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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환의 문화오디세이 ⑩

유행과 신드롬, 광기의 사회학

“나체에다 허리춤에 모피만 둘렀으니 녀자의 의복은 원시로 가고 있더라”

  • 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eutekom@hanmir.com

유행과 신드롬, 광기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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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일에 성복(成服·초상이 난 후 나흘째 되는 날부터 정식으로 상복을 입음)한 후 전국이 본격적인 봉도(奉悼)에 들어갔다. 5월1일은 마침 토요일에다 노동절(메이데이)이었다. 서울시민과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망곡을 위해 돈화문 일대로 몰려들고 메이데이를 맞은 노동자들도 거리에 나와, 이날 낮 1시경 안국동 부근의 인파는 10만을 넘었다. 기생과 장애인들도 이날 봉도에 참례했다. 추모의 분위기는 식지 않고 5월 내내 이어졌고, 학생들의 동맹휴업과 노동자들의 참여도 여기에 일조했다.

6월10일 순종 인산(因山)을 계기로 대단한 소요나 돌발적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예상됐다. 민중의 민족주의적 열기를 등에 없고 독립운동의 각 세력, 특히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당시의 학생운동과 지하 노동운동 세력이 하나같이 이날을 주시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순종 승하 시점부터 국상과 추모 열기가 민족주의적인 운동으로 번지는 것을 막고자 총력을 다했으나 결국 만세운동이 폭발하게 된다.

임금을 잃은 ‘백성’에게는 이 기간이 상중(喪中)이었기 때문에, 연분홍·연옥색 치마저고리는 동아일보의 예상과 달리 전혀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신여성’ 1926년 6월호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간 중 여학생들을 비롯한 모든 여성, 즉 귀부인·여염집 아낙·기생·창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상제가 입는 무명 상복인 깃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무명 상복도 패션

물론 표면적인 까닭은 국상을 당해 애도의 뜻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지만 다른 한편 상복을 입는 것이 사회 분위기를 탄 하나의 패션이 되어버렸던 탓이다. ‘신여성’에 따르면 원래 ‘깃옷이라 하는 것은 부모가 돌아가더라도 성복날에나 입는 것인데 조의만 표하면 되는 국상 때 성복 전날부터 깃옷을 해 입은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이라는 것이다. 당시 상복 붐은 예법과 무관했다는 얘기다. 게다가 철없는 여학생들이 ‘남들 다 해 입는 깃옷 해달라고’ 가난한 부모를 졸라대고 상복을 입은 채 ‘오색찬란한 파라솔을 들었으니 말세’라고 쓰고 있다.



당시에는 추모 분위기 자체가 일종의 유행이었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장은 유행을 창조해낸 매개가 되었다. 국장은 일종의 비극적인 카니발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들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해 봄 경성에는 때 이르게 백구두가 유행했다. 어느 해 여름이건 조선 사람들은 흰 구두, 흰 고무신을 즐겨 신었지만 유독 그해에 흰 신발이 빨리 유행을 타기 시작한 것도 국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마치 2002년 월드컵 당시 젊은 아가씨들이 태극기로 민소매 원피스를 해 입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좌익이 되세(Be the Reds!)”라는 구호가 적힌 빨간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휘젓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패션계에도 붉은색 열풍이 불어닥치지 않았던가. 월드컵이야 세계적인 축제였으니까 그런 ‘방정맞은’ 일도 가능했겠지만, 나라의 아비가 죽은 국상은 경우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러나 이마저도 시대적 유행의 소재로 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1920년대부터 우리 사회가 유행이 지배하는 대중사회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행은 대중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지표이고, 신드롬은 그것이 지나쳐 병적 징후를 보이는 사회현상이다. 물론 유행과 신드롬은 근대 이전 사회에도 존재했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저, 푸른역사, 2003)을 펼치니, 별감(別監)이라는 하위 관료가 평양망건, 외점박이 대모관자 같은 패션의 유행을 선도했고, 숙종 13년 9월11일자 ‘승정원 일기’는 김만중이 조정을 풍자하여 쓴 소설이 세간의 인기를 끌어 좋지 않다는 말을 하며 ‘유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일상화된 유행과 신드롬은 어디까지나 20세기의 산물이다. 한국은 1920년대 들어 대중사회로 진입한다. 대중사회의 성립에 필요한 제반 요건이 이 시기에 이르러 갖춰진 때문이다. 조선 스스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회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일본과 구미로부터 전해진 공산품은 이미 1900년대부터 조선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신문 매체와 출판물이 가히 홍수를 이루고 라디오와 유성기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영화 관객도 급증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만 있는 미디어 소비의 특징적 양상이 모두 나타난 것이다.

‘삼대칠’ 머리에 털실목도리

미디어가 취향과 이데올로기 면에서 평균화된 대중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통적 생활조건과 촌락공동체를 벗어난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학교교육이 널리 보급되고 경향 각지에 도서관이 개설되었다. 1919년 일어난 3·1운동 같은 대중적인 투쟁도 조선이 대중사회로 진입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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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천정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서울대 강사 heutekom@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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