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호

건국 이후 첫 여성 대법관 된 김영란 판사

“법원·가정, 양쪽 모범생 하느라 눈물 숱하게 떨궜어요”

  • 글: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4-09-22 17: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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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 이후 첫 여성 대법관 된 김영란 판사
    종래의 흐름대로라면 대법관은 사법시험 12회(1970년 합격) 전후에서 나왔어야 한다. 김영란(金英蘭·48) 대법관은 1978년에 합격한 사법시험 20회 출신이다. 무려 8년 선배들을 건너뛴 파격 인사였다. 그러나 대법원 속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은 “김 판사는 시기가 문제였지 반드시 대법관이 될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최종영 대법원장은 여성 법관 중에서 대법관이 나올 때가 됐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건국 이후 첫 여성 대법관을 제청한 대법원장이라는 기록을 남기려는 욕심이었을까. 그는 지난해 8월에도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여성인 전효숙씨를 지명했다.

    외부에는 공개하지 않은 사항이지만, 최 대법원장은 대법관 제청자문위원회에 이영애 전수안 김영란씨 3명을 올렸다. 모두 여성 법관이다. 제청자문위는 법조계와 시민단체, 개인의 추천을 더 받아 그중 김영란 전수안 박시환 이홍훈씨 4명을 골라냈다. 최 대법원장은 이중에서 김영란씨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단독 제청했다.

    국회에서 인준안이 압도적 다수(찬성 208표)의 찬성으로 통과된 날 남편인 강지원(55)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김 대법관과 함께 있다고 했다. 김 대법관이 “대법원에 나가지 않는 토요일에 집에서 인터뷰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오전 9시에 하자”고 제의하자 “집안이 너무 어질러져 있어 신경 쓰이는데…” 하면서도 동의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토요일 아침 분당 신도시에 있는 김 대법관 집을 찾아갔다. 강 변호사는 없었다. 그는 매일 아침 KBS 1라디오에서 ‘안녕하십니까, 강지원입니다’라는 시사프로그램을 1년 넘게 진행하고 있다.



    최종영 대법원장이 단독 제청

    판사들은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하다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해간다. 재판연구관은 대부분 판사들이 경력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할 정도로 고달프다는 자리다. 김 대법관은 2년 임기의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5년이나 했다. 이때 쌓은 실력과 성실성은 대법관이 되는 데 밑받침이 됐다. 김 대법관이 재판연구관을 할 때 최종영 대법원장은 대법관과 법원행정처장을 번갈아 하고 있었다.

    -최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할 때 김 대법관이 재판연구관 시절에 올린 검토보고서를 읽어볼 기회가 자주 있었겠군요.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고 뵈었더니 말씀하시더라고요. 내가 썼던 검토보고서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다고.”

    -그때 실력을 인정받은 거로군요.

    “우리가 재판연구관으로 갈 때는 다 실력 있는 사람들로 뽑아간다고 했죠. 동기들이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해 갈 때도 나를 안 내보내고 2년간 더 연구관 일을 시켰죠. 내가 동기들보다 1년 먼저 갔고 2년은 동기들하고 같이 있었고 2년은 동기들 떠난 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5년이죠. 동기인 김수형씨(서울고법 부장판사)와 내가 최장기록을 세웠는데 그 기록이 아직 안 깨지고 있어요.”

    재판연구관에는 대법관에 전속된 연구관이 있고 공동 연구관이 있는데 김 대법관은 공동 연구관이었다. 공동 연구관에게는 새로운 판례를 만드는 어려운 과제가 배당된다.

    -강병섭 전 서울중앙지법원장은 법원을 떠나면서 사법부가 바깥바람에 흔들린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는데요.

    “대법원장이 시기적으로 여성 헌재재판관이나 여성 대법관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 지 오래라고 해요. 나도 신문만 봐서 잘 모르겠지만 (강병섭 원장이) 무얼 항의하는 것인지…. 인사청문회에서 역차별이 아니냐고 질문하는 의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청과정에 시민단체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김 대법관은 대법관 제청후보가 발표된 후 사표를 낸 이영애 전 춘천지방법원장(사시 13회)에 관한 언급은 피했다. 김 대법관의 경기여고 서울법대 선배인 이영애씨는 전효숙 헌재 재판관 임명 때도 비켜갔으니 인사권자의 마음 밖에 있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 같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가장 대답하기 난감했던 질문은 어떤 거였습니까.

    “국가보안법, 친일진상규명법처럼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안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판사가 분명한 의견을 공개하면 재판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판결의 설득력도 떨어집니다. 여당 쪽에 가까운 답변을 하면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돼 야당 쪽에서는 내 판결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겠죠.”

    -임명장을 받은 직후 기자회견에서 “남편은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시부모 부양 등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고 말했는데요. 정확하게 무슨 의미입니까.

    “결혼 초에는 이 사람도 ‘남자는 이래야 된다’ ‘여자는 이래야 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더라고요.”

    김 대법관은 남편을 ‘이 사람’이라고 호칭했다. 여성들이 다른 사람 앞에서 남편을 부르는 말은 ‘애 아빠’ ‘남편’ ‘우리 그이’ ‘신랑’ ‘자기’ 등으로 다양하다. ‘이 사람’이라는 호칭을 쓰는 아내는 드문 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들과 딸을 키우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 선입견에서 자유롭기는 어렵죠. 그런데 자기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니까 고치더라고요. 많이 달라졌어요. 옛날 황 위원께서 보셨을 때 하고 지금은 달라지지 않았나요.

    옛날에 여자는 남자의 세계관 속에 들어가 사는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지요. 강 변호사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죠. 나는 남자가 그런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조차 잘 모르고 결혼했죠. 남편은 아니다 싶으니까 스스로 변하더라고요.

