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한중일 공동시장 씨앗 뿌려 번영과 평화 꽃피우자

동북아 경제공동체 건설을 위한 제언

  • 글: 김세원 서울대 명예교수·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caeonek@snu.ac.kr

    입력2004-12-24 1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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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북아는 미국, EU와 함께 세계 경제에서 3대 성장축(growth pole)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동북아 경제공동체가 형성된다면 이제까지 양대 경제권이 주도해온 세계경제는 3대 경제권으로
    • 나누어짐으로써 견제와 균형을 통해 기존 질서를 재편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동북아 공동시장은 이러한 대변혁의 초석을 놓게 될 것이다.
    한중일 공동시장 씨앗 뿌려 번영과 평화 꽃피우자

    2003년 한중일 3국 정상회담에 앞서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왼쪽),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손을 맞잡고 있다.

    ‘동북아시대’라는 용어는 1990년대 초를 전후(前後)해서 등장했다. 물론 이보다 먼저 아시아·태평양, 환태평양, 동아시아 또는 동남아시아 등 특정 지역 명칭과 함께 자주 ‘시대’ ‘공동체’ ‘공동시장’ 또는 ‘협의체’와 같은 단어가 따라붙기도 했다.

    이러한 용어들이 탄생한 배경으로는 무엇보다 이 지역의 급속한 경제적 부상(浮上)을 들 수 있다. 일본에 뒤이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이 빠른 경제발전을 이룩함으로써 잠재력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중국이 개혁과 개방을 통해 이러한 흐름에 합세하면서 동북아시대는 현실감을 더하게 되었다. 한국, 중국 및 일본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경제 규모, 보유 자원, 경제 역동성, 역내 거래규모 등에서 미국이나 유럽연합(EU)과 충분히 견줄 수 있는 경제권이라는 점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동북아시대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구체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하면 동북아시대를 실현할 수 있으며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련국들 내에서도 체계적인 토론이 전개되지 못하고 있다.

    참여정부 역시 출범 초기부터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 구현을 국정목표의 하나로 내걸었으며, 이 목표를 위해 대통령 자문기구인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금융 및 물류거점 구축, 외국인 투자유치 그리고 역내 경제 및 에너지 협력 등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 후 이 위원회는 2004년 6월 동북아시대위원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그 이유는 동북아정책의 목표인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려면 활동 영역을 경제적인 면에만 국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북아시대위원회의 설립취지는 한반도 평화체제의 정착 및 주변 4강국과의 협력외교를 비롯한 군사 안보협력적 기반을 동시에 확립한다는 정부의 방침을 반영하고 있다. 그동안 북핵문제와 같이 새롭게 불거진 군사 외교문제가 동북아 관계에서 핵심현안 중의 하나로 대두되었다. 또 동북아 내 사회문화교류를 포함하는 폭넓은 협력을 병행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되고 있다.



    이 위원회의 활동을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물론 동북아 정책의 취지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전, 접근 및 추진방법 등을 보면 현재의 방식은 재고해야 할 여지가 있다.

    한마디로 이 위원회가 추진하는 과제들이 앞에서 지적한 내용들이라면 구태여 ‘동북아’라는 별도의 명칭이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경제적인 면에서 특화산업의 개발, 산업경쟁력 제고, 사회간접시설 확충 및 에너지 협력 등은 한국경제가 당면한 일반적 과제이며, 외교·안보정책 역시 그 대상이 동북아 국가들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통합 돌파구로 외교현안 해결을

