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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혼 깃든 아스카 건축의 백미 호류지(法隆寺)

단아하게, 때론 고고하게… 일본 최후의 大木이 복원한 세계 최고(最古) 명찰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백제혼 깃든 아스카 건축의 백미 호류지(法隆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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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혼 깃든 아스카 건축의 백미 호류지(法隆寺)

위로 올라갈수록 층의 넓이가 줄어드는 오층탑.
오층탑의 처마 부분. 첨차와 사귀들로 가득하다(內).

일본에서도 이와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최초의 가람인 아스카데라(飛鳥寺·6세기 말)는 1탑 3금당식이고, 7세기에 세워진 시텐노지(四天王寺·7세기초)와 호류지(7세기 중엽), 야쿠시지 등은 1탑 1금당식이다. 호류지는 1탑 1금당식이라 대강당이 탑과 금당을 감싸안은 구조이지만 쌍탑 1금당식인 불국사의 경우엔 대강당 자리에 대웅전이 들어서 있다. 이에 따라 대강당은 뒤로 밀려났다.

호류지가 창건된 때(607년)는 일본 역사에 말하는 아스카시대(593~710년)다. 창건자는 일본의 기틀을 마련한 쇼토쿠(聖德·574∼622) 태자로 알려져 있다. 원래의 가람이 얼마 안 돼 불타버리자 다시 재건(창건했다는 설도 있다)했는데,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가 8세기 초(710년)이므로 호류지는 1300살의 나이를 먹은 셈이다. 이런 이유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1993년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쇼토쿠 태자는 요메이(用明) 왕의 둘째아들로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대신 섭정으로 큰어머니 스이코(推古) 여왕을 도왔다. 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권력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일본 왕가의 처지는 말이 아니었다. 불교가 보급되고 한반도로부터 고승, 학자, 기술자 등이 대거 도래하자 일본의 학문과 예술, 기술 수준은 몰라보게 향상된 반면 그때까지 ‘천황제’를 떠받들어주던 신토(神道)사상은 크게 위축됐다. 당시 일본에선 소가(蘇我)씨와 모노노베(物部)씨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소가씨는 진보적 성향이었으나 모노노베씨는 씨족 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파였으므로 양측은 대내외 정책에서 사사건건 충돌하고 대립했다.

이 둘은 불교 수용에 대해서도 다른 입장을 취했다. 소가씨는 숭불파(崇佛派)였고, 모노노베씨는 배불파(排佛派)였다. 요메이 왕은 독실한 불교신자였으나 이미 병든 몸이라 극락왕생에 마음이 가 있었고 그의 집안 여자들도 소가 사람들이라 일찍부터 불교를 믿었다. 병약한 요메이가 세상을 떠나자 그 틈을 타 모노노베 측이 소가를 공격했다. 하지만 승리는 엉뚱하게도 도래인 세력과 손을 잡은 소가 측으로 돌아갔다.



요메이의 뒤를 이은 스순(崇峻) 왕은 소가 측 인물이다. 그러나 스순은 소가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반불파(反佛派)로 돌아섰다. 불교를 인정하면 ‘천황제’를 버텨주는 신토사상이 위협받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힘있는 자가 왕위를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오래 못 가 소가 측이 보낸 자객의 손에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소가 측의 우두머리인 소가노 우마코의 딸이자 3대째 내리 대비 신세로 지내던 스이코가 왕위에 올랐다. 쇼토쿠 태자가 정치 일선에 나선 것은 바로 그때다.

神·佛·儒 습합사상과 和

쇼토쿠 태자는 고구려 승려 혜자(惠慈)와 백제의 승려 혜총(惠聰)으로부터 불교를 직접 받아들였기에 누구보다도 불교에 정통했다. 그는 일찍이 소가의 승리를 기념해서 오사카에 국립사찰인 시텐노지(四天王寺)를 세웠다. 국립사찰이란 국가의 안위와 번성을 위해 복을 비는 사찰로 호족들이 자기 가문의 번성을 위해 짓는 절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신토나 유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 품어 안으려 했다. 하나를 선택하고 나머지를 버린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불유(神佛儒) 습합사상’이란 특이한 사상이 탄생했다. 신불유를 받아들이되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이를 적절히 선택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화(和)’다.

그가 ‘헌법 17조’(604년)를 제정한 것은 위기에 처한 ‘천황제’를 굳건히 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 첫머리에 ‘화’를 내세웠다.

그보다 한 해 전인 603년, 그가 ‘관위 12계’를 제정해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세력가의 가문에서만 뽑지 않고 일정한 시험을 쳐서 임용함으로써 인재 등용의 길을 크게 넓힌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고대 일본을 이른바 ‘율령국가’ 체제로 나아가게 했다. 율령제란 법률에 의한 국가통치 방식으로, 여기서 ‘율’은 형벌체계를, ‘영’은 정치조직을 말한다.

헌법 제2조에 삼보 숭배를 의무화했다. 여기서 삼보란 불·법·승이니 불교와 다름없다. 이리하여 불교가 신생 일본의 국교가 된 것이다. 그는 외교에도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당시 중국대륙을 장악하고 있던 수나라 황제에게 사절(‘견수사’라 부른다)을 보내 일본의 존재를 분명히 알리고 또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데도 열성을 보였다. 당시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 자신의 나라를 ‘해가 뜨는 나라’도 표현했는데, 그게 지금의 일본이란 국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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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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