    며느리로서 시부모 모시기가 힘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대가족 제도와 노인 문제도 생각하게 됐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관계로 생각을 확대해나갔죠.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남편이 ‘우리는 부모 모시는 노하우가 있지 않느냐’며 자기 부모를 모셨으니까 처가 부모도 모시자고 하더군요. 친정어머니도 건강이 안 좋거든요. 그 얘기를 친정식구들한테 했더니 참 고마워하데요.”

    -남자들은 편하게 말하는 경향이 있어요. 자기가 직접 수발을 들지 않으니까.

    “시아버님이 치매를 6년 가까이 앓으셨거든요. 씻고 닦아드리는 일을 여자들은 힘에 부쳐 못하잖아요. 시아버님이 옛날 분치고는 키가 크셨어요. 보성전문 농구선수를 하셨대요. 남편보다 크셨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많이 했죠.”

    응접실 벽에 2001년에 찍은 강 변호사의 어머니 이효임 여사의 미수(米壽·88세) 잔치 사진이 걸려 있다. 이 여사는 올 3월에 91세로 세상을 떴다. 인생의 마지막 여로(旅路)에서 2년 반 가량 자리보전을 했다.

    “넘어지셨다가 다친 뒤로 골다공증이 겹쳐 누워지내셨죠. 시누이 집이 옆이거든요. 다치기 전에는 시누이 집까지 걸어가셨는데…. 가끔 시누이 집 가다가 길을 잃었지만 이 동네에서는 어머님을 다 아니까 괜찮았어요. 분양받아 10년 넘게 살고 있거든요.”

    -시아버님이 치매를 앓으실 때는 어땠나요.

    “치매라는 병을 몰라 아버님이 처음에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데 내가 ‘대체 아버님 왜 그러세요’ 하며 화도 내고 그랬어요. 안 그러던 분이 이상한 행동을 하셔서. 그 병을 잘 알았더라면 초기부터 대응을 잘했을 텐데….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시부모를 모시다 보니 노인 문제를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노인도 아이와 똑같거든요. 보호해줘야 하고 외출할 때 모시고 나가야 되죠.”

    “점수 따지면 남편은 나보다 나은 사람”

    최근 미국 컬럼비아대 내과의사 겸 의학사(醫學史) 교수인 바론 러너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사망을 계기로 뉴욕타임스에 ‘긴 작별을 위한 계획’이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낸시 레이건은 남편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후 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하는 활동을 했다. 러너 교수는 낸시가 한걸음 더 나아가 남편의 병이 진행된 과정과 가족들의 대응을 공개했어야 한다고 썼다. 그래야 같은 병을 앓는 환자와 가족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노인들이 치매에 걸리거나 거동이 힘들어지면 서구에서는 대개 요양시설에 들어가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부모가 그런 시설에 들어가면 자식들 체면이 깎인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는데요.

    “아직 우리 부모님 세대는 시설에 들어갈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요. 모셔보니까 가족의 사랑이 필요해요. 치매환자일수록 어린애하고 똑같아지니까요. 어린애가 엄마 찾고 엄마 등에 매달리듯이. 가족만이 그 양반들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딜레마예요.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죠. 우리 애들에게 내가 그렇게 되면 요양시설에 보내고 가끔 찾아온다고 약속하라고 했죠. 그랬더니 애들은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께 하는 거 봤으니까 우리가 모신다’고 말하지요. 부모 마음은 자식한테 짐을 주고 싶지 않은 거죠. 내가 해봤더니 가족의 사랑이 필요해요. 아기 같아져요. 내가 ‘왜 식사를 들지 않으시냐’고 조금 화내면 싫어하세요. 옆에서 노래 불러주면 좋아하시고요.

    어머니는 마지막 한 달 정도 거의 곡기를 끊으셨어요. 다른 사람이 음식을 먹여드리면 안 삼키고 다 뱉어내시는데 아들이 주면 잡수시더라고요. 그게 가족이 돌보는 것과 요양시설의 차이지요.”

    건국 이후 첫 여성 대법관 된 김영란 판사

    김영란 대법관은 여성인 자신을 대법관에 임명한 조치가 ‘대법원이 정책법원으로 가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 단계엔 며느리도 못 알아보지 않던가요.

    “마지막에는 며느리와 손자도 못 알아보셨어요. 그런데 당신 속으로 낳은 아들과 좋아하는 따님은 마지막까지도 느낌이 다른가 봐요. 인간이란 참 미묘해서 심층에 뭐가 있는지 우리는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이 필요한데 나도 충분히 못 해드렸어요.”

    -강 변호사가 외아들입니까.

    “4남3녀 가운데 셋째아들입니다.”

    -셋째가 부모를 모셨군요.

    “큰아주버님이 외교관이라 외국에 주로 근무하셨어요. 둘째아주버님도 건설회사에 근무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거든요. 막내아주버니도 외국에 있었죠. 우리밖에 없어서 결혼할 때부터 모시고 살았죠. 가끔 형제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해도 다른 사람한테 맡기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나도 직접 하는 게 편해요. 성격이 자기 삶을 만드는 거예요.”

    -효부상을 받아야겠어요.

    “절대 안 받을 거예요. 굉장히 힘들어하면서 모셨어요. 자진해서 한 일이 아니고 나한테 주어진 조건이니까 그냥 견뎌낸 거지, 절대 효부 아닙니다. 내 성격이 주어진 조건이면 그냥 그 안에서 어떻게 해결해봐야지, 박차고 나와서 뒤집어엎는 건 못 해요.”

    -‘모범생 콤플렉스가 있어서 직장과 가정에서 다 잘하려고 하는데 남편이 인정하지 않을 때는 전력을 다해서 싸웠다’는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읽었어요. 모범생 콤플렉스라기보다는 모범생 강박증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거 같네요.

