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국민문학 ‘토지’ 작가 박경리 “행복했다면 문학을 껴안지 않았다”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국민문학 ‘토지’ 작가 박경리 “행복했다면 문학을 껴안지 않았다”

2/10
-‘토지’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모두 몇 명이나 되나요.

“800명 가량 될 거예요.”

-모든 인물이 작가의 분신이겠지만 그중에도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조상호 사장은 창(唱) 잘하는 주갑이가 제일 좋다고 하는데요.

“주갑이는 그냥 무심히 쓰다 만들어진 인물입니다.”

‘토지’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작가의 고향인 서부 경남 사람들이다. 주갑은 800명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등장하는 전라도 사람. 조 사장은 전남 장흥이 고향이다.



드라마 ‘토지’, 원작과 너무 달라

박 선생은 1989년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중국여행에 나섰다. 외국여행 기회가 적지 않았지만, ‘토지’의 맥이 끊길까 봐 두려웠고 복잡한 출국수속이 싫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만은 꼭 가보고 싶은 나라였다. 죽(竹)의 장막이 걷힌 직후 베이징을 거쳐 토지 2부의 무대인 간도(間島)를 찾아갔다.

-한번도 안 가본 용정 거리가 소설에서 묘사한 것과 얼추 맞던가요.

“소설 쓸 때 참고한 책자들이 있었어요. 지리, 기후를 비롯해 모든 게 다 나와 있었죠.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진 거죠. 간도에 살던 사람이 ‘간도에 산 적이 있냐’고 물을 정도였어요. 묘사와 내용에 리얼리티가 있어야 작품이 살거든요. 상상력과 직관력으로 정확하게 때려잡아야 해요.”

-토지 2부를 쓸 때 안수길(安壽吉)의 ‘북간도(北間島)’를 참고하지는 않았습니까.

“사투리를 배우려 ‘북간도’를 읽었어요. ‘토지’ 2부에서는 간도 방언을 사용해야 하니까.”

‘북간도’는 1959∼67년 ‘사상계(思想界)’에 연재된 5부작 대하소설. 1870년 조선 말기부터 1945년 광복까지, 북간도로 이주한 민족의 수난사를 그렸다.

-‘토지’의 무대, 하동 평사리에도 가본 적이 없다죠.

“안 가보고 소설을 썼는데 나도 놀랐어요. 동아일보 문명호 기자가 ‘토지’ 1부가 나온 뒤 평사리에 찾아가 기사를 썼어요. 평사리에 조대호라는 참판집이 있었답니다. 소설 속의 조준구를 실제로 찾으려고 무례하게 ‘족보 내놔라’고 했대요. 곳간 사진도 어쩌면 ‘토지’하고 똑같아요.”

-자료를 살펴보다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6·25전쟁 이전에 외할머니가 들려준 거제도의 누런 벼와 호열자(콜레라) 이야기에서 ‘토지’ 이야기가 촉발됐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더군요.

“외할머니는 이상하게도 눈알이 파랬어요. 남쪽에서 어떻게 무슨 피가 섞였는지 모르지만…. 깡마른 몸매의 외할머니는 만날 긴 담뱃대를 물고 계셨습니다. 이 양반이 시장에 가서 장을 볼 줄 모르는 거예요. 돈도 모르고…. 그때 풍속이 여자는 농사를 지어도 시장에는 안 갔죠. 외할머니는 거제도에 살다 통영으로 시집을 왔죠. 친정 문중 땅이 아주 넓어 조랑말 타고 돌았대요. 1902년 호열자가 돌아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어요. 얼마나 죽었던지, 가을에 벼 베어 먹을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답니다.

그 이야기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머릿속에 색채로 다가오더라고. 죽음은 까만 빛 아닙니까. 까만 빛과 황금빛의 대비. 죽음과 삶. 그 이야기가 머릿속에 굴러다니다 작가가 되니까 더 생생해지는 거죠. 그것을 가지고 1부 정도 쓰려던 게 이렇게 확대됐지요. ‘김약국의 딸들’(1962)도 어려서 통영 외가에서 들은 얘기에서 나왔죠.”

-‘토지’ 마지막 21권은 광복을 맞아 백성들이 환호하는 장면으로 끝나잖아요. 공교롭게도 박 선생님이 1994년 광복절 새벽 2시에 ‘토지’를 탈고했더군요.

“그건 절대 의도한 게 아닌데….”

-광복 이전에 성장한 사람에겐 광복이 강력한 체험이겠죠. ‘토지’가 광복에서 끝을 맺어 묻는 이야깁니다만, 박 선생님은 어디서 어떻게 광복을 맞았습니까.

“인천 남동에서였어요. 지금은 그곳에 공단이 들어섰지만 그때는 염전이었어요. 화약 원료로 쓰이는 나트륨 공장이 있었죠. 소금을 분해하면 나트륨이 나오지요. 남편이 그 공장 기술자로 있었죠. 일본 공업대학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했거든요. 학생은 모두 학병으로 끌려갔는데 화학분야 기술자라서 나트륨 공장에 취직한 거죠.

공장 직원들은 전부 일본인이고 남편만 한국 사람이었어요. 염부(鹽夫)들은 막사에서, 직원들은 관사에서 살았죠. 우리도 관사에서 살았는데 거기서 조금 가면 조선인 마을이 있었어요. 해방되니까 일본 사람들 사는 관사에서는 통곡하고 야단이 났죠.

조선인 마을에 국민학교가 있는데 거기에 모두 모이라는 거예요. 그때 내가 입고 나간 옷이 생각나요. 모두들 몸뻬입을 때였는데 분홍색 치마에 하얀 모시 적삼 입고 갔어요. 동네 유지들이 동네 생기고 이리 예쁜 새댁이 오기는 처음이라고 했어요. 그때 더웠어요. 모두 만세 부르고…. 진짜 너무너무 기뻤죠. 친일파말고는 전부 한마음이었어요.”

2/10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연재

황호택기자가 만난 사람

더보기
목록 닫기

국민문학 ‘토지’ 작가 박경리 “행복했다면 문학을 껴안지 않았다”

댓글 창 닫기

2019/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