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고액권’은 선택, 리디노미네이션은 필수

‘인플레이션 착시’는 일시적, 화폐 선진화가 급선무

  • 글: 황의각 고려대 교수·경제학

    입력2004-10-26 11: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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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는 ‘화폐제도 개선기획단’을 구성해 리디노미네이션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국회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화폐기본법’ 제정에 나서야 한다. 한국은행은 신화폐 발행을 준비하고, 금융기관과 기업은 전산시스템 수정에 대비해야 한다.
    • 3∼4년 후 화폐제도를 개선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고액권’은 선택, 리디노미네이션은 필수

    화폐단위를 변경하면 현금자동입출금기(ATM)는 전면 교체해야 하므로 상당한 비용이 들지만 전산시스템의 경우 어차피 교체가 불가피하므로 추가 비용 부담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28일자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화폐의 단위당 가치가 낮은 나라가 지구상에서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면서, 터키가 새해(2005년) 1월1일 여섯 자리의 ‘0’을 없애는 화폐단위 변경을 단행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될 경우 1유로에 1400원인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면서도 유일하게 단위당 화폐가치가 낮은 ‘국제적으로 기이한 나라(international oddity)’로 남게 될 것이라면서 화폐단위를 변경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일부 국회의원과 학계, 업계 등에서 일제히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에 대한 찬반 논의가 일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재정경제부 장관은 물론 2002년부터 중장기 연구과제의 하나로 화폐제도 개선방안을 연구해오던 한국은행 총재조차 이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으로 선회하는 바람에 많은 국민이 혼란에 빠져 있다.

    공직 수장들이야 빨라야 3∼4년 후에나 실시될 정책보다는 재임 기간중 가시적 성과를 이루는 데에 급급할 수 있다. 자리에서 물러난 후의 일로 지금 골머리를 썩이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 필요한 장·단기 과제를 놓고 당장의 찬반논쟁에 휩싸이기 싫어서 일시적으로 덮어두려 한다면 이는 정책 입안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앞으로 3∼4년 후에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하는 것이 우리 경제를 위해 필요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며 만약 필요하다면 지금부터 대책을 강구해야 마땅하다.

    현행 화폐는 ‘후진 경제’ 산물

    먼저 리디노미네이션이란 무엇이며, 왜 이것을 3∼4년 이내에 실시하기 위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가를 밝혀보기로 하자.



    리디노미네이션이란 화폐의 가치 변동 없이 은행권 및 지폐의 액면을 동일한 비율의 낮은 숫자로 변경하는 것이다. 즉 현재 화폐단위의 1000분의 1 또는 100분의 1 비율로 표시하거나 이와 함께 새로운 통화단위로 화폐의 호칭을 변경하는 조치를 말한다. 예컨대 1000분의 1로 리디노미네이션하게 되면, 현행 만원권은 10원이 되고, 5000원권은 5원, 1000원권은 1원, 100원은 10전, 10원은 1전, 1원은 1푼이 된다.

    아무런 정책적 제약 없이 실시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실질가치 변동 없이 단위숫자만을 낮추는 것이므로 원론적으로는 소득, 물가 등 국민경제의 실질 변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리디노미네이션을 실시하면 일시적인 착시효과에 빠질 수 있다. 예를 들어 100만원을 예금한 사람은 화폐단위 변경 후 통장잔액이 1000원이 되어 실질자산 규모가 1000분의 1로 감소한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럴 경우 일시적으로 지출이 감소할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화폐단위 변경에 따른 화폐교환 과정에서 자신의 재산보유 정보가 누출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이 이 제도가 실시되기 전에 부동산을 사거나 외화로 바꾸어두려고 할 경우 일시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착시에 의한 반응은 초단기적이면서도 디플레적 요인과 인플레적 요인의 양방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실질변수에는 대체적으로 중립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인플레이션의 진전 때문이든 실질 성장 때문이든, 한 나라의 확대된 경제와 거래규모를 화폐적으로 표현하는 숫자가 너무 커서 초래되는 국민들의 계산, 회계기장 또는 지급상의 불편을 해소할 목적으로 실시된다.

    그러면 왜 가까운 미래에 화폐단위의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말인가.

    그 이유는 현행 우리나라 화폐제도가 1960∼80년대 인플레이션 경제와 후진 경제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경제 선진화와 국제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묵은 화폐제도의 선진화를 위한 개혁을 단행해야 할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사람도 몸집이 커지면 헌 옷은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화폐제도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고액권 발행, 화폐 규격과 품질 선진화, 위조화폐 방지를 위한 최첨단 장치 도입, 화폐단위 변경(리디노미네이션) 등 세 가지 조치가 필수적이다.

