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좌충우돌, 王변덕’, 한나라당 소장파들의 속살

개혁 마인드 수혈받은 귀 열린 ‘오렌지’
머리 너무 좋은 게 약점인 소신파 ‘한라봉’

  • 글: 이동훈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dhlee@hk.co.kr

    입력2005-04-21 14: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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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세우기’의 주역이던 한나라당 소장파가 돌연 박근혜 대표 몰아내기에 앞장서고 있다. 최병렬 전 대표도 소장파 때문에 뜨고 졌다. ‘창(昌) 대세론’에 편승했다 대선 뒤 ‘이회창 격하운동’을 주도한 것도 소장파다.
    • 이렇듯 변덕스런 성향과 막강한 영향력을 동시에 갖고 있으니 요주의 대상이다. 그 양대 좌장격인 ‘오렌지’ 남경필 의원과 ‘한라봉’ 원희룡 의원을 중심으로 소장파의 색깔을 살펴본다.
    ‘좌충우돌, 王변덕’, 한나라당 소장파들의 속살

    한나라당 소장파의 양대축으로 통하는 남경필(위 사진 가운데), 원희룡 의원(아래).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지난해 3월이었다. 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이 운영위원회에 참석한 박근혜 의원을 당사 한켠의 빈 사무실로 불러냈다. 그날 당사는 시끄러웠다. 최병렬 대표를 지지하는 일부 당원들이 당사를 찾아와 “왜 최 대표를 몰아내려 하느냐”며 소동을 피우고 있었다.

    종말이 예고된 최병렬 체제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남 의원은 곧 다가올 전당대회에서 ‘박근혜 대표 만들기’를 위해 앞장서 뛰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언론을 통해 박 의원이 대표 경선 출마를 포기할 것이란 얘기가 흘러나왔다.

    박 의원은 최병렬 대표에게 화가 나 있었다. 박 의원은 최 대표측이 자신을 겨냥해 ‘2002년 한나라당에 복당할 당시 거액의 수수료를 받았다’는 의혹을 흘리며 흔들어대고 있다고 의심했다. 박 의원이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선에 나서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남 의원은 몸이 달았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남 의원은 박 의원에게 강권하다시피 출마를 거듭 권유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박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결국 박 대표는 출마했고, 당 대표가 되어 17대 총선 때 침몰 직전의 한나라당을 구해냈다.

    올해 1월4일, 4대 입법 처리를 둘러싼 여야 쟁투 국면이 가까스로 봉합된 뒤 맞은 신년 벽두였다. 당내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았고 박근혜 대표와 소장파간 갈등곡선도 동반 상승해 있었다.

    그날 남경필 의원은 김덕룡 원내 대표와 함께 인천공항에서 출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국회 운영위원회의 아프리카 의회 시찰단 일행으로 출국하는 길이었지만 단순한 외유로 보이지는 않았다. 4대 입법 처리를 두고 시종일관 강경노선을 걸어온 박 대표와 명확한 선을 긋는 세리머니처럼 보였다. 그는 전날 기자와 만나 “박 대표에게 더는 미련이 없다”고 했다. 원내수석부대표로서 4대 입법의 여야 합의 통과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좌절했다고 털어놨다.

    그의 표현대로 “100번 가까이 만나” 설득했지만 박 대표는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박 대표는 거대한 벽이었다. 그럴 줄은 몰랐다. 돌아오는 대로 당직을 내놓고 소장파를 규합해 본격 비주류 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불과 10개월여의 시차를 두고 남 의원과 박 대표는 극과극을 오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 대표는 별로 변한 게 없는데 박 대표를 중심에 두고 소장파가 양극을 오간 셈이다.

    세 번의 선택, 세 번의 결별

    이 사례는 한나라당 소장파의 이력과 현재 상황을 압축해 보여준다.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 의원이 주축이 된 소장파는 그리 길지 않은 정치 이력을 통해 세 번 선택하고 세 번 좌절했다. 박 대표는 소장파의 세 번째 선택이자 좌절이었다.

