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국제영화제 킬러’ 김기덕 감독

“이창동 감독이 만들면 ‘사회를 보는 시선’, 내가 만들면 ‘김기덕이 하는 짓’이래요”

  • 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04-10-26 1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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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영화제 킬러’ 김기덕 감독
    “깡패 새끼가 무슨 사랑이야!”잇새로 짓눌려 새어나오는 쉰 목소리. 사랑하는 여인 선화에 대한 감정을 부정함으로써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더 큰 사랑을 표현한 ‘나쁜 남자’ 한기가 내뱉은 한마디다.

    김기덕(金基德·44) 감독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영화 ‘나쁜 남자’ 이후다. 1996년 ‘악어’로 데뷔한 후 ‘파란대문’ ‘섬’ ‘실제상황’ ‘수취인불명’ 등을 만들었고 그때마다 여성비하, 지나친 잔혹성으로 찬반 논쟁을 일으켰던 ‘문제 감독’이지만, 이 영화만큼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당시 SBS드라마 ‘피아노’를 통해 최고 인기 스타에 오른 조재현이 주연을 맡은 덕에 그의 영화 중에 가장 많은 관객(전국 75만명)을 동원하기도 했다.

    사창가 포주가 자신을 경멸한 여대생을 창녀로 만든다는, 그 여대생이 결국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포주를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은 관객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을 넘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난 기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게 어떻단 말인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랑 중 하나가 아닌가. 집창촌 성매매 여성과 포주 가운데 선화와 한기 같은 경우가 없지도 않을 터. 사랑하는 데 윤리라는 게 그렇게도 중요할까.

    사랑하는 여인을 창녀로 만들어놓고 밀실에서 몸을 파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도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남자, 트럭을 몰고 다니며 여인에게 몸을 팔게 하고 그녀가 ‘일’할 동안 밖에서 망을 보는 남자, 일을 마친 여인과 함께 담배를 빼문 그 남자의 간절한 사랑에서 오히려 짙은 페이소스가 느껴졌다.

    이런 영화를 만든 김기덕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의 특이한 이력에도 눈길이 갔다. 1960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학교 따윈 다니지 말라”는 아버지의 엄명에 초등학교 졸업 후 공장에 취직했고, 아버지를 피하느라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남자, 제대 후 프랑스로 떠나 3년간 그림을 그려주며 무위도식하다 귀국해 쓴 시나리오가 당선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 남자, 제도권 밖에서 해마다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내는 남자, 베를린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에서 잇달아 감독상을 수상한 ‘대단한’ 남자. 이 남자를 한번 벗겨보고 싶었다.



    “내가 앵무새입니까?”

    그와 인터뷰 약속을 잡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9월12일 영화 ‘빈 집’으로 제6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고 돌아오자 그를 찾는 곳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식적인 섭외루트를 밟지 않고 직접 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터뷰 안 합니다. 내가 앵무새입니까? 했던 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모르겠어요. 또 인터뷰 하면 뭐합니까?날 영화감독으로 ‘존경’하진 못할망정 최소한의 ‘존중’도 하지 않는 사람이 취조하듯 거만하게 물어대고 기사도 자기들 마음대로 쓰는데…. 감독에 대해 기사를 쓰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냥 영화를 봐주세요.”

    인터뷰 얘기를 꺼내자마자 거절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바쁘다’는 건 핑계일 뿐 인터뷰를 안 하려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구나. 불신, 자존심, 피해의식 같은 거….

    그러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오기가 발동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1시간쯤 후 그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운전중이라 전화를 급하게 끊어서 죄송해요. 지금 지방에 있는데, 서울 가서 전화 드릴게요.”

    며칠 후 김 감독은 “별로 할 이야기도 없는데, 꼭 만나야겠냐”고 물어왔고 “그렇다”고 하자 “그럼 내일 보자”고 했다.

    10월6일 2시 서울 인사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야구모자와 티셔츠, 면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그런데 찻집에 들어서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진흥위원회’ 같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 국내 출품작 선정과 관련된 것 같았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9월22일 심사위원회에서 ‘빈 집’을 아카데미영화제 출품작으로 결정했으나, 24일 ‘빈 집’이 국내에서 공식 개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태극기 휘날리며’를 출품작으로 발표했다. 이에 ‘빈 집’측이 이의를 제기하자 아카데미위원회에 공문을 보내 출품자격 판단을 맡긴 끝에 10월4일 ‘태극기를 휘날리며’를 출품작으로 최종 확정했다.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빈 집’이 심사위원 5명의 만장일치로 출품작으로 결정됐다 이틀 만에 바뀐 거죠. 영진위가 아카데미에 보낸 공문을 보면 ‘태극기 휘날리며’를 출품작으로 결정한 영진위의 의견에 동의해달라는 내용도 있어요. 1000만명이 봐야만 좋은 영화인가요?”

