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호

대학교수 복귀한 서동만 전 국정원 기조실장

“고영구 원장 정실인사 문제삼다 ‘지휘체계 문란’으로 내몰렸다”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5-03-22 18: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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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수 복귀한 서동만 전 국정원 기조실장
    국가정보원 기획조정실장(차관급)에서 상지대로 돌아온 서동만(徐東晩·49) 교수가 일본 도쿄(東京)대 박사학위 논문을 손질해 1000쪽이 넘는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도서출판 선인)을 펴냈다. 서 교수는 8개월 동안 451개 각주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북한의 공식 문건과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을 벌였다. 논문 발표 이후 새로 발굴된 북한 자료도 추가했다. 학계에서는 1973년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출간한 스칼라피노 교수와 이정식 교수의 공저 ‘조선에서의 공산주의’ 이후 이 방면 최초의 ‘대저(大著)’라고 평가하고 있다.

    필자는 그가 ‘친북좌파’라는 공격을 받으며 국정원 기조실장에 취임했을 때 인터뷰를 시도한 적이 있다. 해명할 기회를 충분히 주겠다고 제의했는데도 “국정원 간부는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며 사절했다. 서 교수가 국정원을 나온 뒤 ‘신동아’ 기자가 원주의 상지대 연구실까지 찾아갔으나 차만 마시고 돌아왔다. 고영구 국정원장과 인사 갈등을 빚고 물러난 지 얼마 안 돼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박사학위 논문 보완해 저서 출간

    필자가 그의 책 출간 직후 인터뷰를 요청하자 타이밍이 좋았는지 선선히 응낙했다.

    “두꺼운 책이라 제작비가 많이 들었습니다. 대중성이 떨어지는 연구자용 책이라서 출판사가 손해를 볼까봐 걱정입니다. 인터뷰를 해서 책 홍보를 도와줘야죠.”



    그는 2주 전 서울 개포동으로 이사했다. 인하대 사학과 교수였던 부인 강옥초씨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등학생 딸을 돌보기가 어렵게 되자 누나 집 길 건너에 월세 아파트를 얻었다.

    이사를 했는데도 부인의 책장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다. 서 교수가 인터뷰 사진을 찍는 동안 불행한 일을 겪은 데 대해 위로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사랑하는 아내 고 강옥초의 희생과 헌신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저자가 유학생활 동안, 그리고 이후에 겪었던 어려움을 아내는 삶의 반려로서 모두 받아주며 묵묵히 감내해냈다.…(중략)…그는 누구보다도 모범적이고 성실한 아내, 엄마이자 연구자, 교육자였다. 하지만 얼마 전 그는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무치는 회한과 그리움을 가눌 길이 없다. 이 책을 고인의 영전에 바치며 삼가 명복을 빌고자 한다.’(책 서문)

    서 교수는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위를 감추지 않고 자세히 들려줬다.

    “그 사람이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사실을 제게 숨겼어요. 병은 나눠야 고칠 수 있는데…. 처제에게만 말했더군요. 가족에게 개별적으로 유서를 남겨놓았죠. 나중에 보니 우울증에 관한 책을 구해 읽고 자살 관련 대목에 밑줄을 쳐놓았더라고요.”

    우울증은 자살한 영화배우 이은주가 앓았던 바로 그 병이다. ‘마음의 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뇌의 신경전달물질 불균형으로 생긴다고 한다.

    -책 서문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일부 보완했다는 표현이 있던데, 주로 어떤 부분을 손질했습니까.

    “논문 쓸 때 아직 발굴 안 된 자료들이 있었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정로(正路)’입니다. 1945년 10월13일 결성된 조선공산당 북부조선 분국에서 발행한 기관지가 ‘정로’입니다. 북조선노동당의 전신이죠. 북한연구자들 사이에서 맴돌던 몇 가지 수수께끼가 ‘정로’의 발굴로 풀린 거죠. 1990년대 말 모스크바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현수씨가 찾아냈어요. 전씨는 지금 경북대 사학과 교수로 봉직하고 있죠.

    1946년 8월 창립된 북조선노동당의 기관지가 ‘노동신문’입니다. 지금도 발행되고 있죠. 멸실됐던 초기의 ‘노동신문’도 옌볜과 베이징에서 발굴됐습니다. 전현수 교수, 충북대 김성보 교수, 조선대 기광서 교수 같은 분들이 모스크바에서 유학하면서 소련군 정보보고서를 정리하고 발굴했습니다. 중국 쪽에서도 6·25전쟁과 관련한 자료들이 공개됐죠. 이렇게 새롭게 발굴된 자료를 바탕으로 보완했습니다. 논문의 기본틀, 주제, 취지는 원 논문 그대로입니다.”

    ‘친북좌파’와 ‘DJ식 햇볕론자’

    -일본 유학을 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아버지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께서 식민지 시대에 히토쓰바시(一橋)대에 유학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 미국 유학을 가니까 남들 안 가는 일본 유학을 하고 싶었던 거죠. 일본에 친척도 있었고요. 서울대 대학원에 합격했더라면 유학 안 가고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을지도 모르죠.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복학해 무사히 졸업했어요. 그런데 대학원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외부의 지시가 있었죠. ‘빵잡이(교도소 다녀온 학생)’들은 다 떨어뜨리라는. 학교로서는 불가항력이었어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도 ‘빵잡이’라서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지 못하고 연세대 대학원으로 갔죠.

    유학을 가려고 했지만 여권이 안 나왔어요.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근무하던 1986년에 규제가 풀렸죠. 전두환 정부가 유학 문호를 대폭 열 때입니다. 그때 유학을 떠났습니다.”

