들어 투철한 반공이념하에 민주학원 건설의 선봉이 될 것을 기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어요. 국제자유교원노조연맹(IFFTU)에도 가입한 조직을 용공단체로 모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조작 아니오.”

    삼엄한 군사정권의 등장과 함께 교원노조를 지지하던 이들도 등을 돌렸다. 이목 교사는 혁명재판에 끌려 다니던 중 민주당 의원 시절 교원노조의 합법성에 동의했던 조재천 장관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민주당의 경찰 정보가 어떠했기에 교사들을 정치재판에 회부합니까?”

    냉랭한 표정의 조 장관으로부터 한참 만에 대답이 돌아왔다.

    “이 선생, 전국에 교원들이 얼마인데(당시 통칭 20만) 그들이 단결하면 그 조직에 당해낼 정부가 있나요?”

    이목 교사는 “우리는 정치운동 단체가 아니지 않느냐”고 되물었지만, 조 장관은 “그것이 정치”라며 돌아섰다. 이것이 교원노조가 처한 현실이었다.

    1961년 11월16일. 혁명재판소 심판 제3부 (재판장 김정운)는 강기철 징역 15년(구형 15년), 신동영(총연합회 선전부장·당시 38세·작고) 징역 10년(구형 12년), 이목 징역 10년(구형 12년), 신우영(77·경북지부 부위원장) 징역 5년(구형 1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후 대구교원노조 사건으로 기소된 여학룡(80·대구지부 부위원장) 징역 3년에 5년간 집행유예, 2대 악법 반대 연대투쟁 사건에 기소된 김문심(경북지부 위원장·당시 50세)씨에 대해서는 무기징역(구형 사형)이 선고됐다. 재판정에는 숨이 막힐 듯한 고요가 흘렀다. 재판은 단심(單審)으로 끝났다. 하루아침에 ‘간첩’이란 굴레가 이들에게 씌워졌다. 지옥 같은 고통이 시작됐다.

    강직한 지조의 김문심

    당시 혁명재판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문심씨와 그의 가족에겐 모진 풍파가 몰아닥쳤다.

    1960년 5월29일, 대구농고의 교사였던 김씨는 경북교조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그의 나이 쉰. 노조 교사들 중 가장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강직한 성정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학교장이 비교육적 행태를 보이면 뒤에서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당당히 면전에서 바른 말로 지적했다. 그의 당당함은 교장의 미움을 샀지만, 동료교사들에겐 신망을 얻었다. 게다가 와세다대 정경학부 출신으로, 당시 얼마 되지 않는 유학파 엘리트였다. 일본 교원노조 모델을 참고한 4·19 교원노조의 강령도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4·19 직후 벌어진 2대 악법 반대 투쟁을 이끌었다는 이유로, 그는 혁명재판부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혁명재판부에게 북한 출신에다 동료들로부터 신망받는 핵심 브레인이었던 그는 ‘제거대상 1순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1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된 김씨는 감형조치로 징역생활 10년 만인 1970년 2월25일 출소했다.

    김씨의 장남 김길중(63·사단법인 고려인삼포럼 상임이사)씨는 선친이 눈물을 보이는 모습을 꼭 한 번 서대문형무소에서 목격했다. 항상 흔들림 없었던 아버지의 눈물에 김씨는 슬픔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것을 느꼈다.

    “싸늘한 공기가 채 가시지 않던 2월, 새벽같이 아버지가 계신 서대문형무소를 찾았습니다. 늘 꼿꼿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그날따라 부어 있었고, 머리칼도 듬성듬성 빠져 있었어요. 놀라 ‘고문을 당하셨냐’고 묻자 교도관이 제지했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따름이었습니다.”

    출소 후에도 사회안전법에 묶여 늘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던 김씨는 울분을 삼키며 프랑스 문학사를 번역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당시 교원노조에서 함께 활동하다 권력과 타협해 출세한 동료의 연락은 아예 받지도 않았다. 불의의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유배한 김씨는 5년 동안 전립선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1987년 한 많은 생을 마쳤다.

    김씨의 가족에게도 고난이 닥쳐왔다. 경북여고 가사 교사였던 김씨의 부인 김용아(1999년 작고)씨는 남편이 구속된 후 집에서 2시간이나 떨어진 아포중학교로 쫓겨났다. 네 시간이나 걸려 출퇴근을 하고, 대구구치소로 이감된 남편을 면회하는 고달픈 삶이 이어졌다.