    ‘국제영화제 킬러’ 김기덕 감독
    그는 정말로 서운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기왕 이렇게 된 거, ‘태극기 휘날리며’가 아카데미상 최종 후보 5편에 들고 수상까지 하면 좋겠다”고 툭툭 털었다.

    전통찻집 야외로 자리를 옮겼다. 기와지붕, 미닫이문, 작은 문갑이 놓은 온돌방, 흙벽을 타고 올라간 녹색 덩굴, 흙바닥…. ‘빈 집’의 한옥을 떠올리게 했다.

    -베니스영화제 수상을 축하합니다. 귀국 후 매우 바빴을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바쁜 적이 없었습니다. 인터뷰에, 강연에, 축하행사에, 부산국제영화제에, ‘빈 집’ 홍보에 정말 정신이 없어요. 물론 찾아주는 곳이 많아 기쁘긴 하지만, 저야 꾸준히 영화만 찍어왔을 뿐 달라진 게 없거든요. 국제영화제에서 연이어 수상하자 혜성처럼 나타난 명감독인 양 갑자기 여기저기서 찾아대는 걸 보면 좀 서글퍼집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붙이는 일을 하는 태석은 전단지가 떨어지지 않은 ‘빈 집’에 들어가 며칠간 살다가 나온다. 어느 날 빈집인 줄 알고 들어간 고급주택에서 멍투성이의 선화를 만난다. 태석은 남편의 폭력과 광적인 집착에 망가질 대로 망가진 선화의 손을 잡고 함께 떠난다. 두 사람은 고급주택에서 철거되기 직전의 낡은 아파트까지 떠돌아다니며 다양한 인간군상과 만난다. 하지만 이들의 여행은 ‘가택침입죄’라는 세속의 잣대에 걸리고 만다. 태석은 감옥에 가고, 선화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감옥에서 태석은 전방 180도만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을 피해 숨는 이른바 ‘유령연습’을 하고 출옥 후 선화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태석과 선화, 선화 남편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빈 집’의 줄거리다. 김기덕 감독의 이전 영화와 마찬가지로 10억여원으로 제작된 저예산 영화다. 영어 제목은 ‘3 Iron’. 골프에서 가장 강하다는 3번 아이언을 말한다. 7월2일 촬영을 시작해 18일에 크랭크업 했고 10월15일 개봉한다.

    독특하고 파격적인 소재와 충격적인 영상 때문에 그의 작품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빈 집’은 편안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파격과 폭력성이 많이 희석됐고 간간이 실소를 머금게 하는 유머까지 들어 있다. 김 감독 스스로도 9월21일 기자시사회에서 “내 영화가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지만, 이 영화는 전혀 어렵지 않다”고 말했을 정도. 덧붙여 이 영화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해소하고 자신의 영화를 이해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털어놨다. ‘빈 집’에 대한 언론과 평단의 반응도 ‘김기덕이 달라졌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빈 집’에서는 김 감독의 스타일이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폭력성이 줄어든 대신 한결 세련되고 고급스러워졌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관객들이 변했다고 하면 변한 거겠죠. 영화를 겉으로만 보면 그렇게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빈 집’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생각하지 않고 김기덕이 전에 비해 약해졌다, 강해졌다 또는 순해졌다, 잔인해졌다만 보는 거니까요. 그건 영화의 본질이 아니죠. 잔인한 영화를 보고 싶으면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순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는 게 안전하겠죠. 제 영화의 주제는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표현 방법이 변했을 뿐이죠.”

    -‘빈 집’으로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정해진 것이 없어요. ‘이것을 말하고 싶다’고 전제하는 게 싫어요. 관객이 보는 데 따라 달라질 수 있죠. ‘빈 집’은 네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액면 그대로 해석하는 거죠. 피폐한 두 영혼이 만나 사랑을 나누면서 상처를 치유하는 독특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아마 대다수 관객이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둘째는 모든 게 ‘선화’의 판타지라는 겁니다. 태석이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 거죠. 선화에게는 한국 주부들의 불만이 모두 들어 있지요. 경제권을 박탈당하고 집에 갇혀 살아야 하는 불만들…. 이들이 꿈꾸는 것은 누군가가 찾아와서 자신을 구원해주는 것일 수도 있어요. 태석과 함께 빈집을 떠돌아다니지만 이는 자신이 혼자 집에서 탈출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인 거죠.