    -논문에서, 국제전적 성격이 강했으니까 ‘The Korean War’의 번역인 ‘한국전쟁’ 대신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겠다고 밝혔더군요. 소련과 중국에서 새롭게 발굴된 문서에 따르더라도 6·25전쟁은 남침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까지도 일부 주사파 운동권에 북침설이 퍼져 있었지만요. 북침설의 원류는 어디입니까.

    “북침은 기본적으로 북측의 공식 입장이죠. 냉전시대에 중국,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이 그 입장을 취했죠. 다만 서방에서도 북침설을 취하는 견해가 나오기 시작했죠. 이른바 수정주의 학파죠.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학설을 일부에선 북침설이라고 보았는데, 엄밀하게 검토하면 북침설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남북 사이에 전개돼온 국지전(局地戰)의 충돌 끝에 능력 있는 북쪽이 밀고 내려온 걸로 보는 거죠. 소련과 중국의 자료가 나오면서 북침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없어진 거나 다름없어요. 그런데도 북측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북침이죠.”

    2003년 4월22일 국회 정보위 인사청문회에서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서동만 증인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면 친북좌파임을 알 수 있다”고 발언했다. 또 홍 의원은 “서동만 증인은 친북좌파다. 개혁세력으로 포장된 친북좌파들이 국정원을 점령하면 가는 방향이 자명하다”고 공격했다.

    -홍 의원이 과연 일본어로 된 방대한 논문을 읽었을까요. 홍 의원이 일본어를 할 줄 압니까.

    “홍 의원뿐만 아니라 다른 의원 중에도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몇 있어요. 실제 직접 읽고 한 얘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 무렵 ‘중앙일보’ 권영빈 편집인이 서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과 각종 기고문, 발언록을 읽어보고 서동만은 친북좌파가 아니라는 칼럼을 썼다. ‘북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인도적 지원과 경제 지원을 해야 한다는 DJ(김대중 전 대통령)식 햇볕론자다. 한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을 근거 없이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그 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풍토가 문제다.’

    “저도 그 칼럼을 읽고 깜짝 놀랐어요. 제 이름까지 박은 칼럼이 나오니까 고맙기도 하고…. 나중에 만나봤더니 제 논문을 상당 부분 읽었더군요.”

    아무튼 서 교수의 책을 통독하고 나면 그를 친북좌파라고 지목한 발언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북한 연구,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한나라당 이윤성 의원은 ‘일본에서 증인의 석·박사 학위 논문 지도교수인 와다 하루키 교수가 친북 성향인 걸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던데요. 와다 교수는 친북좌파 성향의 학자가 맞습니까.

    “친북이라는 용어 자체를 쓰는 게 맞지 않습니다. 와다 교수는 한반도를 사랑하는 분이죠. 물론 일본인의 입장에서 사랑하는 겁니다. 그분이 사랑하는 한반도에는 한반도의 북쪽, 즉 북조선도 포함됩니다. 그분은 소련 사회주의 연구의 대가죠. 사회주의체제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죠. 소련 시절에도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고 개혁파들과 교류했어요. 한때는 소련에도 못 갔던 분이에요.

    와다 교수는 소련 점령시 북조선 정책과 김일성의 만주 항일투쟁에 관한 연구를 했죠.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연구했습니다. 김일성의 만주 항일투쟁에 관한 논문이 발표됐을 때 조총련이 발칵 뒤집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북측의 공식적 입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했으니까요.

    다만 와다 교수는 일본과 북조선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실천적으로 노력한 분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 내 수구세력으로부터 견제받는 입장에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책 서문에 ‘2003년 5월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임명되는 과정에서 수구 언론 및 정치인들로부터 ‘친북좌파’로 매도당했다’고 썼더군요. 언론의 ‘중계방송’ 보도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인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색깔 덧씌우기였죠. 그렇게 사람을 단죄하고 매장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더구나 언론은 사회적 책임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화가 났죠.

    북조선 연구자들은 항상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요. 지금도 남북 대치 상황이 완전히 해소된 게 아니잖아요. 다만 정치공세와 언론보도에 항의하거나 문제삼을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한신대 윤평중 교수는 한 칼럼에서 친북좌파의 사회적 함의를 이렇게 풀었다.

    ‘분단체제 아래서 누가 친북적이라고 불린다면, 그것은 곧 ‘빨갱이’와 동의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름 자체가 척결의 대상이었고 사회적 죽음에의 초대장이었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 탄력적 입장을 편다는 이유로 능력 있는 한 북한 전문가를 ‘친북인사’라고 부르는 것은 명백한 ‘인격살인’이며 냉전 색깔 공세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냉전 상황에서는 그런 공격이 상당한 효과를 냈죠. 이제 한국사회가 일련의 정치과정을 거치면서 사실 그런 공격을 하거나 레테르를 덧붙이더라도 효과가 나지 않아요. 약발이 떨어졌죠.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해진 겁니다.

    북한을 대하는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상식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사실과 다른 내용을 함부로 보도해도 된다고 하는 모럴 헤저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국회 정보위에서도 그런 일이 있어요. 직접 가서 확인해볼 수 없으니 북한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농담도 있습니다. 큰소리치면 입증할 수도 없지만 반증하기도 어려운 거죠. 철저히 확인하고 난 뒤 발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수 복귀한 서동만 전 국정원 기조실장

    인터뷰중인 서동만 교수(왼쪽).

    -철저히 확인하지 못하는 데는 북한 쪽 책임이 크지요. 너무 폐쇄적이어서 확인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남쪽에만 책임을 물을 수 없죠. 그러나 북측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그럴 수 있다고 하면 똑같아지는 것 아닙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앞서는 남쪽이 먼저 양식에 입각한 기준을 세워 나가야죠.”

