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호

두 권의 ‘황진이’를 읽는 법

남한 여류소설가의 섬세한 속삭임 vs 북한 원로 남성작가의 선 굵은 외침

  • 글: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입력2004-09-24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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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권의 ‘황진이’를 읽는 법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전경린의 황진이(왼쪽)와 홍석중의 황진이.

    갑자기 황진이 바람이 불고 있다. 황진이는 누구인가. 여성, 그것도 조선시대의 여성이다. 신분 사회의 계율이 엄혹한 조선 중기에 성은 아비의 것을 받고 신분은 기생인 어미의 것을 따른 불행한 여성이다. 황진이는 그 불행의 어둠을 자양분 삼아 조선의 명기(名妓)이자 빼어난 시편을 남긴 시인으로 피어난 조선의 해어화(解語花)다.

    지금 우리 서점에서는 남북한 작가가 각각 써낸 두 개의 ‘황진이’가 팔리고 있다. 하나는 남한의 여류소설가 전경린이 쓴 ‘황진이’(이룸·2004)고, 다른 하나는 북한 작가인 홍석중이 쓴 ‘황진이’(대훈·2004)다. 두 소설은 황진이라는 여성의 삶을 다루면서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동시에 드러낸다. 황진이를 상사(相思)하다 죽은 총각의 상여가 대문 앞에 멈춰섰을 때 황진이의 내면을 그린 대목을 비교해보자.

    “여보세요, 나는 당신을 잘 모릅니다. 한번 얼핏 뵈온 일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당신이 죽음으로 보여준 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압니다. 유명의 길이 달라 지금은 당신의 그 진실한 사랑에 보답할 길이 전혀 없군요. 혹시 이후 저승에서 다시 만나뵙게 될는지. 이승에서 보답할 수 없었던 사랑을 저승에서는 꼭 갚아드리렵니다. 그 약속에 대한 표적으로 제가 마련해 가지고 있던 혼례 옷을 당신의 령전에 바치오니 알음이 있으면 받아주세요. 인명이 하늘에 매였다고는 하나 인정에 어찌 애닯지 않겠나요. 생사가 영 리별이라고 하지만 후생의 기약이 있으니 바라옵건대 어서 떠나세요.”(홍석중 판본)

    “나와 남이 다르거늘, 저마다의 목숨이 다르거늘, 홀로 사랑하고 내 잔에 피를 쏟아 붓고 간 이시여, 어찌 이런 사무친 일이 있단 말이오. 빌고 또 비나니, 맺힌 것을 푸소서. 이승의 일은 까맣게 잊고 훨훨 극락왕생하소서. 정녕 혼자 못 가겠거든, 내 넋까지 거두어 가소서. 정녕 혼자 못 가겠거든, 내 넋 속에 둥지 틀고 원 없이 살다 가시오.”(전경린 판본)

    표현은 다르지만 황진이의 절절한 심정은 두 책에 비슷하게 드러난다. 또 있다. 두 작가가 황진이의 ‘첫 남자’로 황진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연모했고 죽을 때까지 조력자가 된 인물로 만들어낸 ‘수근이’와 ‘놈이’의 존재가 그렇다. 물론 이들은 철저하게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이 창안해낸 인물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여러 모로 닮아 있다. 무엇보다도 상놈의 처지에 양반집 딸인 황진이를 평생 사랑한다는 점이 그렇다.



    전경린이 그린 유기공방 집 아들인 수근은 황진이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도와주면서 황진이에게 “산으로 도망가 화전이라도 일구며 살자”고 한다. 황진이가 기생의 길로 들어서자 수근은 전 재산을 황진이에게 헌납한 뒤 승려가 된다. 이후 불교 탄압에 맞서 소신공양까지 불사하는 수도자로 살아간다.

    한편 홍석중이 그린 놈이는 황진이를 연모하고 그의 곁에 머물며 돕지만 황진이를 제 짝으로 삼으려는 욕심에 황진이의 정혼자에게 출생의 비밀을 토설해 혼사를 무산시킨다. 하지만 현실은 놈이의 속셈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놈이는 화적패에 들어갔다가 끝내 붙잡혀 효수형에 처해진다.

    앞서 말했듯 두 소설은 다른 모습도 여러 면에서 보인다. 아마도 여성과 남성,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40대와 60대라는 두 작가의 차이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전경린의 황진이는 단아하고 차분하다. 반면 홍석중의 황진이는 활달하고 거침이 없다. 전경린의 서사가 철저하게 황진이 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홍석중은 황진이뿐 아니라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도 풍부한 사실적 실감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으로 그린다.