    경제규모 2000배 이상 증가

    첫째,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과 그 대응방향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현행 화폐는 1962년 6월, 당시 구권 10환을 신권 1원으로 바꾼 화폐개혁을 통해 도입된 것이다. 그 후 우리 경제는 고도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개발 인플레이션과 실질생산규모의 괄목할 만한 확대로 경제규모, 즉 명목 국민총생산액(GDP) 규모가 약 2130배나 증대되었고, 소비자물가는 48배 이상 상승했다.

    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지고 거래단위가 늘어나면 화폐수량도 증가한다. 예컨대 경제규모가 10배 늘어나면 화폐금액도 10배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금액을 표시하는 돈의 크기는 결국 수량 증가나 수량 변경 없이 새로운 고액단위를 가지는 화폐의 발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현행 1만원권이 처음 도입된 1973년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100배 이상, 소비자물가는 11배 상승했다. 총 화폐발행액 중 1만원권이 차지하는 비중이 92%로 1만원권 중심의 권종화(券種化)가 심화되고 있다. 경제와 거래규모의 확대에 맞추어 현재까지의 최고액권인 1만원권 발행을 중심으로 돈을 늘려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평균 지폐 보유 장수는 1975년 7장이던 것이 2003년에는 68장으로 늘어났고, 이미 10만원권 수표가 고액권 대용으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로 OECD 12개국의 최고액권 평균가액은 우리돈으로 13만원 수준이다. 미국의 100달러짜리 지폐는 한화 12만원 수준이고, EU의 최고액권인 500유로는 한화 65만원에 해당하며, 일본의 최고액권 1만엔은 한화 10만원의 가치를 갖는다.

    고액권 도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현재 통용되는 10만원권 수표를 사용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표는 평균 1회 사용으로 폐기되며 제조비가 지폐의 50배나 될 뿐만 아니라 위변조의 위험성이 크며, 일일이 이서(裏書)를 해야 하는 등 불편이 따른다. 그리고 폐기 후에도 발행은행이 5년간 보관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어 보관비용도 만만치 않다. 10만원권 자기앞수표를 발행 유통하는 데 드는 인쇄, 보관, 폐기 비용만 해도 연간 6000억원에 이른다. 엄청난 사회적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고액권(예컨대 5만원권과 10만원권) 화폐의 신규공급에 최소한 2년의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이미 우리 경제의 규모나 거래단위의 금액표시 숫자가 너무 비대해져서 어차피 3∼4년 뒤에는 화폐단위의 변경, 즉 리디노미네이션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금 신규 고액권 도입을 도모하기보다는 화폐단위 변경 조치 안에서 현재의 10만원 및 5만원에 해당하는 신규화폐(예컨대 100원권과 50원권으로)를 도입하는 것이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2008년경 실시 바람직

    둘째, 화폐의 규격과 품질의 선진화 문제다. 우리나라 지폐나 주화의 규격은 선진국 화폐에 비해 너무 클 뿐만 아니라 컴퓨터 기기를 통해 위조된 1만원권 지폐가 시중에 다량 유통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형편이다. 따라서 선진국 수준의 규격과 품질, 그리고 최첨단 위조방지 장치를 갖춘 새로운 화폐 발행이 불가피하다.

    이 같은 화폐 교체의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화폐의 전면교환 조치(리디노미네이션)를 통해 일괄 추진하는 것이 시기적으로나 비용 측면에서 훨씬 효율적이다.

    셋째, 왜 화폐단위의 변경, 즉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한지를 좀더 현실적인 시각에서 살펴보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경제규모는 60년대 이후 엄청나게 커졌다. 우리나라 국부(國富)는 현 화폐 수치로 표시할 때 6000조원, 금융자산의 크기는 약 4700조원, 그리고 명목 GDP 규모는 750조원에 이른다. 가계, 기업, 정부가 보유한 금융자산은 연간 평균 15% 증가하고 있는데, 이대로 가면 2008년에 ‘경(京)’(1만조원) 단위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거시변수의 화폐표시 방식뿐 아니라, 민간기업이나 금융기관에서 사용하는 거래단위가 너무 높아서 회계, 장부기장 및 거래에 불편한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울러 수치의 과대 인플레로 인해 월 소득이 100만원인 사람은 ‘0’이 6개나 붙지만 백만장자가 아닌 저소득자에 불과하다. 일상적인 상거래의 최소 거래단위도 100원 이상이 된 지 이미 오래며 10원과 1원짜리 동전은 길에 떨어져도 줍는 사람이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수년 내에 ‘경(京)’ 단위 사용이 가져올 거래 및 기장상의 불편을 제거하고, 고액권 발행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한편 화폐규격과 품질의 선진화를 도모할 수 있는 ‘리디노미네이션’을 지금부터 공개적으로 준비하여 2008년경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면 현재 원화의 대미(對美) 달러환율이 네 자릿수에 이르는 데 따른 불편도 해소될 것이다.

