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조순 전 부총리, ‘참여정부’에 쓴소리

“한국판 뉴딜, 재정만 축낼 것 우리 경제, 일본형 불황 각오해야”

  •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4-12-24 17: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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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배’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손해
    • 연기금 동원은 편법, 모럴 해저드만 부추긴다
    • 경제정책에서 좌파나 우파는 ‘본관이 같은 일가’
    • 엘리트 만들어내지 못하는 교육이 무슨 교육인가
    • 대학에도 획일화 강요…사회주의 국가도 그렇게 안 한다
    조순 전 부총리, ‘참여정부’에 쓴소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학술원 회원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한국은행 총재 ●이화여대 석좌교수 ●서울시장 ●15대 국회의원 ●민주당 총재 ●한나라당 총재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한국경제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시중에 흘러넘치는 돈은 생산적 투자로 방향을 틀 조짐이 보이지 않고 부자건 서민이건 주머니를 열지 않는 통에 내수는 바닥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도 심각한 수준이다. 경제 회복을 국정 운영의 1순위로 삼겠다는 다짐도 아쉬운 마당에 이념 공방과 과거사 논쟁에 민생은 또다시 뒷전으로 밀려버렸다.

    물론 정부는 국민에게 희망의 시그널을 주고 있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설계사인 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은 ‘참여정부는 구름에 싸인 달’이라며 구름이 걷히면 달이 보일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 사령탑인 이헌재 경제부총리조차 ‘이렇게까지 정책의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처음’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걸 보면 정부 내에서도 일종의 위기의식이 언뜻언뜻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가 내년부터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한국판 뉴딜정책’은, 약이란 약은 다 써봐도 꿈쩍못하는 환자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칼을 대는 수술을 하겠다는 소리로만 들린다. 과연 국민은 생존 가능성이 절반인 이 불확실한 수술에 동의서를 써야 할 것인가.

    어려운 상황에서 판단 내리기 어려울 때는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원로를 찾게 된다. 우리 경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장 잘 짚어낼 수 있는 원로가 누구일까 생각하다가 어렵지 않게 조순(趙淳·76) 전 부총리를 떠올렸다.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로 꼽히는 인물. 그리고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의 정부 내 경제 브레인들은 모두 그의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직까지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바로 조 전 부총리다.

    “4% 성장 전망도 지나치게 낙관적”



    인터뷰를 추진하는 과정에 알게 됐는데 조 전 부총리는 지금도 이정우 위원장을 ‘이정우 군’이라고 부르고 있다. 게다가 조순 전 부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의장을 맡고 있는 국민경제자문회의의 부의장을 2004년 6월까지 맡았다. 그만큼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시종(始終)을 안팎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지켜본 대표적 경제학자인 셈이다.

    지난 12월9일과 11일 조 전 부총리를 두 차례 만나 한국 경제의 현재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조 전 부총리는 인터뷰 중간중간 참여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하고 준엄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우선 2005년 새해 경제에 대한 전망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정부는 2005년에도 ‘5% 성장’을 내세우고 있지만 각종 예측기관은 3~4% 수준의 성장을 점치고 있습니다. 2005년 우리 경제를 어떻게 전망합니까.

    “정부가 이야기하는 5%는 희망사항이겠죠. 예측치라기보다는 목표치라는 말입니다. 한국은행이 최근 4% 성장이라는 예측을 내놓기는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조차 낙관적인 전망입니다. 수출도 계속 둔화되는 추세이고 내수도 늘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까지 수출이 성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수출을 빼고 내수만 이야기하자면 2004년 성장률은 1%도 채 되지 않습니다.”

    -정부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이를테면 앞으로 5% 성장을 목표로 해서 성장잠재력을 키운다면 몰라도 당장 내년 성장 목표 5%를 ‘고수’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저렇게 성장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정부도 2004년 성장률이 5%에 못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2005년에 5% 성장을 목표로 한다고 해서 그 이야기를 듣는 국민이 과연 기뻐할까요? 5%라는 수치를 자꾸 고집하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잘못된 수단을 동원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낮으면 낮다고 일러주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가는 것이 옳은 일이죠.”