    “명백한 정실인사”

    서동만 교수는 2003년 5월부터 2004년 2월까지 10개월 동안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재직했다. 국정원에 들어갈 때의 요란한 논란에 비해서는 너무 단명으로 끝났다.

    “들어가 보니까 국정원 개혁은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상당 부분 진전돼 있더군요. 다만 인사 면에서 지역편중 문제가 있었습니다. 심각했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정원 주류가 바뀌었어요. 정권안보 차원에서 생각하다 보니까 그랬겠죠.

    김대중 전 대통령 스스로 심각한 피해자가 아닙니까. 국정원은 가해자적 역할을 했던 기관이죠. 김 전 대통령 집권 후 국정원 내부에서 상당한 진통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인적 청산이 이뤄졌던 거죠. 김대중 정부 후기에는 지역편중 인사가 심각했어요.

    국정원이 직접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면은 줄어들었죠. 그렇지만 오해할 만한 소지는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들어가 조직과 업무 면에서 그런 부분을 축소했습니다.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본연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기구를 재편했습니다. 일단 큰 틀은 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정착시키다 중간에 그만두었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고영구 국정원장과 어떤 인사 갈등이 있었었나요.

    “부서장 인사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사위원회에서 제가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그게 수용되지 않았고, 거꾸로 문제제기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고 원장이 문제를 삼았죠. 그래서 그만두게 된 겁니다.

    이 얘기를 하는 게 좋을지는 잘 판단이 안 서는군요. 실무자 입장에서는 원만한 인사를 하기 위해 일정한 정도의 인사 폭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능하면 빨리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려고 했죠. 그것을 둘러싸고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합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인사상 견해 차이가 있을 때는 어디까지나 국정원장의 생각이 반영돼야 하지 않을까요. 청와대도 그런 쪽을 지지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되겠네요.

    “일단은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다만 인사위원회는 다 만들어놓은 것을 추인하는 것이 아니고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기조실장으로서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입장이죠. 거기에 대해 국정원의 입장이 이미 결정된 건데….”

    -항명이라고 본 건가요.

    “그렇죠. 그거는 이미 결정돼 있는 건데 재론하는 것은 지휘체계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식이었죠.”

    서 교수는 이 대목에서 고 원장과의 인사 갈등에 관한 부분에 한해 원고를 사전에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고영구 원장이 현재 재임중이니까요. 그렇지 않다면야 지나간 일로 얘기할 수도 있겠지요.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립니다.”

    서 교수는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중 교내에서 긴급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유인물을 뿌리다 붙잡혀 구속됐다. 영등포지원 1심에서 징역 7년 구형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때 재판장이 바로 고영구 당시 부장판사다. 기묘한 인연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인근 막회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일 때 고 원장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또 끄집어냈다.

    -긴급조치 위반 사건 재판장을 기억하고 있었습니까.

    “국정원장 인사청문회 준비를 하면서 가물가물했지만 재판장이 ‘고 아무개’ 판사였던 것 같은 기억이 나 혹시 하는 생각에 보좌진을 시켜 판결문을 떼어오게 했죠. 고영구 부장판사가 재판장이었던 게 확실하더군요. 청문회에서 문제 될 것에 대비해 고 원장에게도 미리 보고했습니다.”

    술잔이 몇 차례 오간 뒤 “열 달도 안 돼 원장과 싸우고 물러나 ‘트러블 메이커’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으니 상세하게 해명하는 편이 미래를 위해 낫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그는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명백한 정실인사였어요. 원장 혼자 인사를 하지 않고 인사위원회를 거치는 것은 바로 그런 인사를 막기 위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인사위원회에서 이의를 제기하자 고 원장은 지휘체계 문란으로 받아들였죠. 고 원장이 ‘당신이 그만두든지, 내가 그만두든지 하자’고 강경하게 나왔습니다. (권력관계의) 힘의 측면에서 보면 제가 우위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었죠. 그러니까 제 스스로 물러난 거죠.”

    대학교수 복귀한 서동만 전 국정원 기조실장

    서동만 교수는 고영구 국정원장과의 인사 갈등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내막을 털어놨다.

    인터뷰를 마치고 저녁식사 자리로 옮길 때 인근에 사는 서울산업대 윤홍근 교수를 불러냈다. 윤 교수는 서 교수의 서울대 정치학과 1년 후배다. 재수하는 바람에 1년 후배가 됐는데도 그는 서 교수에게 깍듯이 선배 대접을 했다. 윤 교수는 나중에 이런 코멘트를 곁들였다.

    “서 교수는 순수한 사람이야. 순수하기 때문에 대학 때부터 옥고를 치르며 치열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지. 국정원장이 부서장 인사에서 한 명 봐줄 수도 있다고 넘겨버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그러나 순수하기 때문에 지적했겠지. 순수가 원칙이고 관행이 돼야 하는데, 오히려 문제가 된 거야.”

    서동만 피고인이 긴급조치 9호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1970년대 후반엔 시국사건에서 ‘반타작 재판’의 관행이 있었다. 사실상 형량을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협의해 결정했다. 검찰 구형량에서 1개월도 깎아주지 않는 판결에 대해 ‘정찰제 판결’이란 비난이 나오자 구형량의 절반을 디스카운트해 사법부가 독립된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 ‘반타작 재판’이다.

    ‘반타작 룰’에 따르면 징역 7년을 구형받은 서 피고인은 징역 3년 혹은 3년6월을 받았어야 한다. 그러나 징역 2년을 선고했으니 1년 가량 더 깎아준 셈이다.

    -고영구 부장판사가 그 시대 분위기에선 꽤 노력한 것 아닙니까.