    “남한테 야단맞는 것이 싫어 매사에 잘하려고 하지요. 자기검열이 강한 거죠. 그게 참 괴롭더라고요. 나는 최선을 다해 잘하려고 하는데 남편이 신뢰를 안 보내줄 때 싸웠죠. 남편은 자기 기준에서 보는 거죠. 남편이 원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게 결혼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내 자리 지키면서 내가 할 일만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남편은 자기가 해달라는 것을 내가 안 해주고 고집을 부리면 처음엔 못 받아들이더라고요. 나중에는 자기도 포기했죠. 강 변호사도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제 자식도 부모 틀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결과적으로 내가 이긴 거죠. 내가 더 고집이 센 건가요? 절대 내가 그의 틀에 안 들어갔거든요.”

    -남성우월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강 변호사가 여성과 사회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게 된 것이 김 대법관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내가 독자적인 인생관, 세계관, 라이프 스타일을 고집하니까 싫었겠죠. 그런데 이 사람 자체가 다른 사람의 것을 잘 받아들여요. 폭이 넓어요. 점수를 매기자면 나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평생 웃겨주겠다”

    강 변호사가 서울지검 형사3부 검사를 할 때 김 대법관은 옆방 검사실에 시보로 근무하고 있었다. 경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인 강 변호사는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세청 공무원으로 부산에서 근무하다 다시 사법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밀수 사건이 터졌을 때 부장검사가 부산세관에 와서 수사를 지휘하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어 보였단다. 18회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한 강 변호사의 합격기가 ‘고시계’에 실렸다. 이 글을 김 대법관이 고시공부할 때 읽었다. 7년 연상의 검사가 순진한 시보를 불러내 점심도 사주고 저녁도 사주며 ‘꼬셨다’(강 변호사의 표현).

    -강 변호사에게 ‘김 대법관을 만나면 어떤 질문을 할까요?’ 하고 물었더니 자기가 꼬실 때 인상이 어땠냐고 물어보라고 하더군요.

    “그게 궁금했나 보네. 사람을 잘 웃겼어요. 굉장히 유머러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자기가 평생 나를 웃겨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결혼한 뒤 웃기는 일은 없고 하도 힘든 일만 생기길래 ‘평생 웃겨준다고 해놓고 약속을 어겼다’고 따졌어요. 웃기기는커녕 눈물만 떨구게 할 수 있냐고 한바탕 싸운 적이 있어요.”

    ‘왜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여자는 울까’의 공동 저자 앨런 피스와 바버라 피스는 ‘눈물은 아내들이 남편으로부터 뭔가 얻어내고 싶을 때 흔히 쓰는 정서적인 공갈협박(Emotional blackmail)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여성들은 남편의 깊은 비밀, 취약점을 적절히 활용해 결국 공갈에 굴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눈물 떨굴 일이 자주 있었습니까.

    “부모님 모시고 애 둘을 키우는 데 판사 일까지 많잖아요. 보따리 싸들고 와서 기록 봐야죠. 판사 일을 남편이 도와줄 수 있나요. 만날 기록을 싸들고 오는데 애들은 늦게 자요. 밤 12시에 재워놓고 그때부터 일 시작하죠. 집안에 뒤치다꺼리 할 것도 많고….”

    -직장여성이 시부모 모시기가 보통 일은 아니죠.

    “시부모 손님도 많이 오시고…. 제사 지내야죠. 도와줄 동서들은 다 외국 나가 있죠. 추석 때 일 도와주는 아주머니도 집에 가고 혼자서 송편이란 걸 처음 빚었어요. 송편을 쪄놓고 나니 새벽 1시가 넘더라고요. 상할까봐 송편을 시원한 데 내놓고는 밤새 잊어 그 다음날 아침에 차례 지내는데 상에 안 올렸어요. 얼마나 분한지 모르겠더라고요. 누구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일이 많아서 그런 거니까. 친정에서는 녹두를 쪄서 속을 만들거든요. 나도 친정에서 배운 대로 하느라고 녹두를 쪘는데 돌을 일지 않아서 돌이 씹히는 거예요. 그래서 못 먹은 적도 있었죠. 실수가 많았어요.”

    강지원 김영란 부부는 영호남 커플이다. 강 변호사는 아버지가 전남 완도군수로 있을 때 완도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다 상경했다. 김 대법관은 부산에서 초등학교 6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 공무원인 아버지가 서울로 전근 오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왔다.

    -영호남 커플로 살면서 일화는 없습니까.

    “결혼할 때 양쪽 집안에서 약간 말씀이 있었습니다. 풍습이 다르니까 걱정했지요. 여자 입장에서 호남 쪽 사람이 더 좋은 것도 있더라고요. 시가 식구들이 모이면 시끌벅적해요. 재미있어요. 친정식구들은 무덤덤하게 앉아 있어요. 별로 문제는 없어요. 같은 남쪽이니까 음식 간도 비슷하죠.”

    -인사청문회에서 형사부 경력이 2년밖에 안 된다고 트집을 잡았죠.

    “사실은 더 짧아요. 형사재판은 수원지법 항소부에서 6개월밖에 못 했어요. 그러나 내가 연수원 교수로 있을 때는 형사법 강의를 했어요. 영장담당도 하고 즉결심판도 했습니다. 연구관 시절에 형사법 보고서도 썼습니다.”

    5공 때 형사부 재판을 했던 법관들은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학생들로부터 권력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들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며 데모를 한 학생들에게 국가안전기획부와 검찰이 정해준 대로 ‘정찰제’ 판결이 내려질 때였다. 김 대법관은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까.

