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세속에서 道 탐구하는 ‘의사 居士’ 이동호

“마음의 본체는 자잘한 일상사와 번뇌망상 속에 있는 것”

  • 글: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입력2004-10-27 15:3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공식 직함은 내과의사지만 그에게 의사는 생계를 위한 부업에 불과하다. 세속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도를 탐구해온 월담 이동호 거사. 20대 초 짝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처음 인간의 본질에 의문을 던졌다는 월담은 화두를 잡고 돈오를 체험하며 보림(保任) 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사람은 결국 사주팔자대로 사는 것”이라는 그는 “세속에서 도를 추구한 인생 역시 사주팔자가 아니겠느냐”며 허허 웃었다.
    세속에서 道 탐구하는 ‘의사 居士’ 이동호

    이동호 거사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피부가 맑고 자세나 화법에 흐트러짐이 없다.

    불교에 ‘거사(居士)’라 불리는 계층이 있다.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도 닦는 사람을 말한다. 사바세계의 희로애락을 겪으면서도 고준한 정신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도를 갈고 닦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어지간한 근기(根機·중생의 교법을 받을 만한 성능)가 아니고서는 행할 수 없는 일이다. 근기가 있다 해도 전생에 쌓은 복이 없으면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것이 양수겸장의 노선이요 거사의 길이다. 수도에 신경 쓰다 보면 돈이 없어 고통받기 쉽고, 돈 버는 일에 관심을 갖다 보면 수도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야말로 복혜구족(福慧具足·복과 지혜를 아울러 갖춤)이어야만 갈 수 있는 것이 거사의 길이다.

    불교사를 보면 유명한 거사가 종종 등장한다. 인도에는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있다. ‘유마경’의 주인공이다.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플 수밖에 없다’는 대승불교의 메시지를 남긴 인물이다. 중국에는 방거사(龐居士)가 있다. 당나라 때 활동한 인물로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의 법을 이었다고 전해진다.

    한국에서는 신라시대 변산의 월명암(月明庵)에서 경론을 연구하며 수도한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유명하다. 부설거사는 이른바 ‘패밀리 도통’으로, 부인 묘화(妙花), 아들 등운(登雲), 딸 월명(月明)이 모두 도통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자현(李資玄) 거사가 유명하다. 높은 벼슬자리에 있다가 부인이 죽자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춘천의 청평사(淸平寺)로 들어가서 ‘능엄경(楞嚴經)’의 이근원통(耳根圓通·소리에 집중하는 수행법)을 깊이 연구했다. 조선시대에는 추사 김정희(金正喜)를 꼽을 수 있다. 외형적으론 명문가에서 태어난 유학자였지만 그는 내면적으로 불교에 심취했다. 주머니에 ‘금강경’을 휴대하고 다녔으며 초의(草衣)선사를 비롯한 당대의 고승들과도 교류가 깊었다.

    선풍도골(仙風道骨)의 老거사

    근래에 들어 거사의 맥을 이어가는 인물 중 한 사람이 월담(月潭) 이동호(李東豪·66) 거사다. 불교계에 명함을 내미는 사람이면 대부분 그를 안다. 공식 직함은 내과의사. 전주 시내에서 ‘이동호 내과’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사는 부업일 뿐, 도학(道學)에 대한 탐구가 그의 주업이다. ‘주도부의(主道副醫)’라고나 할까.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의 피부는 맑고 자세나 화법에 흐트러짐이 없다. 처음 보는 사람은 50대 중반으로 여길 정도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풍모를 갖췄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신도 모르게 말이 길어진다. 중언부언하는 경우도 많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월담은 오로지 묻는 말에만 대답한다. 상대가 알아들을 정도만 이야기하고 멈춘다. 목소리 톤도 일정하다.

