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용산기지 이전협상 청와대 보고서의 진실

“이대로 협상하다간 나중에 우리 다 죽는다”

  • 글: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4-10-25 1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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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용산기지 이전협상이 막을 내렸다.
    • 이를 교훈 삼아 다음에 또 미국과 이와 비슷한 협상을 할 때는 ‘동맹’과 ‘협상’을 구분해 ‘국민의 이익’을 챙길 줄 아는 관리들을 협상장에 내보내야 할 것이다.
    용산기지 이전협상 청와대 보고서의 진실

    지난 6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회원들이 외교부 청사 앞에서 용산기지 이전 재협상을 촉구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용산기지 이전은 돈이 얼마가 들든 미국이 원하는 대로 추진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나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인사들은 반미주의자들이므로 이 문제에 개입을 최소화한다’(아이러니하게 실제로는 서주석 전략실장 등 NSC 인사들이 협상과정의 대부분을 추인했다).

    최근 일부 언론을 통해 요지가 공개된 용산기지 이전협상 관련 청와대 보고서 내용 중 일부다. 협상을 주도한 국방부 정책실과 외교부 북미국 관리들의 친미성향 또는 대미종속적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의 정식 명칭은 ‘용산기지 이전협상 결과보고’.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했다. 외교안보 파트에서 작성했을 법한 이런 보고서를 공직자 근무기강을 점검하는 부서에서 작성한 건 용산기지 이전협상팀이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지침에 어긋나게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비판적인 여론이 청와대에 전달됐기 때문이다. 민정수석실은 이를 외교나 국방의 문제가 아니라 공무원 기강에 관한 문제라고 판단했다.

    용산기지 이전협상의 시발점은 1990년 체결된 합의각서(MOA)와 양해각서(MOU)다. 각서 체결자는 한국의 국방부 장관과 주한미군사령관. 그런데 국제협약에 대해 심의권을 갖고 있는 외교부 조약국의 견해에 따르면 이 각서들은 정부간 협정이 아닌 기관간 협정으로 법적 효력이 없다.

    국회 동의를 받지 않은 점도 이 각서의 법적 유효성을 의심케 한다. 기지이전엔 수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고 그 비용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하는 만큼 마땅히 국회 비준 절차를 밟았어야 하는데 국방부 선에서 끝내는 초법적 협상을 한 것이다.



    국가간 불평등 조약의 전형이라 할 만한 이 협정의 핵심은 ‘이전비용 전액 한국측 부담’이다. 용산기지 이전은 한국군의 기지가 아닌 미군의 기지를 옮기는 것이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재배치와 연계되는 문제이므로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그런데도 절반은 고사하고 모든 비용을 한국이 대기로 한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지난해 7월 본격 시작된 용산기지 이전협상은 처음부터 미국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이다. 미국측은 1990년 각서의 유효성을 강조했고, ‘한미동맹의 특수성’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는 한국 협상팀은 대꾸도 제대로 못했다.

    협상하자는 건지, 추인하자는 건지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면 단추를 다 풀고 하나하나 새로 끼워야 한다. 하지만 협상팀은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그대로 둔 채(미국이 화를 내기 때문에) 나머지 단추를 적당히 꿰맞춰 어떤 모양으로든 옷을 걸치는 데 의미를 뒀다. 청와대 보고서는 협상팀의 이런 소극적, 굴종적 자세를 질타했다.

    협상팀은 ‘한국이 먼저 이전을 요구했으므로 비용을 대는 건 당연하다’는 미국측 논리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 1990년 합의각서를 통해 결정된 사항을 이제 와서 뒤집을 수 없다는 패배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일관했다.

    청와대 보고서에 따르면 협상대표였던 차영구 국방부 정책실장은 지난해 7월 제3차 한미동맹 조정회의에서 “한국 정부는 1990년 합의서를 존중해 이전비용 부담을 거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부대표인 위성락 외교부 북미국장도 “1990년 합의서의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며 합의각서의 불평등 요소를 고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쯤 되면 협상을 하자는 건지 추인을 하자는 건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 보고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오산 평택 등 한강 이남의 두 지역을 전략적 허브로 삼아 미군을 재배치하는 것은 우리 의사와 무관하게 주한미군 성격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적어도 이번 용산기지 이전은 (비록 우리가 원하는 바라 할지라도) 미국측 요구가 더 많이 반영된 것이 명백하다.’