    “그렇죠. 신경을 써준 겁니다.”

    아버지 로비로 형량 가벼워져

    -유신반대 데모 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내린 재판장과 피고인으로 만난 인연 때문에 고 원장이 불편해하지는 않았나요.

    “아니오, 그런 건 없었습니다. 출발은 좋았던 거죠. 고 원장이 저보고 그만두라고 했을 때도 그때의 인간적 인연을 생각해 받아들였습니다. 어쨌든 제가 신세를 졌으니까요. 거기서 제가 떠들면 얼마나 추해집니까. 과거의 아름다운 인연을 간직하기 위해서도 사표 안 내고 버틸 생각은 없었어요.”

    엄혹한 시절 이례적으로 관대한 판결이 나온 데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한 가지 가능성은 민주화를 요구한 젊은 학생을 될 수 있으면 봐주려고 판사가 고민하고 노력한 경우다. 또 다른 가능성은 가족의 로비가 힘을 발휘한 경우다. 자녀가 데모를 하다 감옥에 가면 여유 있는 부모들은 실력 있는 변호사를 붙이고 유력자에게 선을 대보려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이 세상 부모의 마음은 똑같다. 유신과 5공 치하에서 이례적으로 관용적인 처벌을 받은 학생들의 경우 두 번째 가능성이 더 많았다.

    술자리에서 “서 교수가 가벼운 형량을 받은 건 가족의 노력과 판사의 노력 중 어느 쪽에 해당하냐”고 물었다. 서 교수는 뜸을 들였다가 짧게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어떤 유력자한테 부탁하셨죠.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필자가 “선연(善緣)이라는 말은 청문회용으로 만들어둔 답변이고, 실제로는 악연(惡緣)이었다고 할 수 있군요” 하고 말하자 서 교수는 “이렇게 그만둔 걸로 따지면 글쎄요? 어떻게 봐야 할지…” 하고 답했다.

    -고 원장과 일생 두 번에 걸친 악연이라고 봐야겠군요.

    “그런데 인생이라는 게 이걸로 끝나는 건 아니니까. 그만둘 때야 저도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잊어버렸어요.”

    긴급조치 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내린 재판장과 해당 피고인을 국정원장과 기조실장으로 함께 일하게 한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인사였다고 할 수 있다. 서 교수가 고 원장에 대해 말할 때 매우 절제된 표현을 쓰기는 했으나 감정은 편치 않은 것 같았다. “제가 국정원을 나온 뒤에 고 원장을 모시는 분들이 둘이서 만날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죠. 제가 응하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술자리에서 “고 원장 관련 부분 원고를 사전에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필자의 양식과 판단에 맡겨두는 것이 서 교수에게 편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해 동의를 받아냈다.

    -국정원에서 불법도청을 하거나 정치에 개입하는 행위는 완전히 사라진 겁니까.

    “국내 정치 부문은 대폭 축소했습니다. 최소한의 정보보고는 하게 돼 있죠. 과거에는 이 일을 하는 대규모 조직이 있었죠. 정치와 경제 부문을 분리했죠. 대통령께서 정치 부문을 이용 안 합니다. 몇 차례 공언하지 않았습니까. 사실입니다. 정권안보적인 기능은 거의 유명무실해진 거죠.”

    -국정원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이 김형욱 살해, 김대중 납치 등 7건입니다. 정보기관을 샅샅이 까발리는 것이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반론도 있어요.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정보공개법 적용을 받지 않습니까. 우리는 국정원 자료를 예외로 했어요. 국정원 자료도 정부의 다른 문서와 마찬가지로 공개할 수 있는 규정이 먼저 만들어져야 할 거예요.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국가안보에 위해가 안 되는 정도에서 공개되지 않겠습니까. 다만 내부 문서를 다시 평가하는 제도적 인프라는 구축돼야 합니다. 그러나 문서를 공개하다 보면 책임의 연속성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지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정보공개를 하면 안 된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요. 과거사를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김대중 정부 출범 때 피해자가 집권하니까 가해자인 국정원에서 대대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문서를 소각했다는 설이 있었죠.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직원들의 입장에서 과거사 규명과 관련해 찬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론조사를 해본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과거사 규명을 지지하는 직원들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되는 사건의 직접적인 지휘선상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퇴직했어요. 남아 있다 하더라도 말단 직원들이죠.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직원들의 심적 고통이 커요. 특히 자식들과의 관계에서…. 예컨대 그런 영화가 몇 편 있지 않습니까. ‘실미도’ ‘효자동 이발사’ ‘하류인생’ 등에서 정보부가 가해자로 나옵니다. 직원들이 자녀들과 같이 그런 영화를 보러 갔다가 낯뜨거워 혼났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국정원 사람들은 직무의 특성 때문에 어디 가서 얘기도 못하지요. 평생 숨기고 살아야 하는 직업이죠. 자기가 공을 세워도 대놓고 잘했다고 내세울 수도 없어요. 명예와 업무상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외부에서 어떻게 보느냐와 별개예요. 자기가 속한 기관의 이미지라든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평가받느냐에 대해 민감합니다. 그래서 과거사 청산이 대다수 직원한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갔다. 서 교수는 저서에서 김일성이 박헌영을 숙청한 이유를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리승엽 등 남로파가 장악하고 있는 당 연락부는 소속기구를 확장하고 금강정치학원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남조선 출신자를 모아 군사훈련을 확대하였다. 그들은 애향심과 박헌영에 대한 충성으로 굳게 단결하고, 더욱이 독자의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에게는 우려할 만한 존재였다.’