    ‘주도부의’라고는 하지만 그가 의업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그가 가진 전문의 자격증만 해도 내과전문의, 결핵과전문의, 가정의학과전문의, 심장내과분과전문의, 소화기내시경분과전문의 등 여러 개다. 방사성동위원소특수취급자 면허도 가지고 있다. 전북대 의대 내과 외래교수이기도 하다. 1975년에는 경희대 동서의학연구소 연구교수로서 ‘한의학으로 노벨상에 도전한다’는 프로젝트를 추진한 경력도 있다. 양방의사지만 일찍부터 한의학도 깊이 연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역시 부업일 뿐, 그가 일생 추구한 목표는 도통(道通) 한 가지다. 그는 평생 ‘어떻게 하면 도통할 것인가?’라는 화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요즘 시대에 ‘도통’이라는 말을 들먹이면 금세 귀신이 출몰하는 ‘전설의 고향’ 분위기가 난다. 그만큼 ‘도를 통한다’는 목표는 신화의 세계로 넘어가 버렸다.

    까마득한 신화의 세계에나 어울릴 법한 주제를 가지고 60대 후반의 노거사(老居士)와 인터뷰한다고 생각하니 여러 가지 감회가 밀려왔다. 설악산 어딘가 바위동굴에서 솔잎차를 마주 놓고 하면 좋을 테지만, 대담은 전주 시내 병원 1층에 있는 서재에서 이뤄졌다. 태극권에 관한 서적 수백 권과 태극권 고수들의 시연모습을 찍은 비디오테이프가 사방 벽을 가득 채운 ‘태극권 룸’에서였다.

    짝사랑 열병이 道로 이끌다

    -언제부터 도학에 관심을 가졌나.

    “열아홉 살부터다. 내 고향은 전남 보성읍 주봉리(珠峰里)라는 곳이다. 당시 우리 동네에 부잣집이 두 집 있었는데, 위에 있는 기와집이 우리 집이었고 아래 기와집이 최가네 집이었다. 최가네 집에는 미모가 빼어난 23세의 처녀가 있었는데, 중학교 교편을 잡고 있던 어머니의 제자였다.

    사실 나는 매우 외롭게 자랐다. 아버지는 공무원, 어머니는 교사로 일하셨기 때문에 가정부 손에서 컸다. 형도, 누나도 없고 동생은 열 살이나 어려서 마땅한 이야기 상대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랫집 누나를 찾아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결국 그 누나를 짝사랑하게 됐다.

    전남대 의대에 진학해 광주에서 지낼 때는 누나 역시 미용학원을 다니면서 내 하숙집과 가까운 곳에 살았다. 자주 왕래하면서 나는 그 누나를 깊이 사랑하게 됐고 나중에는 극심한 혼돈상태에 빠졌다. 연상인 누나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반쯤은 행복하고 반쯤은 고통스런, 복합적인 감정이 혼재된 상태였다. 놓을 수도, 들 수도 없는 상황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때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당시는 동양철학은 구경하기 힘들었고, 서양철학만 득세할 때였다. 서양철학을 공부했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서양철학에는 ‘물음만 있지, 해답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 다음 찾은 것이 종교다. 구약과 신약을 모두 천착하였고, 광주 시내 교회 7∼8군데를 섭렵하였지만 해답을 구할 수 없었다. 특히 ‘나 이외의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 ‘나는 무엇이고 나 이외의 신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 하필 십계명 첫 번째에 이 말을 배치했을까?’ 등등의 의문만 더해갔다.

    그러다 의대 본과 1학년이 되었다. 당시 불교 사찰은 깊은 산속에만 있었지 도시에는 거의 없었는데, 묘하게도 동광사(東光寺)라는 절이 광주 시내에 있었다. 당시 동광사에는 현공(玄空) 윤주일(尹柱逸·1895∼1969) 법사가 계셨는데 설법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우연히 친구를 따라서 동광사에 들렀다가 현공 선생을 처음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섬광이 지나갔다. ‘아! 소설 속에 나오는 도인이 현실에 실재하는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본능적으로 ‘이분이야말로 나를 인도해줄 선생님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법을 듣고 보니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무릎을 쳤다. 진짜 선생을 만난 것이다. 그동안 내가 품고 있던 혼돈이 잘못된 문제제기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됐다. 그후 매일같이 수업이 끝나면 선생 댁을 찾아갔다.”