    셋째로 태석의 판타지일 수도 있어요. 썰렁한 집을 돌아다니는데, 한 여자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 여자의 구원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없겠습니까.

    넷째로 선화의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어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선화는 ‘사랑해요’라고 말합니다. 관객은 태석에게 하는 말로 알겠지만 남편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어요. 태석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남편과 불행한 현실을 해결해보려고 태석이라는 판타지를 만들어낸 거죠.

    이렇듯 제 영화는 뚜렷한 결말이 없어요. 마지막 장면은 모두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죠.”

    -마지막 장면에 선화와 태석이 함께 저울에 올라가자 눈금이 0을 가리킵니다. 베니스에선 이 장면에서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죠. 이 장면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보시는 분들이 답을 가지고 있죠. 어떤 사람은 ‘저게 뭐야’라며 어이없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훌륭한 해석을 합니다.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어요. 물론 감독으로서 저만의 정답이 있긴 합니다. 제 생각과 일치하는 관객도 있겠지요. 이 기자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한 사람이 더해지면 무게가 늘어나야 하는데 오히려 무게 자체가 없어졌으니 선화가 태석을 만나며 자기 현실의 무게, 삶의 번뇌에서 벗어난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제 생각에 꽤 근접하네요(웃음). 어떤 사람은 태석과의 기묘한 동거가 선화의 자살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몸무게가 없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이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물론 우리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말이죠.

    홍상수 감독의 영화도 결말이 황당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보면 제자와 성관계 갖는 것을 또 다른 제자에게 들킨 ‘문호’의 불안함이 절절하게 드러나죠. 제자가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멍하게 있는 모습. ‘내일 잘리면 어떻게 하지?’ 같은 오만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뒤엉켜있겠죠. 인간은 이처럼 강한 체하는 약한 존재죠. 홍 감독이 보여주려 했던 게 그런 메시지 아니겠어요?”

    -선화는 그동안 김 감독이 그린 수동적인 여성상에서 다소 벗어난 것 같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남편에게 따귀를 올려붙이기도 하고요(기자시사회 때 이 장면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간 김 감독을 비판한 근거 가운데 하나가 마초적인 여성관과 지나친 여성비하였죠.

    “아니, 그렇지 않아요. ‘파란대문’ ‘수취인불명’ ‘나쁜 남자’ ‘사마리아’에 나오는 여주인공들을 살펴보세요. 이들은 남성보다도 오히려 능동적입니다. 제 영화를 페미니즘의 견지에서 너무 강박적으로 몰아붙이려는 이들이 있어요. 사실 여성비하라는 말만 들어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여성운동을 하려면 포주들이랑 싸우고 집창촌 폐쇄하는 데 애쓰면 되지, 왜 영화 한 편 가지고 핏대를 세우는지….

    다른 감독들의 영화를 보면 제 영화보다 여성비하가 더 심한 경우도 있어요. 가령 술집에서 여자들 껴안고 있는 장면 있잖아요. 대개는 그냥 지나치는 그 장면이 제 영화보다 더 잔인할 수 있어요. 그 여자들은 생각도, 의지도 없는 그저 남자의 소품에 불과하거든요. 저는 파고들어가서 내면이라도 보여주지만.

    어떻게 보면 사람들에겐 공격할 대상이 필요한 것 같아요. 공격할 무기도 갖지 못한 사람이 말이죠. ‘섬’을 뒤집어 놓으면 ‘악어’예요. ‘악어’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사람들이 역할이 바뀌어 여자가 권력을 잡은 ‘섬’도 비판하죠. 녹차가 쓰면 쓰다고, 싱거우면 싱겁다고 비판하는 것과 똑같아요.

    또 원초적으로 ‘구멍’을 빼앗긴다는 것에만 집착하죠. 하지만 구멍은 메워지는 게 아닌가요. 스스로 메울 수 없잖아요. 그런 질서 자체를 제가 위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배운 사람들의 열등감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김 감독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는 뭡니까.