    6·25전쟁이 끝나고 남쪽에 잔류해 생존한 남로당원들은 상당수에 달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수한 사람들을 사면해줬기 때문이다. 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얼마 안 되는 1956년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진보당 조봉암씨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항해 유효투표의 30%에 해당하는 216만표를 얻었다. 자유당 정권은 조봉암씨에게 남로당 계열의 표가 쏠렸을 것으로 판단했고 결국 조씨는 이로 인해 ‘사법살인’으로 내몰렸다.

    김형욱 회고록에 흥미로운 분석이 나온다.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의 여순반란 사건 관여와 남로당 가입 전력을 폭로하자 조봉암씨의 득표율이 높았던 지역에서 박 후보의 지지도가 깜짝 놀랄 만큼 상승했다는 것이다. 물론 중앙정보부의 이 분석은 극비에 부쳐졌다.(김형욱 회고록 2권 69쪽)

    정권안보적 기능은 유명무실

    -남로당원들은 조국의 독립과 사회주의 운동에 평생을 바친 박헌영에 대해 존경심을 품고 있었죠. 그런데 박헌영이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미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자 남쪽의 남로당 생존파 대다수가 김일성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는 증언을 들은 적이 있어요.

    “조선공산주의 역사에 있었던 비극이죠. 냉전이 격화되고 1947∼48년 동유럽이 강제적으로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스탈린이 대대적인 숙청을 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선 그렇지 않았어요. 동구권에서 소련의 냉전 바람이 몰아치던 1947년 말, 48년 초 북한에서도 일부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던 연안계들이 좌천되었지만 그것에 그쳤죠.

    박헌영 숙청은 남북 양쪽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쟁 이후 최대의 정변이었습니다. 북한 안에서도 엄청난 정치적 파급효과가 있었습니다. 물론 남쪽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죠. 무엇보다 남북을 연계하는 중심적인 세력이었던 남로당계가 숙청됨으로써 사실상 남북간의 정치적 연계가 단절됐습니다.

    동서독 관계에서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중요한 인물이 있어요. 헤르베르트 베너라는 사람입니다. 베너는 사민당의 원내총무였어요. 서독의 동방정책은 김대중의 햇볕정책보다도 훨씬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습니다. 기민당의 반대가 보통이 아니었어요. 서독은 냉전의 한복판에서 동방정책을 편 것이기에 훨씬 더 시끄러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브란트는 반(反)나치 투쟁을 할 때 독일 공산당 소속이었죠. 베너도 마찬가지예요. 독일 공산당의 청년 활동가였습니다. 동독의 율브리트나 호네커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브란트나 베너는 공산당에서 사회민주당으로 전향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거죠. 이 사람들이 동서독의 가교 역할을 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25전쟁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겪으면서 남북을 연결할 수 있는 세력이 남북 양측에서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대학교수 복귀한 서동만 전 국정원 기조실장

    서동만 교수는 현재 상지대 교양학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서 교수는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스님으로부터 받은 ‘이정 박헌영 일대기’를 필자에게 선물로 주었다. 죽은 아내가 받은 책이 한 권 더 있다고 했다.

    “원경 스님이 낸 박헌영 전집에 대해 북쪽에서 엄청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미제 스파이’로 규정해 처형한 사람의 전집이니 달가울 리 없지요. 간행위원이 수백명인데 저도 포함돼 있습니다. 간행위원들 중에 북한과 학술교류를 하는 분들이 곤란한 경우를 겪었다고 합니다. 조선노동당의 역사적 기원이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니까요.

    조선노동당 역사에서 남로당은 없어진 겁니다. 완전한 소멸이에요. 1949년 북조선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이 합쳐져서 조선노동당이 됐잖아요. 그런데 한 쪽의 우두머리가 미제 스파이가 됐습니다. 1956년에 열린 3차대회에서 남로당을 없애버린 거예요. 박헌영의 처리 문제가 조선노동당의 역사적 기원이나 정통성과 직결되니까 역사를 다 바꿔버린 겁니다. 그 정도로 박헌영 사건의 파장이 컸던 거죠.”

    -원경 스님이 집념을 갖고 아버지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모았다죠.

    “1956년까지의 당 내부 결정집을 발굴했어요. 그분이 하신 거예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당 결정집이 미군 노획 문서에 몇 권 들어가 있죠. 1950~56년 결정집 발굴은 그분이 하신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했다고 얘기 안 하니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죠.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남북관계, DJ 정부 때보다 더 악화

    -언론에서 서 교수를 ‘햇볕정책의 숭배론자’라고 쓰던데요.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법을 받아들여 남북정상회담 비자금 수사를 한 것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습니다. 남북관계 발전에 결코 도움이 안 되는 수사였다는 것인데요. 학자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엇갈린 평가가 있을 수 있다고 봐요. 우선 남북관계에는 직접적인 악영향이 있었죠. 여러 가지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사실 남북관계가 완전히 투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남북 경협은 국제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큽니다. 개성공단의 경우 외자유치를 할 수 있죠. 이런 측면에서 국제적 차원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거버넌스(Governance)를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동서독 관계를 두고 보자면 서독이 동독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드러내놓고 한 게 아닙니다. 사실 서독 국민 모르게 한 것이 많습니다. 일종의 지혜라고 볼 수 있죠. 그렇다고 해서 서독 정부가 탈법적으로, 해서는 안 될 걸 하지는 않았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며칠 전 이례적으로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더군요. 언론사 세무조사의 악연이 있으니까 이목을 끈 기사였죠. 그 인터뷰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이 있으면 방북해서 핵문제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운명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어요.