    -잘못된 문제제기라는 게 무슨 뜻인가. 문제제기도 잘된 것이 있고 잘못된 것이 있다는 말인가.

    “불교에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뜻이다.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내가 그동안 고통받고 있던 문제들이 근원적으로 뒤집어졌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시간도 공간도 없는데 나는 왜 고통받고 있는가?’ ‘시공이 없는데 나의 고통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고통이 존재하려면 시공이라는 밑바탕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내면의 고통이 심했기 때문에 이런 의문을 품게 됐던 것 같다.

    고통은 곧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이는 자연스럽게 ‘존재와 무’에 대한 의문으로 넘어갔다. 존재와 무를 불교의 ‘반야심경’ 식으로 표현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눈만 뜨면 자동적으로 이 의문이 떠올랐다. 길을 걸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몇 달간 이마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의문을 품고 시내 거리를 걷다 마주 오는 사람들과 부딪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피해 길 옆으로 걸었는데, 이번엔 종종 전봇대에 부딪혔다. 의문에 잠긴 채 걸어가다 보면 이마에서 번쩍 불이 나곤 했다.”

    20대가 화두 잡는 최적기

    -그 기간이 어느 정도였는가.

    “아마 6∼7개월 걸렸을 것이다. 후일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性徹)선사를 뵈었는데, 성철선사가 강조하신 말씀이 동정일여(動靜一如), 오매일여(悟昧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다.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한결같이 화두가 잡히는 상태가 바로 동정일여다. 오매일여는 깨어 있을 때나 삼매에 있을 때 한결같이 화두가 잡히는 상태이고 몽중일여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잡히는 상태인데, 그때 내가 이런 단계를 밟지 않았나 싶다.”

    세속에서 道 탐구하는 ‘의사 居士’ 이동호

    태극권 고수이기도 한 그는 “태극권이야말로 신체를 단련하는 데 가장 좋은 운동”이라고 강조했다.

    -학교에서 시험은 제대로 치렀나.

    “내가 가진 에너지의 20%만 시험공부 하는 데 쓰고 나머지 80%는 화두를 잡는 데 썼던 것 같다. 다행히 낙제는 하지 않았다.”

    -결국 화두는 풀렸나.

    “어느 날 홀연히 풀렸다. 모든 의심이 다 사라졌다. 무엇이든 보고 들으면 곧 이해되었다. 삼라만상이 나와 부합했다.”

    -화두는 1년을 잡고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3년을 잡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평생동안 잡고 있어야 하는가.

    “백용성 스님은 ‘1주일에 끝낼 수 있다’고 하셨다. 제대로 화두가 잡히면 오래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상근기(上根機)는 1주일이면 생사대사(生死大事)를 끝내는 셈이다. 그 다음 3∼6개월 걸리는 사람이 있다. 길게는 1년도 간다. 만약 1년이 넘어도 풀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화두를 잡는 데에도 적당한 연령대가 있나.

    “물론이다. 호르몬 분비가 가장 왕성한 20대가 최적기다. 혈기왕성한 20대에 밀어붙이는 게 효과적이다. 20대에 돈오(頓悟)하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기 어렵다. 경허 스님, 내소사의 해안 스님, 현공 선생님이 모두 20대에 경지를 보았다. 나이가 들면 에너지가 떨어지고, 그러면 집중력이 떨어진다. 수행의 노선이 돈오점수(頓悟漸修)라 볼 때 돈오 체험은 20대에 하는 것이 좋고 그 다음에 점수(漸修)에 들어가야 한다. 돈오했다고 해서 공부가 모두 끝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돈오는 공부의 초입에 들어선 것일 뿐이다.”