    “제 영화는 인간과 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입니다. ‘나쁜 것이 꼭 나쁜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영화죠. ‘여자를 납치해 창녀로 만든다는 생각을 하다니’라고 하겠지만 이건 제가 영화를 위해 사용한 재료일 뿐이죠. 남들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릴 때 저는 나무의 진액이나 풀을 쪼아서 그리는 거예요. 그저 다른 사람보다 좀 탁한 재료를 쓰는 것에 불과합니다. 깡패나 창녀, 기지촌 여성, 혼혈아 등 다른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부분, 햇빛이 닿지 않아 어두운 부분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거죠.

    제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하 ‘봄’) 이후 제 작품 스타일이 달라졌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 영화의 시나리오는 이미 ‘섬’을 만들 때 썼습니다. 그후에 ‘나쁜 남자’ ‘수취인불명’ ‘해안선’을 만들었죠. ‘사마리아’도 3년 전에, ‘빈 집’도 꽤 오래 전에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그런데도 다들 제가 변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야 제 영화를 받아들이기 수월할 테니까요.”

    그는 우리 영화계와 언론, 그리고 관객에게 불만이 많은 듯하다. 아카데미 출품작 결정 번복의 상처도 아물지 않아서일까. 독설이 이어졌다.

    “영화가 망했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해요. 관객이 들지 않으면 망한 영화죠. 그게 좋은 영화든, 나쁜 영화든 간에. 하지만 1000만이 들면 훌륭한 영화예요. 이게 한국사회의 얼굴이죠. 제 영화를 보고 ‘재수 없는 영화 봤어’라고 욕하는 관객이 많다는 것도 압니다. 자기들보다 못한 인생이 나오면 재수 없는 영화가 되죠. 그 인생이 가깝게는 자신이 될 수 있고 친인척이 될 수 있고, 넓혀 보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구성원인데. 인간을 우등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으로만 나눠서 보기 때문에 제 영화에 ‘아웃사이더’니 ‘언더’니 하는 이상한 수식어를 붙이는 거예요.”

    ‘국제영화제 킬러’ 김기덕 감독

    9월12일 베니스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감독상 트로피를 받아들고 극중 태석의 ‘유령연습’ 상징인 ‘눈’ 그림을 보여주는 김기덕 감독.

    김기덕 감독은 지난 2월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을 때 기자회견에서 “‘사마리아’가 혹시 김 감독과 관련된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사마리아’가 원조교제를 다룬 영화기에 그 질문은 “당신도 원조교제를 한 게 아니냐”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이창동 감독이 만들면 ‘사회를 보는 시선’이고 김기덕이 만들면 ‘지가 하는 짓’이라는 편견이 있다”고 했다.

    “‘나쁜 남자’를 보고 ‘김기덕은 자기 여자한테도 그럴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게 인간입니까. 저는 공격적이지도 않고 남의 인생을 망가뜨릴 만큼 못된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을 무척 좋아하고, 잘 믿고, 쉽게 마음을 열어주고, 그러고 나선 상처받고 후회하는 나약한 인간이죠. 제게 학력 콤플렉스와 제도권 콤플렉스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비제도권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아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만들면 저열한 것으로 취급하죠. 난 그게 배운 사람들의 열등감이라고 생각해요.”

    -이젠 김 감독도 아웃사이더, 비제도권, 언더가 아니라 완전한 인사이더입니다. ‘권력’까지 잡은 것 아닙니까.

    “권력이라…. 물론 잡았죠. ‘표현의 권력’ 말입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워졌죠. 차도 몰고 다니고 골프도 치니까. 하지만 이건 한국사회가 준 것이 아닙니다. 해외의 평가를 통해서 주어진 것이죠. ‘봄’ 이전의 작품들이 못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종상이나 청룡상 후보로도 안 올랐어요. ‘봄’ 이후로 상을 받기 시작했죠. 외국에서 인정해주니 국내에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지. 하긴 제 영화가 국제영화제 후보에 오르자 일각에선 ‘우연이다’ ‘행운이다’라고 평가하더군요. 올해 들어 사자(베니스영화제)랑 곰(베를린영화제), 표범(로카르노영화제)을 받아오니까 비로소 다르게 쳐다보는 거죠.

