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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역사학자의 苦言

노 대통령은 정조에게서 배우라

신하를 ‘국가의 편’과 ‘역적의 편’으로 나누는 순간 개혁은 실종되고 氣싸움만 남는다

  • 글: 박현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 hyunmp@hotmail.com

노 대통령은 정조에게서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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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변화된 태도를 감지한 영남 유생들은 1차 때보다 더 많은 유생이 연명한 제2차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이들은 “먼저 사실을 확인한(先分辨) 다음에 처벌할 것(後誅討)”(16/5/7)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상은 “감히 말할 수 없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던 제1차 만인소 때보다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즉 사도세자 사건을 “한 나라의 공공(公共)의 논의”(16/5/7)로 부각시키는 한편 “부자간의 윤리가 있은 연후에야 군신간의 분의(分義)도 있다”(16/5/22)고 말한 것이다.

“임금이 소인들에 의해 고립됐다”

채제공의 ‘천토상소’는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채제공의 상소는 전하까지 “등에 땀이 흐르고 마음이 오싹”(17/05/28)해질 정도로 강력한 것이어서 벽파의 신하들이 느낀 위기의식은 대단한 것이었다(17/08/09). 아마 몽오(夢梧, 김종수의 호)의 몸을 내던진 공격적인 대응이 아니었다면 우리 노론 내부의 분열과 이탈은 훨씬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몽오는 채제공의 ‘천토상소’가 “국시(國是)를 뒤바꾸려는 책략”에서 비롯되었다고 규정하고, “영남사람 만여 명을 즉각 불러 모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채제공이야말로 “반드시 변괴”를 일으킬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몽오는 나아가 채제공과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있을 수 없다”며 사직서를 던지고 나왔다. 전하가 어렵사리 조성한 남인-노론-소론의 보합(保合)체제를 와해시켜버린 것이다. 그는 또한 국왕 즉위년의 다른 역모사건과 연관지어 채제공을 역공하는 노련함을 보였다(17/5/30).

3.



내가 1785년(정조9) 약관(弱冠, 20세)의 나이에 정시 문과에 급제했을 때, 상께서는 “김상헌의 자손이 등과했다”며 크게 기뻐하셨다. 이 자리에서 전하는 내 이름을 “조순(祖淳)”으로 바꾸어 주시고는(원래 이름은 낙순(洛淳)), “풍고(楓皐)”라는 호까지 지어주셨다(김조순, ‘풍고집’ 부록 풍고김공신도비명 408).

전하께서 주신 이름과 호를 풀어보면 “조상이 순량한 너는 궁중에 심어진 단풍나무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순임금 때의 고요(皐陶)와 같은 신하가 되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날 퇴정(退廷) 후 이 말씀을 전해들은 아버지(김이중)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잔치를 크게 베풀었다. 당신의 친구이자 내 사부이기도 한 이사문·김홍운 선생은 물론이고 연암 박지원까지 초청된 이 자리에서 사부님께서는 나의 글을 일일이 검토하시고 “새로운 시(新詩)”요, 근래에 “보기 드문 글(新文)”이라고 칭찬해주셨다(‘풍고집’ 권9 제오산김문공).

전하께서 특별히 나와 우리 가문에 관심을 기울이신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시(庭試), 즉 홍국영(洪國榮) 잔존세력인 이율 등의 역모를 토벌한(1785년 2월) 기념으로 특별히 과거를 설행(設行)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전하의 권좌는 즉위한 지 10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임금이 소인들에 의해 고립”되었고 이제 “노론은 다 죽게 되었다”(9/2/29)는 역모 주동자들의 말에서 나타나듯이, 노론 신하들과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전하는 우암 송시열을 효종의 묘정에 추배하면서 우암을 “우리 사문(斯文)의 대현(大賢)”이라고 극찬하거나, 세손 시절 당신이 주희와 송시열의 글을 편집하여 만든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소개하기도 했다. 당신이 노론의 도통을 이토록 존중하고 있다는 태도였다(0/5/24).

“신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노론의 신하들은 전하의 정치를 집요하게 부정했다. “전하가 정치하는 것은 근본을 버려두고 말단만 다스리려”는 것에 불과하다거나, 국가를 “조종하는 방술(方術)이 부족”하다(0/11/21 정언 한후익)는 비판, 임금 자신의 뜻만 내세우고 “신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다(4/3/8 서장수)는 비판, 그리고 국왕이 “거만하게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여기면서 뭇신하의 의견을 깔보기 때문에, 서슴없이 할말을 하는 기상이 사라지고” 있다(13/11/17 김종수)는 비판 등이 그것이다. 심지어 “한나라나 당나라의 중등 군주”보다도 못하다(18/5/22 이병모)는 비난까지 서슴지 않았다.

1795년 정월에 있었던 권유(權裕)의 상소 역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전하가 즉위한 지 “15, 16년이 지나면서 세도(世道)가 갈수록 타락하고 민지(民志)가 날로 미혹되어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 수습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르고 말았다”(19/1/11)고 진단했다.

아울러 그는 화성행차를 앞둔 가운데 “형벌을 받아 복주(伏誅)되는 것”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은 정치적 비리를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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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현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 hyunmp@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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