    그는 화두가 풀리고 난 후 출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고 한다. 어느 날 현공 선생님이 일어로 된 책을 하나 주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棄恩入無爲 眞實報恩.’ ‘사소한 은혜를 버리고 무위로 들어가는 것이 진실로 큰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는 정말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은 혼란기였다. 전남 지역에선 여순반란 사건으로 민간인이 수없이 죽었고 거기에 한국전쟁까지 덮쳤다. 물질적으로도 궁핍하던 시절이었다. 5남매 중 장남으로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부모님의 간절한 기대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의대 졸업 후 동양철학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전남대 이을호 선생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동양철학 대학원에 들어오려면 학부에서도 동양철학을 전공해야 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의대 대학원에 들어가 심장학을 전공했다. 박사학위를 받으면 전남대 의대 교수자리는 떼논 당상이었다. 그런데 박사 졸업을 앞둔 1967년 4월 3개월 파견 근무차 전주도립병원에 왔다가 우연히 전주 보문사에 주석(駐錫)하고 있던 현공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됐다. 그는 파견근무가 끝난 뒤에도 모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도교수가 “왜 대학으로 오지 않느냐”고 나무랐지만, 그는 이미 평생 현공 선생을 모시고 불교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터였다.

    좌탈입망의 진수 보여준 스승 현공

    1969년 75세이던 현공 선생은 두 달여 동안 미질(微疾)을 앓았다. 월담은 매일 찾아가 스승의 몸 상태도 살피고 각종 경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곤 했다. 그는 스승의 건강과 함께 임종시 좌탈입망이 걱정됐다. 수행을 많이 한 고수는 죽을 때 ‘한 수’ 보여주고 가는 법이다. 한 수라 함은 좌탈입망(座脫入忘), 즉 앉은 채로 조용히 가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만 명성에 부합하는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승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어 마음속으로만 염려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현공이 그의 얼굴을 넌지시 쳐다보면서 “월담, 너무 걱정 말게! 내가 그냥 가지는 않을 것이네” 하는 것이 아닌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해 겨울 제자 7∼8명이 전주 노송정사에 있는 현공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누워 있는 상태에서도 평소 제자들이 궁금해하던 부분에 대하여 일일이 답변을 해줬다. 질문에 대한 답변이 거의 끝나갈 무렵 현공은 제자들에게 “나를 일으켜라”고 하더니 방석에 좌선하는 자세로 단정하게 앉았다. 이어 현공은 제자들에게 “고성염불을 하거라”고 당부했다. 제자들이 일제히 자리에 앉아서 ‘나무아미타불’을 큰 소리로 외쳤다. 현공은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마른 입술을 달싹달싹 움직였다. 속으로 염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10번의 염불이 끝나자 현공은 오른손을 들어 모두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때부터 현공과 제자들은 침묵상태에서 좌선에 들어갔다. 1시간이 넘어도 현공은 여전히 좌선하는 자세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었다. 월담은 아무래도 이상하여 스승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스승은 여전히 눈을 반쯤 뜬 상태로 좌선에 몰두한 듯 보였다. 수많은 시체를 진단하고 감식해본 의사로서 그는 스승에게 다가가 맥을 짚어보았다. 자신의 맥이 뛰고 있는 것인지 스승의 맥이 뛰고 있는 것인지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더욱 용기를 내어 스승의 앞가슴 속으로 손을 넣어보았다. 이번에도 자신의 심장맥이 뛰고 있는 것인지 스승의 심장맥이 뛰고 있는 것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의사인 내가 분간할 수 없다니 참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옷깃에서 솜털을 빼내 선생의 코앞에 대보기도 하였다. 호흡을 하면 솜털이 흔들린다. 이 방법도 실패. 그 와중에도 현공은 눈을 반쯤 뜬 상태로 여전히 방석에 앉아 있었다.

    월담은 마지막으로 부엌에 들어가 플래시를 가져왔다. 불빛을 산 사람의 동공에 비추면 반드시 반응이 있기 때문이다. 생사를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인 것. 플래시를 비추자 동공은 이미 확대되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앉은 채로 돌아가신 것이다. 좌탈입망의 전형을 보여주고서. 평소 “내가 죽은 후 사리가 나오면 부도를 만들지 말고 흩어버려라”고 했던 선생의 유언대로 사리 23과는 전주천에 버려졌다.