    “다행히 6·29선언 후에 형사재판을 했어요. 그러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판사로 있던 사람들이 다같이 고뇌해야 할 일이죠. 나는 안 맡았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판사는 어려운 법리 풀었을 때 보람”

    -사형 판결을 내려본 적 있습니까.

    “형사 항소부에서는 단독사건만 다뤘습니다. 죄목이 사기 횡령 절도라서 사형 때릴 일이 없었죠. 인사청문회에서 사형을 궁극적으론 폐지해야 한다고 말한 게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지 몰랐어요.”

    -사형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사형은 사회를 방위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우리 형사법은 응보형(應報刑) 주의가 아닙니다. 예컨대 사형 대신에 감형이 안 되는 종신형 제도를 도입할 수도 있겠죠. 완전히 격리해서 사회방위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요. 왜 총살할 때 누구 총에 맞아 죽는지 알 수 없게 여러 명이 쏘냔 말이죠. 판사들도 사형선고를 꺼리잖아요. 꺼림칙한 걸 파고들어가 사회방위 목적에 충실한지 따져보면 문제가 쉽게 풀리리라고 생각해요.”

    -20여명을 연쇄살인한 유영철 같은 범죄자를 사형하지 않으면 어떻게 처벌해야 하죠?

    “철저히 격리하는 거죠.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건지, 후천적으로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100% 그 사람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어요. 사회구조적인 문제도 있고요. 그 사람한테 100% 책임지워서 사형시켜버린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죠.

    사형제도의 목적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나 막상 재판할 때 어떤 재판부는 사형을 용인하는데 나는 개인 신념에 따라 사형 판결을 안 한다면 형평성의 문제가 생기는 거죠.”

    -검사 시보할 때 사형집행을 참관하지 않았나요.

    “지금은 사형을 집행하지 않지만 김대중 정부 이전에는 간간이 했죠. 시보할 때 참관할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안 갔어요. 그것도 목숨을 뺏는 건데 굳이 참관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부검(剖檢)은 지켜봤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사형집행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양론(兩論)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내 의견일 뿐입니다.”

    -25년 법관생활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판결은 어떤 겁니까.

    “판사들은 어려운 법리를 풀어냈을 때 제일 보람을 느끼죠. 법조 출입기자들이 재미있는 판결이라고 집어내는 거하고는 전혀 달라요.”

    -기자들은 아무래도 일반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소재를 찾죠.

    “법관이 무심코 한 판결을 흥미있어 하더라고요. 내가 대법관으로 제청되기 직전에 선고한 판결이 있습니다. 민법 손해배상편에 보면 손해배상을 해야 될 사람이 고의나 중과실이 아닐 경우 손해배상을 함으로써 생계유지가 어려울 때 감액(減額)해주는 조항이 있어요. 법관 직권으로는 못 하는데 피고가 감액 항변을 할 수 있죠. 실제 재판에 적용된 케이스가 없더라고요. 피고가 여러 가지 생계가 어렵다는 주장을 하길래 그런저런 사유를 들어 반 정도 감액해줬죠. 대법원에 올라가 모델 케이스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상고를 안 하더라고요.”

    -인사청문회에서 호주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더군요. 호주제가 우리 고유의 전통이 아니고 일제시대에 생긴 것이라죠.

    “여러 경로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지금의 호주제는 일제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MBC에서 강의할 때 최한기 선생의 호적부를 들고 나와서 설명한 적이 있어요. 최한기 선생의 호적은 지금의 호적과는 다르더군요. 그 집에 사는 노비까지 다 기재돼 있어요. 우리나라 고유의 호적은 세금을 매기기 위한 목적이었다더군요. 지금처럼 가정을 대표하는 추상적인 호주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호주제는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상징성만 있고 생활에서 실제적 의미는 없는 거죠.”

    “성(姓) 선택의 자유는 좀 빠르다”

    -서양여성이나 일본여성은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잖아요. 자녀들도 아버지 성을 갖고요. 우리 여성은 결혼 전이나 후나 성이 그대로지만. 여권운동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버지 어머니 성을 함께 따서 ‘김박’ ‘강송’ 식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농담이지만 그런 식으로 3대만 내려가면 성이 8자가 되게 생겼어요.

    “서구나 일본에서는 성(姓) 선택의 자유가 있어요. 모계 성도 따를 수 있지만 대체로 부계 성을 따르죠. 우리가 성 선택의 자유를 주더라도 관습상 거의 부계 성을 따를 테니까 큰 혼란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 대다수 국민이 거기까지 설득이 안 돼 어려운 점이 있겠죠.”

    -김 대법관은 우리나라도 가족의 합의에 따라 어머니 성을 따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갈 거 같아요. 전세계가 다 그렇게 하거든요. 호주제 폐지 흐름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외국처럼 개인 호적부를 두되 성 선택의 자유는 나중에 논의하자는 흐름이 있습니다. 둘 다 한꺼번에 하자는 견해도 있고요. 나도 성 선택의 자유까지 가는 건 좀 빠르다고 생각해요. 국민의 법감정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생물학적으로는 미토콘드리아에 있는 여성 DNA가 후손으로 죽 연결되거든요. 이번에 수로왕국의 허씨들 미토콘드리아에 있는 DNA를 추적하니까 해양민족이라고 나왔잖아요.”

    미토콘드리아 DNA는 세포질에만 존재해 세포 핵 DNA와 달리 난자를 통해서만 유전된다.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자녀를 진짜 유대인으로 인정한다. 수천년 동안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아 ‘어머니는 가짜가 있을 수 없지만 아버지는 가짜가 있을 수 있다’는 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성 선택의 자유까지 갈 거 같아요. 우리는 유교적 전통이 많이 남아 있는 나라에 살기 때문에 국민의 법 감정을 설득하면서 가야지요.”

