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호

상처받기 쉬운 남성의 초상 ‘보이’ ‘남자의 이미지’

  • 글: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입력2004-12-28 13: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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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받기 쉬운 남성의 초상 ‘보이’ ‘남자의 이미지’

    <b>‘보이’</b> 저메인 그리어 지음/ 정영문, 문혜영 옮김/ 새물결<br><b>‘남자의 이미지’</b> 조지 L. 모스 지음/ 이광조 옮김/ 문예출판사

    서구미술사를 보면 화가들은 끊임없이 남성의 나체를 그려왔다. 벌거벗은 소년들은 대개 시동(侍童), 순교자, 수호신, 유혹자, 나르시시스트, 숭배자 등으로 등장한다. 탐미적인 것에 쉽게 매혹되는 화가들이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으며 너무도 빨리 지나가는 이 아름다운 육체를 그림 속에 남겨놓으려 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보이’의 저자 저메인 그리어는 서구미술사에서 관능적이고 천진스러우면서 부서지기 쉬운 소년들의 몸을 그린 그림 200여 점을 뽑아 거기에 글을 붙였다.

    소년의 알몸을 담은 그림이나 사진은 ‘남성적 관능’의 한 부분을 보여준다. 아폴론, 아도니스, 나르시스는 신화 속에 나오는 아름다운 소년의 표상이다. 24세에 자동차 사고로 죽은 제임스 딘이나 27세에 스스로 머리에 엽총을 쏴서 죽은 커트 코베인 등은 소년의 나이를 지나 생을 마감했지만, 그들에게는 반항하는 소년의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다. 가수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프레디 머큐리 등은 기성사회를 비웃고(여기서 기성사회란 남성들의 사회다) 저항정신과 방종을 삶의 지표로 삼음으로써 무의식 속에서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인물들이다.

    미성숙, 철없음, 성적 열망

    미성숙과 철없음, 그리고 성적 열망은 소년들이 공유하는 특징이다. 소년은 매혹적이지만 그 매혹은 부서지기 쉽다. 소년기는 가부장적인 사회로 진입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준비단계기 때문이다. 첫 몽정, 첫 면도, 변성을 경험하는 시기이며 학습을 통해 사회가 소년에게 요구하는 것들도 습득하게 된다.



    문명은 소년이 아니라 잘 학습된 남성을 원한다. 그래서 소년기의 자유와 방종은 어른이 되기 전까지만 묵인된다. 소년에서 벗어나 남자가 된다는 것은 어머니와 동일시되는 여성 정체성을 깨고 나와 남성 정체성을 확장하며 사회라는 감옥의 규율에 자기를 맞춰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소년은 남성으로 가는 도중에 거쳐야 할 일시적이며 과도기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살아서 소년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제임스 딘, 커트 코베인,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프레디 머큐리 등은 젊음의 알레고리 속에서 신화 속의 아폴론, 아도니스, 나르시스를 대체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남자로 사회화하기 전 죽음으로써 불사신이 되었고, 영원한 소년 이미지로 박제되었다.

    소년을 포함한 남성 누드의 역사는 동성애의 역사와 일치한다. 벗은 몸이 소년이든 여성이든 간에 바라보는 일은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시선의 주체는 지배자이자 권력자이고, 응시당하는 사람은 피지배자다. 소년의 미성숙한 몸이나 여성의 몸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소년의 몸에 매혹당한 동성애자들은 소년을 비역의 짝으로 삼는다.

    중세화가 브론치노의 작품 ‘비너스와 큐피드의 알레고리’는 벌거벗은 연상의 여자와 입 맞추며 손가락에 젖꼭지를 끼워 애무하는 소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은 매우 에로틱하다. 그러나 그 에로틱한 화면 밑에 가망 없는 사랑의 위험과 불운이 감춰져 있다. 가끔씩 성기가 보이는 소년의 벗은 몸은 이 책이 여성용 포르노그래피 성격도 갖고 있음을 드러낸다. 남성이 여성의 벗은 몸을 바라보며 시각적 쾌락을 누리는 것이 정당하다면, 여성도 남성의 벗은 몸을 바라보며 남성과 같은 시각적 쾌락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보는 성과 보여지는 성 사이에는 엄격한 선이 그어져 있다. 이런 부자연스런 이분법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이상(異常)을 길러낸다. 우리가 흔히 보는 남성의 관음증, 적개심, 질투와 여성의 마조히즘, 노출증, 위선 등은 그 이상의 가시적 형태다.