    현공 윤주일 법사는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서울 중앙학교에 다니다가 어느 날 인사동의 범어사 포교당에서 용성스님의 설법을 듣고 불교신자가 됐다. 1914년 일본에 건너가 대정(大正)대학에서 불교학을 수학하고 1916년 서울 대각사에서 용성스님에게 출가했다. 그 뒤로 항일운동과 불교 대중화 사업에 힘썼다. 1925년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정신박약아 시설인 평양 자생원과 고아원 원장을 맡았고 명성학교를 설립해 교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박한영 스님과 같이 역경원, 선학원에서 불교경전 번역과 강의에 힘썼다. 1952년부터 광주에서 포교했으며 1967년 전주로 옮겼다. 특히 금강산 유점사에서 ‘반야심경’을 완전히 한글로 번역했고 이에 대한 해설서를 낸 학승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불경을 완전 한글 번역한 경우는 그가 최초라 한다. 저술로는 ‘불교대성전’ ‘불교입교문답’ ‘불교강연집(30편)’을 남겼다.

    돈오 후 보림의 중요성 깨닫다

    -의사로서 좌탈입망을 어떻게 보는가.

    “가장 바람직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90세인 시대가 곧 올 것이다. 문제는 수명이 아니라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다. 병든 몸으로 오래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기운을 받는다. 이때 받은 기가 소진되면 죽는 것이다. 소진되기 전까지는 건강하게 살다가 갑자기 기가 떨어지면 목욕재계를 하고 2∼3일 시름시름 앓다가 가는 것이 이상적이다. 임종을 맞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본인도 편하고 가족도 편하다. 나는 의사로서 요즘 이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월담은 39세 때 또 한번 돈오체험을 하게 된다. 어떤 불교신도가 병원으로 ‘보조어록(普照語錄)’이라는 책을 가지고 왔다. 이전에 많이 본 책이지만 장정을 고급스럽게 꾸민 판본이라 다시 정독했다. 책을 읽던 중 ‘성재하처(性在何處) 성재작용(性在作用)’이라는 대목에서 번갯불이 튀었다. ‘성품의 본체가 어디 있는가, 알고 보면 그 본체는 작용에 있다’는 뜻의 이 문구를 읽는 순간 머릿속의 의심과 번뇌가 모두 사라져버리는 종교체험을 하였다. ‘마음의 본체를 따로 찾으려고 하지 말라,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들과 번뇌망상 속에 본체가 있다’니, 그동안 은연중에 본체가 현실 밖, 일상생활 밖의 다른 세계에 있다고 생각했던 착각을 송두리째 부숴버리는 문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대목을 읽고 나서 모든 것을 놓을 수 있었다. 어떤 할일이 생각나더라도 마음이 달려가지 않았다. 하는 것과 안하는 것에 걸림이 없어졌다.

    그러나 ‘도고마성(道高魔盛·도가 높아지면 덩달아서 마귀도 높아진다)’이라 했던가. 이 체험 후 하루건너씩 곧 죽을 환자들이 병원에 들이닥쳤다. 병원 문앞까지 왔다가 죽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죽기도 했다. 한 달 사이에 10여 구의 시체를 처리했다. 그러자 죽은 사람의 가족들이 병원에 찾아와 소동을 피웠다. ‘의사가 잘못해서 죽었다’ ‘왜 빨리 대학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느냐’ 등등의 시비가 벌어졌다. 그래도 처음엔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연속적으로 시체가 들이닥치고 시비가 이어지자 마음 한구석에서 미세한 감정의 흐름이 일었다. 다시 1년이 흐르자 그 미세한 감정의 흐름이 좀더 확대됐다. 마음의 균열이 더 벌어졌던 것이다.

    그때서야 그는 보림(保任)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옛날 선지식들이 돈오한 후 20∼30년 동안은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보림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배경에는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마(魔)가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보림이란 새싹이 돋아난 상태의 깨달음을 굳건하게 다지는 보강과정이다. 밥이 끓은 후 뜸을 들이는 것과 같다.