    잦은 선택은 큰 비용을 치르게 마련이다. 그들을 향해 ‘기회주의자’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한다’ ‘배신을 밥 먹듯 한다’는 당내 비난이 쇄도했다. 그들은 이런 평가가 억울하다고 했다. 정병국 의원의 말이다.

    “제왕적 총재인 이회창 총재 앞에서도 우리는 제 목소리를 냈다. 공천을 앞두고 최병렬 대표를 몰아내기 위한 봉기에 나섰다. 지금 막강한 권위를 지닌 박 대표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대드는 우리를 보고 기회주의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로선 억울한 일이다.”

    계보가 사그라진 한나라당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며 명맥을 이어온 소장파. 그들의 출발점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나라당 소장파의 역사는 미래연대가 꾸려지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해 초기 구성원은 김영선, 남경필, 권오을 의원이다. 김부겸, 권영진, 김성식, 고진화, 박종운, 정태근 등 유명짜한 원외 인사들도 미래연대 식구였다.

    맹아를 틔운 소장 모임은 2000년 16대 총선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한다. 원희룡, 오세훈, 김부겸, 오경훈, 박종희씨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 가세하면서부터다. ‘386의 원내 대거 진입’으로 총선 결과가 특징지어지던 바로 그 해다.

    이미 이들은 ‘이회창의 한나라당’에 몸을 맡김으로써 진로의 절반 이상을 선택한 셈이다.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 양쪽에서 동시에 구애를 받던 원희룡 의원은 “당시 내가 한나라당을 선택한 것은,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우파 쪽에 축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소장파의 의미는 ‘이회창 총재의 액세서리’ 정도였다는 평가도 있다. 이는 본인들도 일부 인정하는 대목이다. 오세훈 전 의원은 17대 총선 불출마 선언 이후인 2004년 1월 당 공식 회의석상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우리는 액세서리였다. 소장파라는 명분 아래 지난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수행하면서 액세서리 노릇을 했다.”

    이 총재 시절 박근혜 의원의 탈당과 미래연합 창당 과정에서 한나라당 소장파가 당시 소장파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당 개혁을 촉구하며 이 전 총재에게 반기를 든 박 의원에게 소장파는 차갑기만 했다.

    “이회창 총재를 보위해 집권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게 당시 상황에 대한 소장파 의원들의 변명이다. 한나라당 소장파는 대선 패배 직후인 2003년 1월 일부 세력이 ‘국민속으로’를 만들면서 1차 분화한다.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의원 등은 이후 탈당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원희룡 의원도 ‘국민속으로’ 멤버였다.

    남은 소장파 세력은 새로운 선택을 찾아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분화가 일어난다. ‘서청원계’와 ‘최병렬 옹립파’로 갈라진 것이다. 서청원계엔 박종희 임태희 의원이, 최병렬 옹립파엔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 의원이 섰다. 최병렬 옹립파는 2003년 5월 만들어진 ‘쇄신모임’의 주축이 된다.

    당시 최병렬 의원의 모토는 ‘개혁적 보수’ ‘보수의 반성’이었다. “보수(補修)하는 보수(保守)”란 말은 최 대표가 원조다. 최 대표는 수시로 미래연대 토론에 참석했다. 원희룡 의원의 회고다.

    “다른 중진을 야단만 치던 최 대표가 소장파의 ‘국가보안법 개폐’ 토론에 참석, ‘본질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지만 일리 있는 주장도 있다’며 경청했다. 그런 최 대표에게서 정통보수이지만 다원성을 존중하고 합리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대안은 최병렬이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기획 똑바로 해!”