    동북아시대는 최근 (경제적) 지역주의가 유행처럼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방향이 좀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 쉽게 풀기 어려운 외교·안보 현안을 해결한 후에, 아니면 이러한 노력과 병행하여 동북아 시장통합을 시도한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얽히고 그 전망은 좀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한중일 경제공동체를 추진하는 한편, 이 테두리 내에서 동북아 내 정치·군사적인 현안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실리적인 동시에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기능주의적(neo-functionalist) 접근과 같은, EU에 의한 유럽통합의 발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접근법은 경제통합을 우선 실현함으로써 유럽국가들이 시장 확대에 따르는 경제적 이득도 얻고 동시에 정치통합의 기반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50여년 동안 꾸준하게 시장통합을 추진하면서 유럽은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였고 이를 통해 이미 하나의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동북아지역은 지역주의의 물결에서 예외였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한국만 하더라도 칠레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데 이어 싱가포르와 FTA협상을 마감했으며 일본과는 비슷한 협상을 진행중이다. 또 한국-아세안(ASEAN) 국가간 FTA 협상을 2006년까지 타결하기로 합의했다. 중국과 일본도 아세안 국가들과의 협상을 비롯한 FTA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 과정에 흥미로운 사실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한중일 3국은 모두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호 경제교류를 많이 실현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FTA 대상국을 주로 아세안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지난 11월 말 ‘아세안+한중일(ASEAN+3)’정상회의에서 장기적으로 동아시아공동체(EAC)의 설립을 추구한다는 데에 합의했고, 이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중일 정상회의는 ‘14개항 행동전략’을 채택했지만 그 내용은 경제 각 부문에 걸쳐 협력을 강화한다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처럼 정부 차원에서는 한-중, 또는 중-일 FTA가 아직까지 논의되지 않고 있다. 기본적으로 북핵문제, 남북한 관계 및 중-일의 미묘한 외교관계 등 주로 이 지역에 산재한 외교·안보 현안들 때문이다. 그러나 순서를 바꾸어 경제통합이라는 새로운 틀 속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한편 동(북)아시아의 경제통합 추진에 대한 미국의 시각도 바뀌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동아시아 국가들이 독자적으로 추진해온 경제통합은 물론 경제협력체의 형성에도 반대해왔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초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가 내놓은 동아시아경제회의(EAEC) 구상은 물론, 외환위기 이후에 등장한 일본의 아시아통화기금(AMF) 구상에 대해서도 부정적 태도로 일관했다.

    사실, 최근에 일고 있는 지역주의, 특히 FTA의 확산에 불을 댕긴 것은 미국이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지역(NAFTA)이 설립된 후 미국식 FTA가 붐을 이루기 시작했고 2005년에는 전(全)미주자유무역지역(FTAA)을 설립하기 위한 협상 타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한국을 廚沌?다른 대륙 15개 이상의 국가와 FTA 협상을 벌이고 있거나 이미 체결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동아시아 내 시장통합 움직임에 공식적으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FTA는 가장 느슨한 시장통합

    흔히 지역주의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지역주의는 자유무역지역(free trade area)에서부터 EU와 같은 공동시장 및 경제동맹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지역주의는 설립 취지, 철학적 배경이나 접근 방법에 따라 현격한 차이가 있다. 또 같은 시장통합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형태를 띠느냐에 따라 여기에 참여하는 국가간 통합의 정도는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가장 느슨한 시장통합을 목표로 하는 FTA는 실용적인 면에서 여러 이점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민감한 사안인 회원국 주권에 대한 제약을 최소화할 뿐만 아니라 회원국간 합의에 따라 협정에 담길 내용을 신축적으로 조정할 수도 있다. 역내에서 상품무역을 대부분 자유화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서비스무역 및 투자, 지적재산권 보호, 노동·환경보호 등을 협정에 포함할 것인지 여부는 각 회원국의 방침에 따른다. 이와 같이 같은 FTA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큰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FTA는 현실적으로 많은 단점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결함은 회원국들이 역외국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무역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발생할 수도 있는 무역우회 현상이다. 따라서 역내에서도 원산지규정이 요구되고 멕시코나 칠레같이 여러 국가와 FTA를 체결한 경우에는 수입관리제도가 대상국별로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또 FTA는 예외규정의 채택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국가간 수많은 비관세장벽의 처리에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250여개의 FTA가 체결되기는 했으나 제대로 운영되는 경우는 북미자유무역지역(NAFTA),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및 유럽경제지역(EEA) 등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FTA는 특혜지역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차별 원칙에 지장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FTA보다는 동북아 공동시장이 바람직