    “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역할을 살려나가는 것이 일단은 참여정부의 햇볕정책 측면에서 상당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김 전 대통령에 대한 북측의 평가를 고려하면 상당한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노벨평화상이 한반도 평화라는 측면에서 상징하는 바도 큽니다.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렇지요. 다만 핵문제가 너무 악화돼 안타까운 면이 있어요. 이렇게 악화되기 전에 가서 일정한 역할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는 얘기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이라도 남북관계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참여정부에서 김대중 정부 때보다 남북관계가 나빠졌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어요. 참여정부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이런 얘기 너무 함부로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객관적 현실이 그렇다고 봅니다.”

    -유신 치하에서 감옥살이를 했으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박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 어떻게 평가합니까.

    “학생 때 정치현실이 너무 답답했어요. 그때는 굉장히 미웠죠. 지금은 그래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거리가 확보됐다고 생각합니다. 경제발전의 공은 인정해야죠. 통치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선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개발’이 꼭 ‘독재’와 같이 가야 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어요. 경제성장이라는 상당히 중요한 성과를 거뒀지만 정치적 부작용을 극복하느라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일방적으로 박정희 찬미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 전 대통령의 여러 측면을 균형적으로 평가해야 할 시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광주의 비극이나 전두환 정권의 탄생도 유신체제에서 배태된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올바른 지적입니다. 3김 시대의 부작용도 결국 박정희 시대의 연장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아마 학생운동 출신이 가장 많을 거예요. 4·19세대, 6·3세대, 3선개헌세대, 긴조(긴급조치)세대…. 이게 정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바람직하지 않죠. 그 자체도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경제발전은 이뤘지만 정치에는 전면적인 부작용을 안겨줘 여전히 우리의 극복 대상입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지역주의가 본격화한 때가 박정희 시대입니다. 그것이 최악의 결과로 이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박 전 대통령의 신세도 지고 있는 거지만 여전히 극복해야 될 과제도 많아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한 강연에서 ‘미국의 네오콘은 한반도 갈등상황이 오래 갈수록 미국의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더군요. 남북관계가 호전될 때마다 핵문제를 들고 나온다는 거지요. 그리고 기관마다 핵물질의 양에 대한 분석이 다르고…(‘신동아’ 3월호 106쪽 참조).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북한의 책임이 크죠. 그런데 역시 힘을 가진 건 미국,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미국이라는 생각입니다. 미국이 풀 의지만 있으면 풀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네오콘의 부정적 측면은 저도 상당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한반도의 평화와 관련해 중요한 전기가 이뤄진 건 전부 공화당 정부 때예요. 아이젠하워 공화당 정부가 6·25전쟁을 휴전시키고 뒤처리를 하죠. 닉슨 공화당 정부 때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옵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1989년에 한반도의 핵무기를 다 철수시키지 않았습니까. 시대적인 변화를 만드는 데 공화당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동맹파-자주파 논쟁은 색깔론

    서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이 경선을 준비하던 2000년경부터 외교안보 분야 자문을 했다. 윤영관(전 외교통상부 장관), 서주석(국가안전보장회의 전략기획실장), 이종석(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씨와 한팀이었다.

    -넷 중에서도 가장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하더군요.

    “자문과정에서 사립대학에 있던 제가 가장 자유로운 입장이었죠. 이종석 박사는 세종연구소, 서주석 박사는 국방연구원에 있어 내놓고 자문할 수 없었죠. 윤영관 교수도 서울대 소속이어서 표면에 나서기가 곤란했죠. 노 후보 쪽 인재풀이 상대 진영에 비해 현저히 부족했습니다. DJ정부 햇볕정책이 상당히 진전됐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학자군이 소수죠. 더구나 당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리라곤 누구도 생각지 않았을 때니까요.”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3년 가량 남았는데 다시 일할 기회가 있으리라 봅니까.

    “그 부분은 제가 뭐라고 말할 수 없지요. 인사권자의 의견이 중요하니까요. 언론 인터뷰에서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선거과정에서 정책 자문을 했고 중요한 직책을 맡은 경험도 있기 때문에 참여정부의 전체적 책임은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위직에 있다가 갑자기 그만두게 되면 임명권자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생긴다지요.

    “모양 좋게 그만둔 건 아니죠. 저라고 복잡한 심정이 없었겠어요. 그런데 그걸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요.”

    -윤영관 장관 시절에 정부의 외교안보 그룹에 ‘동맹파’와 ‘자주파’가 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청와대나 정치권에서 숭미(崇美)주의자들이 외교라인에 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고요. 동맹파와 자주파의 갈등이 심각했습니까.

    “동맹파니 자주파니 하고 명칭을 붙여버리면 색깔론 비슷하게 말이 스스로 걸어가는 경향을 갖게 된다고 봐요. 자주파 동맹파로 나눌 정도는 아니었어요. 전반적으로 정책결정 과정에서 경향성이 존재한 건 사실이죠. 기본적으로 자주파가 한미동맹의 틀을 부정하는 건 아니거든요. 한미동맹을 좀더 대등한 방향, 이른바 수평적 방향으로 가게 하자는 쪽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거죠. 그것과 달리 미국을 존중하는 방향도 있을 수 있는 거고…. 특히 정부 부처의 특정 부서에서는 미국의 기존 입장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고 봐요. 부처간 갈등이나 조직간 정책적 갈등은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러나 윤 장관이 해임된 사건의 발단은 부처의 통솔에 관한 것이었죠.”