    -내수 회복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수는 투자와 소비인데요, 지금 기업의 수익률이 급격하게 떨어지는데다 앞으로 전망도 좋지 않습니다. 수익전망이 낮으니까 투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작고 신용불량자 400만명에다 가구당 부채가 3000만원이나 되는 상황에서 소비가 늘기도 쉽지 않은 거죠.”

    “수출 - 내수 연결하는 파이프라인이 끊어졌으니…”

    -올해의 경우 유일하게 수출이 경기를 주도해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수출 호조가 내수로 이어지지도 않고 고용 창출에도 별로 기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같은 경제 안에 있으면서도 수출과 내수를 연결하는 파이프라인이 끊어져있으니까 수출해서 번 돈이 내수와 투자로 이어지질 않는 것이죠. 사실 이러한 구조는 197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져 온 것입니다. 수출 분야에만 기술과 돈을 집중적으로 배분해서 산업을 육성해놓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투자는 이노베이션(혁신)의 함수인데 이노베이션이 없으니까 투자도 잘 이뤄지지 않는 거예요. 역대 정부에서 이러한 양극화 현상이 고질화된 것입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그걸 바로잡는다고 한 것이 벤처 육성 정책 같은 것 아닙니까.

    “벤처만 치켜세운 것부터 잘못된 일입니다. IMF 이후 기업들에게는 부채비율 200%를 맞출 것을 요구하고 은행들에게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 비율 8%를 일정기일 안에 맞추라고 하니 그걸 따라가는 통에 성장 동력이 없어진 거예요.”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그러한 현상이 치유되기는커녕 오히려 왜곡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말씀이군요. 노무현 정부에서는 어떻습니까.

    “무엇보다 경쟁을 되살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경쟁은 경제의 자유화와 자율화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정부가 나서서 자꾸 통제하려고 하니까 경쟁이 안 되는 것이죠.”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콜금리를 결정하기 위한 금융통화위원회를 앞두고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금리 인하 필요성을 밝힌 직후 채권 금리가 떨어지고 한국은행이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경제총수와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분으로 통화정책을 둘러싼 정부와 중앙은행의 바람직한 역할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정부가 처한 사정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지금 기업들이 투자하지 않는 것은 수익성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이지 금리가 높기 때문이 아니거든요. 결국 금리를 낮추면 득을 보는 곳은 금융기관밖에 없습니다. 반면 손해를 보는 사람은 사오정, 오륙도에 직업 잃고서 그나마 돈 몇 푼 쥐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이러한 상태가 앞으로 5~6년 더 갈지도 모른다’는 표현을 썼더군요. 이러다가 이른바 ‘L자형’ 장기 불황으로 갈 가능성도 있다고 보시는지요.

    “그럴 가능성도 꽤 있다고 봅니다.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제도입니다. 똑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우수한 리더십이 작동하고 있느냐, 기업가들이 얼마나 활기 있게 기업을 경영하려고 하느냐에 따라 실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경제에 대한 국민의 통념도 중요하죠.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심리라든지 인센티브가 별로 없는 현행 제도의 특성을 놓고 볼 때 성장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말로만 ‘분배’ 떠들지 말고 중소기업 세금부터 낮춰줘야”

    조순 전 부총리의 우리 경제에 대한 진단은 이렇게 예상보다 심각했다. 조 전 부총리를 찾았을 때 당초 취지는 경기 회복을 위한 해법을 몇 가지 얻어가고자 했지만 듣다 보니 대증(對症)요법 자체를 꺼내들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그는 무엇보다 우리 경제의 ‘양극화’ 현상을 걱정했다.