    한편 한국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뒷받침하려면 큰 시장이 필요하고 따라서 적극적인 FTA정책은 바람직하다. 특히 특화산업을 중심으로 산업구조조정을 원만하게 이루기 위해서는 국내시장처럼 교역이 자유로우면서도 한층 확대된 시장이 필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정적’인 동시에 ‘큰 시장’이라는 두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더라도 앞에서 지적했듯이 FTA는 적절한 선택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최근 급속하게 번지는 FTA 추세와 이를 주도하는 미국 및 EU의 움직임으로 미루어 볼 때 FTA는 지역주의 현상을 뛰어넘어 일반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국제적인 FTA 정책은 WTO에서 현재 진행중인 도하개발의제(DDA) 협상을 계승하고 WTO를 보완하는 새로운 국제무역정책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볼 때 한국경제는 ‘하나의 큰 시장’을 이룩한다는 점에서 양자간 FTA보다는 동북아지역의 공동시장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동시장(common market)’이란 원칙적으로 일정국가 사이에 상품 및 서비스는 물론 자본 및 노동과 같은 생산요소의 이동도 자유화하는 시장통합의 형태를 말한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공동시장의 운영을 뒷받침할 만한 국가간 제도와 정책을 어느 정도 근접시켜 나가는 것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동북아 경제공동체는 동북아 특유의 문화적 바탕 위에 공동시장의 형성을 추구하는 한중일 3국의 모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시장 확보 차원에서 보면 한국은 미국 및 아세안 국가를 비롯해서 가능한 한 많은 국가와 FTA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지 이와는 별도로 한중일 3개국은 FTA라는 과정을 거쳐 장기적으로는 단계별 경제공동체를 추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동안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을 비롯해서 국내 여러 연구기관이 한중일 FTA를 체결했을 때 예상되는 효과에 대해 연구를 해왔다. 주로 거시경제적 전망에 비중을 둔 이러한 연구들은 산업별 분석, 제도적 접근 등 미시적 부분에 대한 연구를을 심층적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한중일 공동시장 씨앗 뿌려 번영과 평화 꽃피우자

    전쟁의 역사를 종식하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추진한 유럽통합의 사례는 동북아 경제공동체 구상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만약 동북아경제공동체가 추진된다면 그 경제적 효과는 단순한 FTA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클 것이다. 공동시장의 경우는 FTA에 비해 회원국간 경제 및 시장 통합의 수준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내 무역 증대, 분업의 촉진, 복지 제고, 규모의 경제 및 범위의 경제, 시장구조의 변화 및 성장촉진 등을 비롯해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정태적·동태적 이득을 크게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효과와 더불어 비록 수치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비경제적 효과는 매우 중요하다. 동북아경제공동체가 경제적 번영을 지향하더라도 평화와 안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통합의 추진은 동북아 지역 내 평화를 정착시키는 계기인 동시에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강도 높은 경제협력의 추진은 북핵문제를 포함하여 안보나 전쟁 예방을 모색하는 논의의 장(場)을 제공할 수 있다. 경제협력의 강화는 그만큼 관련국 공통의 이익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분쟁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EU는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1950년의 쉬망선언에서 출범한 유럽 경제통합의 가장 중요한 취지는 유럽 내 전쟁의 역사를 종식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데에 있었다. 50여년의 역사를 지닌 EU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바로 유럽 내의 지속적인 평화 유지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동북아경제공동체가 누릴 수 있는 이점 중의 하나는 교섭력(negotiating power)을 제고함으로써 세계경제의 발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강한 교섭력은 국제협상을 유리하게 유도하는 데 도움을 주며 세계화에 수반하는 부정적 파급효과를 극복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분쟁 방지에도 효과

    EU가 없었던들 유럽국가들이 국제정치·경제에서 오늘날과 같은 위상을 차지할 수 없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 WTO(GATT)의 무차별 원칙만을 고집하던 미국이 NAFTA 설립을 주도하게 된 배경은 시장의 확보뿐만 아니라 시장통합의 완성 단계(1992년 계획)에 들어선 EU에 대한 교섭력을 강화하고자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동북아는 미국 및 EU와 함께 세계경제에서 3대 성장축(growth pole)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동북아경제공동체가 형성되면 이제까지 양대 경제권이 주도하던 세계경제는 3대 경제권으로 정립(鼎立)됨으로써 견제와 균형을 통해 기존 질서를 재편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처럼 경제공동체는 단순히 공동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like-minded nations)’이 모일 때에 비로소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비록 ‘경제’라는 수식어가 붙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공동체’나 ‘공동시장’은 경제적 이익이 그 기반을 이루지만 관련국 사이에 공동목표, 또는 공동가치를 추구하는 하나의 테두리(boundary)를 마련해준다는 의미도 갖는다는 것이다.