    이상에서 필자는 화폐단위 변경의 당위성을 논해보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조치의 불필요성이나 이 조치에 수반되는 비용의 문제를 제기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들 반대 주장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 경제가 심각한 침체 국면에 빠져 있는데, 왜 하필 지금 리디노미네이션 문제를 들고 나와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느냐는 주장이다. 둘째, 화폐단위 변경은 화폐가치의 혼란과 인플레를 유발할 것이라는 논지다. 셋째, 신규 고액권 발행은 뇌물 제공 등 부패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리디노미네이션이 부동산 투기와 국내 자금의 해외유출 등을 유발한다는 주장이다. 끝으로 화폐단위를 변경하여 환율을 낮춘다고 해서 국가의 위상이 오르겠느냐는 냉소적 시각도 있다.

    ‘고액권’은 선택, 리디노미네이션은 필수

    우리나라의 현행 화폐가 도입된 1962년과 비교하면 현재의 경제규모는 2000배 이상 증가했다.

    이런 비판에는 엄청난 비용이 수반될 리디노미네이션에 나서기보다는 차라리 정부와 중앙은행이 국가경제의 생산력 제고, 국제수지 개선, 물가안정 등에 총력을 기울여 우리 경제의 대외 위상을 높이라는 충고성 주장이 포함된다.

    이상의 반대의견에 대해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필자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먼저 경기가 부진하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는 의견은 대단히 잘못된 판단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현재의 경기부진은 내수경기가 실종된 데서 비롯됐는데 그 배경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에 부(富)의 편재현상이 심각함을 알 수 있고 이것이 내수경기 침체의 한 원인이다. 부(富)의 양극화는 과거 정부의 특혜금융정책 등으로 조성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최근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30%대의 고금리가 유지돼 금융자산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자산을 증식할 호기를 맞아 재산을 더욱 늘렸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은행 대출을 이용한 서민들의 재산이 이들에게 이전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뿐인가. 잇달아 초저금리 시대로 돌아서면서 고금리로 본원적 부를 축적한 이들이 곧바로 증권시장에 뛰어들어 한탕씩 하고 빠져나감으로써 주식 투자에서 얻은 자와 잃은 자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생겼다. 그리고 지난 3년여 동안 경기부양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허용한 아파트 투기를 통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는 회복불능의 격차가 생겨나게 되었다.

    경기침체와 무관

    그렇다고 부자가 된 사람을 탓할 수는 없다. 경제가 이렇게 된 책임은 부자가 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정책을 잘못 운영한 정부당국과 당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관료들에게 있다. 침체된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해서는 기업의 기(氣)를 살려 이윤창출을 위해 자유롭게 기업 경영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기업이 잘 되어야 고용도 창출되고 소득의 분배도 공평해진다.

    또 중요한 일은 국민 모두의 도덕성과 품성을 높여서 협력하는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다. 노사 갈등이 심화되고, 사사건건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는 획기적 기술과 과학의 혁명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생산력 증대를 통한 국가경쟁력 제고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성장률 역시 종전과는 달리 4% 수준을 좀처럼 넘어서기 어려운 경제발전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이런 종합적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현재 경기침체의 주요 원인 또는 촉매제인 것처럼 여기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현재의 경기침체와 리디노미네이션 논의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는 독립적 사안들이다.

    오히려 경기가 과열되었을 때보다는 지금과 같은 저물가와 저금리 환경에서 화폐제도 개선조치를 취하는 것이 시기적으로는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3∼4년 후에 시행하기 위해 지금부터 준비를 하면 신권 제조, 현금입출금기와 자동판매기 등의 교체 및 이에 필요한 신규시설 투자 등을 통해 최소 1조원 이상의 경기부양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화폐단위 변경으로 예금자들이 자기통장의 돈 규모가 작아진 것으로 착각함으로써 지출을 줄이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소비자는 금방 새로운 단위에 적응할 것이다.