    그러나 조 전 부총리가 이야기하는 ‘양극화’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참여정부의 경제브레인들이 지적하는 ‘계층간 양극화’만은 아니었다. 소득불평등 같은 계층간 양극화 현상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경제성장의 핵심을 구성하는 수출과 투자, 그리고 내수가 서로 따로 노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현상이었다. 말하자면 맞물려 돌아가야 할 톱니바퀴 중 몇 개가 빠져버렸으니 기계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는 것이다.

    -수출과 내수, 소비를 이어주는 파이프라인의 단절을 언급했는데, 소득불평등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양극화 현상이 발생하는 셈이군요.

    “그렇습니다. 하나의 경제 시스템 안에 있으면서도 운영원리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요소가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는 세계화한 환경에서 규모의 경제를 등에 업고 있는 산업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재래식 수요와 공급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산업입니다. 그러니 한쪽에서 아무리 돈을 벌어도 다른 쪽으로 잘 넘어오질 않습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융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하루아침에 바뀔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인가요.

    “이 문제는 2005년 하반기라고 해서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래 간다고 봐야 합니다. 좋은 선례가 바로 일본입니다. 최근 언론에서는 일본이 아주 잘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지금도 제로성장에 가깝습니다. 일본은 그래도 우리보다는 이러한 양극화가 덜한 편이거든요. 이런 것만 보더라도 일본과 비슷한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수출이 잘 되고 성장률이 높아도 결국 그것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상이 더욱 심각한 문제를 낳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 논란이지요.

    “사실 현재 실업률이 3.3%라는 통계는 당치도 않은 수치입니다. 일정 기간동안 얼마나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느냐만 보고 실업자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업상태에 있으면서도 직업 구하기를 포기한 ‘구직 단념자’는 통계에도 아예 잡히질 않습니다. 기죽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고 이러한 통계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게 분명해요.”

    조순 전 부총리, ‘참여정부’에 쓴소리

    조순 전 부총리는 소득불평등뿐만 아니라 산업간 양극화 현상이 우리 경제를 짓누르는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고용 없는 성장’은 기술 발달과 경제 체질의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을 것 같은데요.

    “재래시장 주변에 대형 할인점 하나 들어서 봐요. 재래식 구멍가게뿐만 아니라 할인점 입주 업종인 주변 세탁소나 제과점 등도 모두 다 죽습니다. 이런 추세에서 어느 정도 소득불균형의 확대는 불가피합니다. 자꾸 소득 분배 문제를 들고 나온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할 만한 현실적 수단이 별로 없는 거예요.”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에도 ‘성장이냐 분배냐’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돼 왔습니다. 정부에서는 성장과 분배가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얼마든지 함께 갈 수 있는 것인데도 일부 언론에서 참여정부의 분배 중시 성향을 문제 삼는다고 보는 듯합니다.

    “성장과 분배가 동전의 앞뒷면이라…, 물론 그것도 옳은 말이에요. 요는 성장의 기본적 원천이 경쟁임을 알아야 한다는 거죠. 공정한 룰에 따라 제대로 경쟁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분배없는 성장은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성장 없는 분배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성장과 분배가 함께 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때 그때 경제 상황을 봐서 어디에 좀더 역점을 두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 아닙니까. 지금 상황으로 보면 분배를 너무 강조하는 것이 현실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극빈자 같은 경우라면 정부가 도와줘야겠지만,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분배를 앞세워도 효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런 면에서 참여정부 출범 이후 분배 쪽에 역점을 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봅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구체적 정책을 뜯어놓고 보면 실제로 분배를 중요시하는 정책은 별로 없어요. 설령 분배를 중요시한다고 하더라도 입으로만 주장할 게 아니라 국민의 힘든 사정을 말없이 돌봐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중소기업 경영자와 자영업자들에게 세금을 낮춰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그런 게 정말 분배정책 아니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 정부가 분배를 이야기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게 돼있습니다.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어요. 성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분배를 잘하려고 해도 더 잘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거든요.”