    ‘해결방안은, 일본 독일의 사례를 원용해 1990년 당시와 달리 용산기지 이전요구의 주체가 변화(2003년에는 미측이 조기이전을 선(先)제의)한 것을 감안해 협상을 통해 한국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전비용을 전담할 이유가 없는데도 협상팀에서는 이에 대한 검토 및 문제제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는 이 보고서를 작성하기 전 국방부와 외교부 관계자들을 은밀히 불러 협상과정의 문제점을 파악했다. 국방부에서는 법무관리관실 소속 군법무관이, 외교부에서는 조약국 실무자가 ‘조사’를 받았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인물이 김형동 군법무관이다. 김 법무관은 협상과정에서 법적인 자문을 했다. 하지만 말이 자문이지 들러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공직기강비서관실 판단이다.

    김 법무관은 국방부 협상팀인 ‘용산기획반’에 협상의 기준인 1990년 합의각서에 위법적 요소가 있음을 여러 차례 지적했다. 하지만 그의 견해는 번번이 묵살당했다. 또 비용부담에 대한 법률적 검토를 위해 협상팀에 비용목록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으나 ‘비밀’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협상팀은 시민단체 등에 의해 용산기지 이전협상의 문제점이 공론화되자 국방부 법무관리관실에 시민단체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의 법률검토보고서를 공식 요청했다.

    국제공법담당관이던 김 법무관이 그 일을 맡게 됐다. 그가 ‘시민단체의 주장이 다 맞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작성해 상부에 올리자, 국방부를 곤란하게 하는 내용을 빼고 재작성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작성하면 되돌려보내기를 10여차례. 결국 김 법무관의 의지와 상관없는 보고서가 그의 이름으로 작성됐다. 요지는 용산기지 이전협상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 국방부 협상팀은 이 문서를 사방에 돌렸다.

    그후 협상에 관계된 모 장교가 김 법무관에게 전화를 걸어와 “매국적 협상”이라고 울분을 터뜨리며 협상 실무자의 고충을 얘기했다. “이대로 협상하다가는 나중에 우리 다 죽는다”고 말한 그는 김 법무관에게 제대로 된 보고서를 작성할 것을 권유했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김 법무관은 그의 요구대로 새로운 보고서를 만들어 ‘용산기획반’ 책임자에게 전달했다. 이것이 진짜 자신의 의견이라는 말을 덧붙여.

    이석태 당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김 법무관을 청와대로 부른 것은 국방부 협상팀이 돌린 김 법무관 명의의 법률검토보고서를 읽고나서였다. 김 법무관은 “사실은 내 의견이 아니다”라며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이와 관련, 이석태 비서관은 위 보고서에서 ‘부처 내 법무관리관실 법무관들이 협상과 관련해 제시한 검토의견을 무시하고 제한했다’며 국방부 정책실을 비판했다.

    “대통령이 읽고 충격받을까봐…”

    이석태 비서관은 보고서를 작성하기 전 협상 관계자들을 모아 두 차례 평가회의를 열었다.

    1차회의에서는 협상 주도세력인 국방부 정책실과 외교부 북미국, 그리고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NSC의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2차회의 후 상황이 반전됐다. 회의를 주재한 이석태 비서관이 협상팀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기 때문이다. 회의가 끝난 후 국방부와 외교부 관계자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석태 비서관이 의욕적으로 작성한 이 보고서는 대통령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문재인 민정수석이 양을 대폭 줄여 요지만 보고한 것. 문 수석이 그렇게 한 건 대통령이 읽고 충격을 받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한미 양국 협상팀에 의해 타결된 용산기지 이전협정은 조만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국회 비준 절차를 밟게 된다. “문제점을 많이 개선했다”고 자평하는 협상팀과 NSC측 설명으로 보아 미국도 어느 정도 비용을 부담하는 모양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이전비용을 많이 줄였고 모호했던 포괄적 규정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등 진전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워낙 비싸게 부른 옷값을 조금 깎았다고 만족스러워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어쨌거나 북핵 문제와 주한미군 감축 문제로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한국의 협상팀으로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협정내용이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면, 협상절차의 법적인 문제점을 제기해 협상팀의 안일한 자세에 자극을 준 외교부 조약국의 공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청와대 평가회의에 참석했던 이정희 변호사는 용산기지 이전협상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한국측 부담비용이 실제로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국회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전비용을 명시적으로 합의하지 않은 탓이다. 이 변호사가 우려하는 최악의 사태는, 그나마 미국이 부담하기로 한 일부 비용마저 방위비 분담 차원에서 도로 한국이 떠안게 되는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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