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호

인간의 괴로움에 대한 총체적 고찰 ‘이장의’

  • 글: 정영근 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yunjai@snut.ac.kr

    입력2005-03-24 18: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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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괴로움에 대한 총체적 고찰 ‘이장의’

    ‘이장의’ 원효 지음/은정희 역주/소명출판/288쪽/2만원

    불교는 인간이 여러 가지 괴로움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실존적으로 자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관심과 목표는 바로 이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그리고 괴로움의 근본적인 해결은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올바른 앎, 즉 깨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고, 괴로움의 그침을 알고,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이를 위해선 괴로움이라는 증상과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으로 선행돼야 한다.

    원효(617∼686)의 ‘이장의(二障義)’는 바로 이 괴로움의 문제와 깨침의 장애를 총괄적으로 정리해 고찰한 저술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미혹(迷惑)에서 깨침으로 나가는 불교사상의 체계를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러 불교경전 속의 다양한 사상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의 사상체계는 ‘기신론’을 주축으로 구축됐고, 저술의 대다수도 이를 기반으로 한다. 원효는 먼저 ‘기신론별기’를 쓰고 ‘일도장’과 ‘이장의’를 지었으며 다음에 ‘기신론소’를 썼다.

    ‘기신론이장의’라고도 불리는 ‘이장의’는 ‘기신론’에 나오는 장애에 관한 부분을 따로 떼어 상세히 논한 것이다. ‘일도장’이 지혜를 바탕으로 수도하는 모습을 정면에서 다룬 것이라면, ‘이장의’는 번뇌의 측면에서 그것을 제거해 가는 방향을 논하고 있다.



    ‘이장의’에서 원효는 중생이 왜 미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지, 또 어떻게 이 번뇌를 차단하여 깨침을 얻도록 할 것인지를 상세히 논한다. 또 번뇌의 본질과 현상 및 작용, 그리고 번뇌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과정과 번뇌를 끊는 방법 및 최종 단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번뇌에 관한 논의들이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마음의 장애와 무지의 장애

    원효는 ‘이장의’에서 장애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해설한다.

    첫째는 인간으로 하여금 괴로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한다는 실천상의 의미, 둘째는 완전한 앎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는 인식적 의미다. 첫째 의미의 장애는 번뇌가 곧 장애가 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번뇌장(煩惱障)과 번뇌애(煩惱碍)로 이름붙여 설명한다. 번뇌라는 장애 또는 번뇌로 인한 장애는 ‘마음의 장애’라 볼 수 있다. 이를 제거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심해탈이라고 표현한다.

    둘째 의미의 장애는 알아야 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도록 가리고, 아는 작용인 지혜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게 막는다는 뜻에서 소지장(所知障)과 지애(智碍)라고 부른다. 이는 ‘무지의 장애’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제거함으로써 모든 것을 확연히 알게 되는 것을 혜해탈이라고 한다.

    마음의 장애와 무지의 장애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는 상호 연관돼 있고 서로를 함축하고 있다. 마음이 평정을 잃으면 우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다. 한편 자신과 세상의 이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욕심부리고 성내게 된다. 올바른 인식은 참된 실천을 가져오고, 참된 실천을 통해서만 올바른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마음의 장애와 무지의 장애는 올바로 실천하지도 못하고 올바로 알지도 못하는 중생의 모습을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애가 인간을 깨치지 못하도록 막고 가리는 부정적 현실이라 한다면,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장애의 정체와 원인을 추적해야 한다. ‘이장의’에서 원효는 장애의 근원을 나에 대한 집착(아집·我執)과 존재에 대한 집착(법집·法執), 그리고 물든 마음과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밝히고 있다.

    아집, 법집, 물든 마음, 근본무명

    아집은 자신이 영원히 변치 않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실체적 존재라고 믿고 집착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부터 소유에 대한 집착이 나온다. 즉 내 것은 언제나 나에게 속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이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탐욕의 마음을 내고 나의 이익을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분노의 마음을 일으킨다. 아집으로 인해 생긴 탐욕과 분노 등의 번뇌가 장애를 일으킨다.

    법집은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을 고정적인 모습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고정적 존재의 관념은 모든 것을 대립적으로 대상화하여 인식한다. 그럴 경우 있는 그대로 참모습에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장의’에서는 법집을 무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현실적으로 무명에 의해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물든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물든 마음은 그것 자체가 평안한 마음을 동요시키는 번뇌로 인간을 괴롭히고 수행을 방해한다.

    ‘이장의’에서는 물든 마음이 비롯되는 근원을 근본무명이라 한다.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근본무명은 진여(眞如)라는 절대적인 것이 세속의 것과는 차별적으로 존재한다고 보고 그것에 집착하려는 생각이다. 이처럼 진여에 집착하는 마음이 근본무명이기 때문에, 이는 진여의 밝음에 가장 근접해 있으면서도 진여에 가장 위배된다고 할 수 있다. ‘이장의’에서는 이를 마치 맨 아랫사람인 사미와 맨 윗사람인 화상의 자리가 가까운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이처럼 근본무명은 진여에 집착하여 세속의 차별적인 지혜를 부정하므로, 세상의 차별상을 명백히 살핌으로써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원효가 ‘이장의’에서 근본무명에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을 타파함으로써 열반에 고요히 머무르지 말고 세간에 나와서 현실적 상황에 맞서 적극적으로 실천하라는 데 있다.

    중생이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장애의 정체를 밝히고 그것의 근원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다. ‘이장의’는 모든 장애가 노력에 따라 없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장애나 번뇌는 본질적이거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청정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이는 현실적으로 물들어 있다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따라서 누구나 장애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 능력이 다르고 부딪히는 장애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각자 자신에게 해당하는, 그리고 자신이 제거할 수 있는 장애를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이장의’에서는 범부와 이승, 그리고 보살 등 각각의 수준과 수행의 단계에 따라 장애의 종류와 제거 방법이 다름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어쨌든 자신과 존재를 사실 그대로 보게 된다면 그것에 대한 집착과 구속으로부터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집착과 구속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욕망, 증오, 두려움 등을 정화할 수 있다.

    또 세속과 진여가 다르다고 하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면 중생의 근기(根機)나 상황에 따라 알맞은 방식으로 그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천하에 두류(逗)한 어둠은 해가 출현해야만 사라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순도 높은 원광석

    역자 은정희 선생은 ‘대승기신론 소별기’‘금강삼매경론’ ‘이장의’등 원효의 저술에 대한 역주 작업을 20년 넘게 계속해오고 있다. 원문을 충실히 직역하고 친절하게 주석을 다는 것 외에 인용문의 전거를 일일이 추적하여 밝히는 등 성실한 번역작업으로 정평이 나 있다. 또 동학 및 제자들과 수차례 원전을 강독한 다음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암호를 풀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원전의 번역임에도 정확도가 매우 높다. 원전에 충실한 번역은 수백편의 논문을 쓰는 것 못지않게 힘들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작업이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여러 원효 연구가들이 은정희 선생의 번역을 깊이 신뢰하고 연구자료로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아쉽다.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의 내용을 한 번 더 풀어서 번역하고 핵심을 요약 정리한 쉬운 해설을 덧붙였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불교 전공자들의 가공과 제련을 통해서 멋진 제품으로 다듬어지기를 기다리는 순도 높은 원광석 같다. 원광석이 있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직접 땅을 파고 들어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 흘리며 광석을 캐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더군다나 이것은 순도가 매우 높아서 조금만 가공하면 그대로 제품이 된다. 그러기에 이 원광석의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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