    조순 전 부총리는 최근 한 토론모임에서 서울대 시절 가장 아끼던 제자 중의 한 명인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을 향해 “오해를 받을 수 있으니 분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인터뷰를 요청하면서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조 전 부총리는 “언론에서 너무 블로 업(blow up)한 것도 있고…”라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날 다시 들어보니 결국 그의 소신은 확고했다. 단, 분배정책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면서 분배에 대해 이야기하면 시장의 신뢰 상실을 자초하는, ‘열정이 앞선’ 이상주의자들에 대한 걱정이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렇다면 언론보도를 탓한 것은 아끼는 제자가 여기저기서 구설에 오르는 것을 걱정하는 노(老)스승의 가슴 따뜻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사실 조 전 부총리는 인터뷰에 응하기 전에 참여정부의 경제정책과 관련한 구체적 이야기는 피해달라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일단 무릎을 맞대고 앉은 이상 ‘알맹이’를 빼놓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을 이야기할 때 가장 민감한 대목이 좌파논쟁이다.

    “좌파정책 있다면 그건 과거 우파정책에 대한 반동일 뿐”

    사실 조 전 부총리를 인터뷰한 기자는 참여정부의 정책방향에 대해 걱정도 하고 혹독한 비판도 해왔지만 ‘참여정부=좌파’라는 낙인(烙印)찍기식 태도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다. ‘좌파’라는 모자를 씌워놓으면 토론이 불가능해지는, 무지막지한 지적(知的) 동맥경화 증상이 결국 어느 순간엔가 우리 사회의 지적 풍토를 심근경색으로 몰고 갈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싶으면 일단 부인(否認)하라’고 했던가. ‘학계 일각의 의견’을 빌려 조 전 부총리의 ‘선택’을 요구해보았다.

    -학계 일각에서는 참여정부의 경제정책뿐만 아니라 사회 노동정책 전반이 ‘좌파적’이라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에 공감합니까.

    “‘좌파’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에서 특수한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펴더라도 ‘좌파’나 색깔론으로 접근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쟁을 치른 분단국가여서 이러한 표현에는 하나하나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사실 지금 ‘좌파’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면 이는 과거 우파가 정권을 잡았을 때 폈던 정책들이 균형을 잃었기 때문에 거기서 나타나는 반동이라고 봐요. 참여정부의 정책이 ‘좌파’라고 한다면 그런 요인의 상당 부분을 만들어낸 원인은 과거 ‘우파’에서 나온 것입니다. 과거 우파가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정부가 뭐든지 인위적으로 성장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현 정부가 펴는 정책은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것이죠. 그러기에 지금 좌파나 우파는, 말하자면 본관(本貫)이 같은 일가입니다. 하나는 왼쪽에 서 있고 하나는 오른쪽에 서 있을 뿐이지 다 같은 친척이에요.”

    -앞에서 제도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이번에 국회에서 통과된 공정거래법의 출자총액제한 제도나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문제 등이 기업의 투자의욕을 꺾는 제도적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물론 정부에서는 ‘시장개혁’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합니다만.

    “경제가 잘 되고 있을 때라면 기업들의 불만이 덜할 텐데 가뜩이나 경제도 안 좋은데 그런 조치가 자꾸 나오니까 기업들이 불만을 쏟아놓는 것이겠죠. 나중에는 몰라도 지금은 좀 완화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앞으로 우리가 무얼 먹고 살 것이냐’는 데로 모이는 것 같습니다. 과거 반도체나 자동차가 경제를 이끌어온 것처럼 국가 경제를 주도할 확실한 투자 대상이 보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러다가 결국 엔진 꺼진 자동차처럼 우리 경제가 주저앉아버리는 것 아니냐는 불길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국가를 대표하는 산업은 지금도 있습니다. 자동차 반도체 휴대전화 등 잘하는 분야가 한둘입니까. 그런데 바로 산업의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재래 분야와 연결하는 파이프가 끊어졌기 때문에 만년 한대(寒帶)지방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장률 5%라고 하더라도 양측이 연결된 5%냐, 한대지방은 제쳐놓은 채 달성한 5%냐는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결국 그러한 불균형 성장은 몇몇 비즈니스 분야의 리더가 잘해서 이뤄지는 것인데 국민경제 전체로 보면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경제성장 동력을 당장 가져올 묘안은 별로 없습니다.”