    -어머니 성을 따를 수 있게 되면 남아선호 사상도 깰 수 있지 않을까요. 딸이 낳은 자녀도 친정부모의 성을 물려받을 수 있다면 아들에 집착하는 사회 분위기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아요.

    “나도 딸만 둘입니다. 요즈음 딸 하나 둘로 그만두고 더 안 낳는 사람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성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면 손자 손녀가 내 성을 물려받을 수 있겠네’하고 좋아하더라고요.”

    청문회에서 나왔던 질문은 신문에 보도됐기 때문에 중복을 피했다. 다만 국가보안법은 중요한 문제이고 인사청문회 이후 새로운 상황이 발생한 터다. 국가인권위원회, 헌법재판소, 대법원, 대통령의 견해가 각기 다르다.

    “형법을 개정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을 대체입법하자는 의견도 있어요.

    나는 국가보안을 위해 처벌해야 하는 유형이 무엇인지부터 따져보고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국가보안을 위해 처벌해야 할 유형을 정하고 나면 형법에 집어넣든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든지, 다른 특별법을 만들든지, 입법 기술상의 문제거든요. 이것이 순수한 법률가로서 나의 입장이죠.

    형법으로 처벌하든,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든 판사에게는 의미가 같아요. 국가보안법 자체에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은 정당간 대립과 이해 문제라고 생각해요. 헌재에서도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지 이를 개정할 거냐, 대체할 거냐, 폐지할 거냐를 판단한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 사회가 바뀌면 개정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매사에 너무 대립하지 말고 설득의 정치를 모색할 만큼 성숙한 사회가 됐다고 생각해요.”

    대통령(임기 5년)과 대법원장(6년)의 임기가 일치하지 않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과 함께 임기 초반을 보내는 구조다. 최종영 대법원장의 임기는 내년 9월까지다. 내년에는 대법관 제청권을 가진 대법원장을 비롯해 변재승 유지담 윤재식 이용우 배기원 대법관이 퇴임한다. 사법부의 구성이 지금과는 크게 달라진다.

    -대법관이 되고 싶은 법관들이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 열린우리당을 의식해 진보적인 판결을 한다는 우려가 보수 쪽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대법관 제청자문위에 시민단체 대표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는데요.

    “대법원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지금은 사건 처리에 바쁘지만 정책법원에 대한 기대가 큰 것 같아요. 정책법원 역할을 하려면 지금처럼 호모지니어스(Homogeneous·동질의)한 구성원으로는 어렵다는 시각이 있어요. 여성인 나를 임명한 것도 정책법원으로 가겠다는 의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책법원으로 가자면 이른바 진보적 인사로만 구성하거나 지금처럼 커리어 시스템(Career system)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해서는 안 되죠. 다양한 사회현상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시민단체의 요구가 아니라 시대적 요구입니다. 법은 원래 보수적이어야 하잖아요. 지금보다 많이 변화하겠지만 법의 본질을 떠나 시민단체 입김에 좌우되는 구성은 안 하겠죠. 그 정도로 대법원이 양식이 없지는 않아요.”

    -이흥복 신임 서울중앙지법원장이 취임사에서 ‘사법부의 독립과 권위를 훼손하는 세력과 횡포로부터 여러분을 보호하겠다’고 했는데요. 양 측면이 있을 거 같아요. 사법부가 국민여론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도 없고, 시류와 여론에 영합하는 것도 곤란하고….

    “그렇죠. 그 분은 나름대로 염려를 표현한 거죠. 아까 말했듯이 내년 내후년 대법원 구성이 달라지니까 나름대로 사법부를 아끼는 충정에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사 표시를 한 거라고 생각해요.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배심제는 중요 사건에만 한정해야

    -미국영화에는 배심원 재판을 소재로 한 흥미진진한 영화가 많잖아요. 시카고에서 악명 높던 갱 알 카포네 재판 때는 배심원들이 조직원들로부터 협박을 받은 기미가 보이니까 판사가 옆 법정의 배심원들과 즉각 바꿔버리더군요. 알 카포네 전기에도 나와요. 사법개혁위원회가 배심재판 도입을 검토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미국에서도 배심재판은 전체 사건의 10%밖에 안 돼요. 그러나 국민을 사법에 참여시키는 상징적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 비용이 많이 들고 번거롭고 생업에 지장을 주니까 미국도 정말 중요한 재판이 아니면 배심재판을 안 하는가 봐요. 변호사들과 함께 배심원을 선정하는 사람, 배심원의 심리를 읽는 사람까지 있어요. 배심원 선정을 전문으로 하는 여성 컨설턴트가 쓴 책이 최근 번역돼 나왔더군요.”

    배심원 선정 컨설턴트 조-엘란 디미트리우스의 ‘사람 읽기(Reading people)’는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저자는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의 발단이 됐던 로드니 킹 구타 사건의 경찰관들, 아내를 죽인 혐의를 받은 미식 축구선수 O J 심슨의 배심원 선정에 참여해 피고인의 무죄평결을 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사람의 특징, 옷차림,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을 파악하는 기법에 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필자도 인터뷰 기법 개발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숙독했다.

    “배심원 재판에는 정말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하느냐, 나한테 유리하게 해줄 사람을 선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죠. 모든 재판을 다 배심제로 하는 것은 낭비고요.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한정하는 게 좋아요. 국민에게 법치주의 교육을 시키는 의미도 있죠. 판사들도 절차를 더 신중하게 진행할 테고…. 제도가 있다는 것 자체는 좋을 것 같아요. 사법개혁위원회에서도 긍정적으로 도입을 검토하는 거 같아요. 위헌 문제가 남아 있긴 해요. 헌법에 법관 자격을 갖춘 사람이 재판을 할 수 있도록 돼 있거든요.”

    -배심제가 유전무죄(有錢無罪)의 경향을 강화할 가능성도 있죠.