    5·16 당시 경북고 3학년에 재학중이었던 장남 길중씨와 같은 학교 2학년이던 차남 안중씨(62·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사춘기 시절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김씨가 혁명재판부에 기소된 직후 경북고 교문에는 ‘국제공산주의자 김문심을 극형에 처하라. 군민회’란 벽보가 붙었는데, 이를 보는 순간, 두 형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후 길중씨에게는 교문에 들어설 때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버릇이 생겼다. ‘연좌제’의 족쇄는 이후에도 이들 가족을 망령처럼 괴롭혔다. 여권을 발급받기도, 취업을 하기도 힘겨운 삶이었다.

    세월은 흘러 민주화가 이뤄졌고, 가족들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대한 마음의 짐을 지고 있다. 길중씨는 “현 정치권의 386 인사들 보면 자신들이 지나온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은 높게 평가하면서 정작 그 토대를 마련한 6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선 외면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또 하나의 잊혀진 과거사, ‘4·19 교원노조’ 사건

    국회 앞에서 5·16 군사쿠데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강기철 대표.

    한편 4·19 교원노조의 명맥을 이어간 인물도 있었다. 1960년 당시 경북 교원노조 부위원장과 총연합회 사무국장직을 맡았던 이목씨는 전교조의 출범에 함께 참여했다. 혁명검찰부에 의해 5년간 옥고를 치른 이씨는 출소 후에도 못다한 교원노조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지금도 전교조의 원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8월에는 ‘남북교육자통일대회’ 행사차 금강산에 다녀오기도 했다. 4·19 교원노조의 역사를 남기고자 1989년에는 ‘한국교원노동조합운동사’를 발간하기도 했다.

    82세의 고령에도 이씨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고통스런 과거를 응시하면서도 좀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1960년대 당시 사흘에 한 번씩 경찰이 찾아와 장판까지 뜯어서 집을 샅샅이 뒤지곤 했지. 집 앞에 문패조차 달 수 없는 상황인기라. 무엇으로 얽혀 누명을 쓸까봐 사람들을 마음 편하게 만날 수도 없고, 여권을 신청할 때마다 국가정보원에서 검토하느라 남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고 평생 감시당하는 삶을 살았지…”

    이씨는 현재 전교조의 구성원들에게 ‘살아 있는 신화’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에서 숨죽여 살아온 많은 4·19 교원노조 교사들은, 사회와 연을 끊고 살아왔다.

    경북지부 부위원장을 지낸 신우영씨. 그에겐 40년 전의 불행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현재 대구 지저동의 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신씨는 반신불수의 몸으로 당뇨 합병증과 싸우고 있다.

    1960년 혁명재판부에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신씨는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6개월 복역한 뒤 출소했다. 그가 영어의 몸이 된 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친척과 이웃은 그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 친구의 사업을 물려받은 뒤 한동안 경제적 안정을 이루는 듯했지만, 1980년대에 부도를 맞았다.

    현재 병마와 싸우는 신씨를 찾는 가족은 없다. 하나뿐인 아들은 어디에 살아있는지 연락처조차 알 길이 없다. 신씨의 아내 지용분(78)씨는 기자에게 “이 집을 방문한 손님은 처음”이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신씨는 경계심이 누그러진 후에야 가슴속에 품어온 이야기를 털어놨다.

    “가슴속에 묻고 살아온 세월이요. 그래도 우리 나름대로 바른 목소리를 냈다고, 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자부하고 있어. 그런데 고향에 내려가면 모두 나를 ‘빨갱이’라 부르며 상종도 하지 않았지. 구속된 나를 면회 오는 사람도 없었어요. 이가 갈리게 세상을 증오했지. 이젠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건장한 체격과 당당함으로 동료를 이끌던 신씨는 40년 세월의 풍파에 몸도 마음도 모두 쇠한 듯했다.

    빨갱이로 외면당한 세월

    대구교원노조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른 여학룡(80) 교사는 자신의 고향인 경북 상주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영어와 일본어를 가르치며 홀로 살아가고 있다. 1960년 당시 경북여고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친 그는, 대구교원노조를 탄생시킨 주역이다. 1960년 4월27일 대구의 각급학교에 전화연락을 하고, 뜻있는 교사들의 모임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1964년 출소한 그에게 ‘살아남는 것’은 가장 큰 과제였다. 풍비박산 난 집안사정과 공납금이 없어 학교에서 쫓겨난 자녀들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파면당한 이후 동료 교사들도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중국음식점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은 제자가 중국집에서 물을 따르는 여씨를 보고 깜짝 놀라 도망간 일도 있었다.