    -누적되어온 구조가 문제라면 지금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역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규제를 완화해주고 최근 들어 몰락하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에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소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세무조사를 안 한다고 해서 큰일날 일은 없거든요. 10대 차세대 성장동력 산업도 좋겠지만 당장 잘못하는 부분부터 바로잡는 것이 정부가 할 일입니다.”

    -최근 부동산 시장 동향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가장 역점을 기울여온 부동산정책의 핵심은 세금을 동원해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값은 잡았다고 쳐도 거래는 얼어붙고 건설경기도 죽어버리다 보니까 더 큰 문제를 낳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동산을 바라보는 기본 자세만 놓고 보면 정부의 논리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는 해요. 부(富)의 소유수단으로서 토지나 주택을 소수가 차지하는 것은 좋지 않거든요. 이러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부동산에 중과세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富)를 소유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40~50대에 명예퇴직한 ‘사오정’ ‘오륙도’는 퇴직금 조금 받아서 할 게 없는 거예요. 그 돈을 가지고 자녀 교육비로도 쓰고 노후대책에도 써야 하는데 은행에 넣어 놓으면 제로금리 상태라서 돈을 불리질 못합니다. 그래서 자영업에 나서지만 그게 쉽지 않거든요. 결국 가장 사정이 딱한 계층이 이런 중산층입니다. 그러다 보니 확실한 수단으로 ‘땅이라도 좀 사두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그나마 안심이 되는데 그걸 꽉 눌러놓으니 죽는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요.

    부동산을 부(富)의 보유수단으로 무제한 허용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것밖에 도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너무 강력한 수단을 써서 부동산 보유자들을 억누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조순 전 부총리는 경제학계에서 ‘한국의 케인스(Keynes)’로 불린다. 그 자신은 케인스로부터 출발해 통화주의자로 연구 영역을 넓혔다고 밝히고 있지만 아무래도 케인스 연구가 그의 학문적 출발점인 만큼 그의 성향은 케인스에 가까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케인스는 정부가 나서서 공공정책을 통해 시장에 개입하면 총수요가 증가하고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공공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대표적 저서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공투자를 강조한 학자가 바로 케인스다.

    조순 전 부총리, ‘참여정부’에 쓴소리
    마침 정부는 내년부터 대대적인 공공투자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는 종합투자계획, 이른바 ‘한국판 뉴딜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1920년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뉴딜정책이 바로 대표적인 케인스적 처방.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정부가 펴겠다는 ‘한국판 뉴딜정책’도 거슬러 올라가면 케인스의 해법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케인스’라고도 불리는 조순 전 부총리는 이러한 정부의 계획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해졌다.

    -최근 정부는 공공투자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려는 이른바 ‘한국판 뉴딜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민간투자법을 개정해 학교 보육시설, 자연휴양림 같은 공공시설을 대량으로 짓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공투자 방식은 얼마나 실효를 거둘 수 있겠습니까.

    “당장 고용 창출 필요성이 있으니까 케인스식으로 공공지출을 함으로써 승수효과를 내겠다는 것이죠. 하지만 승수효과는 별로 나타나지 않을 것 같고요, 당장 고용창출 효과는 있겠지만 그런 시설을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쓸데없는 건물만 많이 생기고 좁은 국토는 훼손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게다가 정부의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고요. 그런 방식이 계속되면 몇 년 뒤에는 관리조차 하기 힘들어질 가능성이 대단히 큽니다.”