    소장파는 대표 경선에 나선 최병렬 의원의 숨은 참모 노릇을 톡톡히 했다. 최 의원도 그들과 함께 일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실제로 최 대표는 첫 당직 인선에서 원희룡 의원을 기획위원장, 오세훈 의원을 청년위원장에 앉혔다. 정통 보수와 개혁적 보수의 만남. ‘세팅’은 훌륭해 보였다. 소장파를 가리켜 ‘신주류 계파’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오래갈 것 같던 신구(新舊)의 동거는 이내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2003년 9월 당시 기획위원장을 맡은 원희룡 의원은 닥쳐올 불법 대선자금 국면을 헤쳐나갈 방도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최 대표 앞으로 며칠째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최 대표가 별 반응이 없자 그는 7층 대표실을 찾아 독대를 청했다.

    “다가올 여권의 공세를 헤쳐나갈 방법은 지난 대선의 불법자금 문제를 국민 앞에 진솔하게 밝히는 정공법뿐입니다.”

    최병렬 대표의 인상이 구겨졌다.

    “국민 앞에 진솔하게 밝혀 이해를 구한 뒤 당사를 팔고 천막으로 가야 합니다.”

    최 대표가 더는 듣지 못하겠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획 똑바로 해!”

    최 대표는 이후 이재오, 홍준표, 김문수 의원 등 재선 3인방을 중용하며 당을 비상대책위 체제로 몰고 간다. “진솔하게 밝히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는 소장파의 해결 방식 대신 “적이 칼을 휘두르면 그 칼을 물고 맞짱을 떠야 한다”는 재선 강경파의 해결 방식을 택한 것이다.

    소장파와 최 대표 사이에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다. 원희룡 의원은 이재오, 홍준표 의원에게 철저하게 따돌림당한다. “소장파도 물갈이에서 예외가 아니다”는 경고가 강경파 실세 의원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터져나왔다.

    2003년 11월. 이 같은 기류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비대위원장 이재오 사무총장이 비대위원인 원희룡 의원에게 “더 이상 비대위 회의에 나올 필요없다”고 통보한다. 원 의원이 그 즈음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근거 없는 폭로는 당장 그만둬야 한다. 지금 1980년대식 재야 투쟁하는 것이냐”며 비대위 주도의 대여(對與) 폭로공세를 비판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재오 총장은 격노했다. “새벽부터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격려는 못해줄 망정…”이라며 한동안 분을 삭이지 못했다고 한다.

    최 대표와 소장파는 결국 결별한다. 다음해 2월 소장파는 최병렬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처리무산, 서청원 의원 석방결의안 통과, 관훈토론회장에서 이회창 총재 책임론 거론 등 일련의 리더십 부재 상황이 동기가 됐지만 소장파는 그전부터 최병렬 체제를 무너뜨릴 준비를 해왔다. 남경필 의원의 회고다.

    “최병렬 대표가 대표 출마 전에 했던 말과 글은 알고 보니 이전부터 소장파 활동을 함께해온 권영진 박사가 쓴 것이었다. 권 박사가 쓴 글을 최 대표는 읽기만 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로선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최 대표의 말은 레토릭에 불과했고 그는 입으로만 개혁을 얘기했다. 대표 취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그 실체가 드러나더라. 우리는 고민 끝에 그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당 소장파는 이회창, 최병렬에 이어 세 번째 선택을 한다. 박근혜 의원이다. 소장파의 눈에 박근혜 의원이 확 들어온 것은 2003년 5월이라고 한다. 소장파 그룹이 분화하면서 만들어진 쇄신모임에 박근혜 의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장파측 인사의 회고다.

    “당시 박 의원을 보고 의원들 사이에서 ‘저 여자, 괜찮네’란 얘기들이 나왔다. 상당히 개혁적으로 보였다. 특히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고 차분히 앉아서 메모하는 모습에 소장파 의원들이 호감을 가졌던 것 같다.”

    최 대표를 몰아낸 소장파에게 박 의원은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소장파 의원들은 2004년 벽두부터 박 의원에게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쇄신 모임 워크숍 등에서 보여준 박 의원의 개혁적 인상이 선택의 중요한 이유가 됐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총선 직전인 2004년 3월 박 대표 체제가 등장하자 소장파는 다시 주류로 부상한다. 17대 총선을 거치면서 한나라당 의석수는 많이 줄었지만 소장파엔 새로운 인물들이 수혈됐다. 박형준, 김희정, 이성권, 정문헌, 김명주 의원 등이 그들이다. 소장파는 ‘새정치 수요모임’을 꾸리며 당내 강력한 주류 개혁세력으로 부상했다.