    “미국에서도 배심재판을 반대하는 전문가들이 있죠. 다수 의견은 그래도 있는 게 낫다는 거예요. 상징적인 면이 있는 거 같아요. 있는 것하고, 없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어요.”

    -주민 의사에 의한 판결은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사회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제도라고 할 수 있겠죠.

    “영국에도 있던 제도이지만 미국에서 발달한 이유는 서부 개척사와 관계가 있대요. 재판할 사람이 없으니까 동네 주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해 재판하는 거죠. 미국이 연방의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발달한 거죠. 억울한 왕따 희생자도 많았답니다. 미국 동부의 마녀재판은 유명하잖아요.”

    건국 이후 첫 여성 대법관 된 김영란 판사

    영호남 커플인 김영란 대법관과 강지원 변호사.

    김 대법관은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조배숙 의원(열린우리당)과 경기여고 서울법대 동기동창이다. 서울법대에 여학생이 적을 때라 경기여고 3총사는 늘 붙어다녔다. 사법시험은 김 대법관이 법대 4학년 때인 1978년 가장 먼저 합격했고 조 의원은 1981년, 강 전 장관은 1982년에 합격했다.

    -강 전 장관이 솔직한 언행과 화사한 패션으로 인기를 끌었는데 갑자기 낙마했어요. 최근에 만나봤습니까.

    “네, 대법관 된 것을 축하해준다고 해서 만났죠.”

    -장관 물러난 것에 대해 본인은 뭐라던가요. 시중에 루머가 많아서….

    “본인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던데요. 호남 출신 국방부 장관을 교체하면서 호남쪽을 배려하려다 보니 그만한 비중을 가진 법무부 장관을 호남에 주려고 바꾼 걸로 이해하고 있던데요. 본인은 큰 현안 없이 사퇴하게 돼 너무 즐겁다고 했어요.”

    -검찰을 장악하지 못하고, 검찰개혁과 관련해 대통령의 의중보다는 검찰편에 섰던 것이 경질 이유가 됐다는 시각도 있어요.

    “검찰 장악은 시대착오적인 말이죠. 강금실을 장관 시킨 것은 검찰을 장악하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제대로 된 검찰을 만들려고 보낸 거지. 검찰내에서도 중간층 이하에서는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검찰이 달라질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남아요.”

    -한국의 보수적인 가치관에서 나온 말이라 여권론자들이 들으면 화내겠지만 아무튼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팔자가 세다’는 말을 옛날 어른들이 했잖아요. 이 시대에는 안 맞는 얘기죠. 어찌됐건 두 동기생은 순탄한 가정생활을 못 했는데 김 대법관은 시부모까지 모시고 무난하게 산 것 같아요.

    “나도 순탄치만은 않았던 거죠. 농담이지만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 잘 쓰고 운동해 몸짱도 되고, 애들 교육도 잘 시키는 걸 최고로 치는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어요. 내가 출세했는지는 모르지만 애들 교육이며 여러 가지가 경쟁력이 없어서 친구들이 별로 부러워하지 않아요.”

    김 대법관은 두 딸을 모두 대안학교(인성 특성화 학교)에 보냈다. 큰딸 민형(21)은 전남 담양 한빛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중이다. 막내딸 선형(17)은 분당의 도시형 대안학교인 이우학교에 다닌다. 아버지 강 변호사가 공동설립자다. 선형은 여름방학 동안에도 입시공부는 안 하고 영화를 찍으러 다니고 어머니 개량한복을 만드느라 바빴다.

    강 변호사에게 이 인터뷰 며칠 전에 “왜 아이들을 모두 대안학교에 보냈느냐”고 묻자 “김 판사한테 물어봐요”라고 했다가 간단히 설명했다.

    “우리 부부가 전형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자유로운 학교에 보내서 개성을 살려주고 싶었습니다.”

    분위기로 보건대 자녀를 대안학교에 보낸 데는 김 대법관의 발언권이 더 셌던 것 같다.

    “인사청문회 위원들이 돈 많이 드는 귀족학교에 자녀를 보냈다고 생각하던데 전혀 그게 아니고요. 그야말로 대학입시를 포기하고 애를 실험적인 교육으로 내몬 거죠. 나쁘게 말하면 못할 짓을 한 엄마예요. 사회 분위기가 획일적인 교육을 강요하잖아요. 대학만 좋은 데 가면 되니까 중고교 시절은 담보로 잡히죠. 애들한테 청소년 시절을 돌려주고 싶더라고요. 고민하면서 정말 자기 길을 찾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이런 걸 다 겪어보게 하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죠. 엄마가 쇼트 커트(short cut·지름길)로 가는 요령을 가르쳐줄 수도 있지요. 그러나 시간이 많이 걸리고, 스스로 고생도 하고, 엄마가 나를 왜 이런 학교에 보냈나 하고 원망할 수도 있지만, 그게 성장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애들이 옷도 만들고 농사도 짓고 사는 거죠. 물론 공부도 하지만.

    애들 학교 축제에 가보면 입시 때문에 압박받지 않고 몇 달 전부터 고민해 아이디어를 내 연극도 하고, 시도 쓰고, 배경음악 녹음하고, 별짓 다해서 참 재미있게 해요.”

    -대학입시는 완전히 포기한 겁니까.

    “스스로 가고 싶으면 가겠죠. 갈 능력 있으면 가는 거죠. 다양한 사회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는 애들도 필요하잖아요. 실패할 확률이 높죠. 쇼트 커트는 아니지만 거기서 인생을 배우는 거죠. 이상하게 애 아빠하고 나하고 그 점에서는 전폭적으로 의견이 같아요.”