    두 번째로 반대자들은 화폐단위 변경이 화폐가치 혼란을 야기하고 인플레를 유발할 것이라는 논리를 편다. 하지만 화폐단위 조정이 물가상승과 부동산 투기 및 자금의 해외유출을 초래하는 경우란 과거 1962년 화폐개혁 때처럼 예금동결, 일정액 이상 교환금지, 교환시 실명확인 등 부정축재자를 색출해내는 것과 같은 정치적 목적으로 실시될 때에나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최근 논의되는 리디노미네이션의 취지는 과거와 같은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경제적 목적에 있기 때문에 개인 자산보유자가 불안해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또 일부에서는 소수점 이하의 우수리 절상으로 인해 물가상승 요인이 발생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와 같은 우려는 전, 푼 등 보조화폐를 도입해 해결할 수 있다. 3년 정도의 준비기간을 거쳐 1년 정도 신·구 화폐 이중가격표시제를 시행하면 단위 변경에 따른 화폐가치의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

    세 번째 반대논지는 단위 변경 구조 안에서 고액권 발행으로 뇌물 제공 등 부패를 조장할 것이라는 우려다. 그러나 부정부패야말로 도덕·윤리의 문제이자 잘못된 관행과 질서의 문제이지, 고액권 발행과는 별개의 사안이다. 고액권을 발행하는 선진국이 고액권이 없는 한국보다 부패가 더 심하다고 볼 수 있는가. 또 고액권 지폐가 아니라도 외화, 상품권, 귀금속 그리고 무기명 예금증서 등 뇌물 대체수단은 얼마든지 있다. 도둑이 새 칼을 소유했다고 새로 도둑질을 감행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고액권’은 선택, 리디노미네이션은 필수

    최근 논의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순수하게 경제적 목적에서 추진되는 것이므로 개인 자산보유자가 불안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넷째로 화폐단위 변경을 통해 환율을 낮춘다고 국가의 대외 위상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폐단위 변경을 위해 투자할 돈이 있으면 생산성 증가를 통해 환율을 낮춰야 국가의 위상이 향상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타당하다. 화폐단위를 변경한다고 갑자기 국가의 위상이 오를 수는 없다. 그러나 화폐단위 변경으로 환율 단위수가 줄어들면 화폐의 대외적 가치가 격상되는 효과를 통해 간접적으로 국가의 이미지가 높아질 것이다.

    화폐는 그 나라 경제의 얼굴이다. 우리나라 현 화폐의 대미 달러환율은 네 자릿수다. 2005년 터키가 화폐개혁을 단행하면 대미 달러환율 네 자릿수 나라는 OECD 국가 중 한국이 유일하다.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대미 달러환율이 네 자릿수 이상인 나라는 26개국이지만 이들은 대부분 아프리카, 남미지역 국가들로서 한국보다 훨씬 후진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네 자릿수 이상의 대미 달러환율이 도대체 무슨 문제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실생활과 직결된다. 예컨대 내국인이 제3국으로 여행하여 물건을 구입할 때 제3국 화폐 대(對) 미국 달러의 교환비율을 먼저 머릿속으로 계산한 다음 다시 미국 달러와 우리나라 돈의 교환비율로 환산하여 그 물건 가격이 도대체 얼마인가를 평가해야 한다. 이때 네 자릿수 환율을 계산하기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대미 환율이 한 자릿수라면, 환산과 계산이 훨씬 쉽다. 동시에 외국에서의 지출을 줄이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국내 생산성 제고를 통해 환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화폐단위 절하를 통해 환율을 낮추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생산성 증가를 통해 자연스럽게 환율을 인하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경제의 현실에 비춰볼 때 이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고, 설령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실제로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예산 투자와 노력이 요구된다. 우선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몸에 맞지 않는 낡은 옷(네 자릿수 환율)을 벗고 새 옷(한 자릿수 환율)으로 갈아입게 되면 대외 이미지 개선은 물론 기분전환 효과까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끝으로 화폐단위 변경(리디노미네이션)에 엄청난 비용이 소요될 것이 뻔한데 왜 하려 하는가라는 반론이 있다. 화폐단위를 변경하면 신화폐 제조, 자동판매기와 현금인출기 등 현금입출기기의 교체 및 전산시스템의 수정, 기존 채권과 주식의 액면수정 등에 적지 않은 비용이 소요되는 것이 사실이다.

    3~4년후 실시해도 지금 준비해야

    그러나 이러한 비용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적으며 오히려 여기서 나오는 편익이 비용보다 월등히 많다. 현재 우리나라 은행권의 평균수명은 권종별로 2~4년반 정도이므로 리디노미네이션을 위한 3년 정도의 준비기간과 1년의 신·구 화폐 병행 통용기간을 감안한다면 신은행권 발행에 따른 추가적인 비용은 크지 않을 것이다.