    -공공투자를 통해 경기를 회복시킨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경우 똑같은 방식을 10여년 계속하다 보니까 정부의 부채가 국민총생산(GDP)의 150%를 넘어섰어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태가 빚어진 것이죠. 일본은 총리가 바뀔 때마다 정부 지출을 늘리는 형태의 경기대책을 내놓았습니다. 이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도로를 건설하더라도 땅값이 올라가니까 지방에서는 환영하고 국회의원들도 이런 공사를 벌이기를 원합니다. 유효수요가 부족해서 케인스식으로 수요를 늘리겠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정부가 내세우는 것들은 유효수요가 아닙니다. 지금의 불황은 유효수요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경제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케인스식으로 대처하면 일본처럼 된다는 말입니다.”

    “기금도 결국 정부지출… 편법 동원 안 된다”

    -그래서 정부는 재정적자를 유발하는 국채를 발행하지 않고 연기금이나 사모펀드(PEF) 같은 민간자본을 끌어들이겠다는 것인데….

    “그러한 방식은 모럴 해저드(moral hazard)에 빠져들 가능성이 더욱 높습니다. 국민경제에 대한 경각심도 적어지고 돈도 헤프게 쓰게 됩니다. 게다가 자기 지역구에 이런 공사를 유치하려는 로비가 정치권에 기승을 부릴 거예요. 기금을 끌어다 쓰더라도 결국 정부지출이나 다름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 편법을 써서는 더 더욱 안 됩니다.”

    -그렇다면 결국 대기업이 싸들고 있는 돈과 시중의 풍부한 유동성을 민간투자 쪽으로 돌릴 수 있는 방안이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인데요.

    “우리나라 기업의 가장 큰 문제는 이노베이션이 없다는 거예요. 이노베이션의 주체는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전형적인 중소기업이잖아요. 투자가 부진한 원인도 이렇게 중소기업의 이노베이션 부족에서 오는 겁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장 기능을 복원하고 경쟁 시스템을 도입하고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 현재 우리 경제를 짓누르는 요인을 들라면 고유가에 환율 하락, 실업률 증가 같은 변수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의 기본틀이 과거와는 판이하게 바뀌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영미식 주주자본주의 시스템이 뿌리내리면서 나타난 외국인 비중의 증가, 세계화 및 지역주의의 급속한 확산, 가공할 만한 중국 경제의 부상(浮上) 등이 그러한 변수다.

    -최근 외국자본의 행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고배당 등을 통해 이익 실현에만 관심을 보이는 이들 자본의 움직임을 규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조짐이 보이자마자 외신에서는 이를 두고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 정부가 국수주의로 회귀하고 있다’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몇 년 사이 급증한 외국자본의 최근 움직임을 어떻게 봐야 하겠습니까.

    “지난 몇 년 동안 외국 사람들이 공장 하나 짓지 않고 포트폴리오 투자만으로 빼간 돈이 100조원 이상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 정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돈입니다. 이런 상황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요. 한국이 처한 이런 딜레마는 결국 준비 없이 자본시장과 자산시장을 한꺼번에 열어놓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국내 기업들에게는 부채비율 200%를, 금융기관에는 BIS 자기자본 비율 8%를 계속 요구해왔거든요. 결국 자산을 파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데 재벌을 포함한 국내 기업에 너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다 보니까 외국자본으로 넘어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와서 다시 규제를 한다고 하면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겠죠.”

    -외국계 자본이 대주주 지위를 가진 은행들의 문제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은행들은 대부분 기업 심사를 통해 리스크를 지고 사업에 투자하기보다는 소비자 금융 위주의 안전한 돈벌이에만 치중하고 있어 금융산업 발전이라는 면에서 보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은행의 공공성이나 사명감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은행들의 경영 형태가 우리 국민경제 발전에 적합한 방식이라고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 금융시장에서 국내 은행들이 주류를 형성하면서 분위기를 잡아나간다면 외국계 은행들도 따라오겠지만 지금은 국내 은행들이 외국은행에 비해 규모도 작은데다 그럴 만한 형편도 되지 못하거든요.”