    ‘내재적 접근법’은 방법론 논쟁일 뿐

    -보수 쪽에서는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이종석 박사의 저서가 제 책보다 먼저 나왔죠. 박사논문이 조선노동당 연구죠. 명백히 북조선을 비판적으로 연구한 논문입니다. 덧씌우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언론에서 내재적 접근론자는 ‘친북’, 외재적 접근론자는 ‘반북’으로 분류했어요. 그래서 이종석 박사가 ‘비판적 내재적’ 접근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슬픈 일이죠. 왜냐하면 어떤 대상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건 연구자의 당연한 시각입니다. 그런데도 비판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서 범주화하는 거죠. 그 정도로 북한 연구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책 서문에 “북한의 공식 문건은 개찬(改竄)으로 점철돼 있지만 북조선 현실의 ‘내재적 논리’를 추적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자료”라고 썼더군요. 송두율 교수가 말하는 ‘내재적 접근법’과는 어떻게 다른 건가요.

    “내재적 접근은 본래 E. H. 카가 소련 연구에서 처음 사용한 방법입니다. 소련 사회의 논리에 따라서 소련을 들여다보는 거죠.”

    ‘역사란 무엇인가’로 알려진 카는 소비에트 러시아사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4부작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는 그의 대표작이자 불후의 명저로 꼽힌다.

    “아주 기념비적인 저작입니다. 북한의 문헌은 자료의 성격이나 양적 규모로 봤을 때 소련과 비교가 안 됩니다.

    송두율 교수는 정작 북한 연구를 직접 하지 않았어요. ‘소련과 중국’이라는 저서에 북한과의 비교가 나오지만 본격적인 북한 연구를 한 게 아녜요. 자신이 주장했던 내재적 접근 방법을 가지고 북한 연구에 적용해 구체적인 연구 성과를 내놓은 건 아닙니다. 방법론 논쟁만으로 끝난 것입니다.

    저는 북한 연구에서 기본적으로 내재적 접근을 취해야 한다고 보고 있어요. 자료의 한계가 있지만 그것은 극복해나가야 할 문제이지 내재적 접근이 안 된다는 얘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꼭 공식 자료만 봐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공식 자료를 안 보면 안 된다는 얘기죠. 외부 자료를 보거나 외부의 증언을 토대로 한다고 해서 그게 꼭 외재적 접근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도 책 서두에 E. H. 카를 거론했어요. 제도의 형성과정을 추적해 정치 경제 사회 분야별로 기본적 틀을 구성한 것은 E. H. 카에게서 취한 부분이 많습니다.”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이 국회에서 송두율 교수 초청의 배후세력이 바로 이종석 차장과 서동만 실장이라고 지목했죠.

    “송두율 교수는 1998년 베이징에서 남북 학술회담 할 때 한 번 뵌 적밖에 없어요. 여러 분들하고 같이 술 한잔 마셨죠. 그분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 국내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저를 잘 안다고 한 모양이에요. 한국 상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면 그런 얘기 안 했어야죠. 구체적으로 잘 아는 관계도 아니었는데…. 그 바람에 친하다는 얘기가 확 퍼져나간 거죠.

    한국에 살러 들어온 사람이니까 큰 틀에서 포용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해외에서 고독하게 생활한 분이죠. 품어야 할 대상이지 단죄의 대상이라고 보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분이 자기 행적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렇습니다. 처음에 한꺼번에 딱 털고 들어왔으면 큰 문제가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분이 솔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죠.

    또 한국 사정에 너무 어두웠습니다. 국내에서 노동당 입당이나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것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인지를 잘 몰랐던 거죠. 남한 사회에 대한 현실 인식이 부족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서동만은 유신 말기의 어둠이 짙었던 1978년 5월8일 어버이날에 유신반대 데모를 벌여 구속됐다. 김철수, 부윤경과 함께 주동한 시위에는 줄잡아 1500여명이 참가했고 경찰기동대가 폭력 진압할 때까지 1시간 동안 이어졌다. 일부 학생은 봉천동과 신림동으로 나누어 진출해 ‘유신 철폐하라’ ‘독재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벌였다.

    서동만의 지도교수였던 김학준은 서동만이 형사들에게 붙잡혀가는 것을 보고 정치학과 동기생인 김장권에게 “동만이 집에 가서 책을 치우라”고 시켰다. 당시에는 구속학생의 방을 압수수색해 금서(禁書)가 나오면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로 추가 기소했기 때문이다.

    “저도 시위 전날 위험한 책을 미리 치워놓았죠. 그런데 제가 붙잡혀가고 장권이가 와서 보스턴백으로 한 가방 또 가져갔다더군요. 긴급조치 시대에는 그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죠. 장권이는 저와 일본 유학 때도 만나 우정을 나눴어요.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있다 2003년 겨울에 암으로 죽었어요. 아까운 인재죠.”

    민청련 조직에 중심적 역할

    서 교수의 아버지 문수씨는 코오롱그룹 계열사 사장을 지내다 아들이 긴급조치로 구속되는 바람에 해직을 당해 서울 무교동 코오롱빌딩 지하에서 일식집을 경영했다. 회사에서 위로조로 가게 자리 를 내준 것이었다.

    서문수씨는 자유당 간판으로 경북 경산에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다. 이기붕씨가 집권 자유당 2인자로 ‘서대문 경무대’ 소리를 들으며 한창 위세를 떨칠 때 이씨의 비서를 지냈다. 4·19가 나면서 이씨 일가는 멸족(滅族)이 됐다.

    “어머니는 그걸 보고 어릴 때부터 절대 정치하지 말라고 훈계하셨죠. 귀가 따갑게 듣고 자랐어요. 아버지 입장에서도 기가 막히죠. 4·19 학생 데모 때문에 몰락했는데 아들놈이 데모를 해서 사장 자리에서 잘리게 됐으니까요.