    요즘은 길거리에서 사인해달라는 분이 많아요(인터뷰 중에도 3명의 팬이 사인을 받아갔다). 하지만 다 허수아비 시선이에요. 사인 받는 분들께 ‘제 영화를 보셨나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 ‘아직 못 봤는데요’라고 해요. 제 영화를 이해하려는 게 아니죠. 저는 그런 시선들이 전혀 반갑지 않아요. ‘빈 집’도 크게 성공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습니다. 아마 10만명쯤 보러오지 않을까요?”

    ‘국제영화제 킬러’ 김기덕 감독

    영화 ‘빈 집’에서 선화와 태석이 재회하는 장면.

    김기덕 감독은 언젠가부터 국내보다는 해외시장을 겨냥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빈 집’에서 대사를 없앤 것도 그런 의도에서다. 현재 ‘빈 집’은 해외시장에서 100만달러(약 12억원)의 수익을 내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해외에 두터운 팬층 있는 그는 “베니스영화제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본 영화는 내 영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는 ‘베니스의 권상우’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단연 최고의 스타였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외국 관객이 많이 찾은 영화도 그의 작품들이다. ‘봄’은 미국 영화시장에서 흥행수입 200만달러를 돌파했고, 러시아 등 유럽시장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다.

    “외국인은 제 영화에 대해 편견이 없어요. 장동건이 누군지, 이승연이 누군지도 모르죠. 영화의 본질만 봐요. 이승연의 누드가 언제 나오는지에만 관심 있는 관객과는 차원이 다르죠. 국내에선 스타가 나와야 훌륭한 영화로 대접받잖아요.

    -김 감독 영화에는 스타들이 거의 출연하지 않죠.

    “‘빈 집’을 만들 때도 이른바 스타들에게 먼저 섭외를 했습니다. 그 사람이 안 돼서 승연씨가 하게 된 거죠. 남자주인공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에는 톱스타를 섭외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어요. 하기야 스타가 제 영화에 나오려고 하겠어요? 돈도 조금밖에 못 주는데. 예전에 제 영화에 출연했다가 요즘 톱스타로 부상한 배우에게도 출연제의를 했는데 가타부타 답도 주지 않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신인배우들과 작업한 게 다행인 것 같아요. 저는 시나리오를 무척 꼼꼼하게 쓰는 편입니다.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배우가 잘 흡수하면 좋은 연기가 나오는 거죠. 그런데 톱스타가 대본도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채 잘난 체만 하고 자기들 스케줄에 맞춰서 촬영해야 한다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겠어요? 전 배우의 스케줄에 맞춰 일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감독들보다 영화를 빨리 찍을 수 있는 겁니다.”

    -‘위안부 누드’ 파동으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다시피 한 이승연씨를 캐스팅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이승연씨 출연을 놓고 논란이 거세지자 “이승연 캐스팅이 불편을 줬다면 사과하겠다”고 말했는데요. 진심이라기보다는 약간 비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논란이 뜨거워져 저도 인터넷에 들어가봤습니다. 승연씨에 대해 정말 끔찍하게 얘기하더군요. 한국에 정말 ‘악마’가 많구나 싶었어요. 승연씨는 ‘선화’를 진지하게 잘 읽어냈습니다.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이건 마치 선화의 꿈인 것 같아요’라고 했어요. 바로 제가 말하고자 하던 바였죠. 그래서 캐스팅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승연을 찍은 게 아니고 ‘빈 집’을 찍은 겁니다.”

    갑자기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직하던 음성이 좀 올라갔다.

    “제가 예전엔 영화감독이 아니었나요? 눈물겨운 성공 스토리, 신파 드라마 억지로 만들지 마세요.”

    모 방송국에서 김 감독의 생애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제안해온 것이다. 그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른 성공 스토리로 자신을 포장하는 게 너무도 싫다고 했다. 그는 “어릴 적에 이사와 서울 근교에서 살았고, 공장에 있을 때도 능력을 인정받았고, 해병대에서도 하사관으로 ‘지휘’를 하는 위치였고, 프랑스에도 내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서 갔다”며 “지나치게 왜곡된 나의 과거가 관객들로 하여금 내 영화에 대해 왜곡된 시선을 갖게 한다”고 했다.

    자연스레 화제가 ‘감독 김기덕’에서 ‘인간 김기덕’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어릴 적 부모님께서…”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그는 “우리 부모님은 좋은 분들”이라며 말을 잘랐다.