    소장파는 아울러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의원으로 대표되는 당내 비주류의 공격으로부터 박 대표를 엄호하는 세력이 됐다. 그러나 소장파와 박 대표의 밀월 관계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004년 8월4일 박근혜 대표가 ‘임시’ 호칭을 떼고 정식 대표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소장파 조직 ‘새정치 수요모임’은 박 대표와 저녁 회동을 했다. 당시 여권은 박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던 정수장학회를 문제삼아 과거사 공세를 펴고 있었다. 저녁 자리에서 소장파 의원들은 박 대표에게 “정수장학회를 정리해 민주화 유자녀들을 돕는 활동에 나서달라”고 건의했다. 경청하던 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시기와 절차가 있지 않겠습니까. 1년에 한 번 총회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 믿고 맡겨주십시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다음날 일부 신문에 ‘박 대표, 정수장학회 정리할 듯’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다. 박 대표는 신문 기사를 보고 발끈했다고 한다. 소장파 의원들에게 “바깥에 나가서 이렇게 얘기하면 더는 당신들과 얘기 못한다”는 경고가 전달됐다고 한다. 박 대표는 이날 오후 전여옥 대변인을 통해 “현재로서는 이사장직을 사퇴할 의향이 없다. 사퇴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박근혜와의 허니문은 단 5개월

    이날 사건이 소장파와 박 대표의 허니문이 깨지는 시발점이라고 당사자들은 회고한다. 이후 국가 정체성 논란까지 겹치며 양측의 골은 깊어만 갔다. 박 대표는 그 와중에도 원희룡 의원에게 ‘대한민국 정체성 수호 비상대책위원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원 의원은 이를 거부했다.

    국가보안법 개폐논쟁 등 4대 입법 정국은 양측을 화해 불능의 지경으로 내몰았다. 남경필 의원의 말이다.

    “박 대표와 결별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박 대표의 이념이 전향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지도력의 문제도 드러났다. 정식 보고절차를 밟아 결정된 사항이 마지막에 가서 뒤집어지더라. 어디선가 얘기를 듣고 온 듯했다. 그리고 박 대표도 결국 대권에 욕심을 드러내더라.”

    원희룡 의원은 침울하게 회고했다.

    “우리가 선택한 대안은 한 달, 두 달도 못 가서 결국 원위치로 돌아가고 말더라. 우리가 믿고 동반할 세력이 이렇게 없는지 한동안 정말 좌절했다.”

    한나라당 소장파는 이제 누구를 내세울 수도 없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나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들에 대한 당내 분위기는 더 싸늘해졌다. 세 번의 선택과 세 번의 결별 과정은 ‘잦은 배신’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들의 말발이 더는 먹히지 않는 분위기다. 한 재선 의원의 말이다.

    ‘좌충우돌, 王변덕’, 한나라당 소장파들의 속살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 모임인 ‘새정치 수요모임’이 2004년 8월15일 독도에서 ‘독도수호결의’를 다지고 있다.

    “소장파 얘기는 겉만 번지르르하다. 수사(修辭)에 담긴 실체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과거의 한나라당과 달라진 게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진실됨이 없고 겉멋만 부리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진성당원제에 대한 소장파의 달라진 견해는 ‘소장파=못 믿을 세력’으로 규정짓는 촉매 구실을 했다. 소장파는 당 개혁의 일환으로 진성당원제 도입을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다. 하지만 소장파는 최근 들어 이름만 바꾼 진성당원제인 ‘책임당원제’에 “문제가 있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소장파는 그때그때 다르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박 대표를 흔들려는 얕은 수라는 비판도 나왔다. 소장파측 관계자도 솔직히 인정한다.