    -최근 우리나라에도 세계화된 경제에 반대하는 시민사회 일부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개방경제의 혜택을 누려온 우리가 세계화의 흐름을 거부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체제의 국가들이 세계화 흐름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세계화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오는 곳은 대부분 후진국입니다. 한 마디로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죠.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우리가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착각해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아하, 이거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러니까 세계화 체제를 비난하는 거죠.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반대한다고 해서 세계화의 원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경쟁력을 키우고 특화산업을 발굴하는 것입니다.”

    “세계화 반대 외치는 건 후진국 논리”

    -중국의 질주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놀랍습니다. 인구 13억명의 중국이라는 시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요.

    “지금도 잘 활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국내산업 공동화 이야기까지 나오는 걸 보면 오히려 지나칠 정도라고 할 수 있지요. 이제는 우리가 좋든 싫든 한국과 중국은 하나의 경제권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이만큼 지탱하는 것도 사실은 중국 때문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 경제가 지금 이만큼이나마 회복한 것 역시 중국 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주의 깊게 볼 것은 일본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중국의 급부상이라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임금 수준을 낮췄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기업 임금은 선진국에 비해 결코 낮지 않은 수준이고, 은행원 경우도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낮지 않습니다. 자동차업체 임금도 비슷한 수준이고요. 그런 상황에서도 파업이 그치질 않습니다. 일본 독일의 사례를 감안하면 우리 임금 수준도 지금보다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해 말 골드만 삭스는 ‘오는 2039년이면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습니다. 중국 경제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부상하는 요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중국인은 경쟁에 친숙합니다. 사회주의 체제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정부에 의존한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잘해서 올라가는 것도, 잘못해서 몰락하는 것도 내 책임일 뿐이지 정부가 나서서 도와주는 법이 없거든요.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웬만하면 모든 걸 정부에 해결해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할 일은 하지 않고 정부에 요구만 하는 셈이죠. 한중일 3국 중 일본과 한국은 그런 식이에요.”

    “모스크바大는 모스크바大 식으로 하게 하라”

    조순 전 부총리는 중국의 사례를 들어 ‘경쟁’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도중 갑자기 교육 문제로 화제를 바꿨다. 교육현장에서부터 경쟁할 수 있는 풍토를 가르쳐야 하는데 현재 교육시스템이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할 말이 무척 많은 듯했다. 느릿느릿 이어가던 조 전 부총리의 말이 갑자기 빨라졌다.

    “얼마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에서 우리나라 고교생의 성적이 하도 높게 나왔다기에 자연과학을 하는 교수님께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그분 말씀이 우리 학생들이 아무리 수학을 잘한다고 해도 그것은 평균점수일 뿐이지 상위 10% 학생의 수학 성적을 다른 나라 학생들과 비교하면 형편없다는 거예요. 주변에서 하도 ‘공부 공부’하니까 학생들의 평균 점수는 높을지 모르지만 상위권 학생의 성적은 다른 나라에 훨씬 못 미친다는 거지요. 사실 전체 학생이 수학 공부를 조금 잘해봤자 무슨 소용 있습니까. 최고 학생들이 잘해야지요. 그래야 나라를 이끌어갈 것 아닙니까.”

    -평준화 정책이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봅니까.

    “경쟁을 촉구하는 교육체제를 만드는 것이 우리나라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수요건이에요. 고등학교를 평준화하고 이제 대학까지 평준화하겠다고 나서는 한 입시 부정행위가 그칠 수 없고요, 강남 땅값이 진정될 리가 없어요. 음성적으로 숨어들 뿐이지요. 교육은 엘리트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엘리트를 못 길러내는 교육이 무슨 교육입니까.”

    -하지만 교육 문제를 교육 수요자, 그러니까 학부모나 학생의 이해관계를 도외시하고 집행할 수는 없을 텐데요.

    “아마도 우리나라 국민에게 평준화를 선택할 것이냐 아니냐를 던져주고 투표하라고 하면 평준화 쪽이 우세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이너리티’라고 하더라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에요. 한 사람이 주장해도 옳은 것은 있거든요. 평준화 교육은 당장 겉으로는 좋겠지만 교육을 망치는 일입니다. 교육이 망가지니까 경쟁력이 살아나지 않는 것이죠.”