    김 감독의 아버지 콤플렉스는 널리 알려져 있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두려웠다. 완고한 절대군주의 그 천둥 같은 목소리. 나는 그 앞에서 문을 열고 닫는 것조차 망설여졌고 밥 한 숟가락 넘기는 것도 불편했다. ‘이놈의 새끼 커서 뭐가 될래?’ 아아, 나는 그 흔해빠진 야단 소리를 견디지 못했다. 그러기엔 난 너무 연약했다. … 난 아버지가 집을 비우는 때가 제일 행복했다. 아버지를 피해 달아날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인 화장실을 난 참 좋아했다(‘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에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그는 초등학교 시절 낙서를 한다고 아버지한테 피가 날 때까지 종아리를 맞은 적도 있다. “공부하지 말고 기술을 배워 공장장이나 되라”는 아버지 엄명에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에 취직했다.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것도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피할 수도 없었어요. 아버지 역시 피해자였기 때문이죠. 아버지는 지금도 6월25일이 되면 국무총리에게 ‘6·25 때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총알을 맞았고 아직까지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산다. 이제라도 보상을 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요. 수십 년째 보냈지만 ‘근거 없다’는 답신만 날아오죠. 아버지는 국가로부터 받은 상처와 분노를 자식들에게 푼 것 같아요.”

    아버지의 삶이 영화 ‘수취인불명’의 모티브가 됐다. 영화에서 지흠과 그의 아버지가 바로 김 감독 부자의 자화상이다.

    “아버지에게 학대받았다고 했던 제 말들이 아버지께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아버지 밑에서 굉장히 억눌렸던 건 사실이지만 학대라고 볼 수는 없어요. 아버지는 저를 사랑했으니까요. 지금은 제가 유명한 영화감독이 된 걸 무척 자랑스러워하세요. ‘김기덕 감독 알우? 걔가 내 아들이야. 어휴 그놈의 새끼, 내가 많이 때리고 잘 가르치지도 못했는데…’라면서.”

    -아버지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폭력성을 지니셨다면 어머니는 포용성을 지니셨어요. 최후의 승자는 늘 어머니셨죠. 제게 어머니는 언제나 한없이 품어주는 존재였어요. 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제 영화도 그래요. 공격성뿐 아니라 어머니의 품 같은 따뜻함도 지녔죠. 그런데 지금 두 분 다 몸이 좋지 않으셔서 걱정이에요.”

    ‘살면서 만든 영화’

    해병대에서 전역한 1990년 초, 그는 자신이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는 무작정 파리행 비행기에 오른다. 부랑자들이 웅크리고 있는 센 강가에서 첫날밤을 보낸 그는 야생동물 같은 동유럽, 아랍 친구들을 만나 연원을 알 수 없는 동질성에 끌려 친구가 됐다. 그들을 따라 지중해와 접한 남프랑스로 간 김 감독은 그곳에 화실을 얻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배낭에 짊어지고 유럽 10여개 나라를 돌면서 전시회도 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 자체가 큰 행복이었다. 그렇게 3년여를 보내고 1993년 귀국했다.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그가 쓴 시나리오 ‘무단횡단’이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 대상을 차지하면서부터다. 그에게 1500만원의 상금을 안겨준 이 작품은 아쉽게도 제작사의 사정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무렵 성수대교 근처에 살던 그는 한강 다리 밑에 모여 사는 부랑자들을 자주 목격했다. 또 거기서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이 한강철교 교각에 써놓은 ‘유서’들을 읽었다. 부랑자들이 여자를 집단으로 강간하고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자료들을 모아 시나리오를 써 무작정 영화사로 찾아갔다. 시나리오를 읽어본 영화사 사장은 “시나리오를 팔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직접 영화를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사 사장은 황당해했다. 그때까지 김 감독은 전문적인 영화 공부는 고사하고 영화 찍는 현장에도 한번 가본 적이 없었다. 1주일간 승강이를 벌인 끝에 결국 영화사 사장이 항복하고 말았다.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 ‘악어’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후 그는 8년 동안 10편의 영화를 만든다.

    “그런 면이 있죠. 다른 감독이 배워서 영화를 만든다면 저는 살면서 영화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책 따위는 별로 읽지 않아요. ‘수취인불명’이 제 삶을 가장 많이 담은 영화죠. ‘해안선’에는 해병대에서의 경험이, ‘야생동물보호구역’에는 프랑스에서의 경험이 녹아들어갔고요. ‘나쁜 남자’와 ‘사마리아’는 간접적으로만 바라봤어요. 나머지 영화들은 현실에서 모티브를 잡고 제 상상의 나래를 편 작품들입니다.”