    되돌아보니 병원에 들이닥친 10여구의 시체도 일종의 마였던 것이다. 돈오한 후에는 점수(漸修)해야 한다. 점수에 이르렀가 아닌가의 판단기준은 화엄에서 말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다. 즉 일상생활에서 일을 처리할 때마다 일과 일 사이에 걸림이 없으면 점수가 제대로 된 것이고, 걸림이 있으면 안 된 것이다.

    좀더 자세하게 정의한다면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상황에 응하면서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음)’에 도달해야 한다. 점수에 이르려면 보림이 필요하다. ‘보조어록’을 읽고 난 후 곧바로 보림에 들어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전국의 선지식들을 본격적으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고승과의 만남

    그는 도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불교계의 고승은 물론 불교 밖 도인들도 가리지 않고 만났다. 기 수련을 중시하는 도교 쪽 인물을 여럿 아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월담이 불교계의 고승들을 만났던 경험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강(田岡·1898∼1975) 스님은 근대 한국 불교계에서 ‘지혜제일’로 소문난 고승으로 선문답에 있어 전광석화 같은 지혜를 보여주었다. 그는 전남 곡성의 태안사 입구 돌다리를 건너가다가 물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한때는 지나치게 화두참구에 골몰하다가 상기병을 얻어서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증상으로 고생했는데, 부산의 어느 한의사를 만나 상기된 기운을 하단전으로 내리는 이야기를 듣고 몸을 치료했다고 한다. 지금도 선방(禪房) 수좌(首座)들 사이에서는 번갯불 같은 선기(禪機)를 지녔던 전설적인 선승으로 통한다. 현재 인천 용화사에 주석하는 송담(松潭) 스님이 그의 수제자로 알려졌다.

    월담이 전강을 만난 시기는 1960년 무렵이다. 현공 스님을 만나러 전국의 고승들이 광주 동광사를 찾았는데, 덕분에 그는 기라성 같은 고승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강은 우선 생김새부터가 특이했다. 두꺼비 얼굴에 바윗덩어리를 합쳐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가섭존자가 부처님 가사를 가지고 3000년 동안 계족산에 앉아 있는 부동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키는 그리 크지 않고 통통한 몸이었는데, 눈꺼풀이 길게 쳐져 있어 눈을 내리면 마치 감은 것처럼 보였다.

    전강의 설법을 듣다 보면 깊은 바닷속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잔잔하고 느리면서 나지막한 저음으로 골수를 파고드는 설법을 해서다. 참선한 스님에게서 나오는 에너지 파동이 청중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설법의 요지는 무상(無常)에 관한 것이었다. 인생이 잠깐이니 어서 빨리 도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송광사 구산(九山·1909∼83) 스님이다. 27세 때 폐병에 걸려 죽기 직전이었던 그는 천수주(千手呪)를 외우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지리산 영원사(靈源寺)에서 100일 동안 천수기도를 하고 병이 나은 후 출가했다. 1970∼80년대 초반 순천 송광사에 외국인 승려들이 선(禪)을 배우기 위해 머물렀는데, 그들은 구산의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다. 법정 스님의 사형(師兄)이 구산 스님이다.

    구산은 소탈해서 마치 초등학교 은사를 뵙는 것 같은 편안함을 줬다. 고승이라는 위세가 전혀 없고 아무리 하찮은 질문이라도 성실하게 답변해줬다. 주된 설법 내용은 ‘칠바라밀’의 실천이었다.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한 가지씩 실천하라는 뜻이다.

    “공부는 힘 있을 때 몰아붙여야 하네”

    고암(古庵·1899∼1988)스님은 1967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3차례에 걸쳐 조계종 종정을 지낸 분이다. 월담은 1994년 서울 정릉의 삼정사에서 고암과 함께 하룻밤을 지새우면서 허심탄회하게 이것저것 물어본 적이 있다.

    “스님! 사람이 늙으면 욕심이 없어질 것이고, 미래에 뭘 하려는 것도 없고, 성가시게 하는 사람도 없고, 하루에 밥 먹는 일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탐진치(貪嗔痴) 번뇌망상이 자연히 사그라지고, 공부가 순일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 질문에 고암은 “아니네. 나이 먹어서 힘이 없어지면 정진이 안 되는 것이네. 공부는 힘 있을 때 몰아붙여야 하는 것이네”라고 답변했다. 그는 이 답변이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고 털어놓는다.

