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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발굴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 사진 찾아냈다

을사늑약 직전 옛 제용감 관아 4개월간 사용

  • 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 ihoh@yonsei.ac.kr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 사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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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수원농업칠십년’(21쪽)과 ‘수원농업팔십년’(18쪽)에는 “1899년에 세워진 商工學校는 지금의 명동 중국대사관 뒤에 있었고 1904년 농과의 증설로 출발한 農商工學校는 처음에 農科만이 勳洞 小屋을 교사로 사용하였다가 다시 합쳐서 壽松洞 濟用監(현 淑明女子中高等學校 構內)으로 옮겼다”고 나와 있다.

이 3개 학교의 교사(校史)를 보면 모두 자기 학교의 모태가 구한말의 농상공학교라는 점, 농상공학교가 옛 제용감 건물을 교사(校舍)로 썼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다만 첫 교사인 제용감이 있던 위치에 관해서는 ‘현 중동전기공업고등학교 구내’ ‘과거 숙명여자중학교가 있던 자리로 지금의 종로소방서 뒤편’ ‘현 숙명여자중고등학교 구내’ 등으로 엇갈린다. 그러나 여기서 제용감 자리로 언급된 곳이 그리 넓은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그 위치 추정에 있어 다소의 오차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듯하다.

이와 관련, 필자는 제용감의 위치에 관해 이를 좀더 정확히 추정해보려 옛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놓고 대조해본 결과 황성신문 세 번째 사옥인 제용감 건물이 있던 곳은 현재의 국세청 본청 자리로 추정된다.

3개 학교 校史에 남아 있는 사진

여기서 잠시 제용감 사진을 살펴보자. 이 사진이 언제 촬영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한적한 것으로 미뤄 농상공학교가 각기 분리되어 떠나고 난 1907년경이나 그 직후일 것으로 짐작된다. 농상공학교가 떠난 뒤 이 건물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언제 헐렸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관련기록을 찾지 못했다. 사진 왼쪽 뒤편에 보이는 건물은 한성사범학교 건물의 일부로 추정된다.



제용감 건물의 제일 왼쪽에는 지붕과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헛간 같은 것이 보인다. 그보다 조금 오른쪽에는 처마에서 아래로 햇빛을 가리기 위한 차양이 쳐져 있다. 그 오른쪽 툇돌 앞에 양복 입은 사람이 서 있는데 모자를 쓰고 코트를 걸친 듯하다. 제용감 건물 본채의 중간에는 넓은 대청이 있고 오른쪽엔 작은 창이 여럿 달린 큰방이 있는 것이 보인다. 큰방 앞 바깥으로 벽돌이나 돌로 쌓아 만든 듯한 아궁이가 보인다.

구한말 민족지 가운데 독립신문사는 그 사옥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사진이 확인된 바 있다. 대한매일신보도 창간 사옥과 두 번째 사옥의 사진이 최근 확인됐다. 그러나 구한말 4대 민족지 가운데 하나인 황성신문의 경우 신문을 발행하던 사옥 4개 중 현재까지 건물 사진이 확인된 것은 세 번째 사옥인 옛 제용감 관아의 건물이 처음이다.

‘서울육백년사’에 의하면 제용감은 “조선 초기에…제용고(濟用庫)로 설치했다가 후에 제용감(濟用監)으로 이름이 고쳐졌고 세조 7년(1461년)에 염색을 담당하던 관청인 도염서(都染署)를 병합시켰다.…이곳에서 관장하던 일은 진헌(進獻)되는 모시(苧), 마포(麻布), 피물(皮物), 인삼(人蔘) 등과 사여(賜與)되는 의복, 사라(紗羅), 능단(綾緞) 등과 포화(布貨), 채색(綵色), 입염(入染), 직조(織造) 등에 관한 것이었다. 고종 31년(1894년)에 폐지했다가 광무 8년(1904년)에 제용사(濟用司)로 고쳐서 선수(膳羞)와 특종 산물에 관한 일을 장악케 했다가 이듬해 3월에 이를 다시 폐지시키고 말았다.”(제1권, 333쪽).

‘서울육백년사’는 제용감이 있던 위치를 “中部 壽進坊(오늘날의 수송동 숙명여자중고등학교 북쪽)”이었다고 밝히고 있다(제1권, 333쪽).

제용감 관아 건물에는 1903년에 신설된 관리서가 들어서게 됐다. 관리서는 산림보호, 사찰, 유물, 유적 등을 관리하기 위해 궁내부 산하에 설치한 관아였으나 1년 만에 폐지되고 소관업무는 내부관방(內部官房)으로 이관됐다가 내부지방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제용감 터에 얽힌 이야기

옛 제용감 터는 원래 고려 말 이성계 역성혁명의 일등공신인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살던 집터의 일부였다. ‘서울육백년사’에 의하면 정도전의 집터는 매우 넓어, 남쪽으로는 현 종로구청에서부터 북쪽으로는 중학동, 동쪽으로는 현재의 연합뉴스 터 일부에까지 걸쳐 있었다고 한다.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으로 쓰인 제용감 터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 제용감 → 관리서 → 황성신문 → 농상공학교로 이어졌다. 그 뒤 어떻게 됐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를 아직 찾지 못해 확실히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변천과정을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즉 옛 제용감 관아 건물은 구한말에는 주요 민족지 황성신문의 세 번째 사옥이었고, 광복 후에는 우리의 주요 언론기관의 하나이던 합동통신이 1970년대 후반 현대식 빌딩을 신축해 언론활동을 펼친 자리였다는 것, 그리고 바로 옆 터는 1904년 7월 영국인 언론인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이 배일·구국(排日救國)의 기치를 내건 신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곳이다. 현재 우리나라 주요 통신사인 연합뉴스(연합통신의 후신)가 옛 대한매일신보 사옥 터의 일부를 포함한 대지 위에 사옥을 짓고 언론활동을 벌이고 있으니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연합뉴스 빌딩 터는 100년 전 대한매일신보 사옥 터와 일부가 겹쳐 있고, 길 건너 중학동에는 ‘한국일보’가 자리잡아 근 50년째 신문을 발행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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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환 전 연세대 교수·신문방송학 ihoh@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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