    -두 분이 이른바 ‘KS’ 출신이고 사법고시에 합격,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 코스를 순탄하게 달려오다 보니 보통 사람들이 선망하는 사회적 출세를 좀 시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건 아닐까요.

    “그게 아니죠. 무시하는 게 아니라 방향을 좀 달리 잡은 거죠. 출세나 명예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거죠. 애들이 뭘 하고 살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학습이 안 되면 경험이 안 되는 거예요. 시험에 합격하고 출세해야 행복한 건가요. 밖에다 기준을 두니까 욕망이 한이 없어요. 그러면 행복을 느낄 수 없어요.

    나도 그렇게 살았거든요. 항상 부족해요. 그 다음 목표가 또 생기죠. 그래서 우리 애들은 성취추구적인 삶에서 벗어나 정말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어요.”

    강 변호사도 검사장을 거쳐 검찰 고위층으로 출세하는 코스를 스스로 마다하고 검찰에서 흔히 ‘물 먹는 자리’라고 하는 서울고등검찰청 근무를 자원해 청소년 업무를 했다. 그러다 2002년 검찰을 떠나 후배들과 법률사무소 ‘청지’를 설립해 대표로 있다.

    -강 변호사는 행정 사법고시 양과에 합격했고 검사를 지망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젊은 시절에는 출세지향적인 성향이 남보다 강했다고 보이는데….

    “건방진 얘기지만 능력이 없어서 물 먹은 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잖아요. 나는 그게 재미있고 좋더라고요. 아주 창의적인 사람이거든요.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죠. 창의적인 사람은 창의적인 걸 하게 해야 능력발휘를 하거든요. 정해진 답이 있는 길을 가면 오히려 능력발휘를 못할 거 같더라고요. 정말로 능력발휘를 하면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훨씬 더 크잖아요. 남들 다 하는 검찰 엘리트 코스로 가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 기대되더라고요.

    우리 애들도 정해진 코스로 안 보내니까 애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재미있어요. 우스운 얘기지만 서울대 법대 1학년생 200여명을 모아놓고 ‘법률문장론’을 강의하면서 ‘너희들은 부모의 상상력 결핍으로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애가 뭘 할지 짐작할 수 없는 상태가 주는 즐거움이 있어요. 그게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클 거라 생각해요.”

    -강 변호사가 검찰에서 출세하는 코스를 버리고 ‘샛길’로 빠지려는, 인생관의 전환이 언제 온 겁니까.

    “자기도 과거에는 출세지향적이었다고 말해요. 보호관찰소장하고 청소년보호위원장 하면서 변한 거 같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못 느꼈거든요. 청소년들을 만나보면서 자기가 옛날에 출세하기 위해 포기했던 일들을 생각하게 된 거죠. 청소년 시절에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려고 하는 거 같아요.”

    대학시절 꿈은 문학도

    -강 변호사가 신문에 쓴 글은 몇 번 봤습니다. 직업적인 글쟁이보다 오히려 잘 써요.

    “이 사람의 청소년 시절 꿈이 신문사 논설위원이었대요. 황 위원처럼.”

    신문사 논설위원 안 한 건 잘한 일이다. 하여튼 강 변호사는 단조로운 수사, 기소 업무를 하기엔 너무 재주가 많은 것 같다. 강 변호사는 최근 청소년 음악회에서 무대에 올라 이탈리아 가곡 ‘불꺼진 창’을 불렀다.

    “강 변호사가 고등학교 때 서울대 사대 백일장에서 장원한 글도 있어요. 글이 씩씩하더라고요. 나는 문학적인 글을 썼는데 이 사람은 지사적인 글을 썼더라고요.”

    -인터뷰 기사에서 읽었는데 고교와 대학시절의 꿈이 법관이 아니라 문학도였다면서요. 가족의 권유로 법대를 택했지만 문학을 계속하겠다고 우기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고 했더군요.

    “나도 고등학교 때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거든요. 글 쓰는 뭔가를 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던 거죠.”

    -판결문도 글쓰기 아닌가요.

    “판사도 글 쓰는 직업이죠. 나도 그렇게 말합니다. 다만 글 내용이 다르죠. 판사도 문장력이 좋은 사람이 하기가 수월해요.

    경기여고 때 성적이 좋았어요. 경기여고 선배들 중에 서울대 사회계열에 들어간 사람이 딱 한 명 있었어요. 교장선생님이 올해는 꼭 사회계열 합격자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있으셨죠. 나는 인문계열로 가고 싶었는데 교장선생님과 아버지께서 성적이 아까우니까 그쪽으로 가보라고 했어요. 부모님 말씀을 거역 못해 일단 사회계열로 갔어요. 나중에 사회과학대와 법대 중에서 선택할 때도 갈등이 있었어요. 나는 사회학을 하고 싶었죠.

    또 그냥 떠밀려서 법대에 갔거든요. 한동안 법률에 취미가 안 붙었어요. 너무 하기가 싫은 거예요. 그러나 반성하고 2학년 겨울방학 때 민법 형법 헌법 삼과를 일독하고 사법시험을 한번 보자 한 것이 그만 합격이 된 거예요. 내가 철없이 이런 말을 하고 다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늦게 붙은 사람들을 약 오르게 했어요. 1차 붙은 게 아까워 3학년 겨울방학 때 2차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넉 달 공부하고 4월에 합격했죠. 떨어지면 새로운 진로를 생각해볼 결심이었는데 합격했어요. 아슬아슬하게 붙었어요.”

    -천재네요.

    “단기 집중력이 있는 것 같아요. 천재는 아니고.”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느낀 건데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선택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아요. 그런데 김 대법관은 싫어하는 걸 하면서도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 같아요.