    어느덧 약속한 2시간이 지나갔다. 김 감독은 오후 5시에 경기도 일산 근처에서 약속이 있다고 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벽을 허물고 이제 좀 속 깊은 얘기를 해볼까 했더니 시간이 다 가버린 것이다. 그래서 일산으로 가는 김 감독의 2인승 코란도에 무작정 올라탔다. 그렇게 인터뷰가 이어졌다.

    -차가 2인승이네요.

    “지난해부터 운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지하철을 타고 다녔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요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좀 곤란해요(웃음). 차는 곧 바꾸려고 해요. 2인승이라 가족과 같이 움직이려면 아무래도 불편하더군요.”

    “아내에게 항상 미안해요”

    그는 결혼도 했고 초등학교 2학년짜리 딸도 있고 노부모도 살아계시다.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후에도 “가족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그는 “반지도 없고, 행색도 그렇고, 영화를 봐도 결혼했을 것 같지 않은지 사람들은 내게 좀처럼 결혼했냐고 묻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가족에 대해 말을 아끼는 건 사실이다.

    “아버지에 대해 별 생각 없이 한 얘기들이 아버지께 너무 큰 상처가 됐어요. 이젠 웬만하면 가족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합니다. 제가 영화감독이지 가족이 감독인 것은 아니잖아요. 저로 인해 그들의 삶이 방해받으면 안 되죠. 특히 딸아이가 아버지 때문에 특혜를 받거나 상처를 받는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아요.”

    -부인과 사이는 좋으신가요?

    무례한 질문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1993년 결혼한 부인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저 프랑스에 있을 때 편지로 교제했다는 정도말고는. 혹시 그가 영화에서 그린 것 같은 사랑을 하지는 않았을까 궁금했다.

    “노코멘트. 가족 이야기는 안 할래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또 아내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사이가 좋은지 묻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자체가 아내한테 미안한 일이죠. 또 제 영화가 그리는 사랑의 이미지는 그 사람과 무관합니다.”

    -사랑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남녀간의 사랑을 묻는 거죠? 그건 남녀가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이겠죠. 만나자마자 손잡고 껴안고 섹스할 수도 있고요. 한순간 쾌락일지라도 그때만큼은 사랑이죠. 하지만 사랑은 일방적인 강요가 되어선 안 돼요. 그런 면에서 제 영화의 사랑과 제가 추구하는 사랑은 다르죠. 저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냥 느낌이 좋으면 편안해하고 좋아해요. 하지만 제 사랑을 강요하진 않죠. 싫다고 하면 깨끗하게 놓아줘요. 제 사랑이 또는 제가 추구하는 쾌락이 상대방에게 고통이 되어선 안 되니까요. 그렇기에 사람과 관계 맺기를 굉장히 두려워하죠. 편해지는 느낌, 좋아하는 마음이 두려워요. 내가 약해질까봐, 또 상처받을까봐. 그런 후유증은 정말 오래가거든요.”

    내친김에 무례한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그와 관련된 소문들에 대한. 예상한 대로 그는 발끈했다.

    “좀전에 말했듯 저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강요하는 사람도, 그걸 이용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 루머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는지, 정말 무서워지는군요.”

    세심하고 연약한 사람

    어느덧 일산이다.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기에 지하철 3호선 원당역 근처 자그마한 동산으로 산책을 갔다. 제법 찬 가을바람에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그는 오솔길을 걸으면서 길가에 떨어진 밤을 줍더니 대충 껍질을 벗겨 입속에 넣는다. 기자에게도 하나 건넸다. 한입 깨무니 고소하다.

    “집 근처라 종종 혼자서 오곤 해요. 땅에 떨어진 밤을 주워 먹기도 하고, 차에 혼자 누워서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시골 태생이라 그런지 이런 곳에 오면 마음이 차분해져요.”

    느낌이 달랐다. 이 사람이 아까 전통찻집에서 우리 영화계에 대해 날 선 독설을 퍼붓던 그 사람인가. 그는 거듭 말한다. 자신은 무척이나 세심하고 쉽게 상처받는 연약한 사람이라고. 그랬다. 그는 자신의 한마디, 행동 하나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고 또 걱정했다. 거친 외피 안에 부드러운 속살을 감추고 있는 생률(生栗) 같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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