    “소장파는 철학적 역사의식을 가지고 출발하지 않았다. 현실적 요구,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 우선이었다. 극우 TK 중심으로 짜인 한나라당을 바꾸자는 전제 하나로 출발했다. 자연히 소장파는 전체적인 그림이 완결되지 못하고 그때그때 짜맞춘 짜깁기의 성격이 강하다.”

    소장파가 그려온 그림은 이런 식이다. 대북관계에서는 과감한 교류를, 경제부문에서는 복지확대를 주장하면서 기존 틀을 수정 보충하는 형식이다. 이 같은 그림은 최근엔 박형준 의원이, 그전엔 김성식 현 경기 정무부지사가 도맡아 정리해왔다고 한다.

    용의주도하지 못함과 가벼움이 그들이 자주 좌절하게 되는 이유라는 설명도 있다. 이에 대한 정병국 의원의 말이다. “철저하지 못하고 용의주도하지 못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에 그쳤고, 그러다보니 진의가 잘못 전달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관되게 유지해온 개혁의지만은 인정해달라.”

    그렇다면 그들은 일관된 개혁의지를 보였는데 세상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남경필 의원은 소장파의 미래에 대해 “계속 나서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소장파는 더 이상 소장파가 아니다. 당을 책임지겠다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침체되어 있지만 나쁘지만은 않다. 타이밍과 명분을 준비하면 된다. 시대의 큰 흐름을 타면서 반보(半步) 앞에서 잡고 나가면 된다.”

    소장파의 주축인 남경필, 원희룡 의원을 통해 소장파의 속살을 엿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들은 각각 경기지사와 서울시장에 뜻을 둬왔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최근 소장파 내에서는 이 뜻을 접어야 한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네 번째 선택은 한나라당 탈당?

    “소장파가 직접 나서기 위해서는 자기 희생이 따라야 한다. 자기들을 기꺼이 내놓고 밟고 가라고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신뢰를 받지 못한다. 경기지사니 서울시장이니 하면서 자기 욕심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한 소장파 의원의 말이다.

    소장파의 또 다른 선택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것은 ‘탈당’이다. 한나라당 해체와 이후 이어지는 여권 중도세력과의 연합 신당 창당은 최근 당 안팎에서 떠도는 소장파의 유력한 미래 중 하나다. 소장파의 ‘네 번째 선택’은 어쩌면 2007년을 앞둔 마지막 선택이 될 것이다. 과연 그들은 네 번째엔 성공할까.

    한나라당 중진 의원들 중엔 찢어진 청바지에 물들인 머리, 귀고리를 걸고 의원회관의 아버지(고 남평우 의원) 사무실을 찾아오던 대학생 남경필을 기억하는 이가 꽤 있다.

    “그는 전형적인 부잣집 아들이다. 부친이 사주로 있던 경인일보에서 3년간 기자생활을 한 뒤 미국의 명문 예일대에서 유학한 경력이 눈에 들어온다. 부친 별세 후 수원 팔달 지역구를 물려받아 1998년 보궐선거에서 33세의 나이로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2세 정치인이고 오렌지족이다.”

    16대 국회 당시 당 개혁을 외치던 남 의원의 뒷전에선 중진 의원들은 “남경필, 많이 컸네”하고 말했다. 2003년 12월 개혁 공천 논란의 와중에 소장파의 칼끝에 놓여 있던 정형근 의원이 ‘오렌지’라며 남 의원을 원색적으로 공격한 것은 이런 당내 기류의 일단을 보여주는 일화다.

    남경필 의원이 3선의 정치인으로 커가는 과정은 정확히 한나라당 소장파의 역사와 일치한다. 남 의원은 자신의 단점을 정확히 파악한 듯했다. 그를 잘 아는 한 인사는 그의 장점은 “귀가 열려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초선 의원의 말이다.