    세속에서 道 탐구하는 ‘의사 居士’ 이동호

    그는 유학 불학 도학 역사 문화 등 각 분야의 책들을 수집했다. 대략 5만권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

    율사(律師)로 유명한 묵담(默潭)스님. 율사는 계율을 중시해 이를 제대로 지키면 수행은 저절로 된다고 본다. 묵담은 특히 승려들을 대할 때와 재가신도를 대할 때가 하늘과 땅처럼 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승려에게는 그야말로 호랑이처럼 엄격해 조금만 실수해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네놈이 중이냐”고 호령하곤 했지만 재가신도를 대할 때는 자애로운 할아버지처럼 부드러웠다.

    어느 날 월담을 만났을 때 묵담은 부인이 옆에 있는 데도 단도직입적으로 “자네 출가하소. 내가 2년 안에 견성오도(見性悟道) 시켜줌세. 내가 보증하네, 만약 지금 당장 출가를 못할 것 같으면 말년에라도 출가해서 그 상태로 세상을 떠야 하네”라고 말했다. 묵담은 1주일 동안의 엄격한 계율엄수를 겪어야만 보살계를 줬다. 월담 역시 보살계를 받을 때 1주일 동안 병원 문을 닫고 전주 완산동 관음선원에서 용맹정진했다. 그런 후에야 묵담은 당신이 입고 있던 가사장삼, 염주, 불자를 그 자리에서 벗어 그에게 넘겨줬다.

    주로 변산의 내소사(來蘇寺)에서 머물렀던 해안(海眼·1901∼74)스님. 1917년 장성 백양사에서 스승인 백학명(白鶴鳴·1867∼1929) 선사로부터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어라’는 화두를 받고 일주일 동안 불철주야 정진했다. 1970년대에 전국적으로 알려진 해안을 추종하는 제자들의 모임 전등회(傳燈會)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주에서 남양당 한약방을 운영하는 청산거사도 그중 한 명이다.

    해안은 대선사의 위의(威儀)를 갖췄지만 대인 접촉 방법은 아주 따뜻했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대하던 방법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시에도 능해 자신의 감정을 곧잘 한시로 표현했다. 월담에게 동산(冬山)이라는 호를 내리기도 했다. 이 밖에도 명봉(明峰)스님, 월산(月山)스님, 성철스님, 청화(淸華)스님 등과 함께 한 기억들도 그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행의 토대는 자비심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우선 마음과 육체가 건강해야 한다. 최적의 컨디션에서 최상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려면 몸을 소중히 해야 한다. 몸을 여는 열쇠는 마음에 있고, 마음을 여는 열쇠는 몸에 있다. 육체를 다루는 의사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몸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인간의식을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체 그 자체는 요술방망이와 같다. 몸을 먼저 닦는 것이 그만큼 소중하다. 몸이 아프면 수도를 못한다. 그렇다고 몸에만 집착하면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모두 닦는 것이 바로 성명쌍수(性命雙修)다.”

    -수행에 들어가는 기본 조건이나 수행 과정에 대해 설명해달라.

    “기본은 마음이 선해야 한다. 선하다는 건 자비심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공부과정에서는 필요없지만, 초창기의 토대는 자비심이다. 자비심이 충만하면 이것이 깨달음의 에너지로 전환된다. 자비심을 보충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 그 다음 정공부(靜工夫)에 들어가는데, 최소한 4∼5시간 좌선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 시간 동안 앉아 있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고관절이 열리면 다리가 저리지 않기 때문에 처음 2시간을 넘기면 4∼5시간 정도는 견딜 수 있다. 2시간에 이르는 과정에서 고통이 온다. 이 고통을 참을 수 있어야 수도도 할 수 있다.