    먼저 경제공동체를 이룩하는 필요조건의 하나인 경제적 거래를 살펴보면 동북아지역은 역내 무역 및 자본이동이 심화됨으로써 이미 하나의 ‘자연적 경제권’을 형성해가고 있다. 한 예로 한중일 3국의 총 대외무역에서 이들 국가간 무역, 즉 역내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의 12.5%에서 2002년 22.4%로 확대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경우에 대외무역의 25% 안팎이 역내 다른 두 나라와의 사이에 이뤄지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에도 이 비중이 거의 20%에 육박한다. 특히 정보기술(IT)산업에서는 산업내 무역이 두드러지며 동북아지역이 세계적인 정보혁신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사실상 경제통합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예를 찾는 것은 극히 쉽지 않다. 경제통합의 성공을 보장하는 공통적인 요소로는 지리적인 근접성과 긴밀한 역사적 관계를 꼽을 수 있다. 이 두 요소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가까이 있는 국가들은 항상 역사적인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중일은 떨어질 수 없는 숙명적인 이웃이라는 점에서도 선린(善隣)관계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외에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의 핵심요소는 문화적 공통요소와 가치의 공유라고 할 수 있다. EU의 경우는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미국이 NAFTA 설립을 주도하고 FTAA의 창설에 집착하는 이유도 경제적 이익과 더불어 문화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및 시장경제와 같은 미국적 가치를 미주(美洲) 전체에 정착시킴으로써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려는 의도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적 가치를 너무 일찍 포기했다’

    물론 동북아 3국 내에서도 서로 다른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며, 공통의 가치관을 내세우기에는 논란이 따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 다소 무리가 따르기는 하지만 -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상대적인 의미’에서 이들 3국이 공동으로 향유하는 가치관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1990년대 말 서울에서 개최된, 동양윤리를 다루는 한 국제모임에서 ‘동양은 동아시아적 가치를 너무 일찍 포기했다’는 한 유럽학자의 평가는 퍽 인상적이었다. 일부 동아시아국가들이 괄목할 만한 경제적 성과를 지속하면서 학계에서는 한때 ‘동아시아적 가치’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접근 방법이 시도되기도 했다. 1980년대 초 이후 서양에서 시작된 이러한 움직임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있게 한 비경제적 요인을 주로 유교문화에서 찾으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본경제의 장기침체와 동아시아의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평가는 급선회했다. 그동안 장점으로 지적되어온 동양적 가치관이 오히려 경제위기의 근본 요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엇갈린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적 자본이 경제성장의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가치란 - 같은 사상이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 항상 고정적일 수는 없으며 시대의 흐름과 사회적 여건의 발달에 따라 점진적으로 바뀐다는 데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시장경제가 신축적으로 조정을 거치듯이 가치관도 긍정적인 면을 살리면서 경제운영에 적절하게 접목할 때에만 경제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과거 동아시아의 장점으로 지적되던 정신적, 문화적 요소도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적응해갈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경제통합이라는 공동체적 테두리가 마련된다면 동북아 3국이 다양하면서도 공통적인 가치를 개발, 보존,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여지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크다.

    어떤 형태의 지역적 경제통합이든 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과도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동북아경제공동체의 실현을 위해서도 일정한 ‘준비기간’을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기간에 3국이 해야 할 일은 시장경제에 대한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면 경제공동체는 비교적 용이하게 실현될 것이다.

    시장경제 확립이 대전제

    경제통합에 따른 시장 확대는 글자 그대로 시장경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 과거 사회주의 체제간 시장통합을 시도하던 상호경제협의체(COMECON)가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서지도 못한 채 끝났고 대부분의 개도국간 경제통합 시도가 실패를 거듭하는 중요한 원인은 이들 국가에서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세안 역시 20여년 넘게 자유무역지역(AFTA)의 설립을 준비해왔으나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반면 EU나 NAFTA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이들 지역에 시장경제가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역내에서 요구되는 시장경제의 정도는 통합의 폭과 깊이에 비례한다. 예를 들어 NAFTA 3국이 공동시장을 추구하려면 멕시코의 시장경제는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 EU가 중·동유럽 국가의 가입 과정에 가장 강력하게 요구한 조건의 하나가 바로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동북아 3국은 모두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은 아직 시장경제를 제대로 도입하지 못한 채 체제 조정 과정에 있다. 한국이 외환·경제위기를 겪고 일본이 장기 경제침체를 경험한 것도 따지고 보면 대내외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맞추어 적절한 구조조정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체제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동태적으로 변해가야 한다는 점에서 점진적인 진화가 동반되지 않는 한 시장원리에 따른 이점을 발휘할 수 없다. 이처럼 동북아경제공동체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역내에 시장경제가 정착되고 경제 구조조정이 원만히 진행되도록 상호 협력하는 준비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효율과 형평의 조화