    저는 자주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세미나를 했어요. 그러다 아버지한테 걸리면 일장 설교를 듣곤 했죠. 아버지는 전형적인 TK여서 말할 수 없이 보수적이셨어요. 아버지와 영 안 맞는 게 있었어요.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뒤 집에만 계실 때 많이 약해지셨죠. 제가 쓴 박사논문을 다 읽으셨어요. 할 일도 없으시니까. 아들이 도쿄대에서 박사학위 받은 걸 무척 흡족해하셨어요.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했다가 학업도 못 마치고 학병으로 끌려가 도중에 하차하셨거든요.”

    서 교수의 모친은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다니던 숙명여중 국어교사였다. 1980년대 초에 서 교수는 강 변호사의 전 남편 김태경씨와 친하게 지내며 번역 일을 했다.

    “김태경씨가 강 변호사와 연애할 때 함께 자주 만났지요. 한가족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강 변호사는 어머니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있어 저희 집에 자주 놀러왔죠.”

    서 교수는 김근태가 의장으로 있던 민청련에서 장영달, 이해찬과 함께 일했다. 민청련이 조직될 때 75학번 긴급조치 9호 복역자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민주화의 길’이라는 기관지를 편집했다. 직장에 다니느라 언더(지하)에서 역할을 했으며, 드러내놓고 활동하지는 않았다.

    -한때 일본에서 반한(反韓) 운동을 해서 귀국 못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 반한 운동을 했습니까.

    “반한 운동에 관련돼서라기보다는 와다 선생이 ‘찍히면서’ 같이 찍힌 측면이 강했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됐던 조성우를 도와 한국민주화 운동의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저한테 오면 통역해주고 그들이 보내준 자료를 일본의 시민단체에 전달해주었습니다. 다른 유학생들에게 시킬 수는 없었지요. 워낙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한국 민주화 운동에 연관돼 있다 보면 친북으로 몰릴 소지가 있었습니다. 1986년에 유학 갔다가 87년에 서울에 와서 결혼했어요. 그 다음에 한번도 서울에 못 들어오다가 1995년에 박사논문 끝마치고 왔습니다. 8년 동안 한번도 못 왔죠. 그 과정에서 어떤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는데도 당국의 발표로 신문의 사건 관련 도표에 제 이름이 등장했지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장일순 선생입니다. 199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평생 야인으로 살며 민주화운동과 환경운동을 하셨어요. 원주 운동권의 정신적 지주죠. 지학순 주교 곁에 이분이 있었어요. 김지하 생명사상의 원류도 이분이죠. 김지하씨도 ‘나야 설레발이고 아이디어는 그분 거야’라고 말씀하세요.

    황 위원이 ‘신동아’ 1월호에 박경리 선생을 인터뷰했더군요. ‘토지’의 사상적 토대도 장일순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자리잡힌 것입니다.

    북한 연구하면서 1950년대의 뛰어난 연구자를 발견했어요. 그렇다고 존경하는 인물은 아닙니다. 한 사람은 송례정씨죠. 북한의 경제사회 발전단계에 관한 논문을 쓴 경제학자죠. 또 한 사람은 농업경제학자 홍달선씨. 이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1960년대 중반 이후는 글이 없더라고요. 독창적인 연구자들입니다.”

    장일순 선생 가장 존경

    -학생들에게 어떤 책을 읽으라고 권합니까.

    “저는 교양학부 소속이에요. 교양과정에서 ‘북한사회론’ ‘민족과 통일’을 가르치죠. 가끔 남한정치도 가르치는데 두 과목이 주 과목입니다. 교양과정 학생들한테 사회과학 책을 소개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백낙청 선생이 쓴 ‘흔들리는 분단체제’를 소개합니다. 학생들에게는 이렇게 인문학적인 글이 도움이 됩니다.

    인문학의 교양과 교육이 뛰어난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예컨대 학생들이 졸업해 사회에 진출하면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CEO(최고경영자)가 사람 만나 사업 얘기만 합니까. 사업 얘기는 5% 정도에 지나지 않아요. 나머지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신변잡기를 말하죠. 대학 4년 동안에 교양을 충분히 갖추라고 학생들에게 강조합니다.

    예컨대 북한을 주제로 한 학기 내내 강의 듣고 책 읽고 사고할 수 있는 시기가 대학 때말고는 없죠. 졸업하면 절대 이런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서 교수는 “요즘 학생들이 불쌍하다”고 했다. “학점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취직하기 위해 컴퓨터 영어 직업교육에만 매달려요. 나무랄 수만은 없죠. 우리 현실이 그러니까. 다 기가 죽어 있어요. 학생운동 하는 게 다 좋은 건 아니지만, 우리 때는 그래도 기(氣)는 살아 있었잖아요. 너무 안타까워요.”

    -평소 술은 얼마나 드세요.

    “술은 시간으로 마십니다, 양으로 안 마시고. 취해서 흐트러진 기억은 거의 없어요.”

    -일본에서 택시운전사와 시비를 벌였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던데요.

    “술김에 마음이 풀어져 실랑이가 벌어진 거죠.”

    -국정원에서 나온 뒤 부인을 잃고 괴로운 시간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국정원 그만두는 바람에 책을 냈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평생 못 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정적인 게 가장 아프죠. 인생에서 이번 일이 가장 어려웠죠. 가정적인 일을 한번 겪으니까 그 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아요. 지금은 안정이 됐습니다.”

    해가 남아 있을 무렵에 시작된 술자리가 길어졌다. 두 교수의 대화가 진지했다. 윤홍근 교수는 “정치학자들의 입장이 너무 정해져 있어 문제 해결과 대안 마련을 위한 토론이 실종됐다. 입장의 차이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그 입장은 대개 사람과 연결돼 있다. 철학이나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입장의 차이가 아니다”고 받았다.

    그는 필자에게 “책 이야기만 물어볼 줄 알았는데 책과 관계없는 질문이 절반이 넘는군요”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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