    “재미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건 사실이지만 내가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소질은 있는 것 같아요. 철학책 읽기를 좋아합니다. 수학을 잘했어요. 어려운 문제를 논리적으로 풀어냈을 때 성취감이 큽니다. 내가 자꾸 ‘재미없다’면서도 잘 적응한 것은 나한테 법률적인 사고를 하는 소양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적성검사를 해보면 수학자 철학자 과학자로 나왔어요.”

    -문학을 했으면 실패했을지도 모르죠.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래요. 취미로는 좋은 책 많이 읽곤 하지만. 남편이 만날 놀리는 게 인풋(input)은 많은데 아웃풋(output)은 안 된다고 해요. 남편이 골치 아픈 철학책 뭐하러 읽냐고 놀리는데 아웃풋하려면 안 읽어요. 그러자면 머리가 아프죠. 책 자체의 논리적인 흐름에 푹 빠져요. 소설도 그 책의 구성에 빠지고, 철학책도 논리를 전개해가는 과정을 즐기죠. 그러한 소질이 있기 때문에 단조로운 법관 생활을 견딘 것 같습니다.”

    -판결문 쓰기는 재미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재미는 없어요. 그렇지만 난마같이 얽혀 있는 사건을 해결하는 쾌감이 있어요. 내가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하면서 배석판사들이 가져온 결론을 검토하다 보면 이론은 맞는데 뭔가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그러며 기록을 가져오라고 해서 내가 다시 보거든요. 뭔가 합리적인 결론을 찾아낼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해줘요. 그럴 때마다 너무 기뻐요. 나한테 그런 소질이 있나 봐요. 연구관도 아마 그래서 오래 한 거 같습니다.”

    -문학도였으니까 습작이 있겠군요.

    “단편소설 두 편이 교지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지금 보면 형편없겠죠. 보관하고 있지 않아요.”

    김 대법관이 대학 1학년 때 쓴 단편소설이 ‘서울대’라는 교지(校誌)에 실렸다. 사법시험 합격한 뒤에는 서울법대에서 발행하는 ‘피데스(Fides)’라는 교지에 대학 1학년 때 썼던 소설이 실렸다. 김 대법관은 “누군가 찾아 읽어보면 우스울 것”이라며 밝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대’에 실린 소설을 보고 국문과 전광용 교수님이 부르시더라고요. 우리 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꺼삐딴 리’ 같은 작품을 남기셨죠. 전 교수님이 소설을 써보라고 그러셨어요. 내가 아마 소설을 썼다면 아주 논리적이고 딱딱한 걸 썼을 거예요. 소설가 최인훈 조성기씨가 서울법대 출신인데 논리적이고 문장이 딱딱해요.”

    소설 쓰면서 사법시험 합격

    -감명 깊게 읽은 문학작품이 있다면….

    “박경리씨의 ‘토지’가 좋아요. 두세 번 읽었어요. 다시 한번 읽고 싶어요. 문장이 고풍스럽고 우아해요. 한번도 뵌 적은 없어요.”

    -강 변호사가 어느 인터뷰에서 아내 흉을 본 게 있더군요. 책을 이것저것 동시다발적으로 보는데 침대에 한 권, 소파에 한 권, 식탁에 한 권 식으로 흩어져 있다고….

    “부엌에서 일할 때는 소프트한 소설을 읽습니다. 조용히 오래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때는 딱딱한 것을 읽죠. 여행 갈 때도 딱딱한 것을 들고 가요. 소프트한 건 그날 밤에 다 읽어치우니까. 어떤 사람은 집에 서재도 없냐고 하지만 서재에서 읽는 책이 따로 읽고 부엌에서 읽는 책이 따로 있죠. 잡지는 거실에서 TV 보면서 읽는 거고….”

    분당 신도시가 만들어질 때 분양받아 입주했다는 복층아파트 2층을 서재로 쓴다. 부모 모시고 살기 위해 넓은 평수의 복층아파트를 분양받았던 것 같다. 법률서적을 중심으로 책이 벽면을 가득 메웠다. 김 대법관은 “아래층에서 주로 생활하다 보니까 서재에 차분히 앉아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

    응접실에는 음악 CD가 많았다.

    “사무실에도 저만큼 있어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요.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안정돼요.”

    -젊을 때는 안경을 쓰지 않았던 거 같은데….

    “콘택트 렌즈를 꼈죠.”

    필자가 법조담당 올챙이 기자 시절에 강 변호사는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로 일했고 김 대법관은 서울민사지법 합의부 판사로 있었다. 판·검사 커플 1호인 이들은 당시 서소문 법조타운의 화제의 인물이었다.

    “연구관 할 때 망막염을 앓았어요. 그 뒤로 렌즈 끼기가 겁나 안경을 쓰기 시작했죠. 난시도 있어요. 책 읽을 때는 독서용 안경을 써요. 대법관들은 늘 눈의 건강을 염려하죠. 기록 보다가 나쁜 눈이 더 나빠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돼요.”

    속기사가 둘째딸 선형이 만들었다는 한복을 보여달라고 하자 김 대법관은 장롱에서 빨간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꺼내들고 나왔다. 여자들은 관심사가 비슷하다. 딸이 동대문시장에서 천을 떠다 만든 옷이라고 했다.

    “딸이 ‘청와대에서 대법관 임명장 받는 날 입고 가면 좋을 텐데…’라고 말해 ‘엄마가 그럴 용기까지는 없다’고 대답했어요. 너무 잘 만들었어요. 선형이는 바느질에 취미를 붙여 어른이 되면 옷수선집을 하겠대요. 벌써부터 재봉틀 사달라고 졸라요.”

    김 대법관은 엘리베이터 앞에 배웅 나와서도 딸 자랑을 멈추지 않았다. 필자가 “아들만 둘이라서 그런 잔재미를 모르고 산다”고 하자 그녀는 “아들은 열을 낳아도 이런 재미는 없을 거예요”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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