    이러한 준비기간 중 경제협력에서 비중을 두어야 할 부분은 통화가치·환율의 안정과 형평성 원칙의 도입이다. 1997년 외환위기는 물론 EU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통화가치의 안정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실물시장의 자유화 역시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다. 이미 한국 및 일본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국가간 금융·통화시장 안정을 위한 협력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동북아 3국이 경제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이 수준을 넘어서 통화정책을 비롯한 거시경제적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한편 경제통합 추진과정에 제기되는 기본적인 과제 중의 하나는 시장통합에 따르는 이득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즉 효율과 형평 사이에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문제다. 한때 논의된 동북아개발은행의 설립도 이러한 주제와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다.

    확대된 시장을 통해 이익을 실현하려는 시장통합의 취지에 따른다면 원칙적으로 정부간 합의에 의한 시장개입은 왜곡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시장통합의 이익이 특정 국가나 지역에 편중됨으로써 양극화 현상이 발생한다면 불이익을 받는 국가는 구태여 통합에 참여할 의미가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공동체의식에 기초한 공동번영의 정신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아공동체를 설립하는 데 드는 비용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비용은 시장통합이 요구하는 각국 내 구조조정이나 역내 저개발지역에 대한 지원과 같은 경제적 부담 이외에도 경제주권에 대한 제약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역내 시장자유화나 경제정책 협조체제의 운영에 따라 각국은 경제주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주권에 대한 제약’이라는 비용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추지 않는 한 어떤 형태의 경제통합도 명분에 불과하다.

    국가의 시장개입을 의미하는 모든 정책은 편익과 비용을 동시에 수반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국가발전의 차원에서 기대되는 편익과 치러야 할 비용에 대한 판단과 선택이다. 그러므로 동북아경제공동체를 추진하려면 무엇보다 3국간 정치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물론 그러한 합의에 앞서 이러한 국가적 비전에 대한 국내의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변방경제로 전락하기 전에

    일부 연구보고서가 한국경제를 호두까기(nutcracker) 속에 놓인 처지라고 비유했듯이, 우리 경제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어 혁신을 게을리하면 언제라도 변방경제로 전락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도전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바로 동북아경제공동체의 실현이라고 믿는다.

    동북아경제공동체를 추진한다고 해서 한국경제가 당면한 근본적 과제들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주어진’ 지정학적 여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비전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또 동북아가 하나의 큰 시장으로 발전한다면 한국경제의 전반적 경쟁력 제고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한국경제가 이러한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기본 과제에 충실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경제 구조조정을 통해서 시장경제의 틀을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일이다. 1997년 외환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한마디로 시장경제의 미숙한 운영에 따른 ‘제도의 실패’에 있었다. 규율(discipline)과 경기규칙(game rules)을 핵심으로 하는 시장경제는 패러다임의 변화에 맞추어 꾸준히 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기본적인 제도와 질서를 확립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화의 진전에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1998년부터 추진된 구조조정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며, 그 취지는 개혁을 통한 체계적인 체제 정비와 제도의 수립에 있었다.

    최근 계속되는 경제침체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는 불확실성의 배경에는 일관성을 결여한 경제정책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확하게는 구조조정의 실종에서 비롯되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시장에 대한 경제주체의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며, 이러한 작업은 시장 전망을 예측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잘 돌아가는 시장경제’야말로 한국경제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특화산업 육성이 중요

    또 다른 과제는 특화산업을 육성하는 일이다. 한국경제는 보유자원의 양이나 시장규모로 미루어 세계시장에서 경쟁우위를 누릴 수 있는 제한된 수의 전략산업을 특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산업만이 동북아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이 동북아시장에서 기술혁신중심지로서 자리를 굳히지 않고서는 동북아경제공동체의 발전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없다.



    동북아에서 경쟁우위 산업을 확보하려면 우선 국내에서부터 과감한 산업구조조정을 거쳐야 한다. 또 국내 산업구조의 발전방향을 설정하는 과정에도 동북아 내 분업구조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업부문별로 국제경쟁력에 기초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며 특히 농업부문의 구조개편은 필수 과제이다. WTO 국제무역협상은 물론 한국과 칠레의 FTA 체결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선(先) 국내협상-후(後) 대외협상의 순서를 밟아야만 협상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교훈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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