    “처음 남 의원을 만났는데 ‘나는 백지상태다, 아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 이어 ‘순수한 열정은 있다’고 하더라. 그냥 ‘뺀질이’로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남 의원은 자신의 스승으로 김부겸 의원과 김영춘 의원을 꼽는다. 국회에 갓 들어온 남경필을 붙잡고 가르친 이들이다. 남 의원의 개혁적 마인드는 그들에게서 수혈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1998년 국회에 입성해 젊은 초선 김영선 의원과 모임을 만든 것도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선택일 것이라고들 한다. 그가 원희룡 의원과의 관계를 ‘상보적 관계’라고 보는 것도 그 이유다. 남 의원은 원 의원의 개혁성을, 원 의원은 남 의원의 안정감을 보충하고 있는 셈이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오렌지와 한라봉

    소장파의 양대 축인 남경필 의원과 원희룡 의원. 남 의원이 오렌지라면 제주도 출신 원희룡 의원은 ‘한라봉’으로 평가된다. 그만큼 두 의원은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르고, 각자의 길을 걸을 가능성도 상존한다. 그럴 경우 소장파의 무게중심이 어디로 쏠릴지도 관심사다.

    원희룡 의원의 이력서에는 의외라고 생각되는 대목이 있다. ‘1998년 부산지검 강력부 마약 사범 담당 검사’가 그것이다. 그의 회고다.

    “부산으로 내려가 강력부 배치 사실을 알았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18명의 식구가 나를 맞았는데 12명이 무술 유단자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다부진 체격에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우리 방의 무술합계는 40단이 넘었다.”

    그는 검찰 수뇌부가 자신처럼 순한 인상을 가진 검사를 왜 강력부 마약 담당 검사로 배치했는지 한동안 의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사에게 배치경위를 물었다고 한다. 그때 상사가 했다는 말은 이렇다.

    “자네는 인상이야 한없이 순해 보이지만 일 처리가 강력하잖아.”

    1982년도 학력고사 전국수석, 1992년 사법고시(34회) 전국 수석. 수석에 수석을 달려온 그는 당내 소장파 활동에서도 늘 선도(先導)하는 위치에 섰다. 인상은 한없이 순해 보이지만 강력했다. 2003년 8월 그는 ‘60대 용퇴론’을 들고 나온다. 당시 소장파는 매일 밤마다 모였다. 나이를 기준으로 누구를 나가라고 하는 얘기는 상식 밖이었다. 당시 참석자들도 쉽게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상황 정리를 끝낸 그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인터넷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작심한 듯 풀어놓았다.

    “지역 여론을 보면 내년 총선에서 60세 이상은 (당선되기) 어렵다. 총선에서 용퇴하는 사람이 무더기로 나와야 한다. 나이가 총선 승패의 중요 요인이 될 것이다. 최병렬 대표에게 개혁적 공천 의지가 없다면 대대적인 당내 싸움에 들어갈 것이며, 그때는 대표고 뭐고 없다.”

    그는 용퇴론을 먼저 치고 나온 것에 대해 “파도를 부르고 동남풍을 부르는 심정으로 미친 짓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60대 용퇴론’은 ‘5·6공 세력 퇴진론’으로 확전됐다. 한나라당이 다음해 총선 공천에서 개혁 공천을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일견 무모해 보인 원 의원의 ‘60대 용퇴론’이 단초가 됐음이 사실이다.

    “파도 부르고 동남풍 부르는 심정”

    그는 늘 이렇게 말해 왔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분위기에 안주하면 국민에게서 버림받는다. 몰매를 맞고 혼자가 되는 한이 있어도 개혁에 대한 소신을 버리지 않겠다.”

    원 의원 측근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그가 돈키호테처럼 보였지만 지나고 나면 그의 말이 맞다.”

    그러나 원 의원은 계속 돈키호테로 인상 지워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약점은 “머리가 너무 좋은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약점은 그가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생각하는 대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 관계자의 말이다.

    “한나라당 대의원들은 박근혜 대표를 보완해주기 위해 그를 2등 최고위원으로 뽑아줄 수는 있지만 그에게 한나라당을 맡기지는 않는다. 솔직히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그가 열린우리당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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