    실존의 모순이 삶의 원동력

    필자는 홍석중의 ‘황진이’를 먼저 읽었다. 이 소설은 우리가 북한 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체제 선전이나 이데올로기 찬양이 일절 없고 활달한 문체로 성애묘사까지 노골적으로 한다. 홍석중의 소설은 그 자체로 매우 뛰어난 소설적 성취를 이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최근 우리 소설이 잃어버린 ‘선이 굵은’ 남성서사가 돋보인다는 점이다. 또 가살스럽다, 감때사납다, 거쿨지다, 관후하다, 가물철, 검덕귀신, 겨끔내기, 겨릅불, 고래실논, 구메밥, 날가지, 노구메, 덜퉁하다, 데설궂다, 되알지다, 두억시니, 만문하다, 매시근하다, 모대기다, 모지름, 몰밀다 등과 같은 옛말과 입말, 민중들이 즐겨 쓰는 비유와 속담이 풍부하게 나타나 사실적인 실감을 불어넣고 있다. 문장이 활달하고 거침이 없어 소설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홍석중은 황진이의 행적과 일화를 서사의 중심축에 놓으면서도 주변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꼼꼼하게 묘사한다. 그들의 처지와 정황을 신분사회의 질곡이라는 원근법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한 인간이 끌어안고 있는 실존의 모순이 시대적·사회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황진이가 불가피하게 떠맡은 실존의 모순은 외부의 정황에서 발생하지만 그것은 내면화되며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된다.

    전경린의 황진이는 자유혼을 갖고 끊임없이 도망가려고 하는 탈주자다. 자신의 삶이 몇 겹이나 되는 모순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투명한 자각에 이른 존재다. 황진이는 제 삶을 억압하는 다섯 겹의 감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미와 아비가 만든 감옥이 첫 번째 감옥이겠지요. 나라에서 만든 온갖 법과 규제의 감옥이 두 번째 감옥이겠고,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끼리의 관습과 인정과 통념이 세 번째 감옥이겠고, 늘 멀리서나 곁에서나 쳐다보는 타인들의 시선이 네 번째 감옥이겠고, 무엇보다 자기 속에서 자기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괴물같이 커다란 눈이 다섯 번째 감옥이겠지요.”

    남존여비, 일부종사, 칠거지악 같은 여성억압적 가치관이 시퍼렇던 조선시대에 여성으로, 아니 여성보다 훨씬 더 비천한 신분인 기생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 황진이가 불시착한 유령적 실존의 자리다. 그 삶은 불우하고 고달팠다. 하지만 기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임을 알아차린 황진이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길로 들어선다.

    “어머니가 죽어간 그 자리에서 나는 거꾸로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 자리가 저라는 씨앗을 떨어뜨린 자리이니, 그곳에서 꽃 피울 수밖에요. 진흙 연못을 이이 어디 다른 꽃으로 가 꽃을 피우는가요? 세상 바깥에서 온몸을 물에 담그고 천하게 살겠지만 내 생은 길고 짧거나, 천하고 귀한 세상의 이치를 벗어나 자유로울 거예요.”

    자유혼을 가진 탈주자

    황진이는 이미 여성을 억압하는 세계에서 탈주한 여성이다. 남성의 그늘에서 기생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당하게 독립된 삶의 주체로 서 있는 존재다.

    전경린이 그려내고자 했던 황진이는 끊임없이 억압의 사슬을 끊고 탈주하는 자유인의 모습이다. 바로 거기서 ‘나는 나다’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발랄한 현존의 한 원형을 구현해내려고 했던 것이다. 황진이는 방외인, 즉 체제 바깥으로 튕겨나간 아웃사이더다. 자발적 방외인의 삶을 스스로의 실존으로 선택함으로써 황진이는 제 삶을 절대자유의 경지라는 토대 위에서 주체적인 것으로 세운다.

    “어떤 삶이 검은 창자를 벌리고 나를 기다릴지라도, 그곳이 산이든, 집이든, 풀숲이든, 길 가운데든, 중이 되어 걸식하든, 벌레가 되어 기든, 상것이 되어 손이 발이 되도록 상하며 살든, 나는 나다. 나는 언제나 진이다. 나는 홀로 나의 신 앞에 선다.”

    황진이가 주목받는 것은 유교의 강압적 계율 또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 흡수되기보다는 끊임없이 거기서 벗어나려는 탈주자의 영혼, 자유혼의 표상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황진이는 조선의 팜파탈이며 뮤즈이고, 자유연애주의자이며 스캔들 메이커이고, 전근대의 지평에서 피어난 자생적 페미니스트다. 황진이는 자기 운명의 모순 속에 갇혀 있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그 억압의 굴레를 벗고 나온다. 전경린은 황진이에게서 “담대한 인격과 신비로운 운명, 미적 권력을 가진 매혹적인 아니마”를 읽었다고 말한다.



    당대의 인습과 제도에 발칙하게 저항하며 도발적으로 실존을 꾸린 황진이는 여러 면에서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이태준, 정한숙, 박종화, 안수길, 유주현, 정비석, 최인호, 김탁환 같은 작가들을 뒤이어 홍석중과 전경린이 황진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써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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