    자동판매기를 교체하는 데 드는 비용 역시 3∼4년에 걸쳐 분산되기 때문에 그 부담이 우려할 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현금인출기(CD)는 큰 문제가 없으며, 다만 현금자동입출금기(ATM)의 경우는 전면 교체해야 하므로 상당한 교체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전산시스템의 경우도 Y2K 대비차원에서 교체된 수많은 전산기기와 프로그램들이 수년 내에 내용(耐用)연수가 다해 어차피 교체 및 수정이 불가피하므로 실질적인 추가 비용부담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은행이 잠정적으로 계산한 리디노미네이션의 총비용과 총편익을 보면 총비용은 약 2조7000억원,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편익은 10년간 이득만을 고려할 때 약 8조6000억원이다. 편익에는 기장상의 편리함이 가져다주는 이익도 있지만, 현재 통용되는 10만원권 은행 자기앞수표의 발행 및 사용 후 보관비용(연간 6000억원×10년 = 6조원)의 절감효과가 큰 몫으로 계상되어 있다.

    화폐제도의 선진화를 위한 조치, 즉 화폐교환 조치를 통한 고액권 문제, 화폐규격과 품질의 문제, 환율의 조정문제 등을 일괄 해결하기 위해 3∼4년 후 실시를 목표로 지금부터 준비에 착수한다 해도 결코 빠른 것이 아니다. 당장 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왜 하필 경제가 어려운 지금 이 문제를 논의하느냐는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이 과제는 어느 때인가는 꼭 해야 할 일이며 시기가 늦어질수록 사회적 비용은 더 커질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준비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리디노미네이션은 국민경제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관련 법령의 제정 등이 필요하므로 정부가 장단점을 제시하면서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국민여론을 수렴해야 한다. 국민적 이해를 바탕으로 다수의 합의를 유도하면서 국회의 입법절차를 거쳐 시행해야 한다. 이미 지난 16대 국회 마지막 회기 중이던 2003년 11월20일 당시 민주당 이완구 의원 등 18인의 발의로 화폐단위 변경을 포함한 ‘화폐기본법안’이 의안 2954호로 국회에 제출된 바 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용돌이와 17대 국회의원선거 등으로 이 법안은 흐지부지되었다.

    지난 8월말 ‘이코노미스트’가 한국 화폐단위 변경 필요성을 언급한 직후 일부 정치권에서 화폐개혁 논의가 다시 일자 정부는 처음에는 동의하다가 부인하고 나서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그리고 국회는 삼권분립 정신을 실종한 듯 2004년 10월 현재 잠잠해진 상태다.

    속셈 숨기면 안돼

    하지만 우리 경제의 선진화와 규모 확대에 맞지 않는 현행 화폐단위는 늦어도 2010년이 되기 전에 변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라도 한국은행과 정부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치밀하고 세심한 준비를 해야 한다. 오해나 혼란이 없도록 대국민 홍보도 계속해야 한다.

    리디노미네이션의 성공적인 실시를 위해 정부, 국회, 금융계, 산업계 등 관련 주요기관들은 다음 사항들을 사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정부(재경부 등)는 관련 법률안의 입법예고 및 국회제출, 가칭 ‘화폐제도개선기획단’ 구성·운영, 그리고 대국민 홍보와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한 대응방안을 마련하면서 이를 여론에 공개해야 한다. 국회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새로운 화폐기본법(가칭)의 제정을 제안, 공청회 등을 거쳐 국민적 합의를 모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행은 신화폐 발행 준비, 결제시스템 수정, 그리고 한국조폐공사를 통한 신화폐 제조, 현금취급기기 테스트센터 설치·운영 등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시중 금융기관과 기업은 전산시스템(결제시스템, 회계시스템) 수정을 위한 준비, 각종 현금취급기기의 교체를 위한 대책마련과 각종 장표의 변경 등에 대비해나가야 한다.



    이런 준비사항들이 차질없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부당국, 특히 재경부가 화폐제도 변경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밝혀야 한다. 속셈을 숨기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시간에 쫓겨 추진하려 들면 그만큼 국민적 저항과 경제적 혼란 및 사회적 비용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정부는 지금부터라도 화폐단위 변경은 정치적 동기가 아닌 경제적 목적으로 취해지는 것이며, 화폐교환을 무제한 무기명으로 시행할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재산 보유자가 불안하지 않도록 충분한 홍보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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