    ‘사면초가’에 처한 그를 구한 것은 신문사 일이었다. ‘대구일보’의 업무국장직을 맡게 됐던 것이다. 전교조가 탄생하고 합법화되는 과정을 보면서 그는 가슴속에 감춰둔 ‘4·19 교원노조’ 이야기를 꺼내놓고 싶었다. 끝없는 망설임의 과정이었다.

    그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1960년부터 지금까지 모아둔 ‘교원노조’ 관련 기사와 혁명재판 관련 서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행여 경찰에 압수될까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까, 땅에 묻고 숨기며 간직한 자료였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길 이야기가 아니겠지요? 나는 학생들에게 떳떳하고 양심적인 교사가 되고 싶었을 뿐입니다. 내 월급을 더 받기 위해서도,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지요. 지금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전교조에 비해 그 존재조차 유명무실한 우리의 투쟁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4·19 교원노조 활동으로 파면된 1500명의 교사들에게도 비참한 삶은 이어졌다. 교육부는 심사를 거쳐 파면된 교직원들을 선별 복직시켰으나, 사건이 터진 지 3년이 지나도록 400명의 교사들은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낙향해 농사를 짓거나 아내를 접대부로 보낸 사람에서부터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까지 비참하게 스러져간 이들의 삶은 일일이 글로 담지 못할 정도다.

    소설가 조성기(53)씨 역시 4·19 교원노조 경남지부 초등학교연합 위원장을 지냈던 선친 조인식(1980년 56세로 작고)씨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1961년 5월 실종된 줄만 알았던 그의 아버지는 육군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부산 봉래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해직된 후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매일 술을 마시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1983년 발표된 자전소설 ‘야훼의 밤’에는, 조씨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소설 속에 묘사된 아버지는 교원노조 활동으로 용공세력으로 몰리고, 감시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알콜 중독으로 점점 미쳐가는 인물이었습니다. 소설을 본 선친의 지인들은 ‘너희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아느냐’며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다만, 교원노조 사건으로 한 가족사가 얼마나 무참히 무너질 수 있는지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교원노조 소외시킨 민주화 보상법

    40년 세월이 흘렀지만 4·19 교원노조 사건은 여전히 ‘명예회복’ 절차에서 비껴나 있다. 법적 제도적으로 이들의 존재는 철저히 소외돼 있기 때문이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교원노조 사건을 비롯, 소위 혁명재판부가 처리한 정치사건들은 혁명과업 수행을 위한 조처라는 나름의 명분에 가려 재심의 길이 봉쇄됐다. 제3공화국 헌법부칙 제4조, 2~4공화국 헌법부칙 제11조에는 재심의 길을 막는 명문이 박혀 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진상 규명의 길은 요원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5·16은 군사쿠데타’로 규정하자, 강기철씨는 국회를 상대로 ‘5·16 진상규명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을 청원하려고 했다. 이때 34명의 여야 국회의원이 지지성명에 참여했고, 당시 정대철 민주당 의원은 ‘교원노조 사건이야말로 쿠데타 정권의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이라 규정했다. 하지만 청원은 불발에 그쳤다. 전교조가 불법단체로 규정된 상태에서 30년 전 교원노조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마련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하 민주화 보상법)의 탄생에 기대를 걸었지만, 4·19 교원노조는 진실 규명 대상에서 제외됐다. 강씨는 2001년 11월 “민주화 보상위원회로부터 교원노조 사건과 관련, 투옥된 것은 3선 개헌 발의일 이전의 일이므로 보상법을 적용받을 수 없다”는 통지문을 받았다. 다음해 2월 재심을 청구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김길중씨는 이 대목에서 “김대중 정부와 5·16 군사쿠데타의 주체인 김종필 자민련 전 대표와의 정치적 야합이, 5·16 직후 벌어진 용공조작 사건의 진실 규명을 교묘히 막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강씨는 명예회복을 위한 법적 소송을 검토하기도 했다. 4·19 교원노조 사건에 대해 재심청구소송, 교원노조 간부들을 얽어맸던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6조의 위헌을 묻는 헌법 소원, 사회안전법에 의거한 보안 처분에 대한 원인무효소송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변호사가 소송을 포기해 명예회복을 향한 노력은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이제 공은 17대 국회와 노무현 정부로 넘어왔다. ‘과거사 진상규명’ 의지를 밝힌 참여정부가 과연 지금껏 진실규명에서 소외돼온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40여년간 역사 속에 묻혀 숨죽이며 살아온 이들은 ‘생의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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