    -우리 사회 일부에서 제기된 이른바 ‘서울대 폐지론’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서울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지금 서울대가 갖고 있는 문제를 서울대가 해결하게 해줘야지요. 자율에 맡기면 서울대가 모집 방식을 바꾸고 잘할 텐데 서울대나 충북대나 제주대나 똑같은 기준에 따라 하라고 하니, 원…. 미국 같은 경우만 해도 하버드는 하버드대로 예일은 예일대로 프린스턴은 프린스턴대로, 다 나름의 방식이 있어요.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사회주의 국가도 그렇게 하는 나라가 없어요. 모스크바대학은 모스크바대학대로, 인민대는 인민대 방식대로 하는 것이지요.”

    “한-일 FTA 처음부터 어려울 것으로 봤다”

    -최근 여당이 제출한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둘러싸고도 논란이 적지 않습니다. 일부 사립학교는 ‘개정안이 통과되면 학교 문을 닫겠다’는 극언까지 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기본 원칙은 학교는 교육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겁니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하는 사람에게 맡겨야 하듯이 말이죠. 뭔가 비리가 나오면 그때 가서 책임을 묻는 것은 필요하지만 우리나라의 수준이 낮으니까 정부가 개입한다고 해서 상황이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최근 조순 전 부총리는 한중일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 경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마침 참여정부가 출범과 동시에 내세운 국정목표 중 하나가 ‘동북아경제중심 국가 건설’이다. 그런데 정작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은 막판까지 와서 ‘갈짓자 걸음’을 하고 있고, 동북아 공동체로 가기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이 필수적인데도 북핵 문제 해결의 돌파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동북아 경제공동체가 ‘구호’로만 끝나는 것은 아닌가.

    -참여정부는 동북아 중심국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동북아 경제공동체 구상은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 것 같습니까.

    “할 수 있다면 물론 좋습니다. 문제는 그럴 준비가 돼 있느냐 하는 점이죠. 당장 한-일 FTA만 해도 그동안 추진하다가 멈칫멈칫하고 있거든요. 우리 재계에서 준비가 안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난 애초부터 한-일 FTA는 어렵다고 봤어요. 당장 우리 정부가 농민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농산물 수출 국가와 FTA를 맺는 것이 쉽지 않을 겁니다. 아세안(ASEAN)하고 FTA 협상을 벌이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유럽, 미국과 동시에 FTA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잘 이해가 안 가요. 우리가 FTA에 임하는 자세가 무엇인지, 이렇게 많은 FTA를 동시에 추진할 만한 능력을 우리가 갖추고 있는지 등을 검증해 보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혹시나 외국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걸 보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인터뷰 내내 “장기불황은 불가피한데 정부가 섣불리 희망을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걱정하던 조순 전 부총리를 붙잡고 단도직입적으로 ‘도대체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채근했다. 그랬더니 조 전 부총리는 결국 다시 교육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아이들 교육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젊은 여성들이 아이를 안 낳겠다고 하잖아요. 아이를 낳아놓으면 감당하질 못하겠다는 얘기거든요. 아이를 안 낳으니까 인구는 감소하고 노령화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겁니다. 경제가 나아가려면 젊은이가 많아야 하는데….”

    아이 낳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사회시스템, 가족을 버려둔 채 더 나은 교육을 찾아 이 땅을 떠나는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는 교육시스템, 경쟁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이를 통해 활력을 되찾는 경제시스템. 대략 이런 것이 조순 전 부총리가 ‘신동아’와의 신년 특별대담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결국 우리 경제의 고질은 당의정 한두 알이나 링거 주사 한 방으로 치유될 수 없다는 말이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던가. 새해 아침 조순 전 부총리가 덕담 대신 풀어놓은 쓴소리가 좋은 약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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