    고관절이 풀리면 허리를 단련해야 한다. 장시간 앉아 있으면 허리가 굽는다. 그래서 척추를 받치는 근육을 풀어줘야 한다. 척추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뒤로 굽히는 후굴과 전후·좌우 회전 운동을 한다. 음식은 소식한다. 사상체질에 맞는 음식을 섭취하는 게 좋다. 육식은 되도록 피한다. 수도를 하는 장소, 즉 토굴터로는 전쟁터, 물가, 중음신이 많은 곳, 고압선이 지나는 곳, 사람들이 집합하는 곳, 수맥이 흐르는 곳, 습기가 많은 곳, 나무가 우거져 있어 햇볕이 들지 않는 곳 등은 피하는 게 좋다.”

    월담은 초보자들이 몸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태극권을 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그는 도교의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 ‘도장정화(道藏精華)’에서 108가지 동작을 눈여겨보았다. 동작의 연원은 중국 무당산(武當山)의 장삼봉(張三?) 진인에게서 비롯됐는데, 공격적 운동법이 아니라 방어수단이다. 수도인이 내공을 증강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한국의 살풀이춤처럼 아주 유연하다. 환자들에게도 시켜보니 호흡기가 강화되어 감기가 없어지고 내장을 뜨겁게 해주었다. 심폐기능을 강화하는 데 수영보다도 효과가 있다. 심장의 조급한 맥이 느린 맥으로 돌아와서 고혈압 환자에게도 좋다. 또 하체근육을 사용하기 때문에 당을 많이 소비해 당뇨병에도 효과를 발휘한다.

    그는 병원 지하실에 태극권 연습실을 마련해놓고 틈틈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지도하기도 한다. 그는 불교 경전에 해박한 거사이면서 도교의 태극권에도 고수다.

    필자는 그가 살아온 구도과정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병원에 소장되어 있는 5만권에 가까운 장서규모에 기가 죽었다. 그의 서가엔 ‘사고전서’ 1500권, ‘역경집성’ 300권, ‘고사류원’ 45권, ‘통지당경해’ 38권, ‘고금도서집성’ 80권, ‘사부총간’ 25권 등 유학 분야 3000여권, ‘고려대장경’ ‘한글대장경’ ‘중국만속대장경’ ‘일본국역대장경’ ‘일본신수대장경’ ‘일본신참대장경’ ‘일본남전대장경’ ‘인도프라트리카대장경’ ‘티베트대장경북경판’ ‘티베트대장경나사판’ ‘미얀마대장경’ ‘세이론스리랑카대장경’ ‘베트남대장경’ ‘몽골대장경’ ‘캄보디아대장경’ ‘영국대장경’ ‘러시아장경’ 등 불학 분야 5000여권, ‘정통도장’ ‘도장정화’ ‘도장집요’ ‘장외도서’ 등 도학 분야 1만권. 이외에도 한국고대사, 중국사, 문화, 예술, 철학 방면의 책이 수두룩하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새벽 1시다. 오후 6시에 시작했으니 7시간 가까이 지난 것이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매우 원시적인 질문을 던졌다.

    -60대 후반까지 살아보니까 인생은 무엇이라는 생각이 드나.

    “나는 평생 동안 시간을 아끼려 노력한 사람이다. 낮에는 진료하고 진료가 끝나면 나만의 세계에 몰입했다. 친구들과 술 먹을 시간도 없었고 골프 칠 시간도 없었다. 촌음을 아껴 책을 보고 좌선했다. 때로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오후 5시 무렵 병원에서 신병 시절 군대 밥 먹듯 허겁지겁 저녁을 먹기도 했다.



    그런데 60대 후반에 들어서보니 결국 사람은 타고난 사주팔자대로 사는 것 같다. 20대까지는 팔자에 관심이 없었고 30대에는 사주팔자가 있다고 어렴풋하게 느꼈다. 40대에 들어서니 50%, 50대가 되니 75%, 60대가 되니 95%가 팔자이고 나머지 5%가 후천적인 노력에 달린 것 같다. 하지만 내 말의 요지는 타고난 소질과 적성 그리고 장단점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생이란 타고난 대로 살아가는 거니까.”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