    전쟁과 동화되는 남성성

    조지 L. 모스의 ‘남자의 이미지’는 저메인 그리어의 ‘보이’와 함께 읽을 만한 책이다. 두 책은 남자의 아름다운 몸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그리어가 19세기 이전까지 남성적 응시의 지배 대상이던 소년의 벗은 몸에 대한 도상을 종횡으로 누비며 관음의 역사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욕망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면, 모스는 남자의 이미지가 국가 또는 가부장적 권력이라는 외부자의 시선에 의해 어떻게 조작되고, 어떻게 사회 규범적인 가치로 일반화되며, 어떻게 민족주의 인종주의 나치즘 등에 의해 남용되었는지 그 역사와 과정을 추적한다.

    서구에서 현대적인 남성성의 이상적인 모습이 일반화되어 유포된 것은 18세기 무렵이었다. 의지력, 명예, 용기와 같은 것이 남자의 덕목으로 장려되고, 국민, 숭고함, 전쟁 등과 결합해 남성성의 이상형을 구축하는 필수적 요소라는 확고한 지위를 얻으면서 남자들의 내면에 강박증적 이데올로기로 새겨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가장 극렬하게 추구한 사람이 바로 독일 나치의 히틀러다. 나치 이론가들은 고대 그리스인의 이상형에서 영감을 받아 건장한 아리안족 남성의 신체규준을 만들었고 이것을 이상화해서 종교의 대용물로 고착시켰다. 그리스 조각 같은 남성의 육체는 곧 국가의 상징으로 조작됐는데, 이는 전쟁을 수행할 남성을 길러내야 한다는 국가적 필요성이 반영된 것이었다. 단련된 신체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가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국민의 소유물이었다.

    인종주의는 신체 단련과 조형에서 시작해 이상적인 남성의 정신적 자질들, 이를테면 “충성과 정직, 우애와 순종, 기강과 용기” 등과 같은 윤리적 명령으로 나아간다. 아울러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리스 조각에 가까운 신체적 단련과 조형이 갖는 미학적인 호소력과 국가사회주의가 유포한 숭고한 대의는 그런 차별과 폭력의 야만성을 희석시키고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이상화된 남성 모델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반이성적, 반인륜적 인종학살은 이성의 마비라는 무대 위에서 벌어진 ‘진부한 악’의 광란이고 유희였다. 히틀러의 악랄한 인종주의는 나치 이론가들이 만들어낸 아리안족 남성의 스테레오타입이라는 바탕 위에서 성립한 것이다.

    전쟁은 오로지 남자만의 것이다. 여성의 참전은 간호사나 매춘부와 같은 부수적인 역할에 한정된다. 전투원은 언제나 남자들이고 용감한 병사는 진정한 남자다움의 신체적, 정신적 자질의 적절한 상징이다. 전쟁을 통해 소년은 비로소 남자로 태어난다. 군대는 소년의 신체를 단련하고 국가나 위계질서에 대한 복종과 존중심을 심어주며 국가에 충성하고 전쟁에 참여하는 게 숭고한 대의에 따르는 것이라는 신념을 키워준다. 숭고한 대의는 남자다움의 이상형에 복무하는 것인데, 그것의 기원은 다름 아닌 국가다.

    남자가 된다는 것은 전쟁을 수행할 만한 육체적, 도덕적 자질을 갖추는 것을 뜻한다. 아울러 전쟁은 공격성과 폭력을 숭고한 대의에 수렴시킴으로써 정당화한다. 그러니 남성성과 군국주의 파시즘 이데올로기가 그토록 자주 자기동일성의 범주에서 겹쳐져 작동하는 것이다.

    사회는 끊임없이 ‘남자답다’ 혹은 ‘여자답다’는 규범을 만들고, 그 규범을 도덕으로 보편화하며 미풍양속으로 강화한다. 남자가 육체적, 도덕적 강인함을 추구하며 국가와 사회가 요구하는 숭고한 대의에 복무하도록 훈련받는 동안, 여자는 가정에서 남편에게 평화와 안락을 보장해주는 존재로 양육된다. 내면의 자발적 욕구가 아니라 밖에서 주어진 강제에 의해 그 ‘다름’을 신체의 안팎에 각인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남자나 여자 모두 본래적 자기에서 일탈하는 경험을 겪는다. 그리고 사회가 요구하고 강제하는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규범을 위반하면 크고 작은 처벌이 따른다.

    왜곡된 남성 담론의 결과물

    이처럼 우리의 관념 속에 자리잡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이미지들은 대부분 역사적으로 조작되고 왜곡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힘차고 활기차며 건장하고 당당한 존재로 표상되는 남자다움은 가부장적 권력을 위해 만들어진 왜곡된 남성 담론의 결과물이며, 나약하고 온화하며 눈물이 많은 여성 이미지 역시 가부장적 권력이 남자를 차출해서 써먹기 위해 만든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 입장에서 보면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적 권력이 남자를 차출해 갔을 때의 빈자리를 메워야 할 존재일 뿐이다.

    여성이 그릇된 고정관념적인 이미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면 남성 역시 왜곡된 남성성의 이미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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