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노무현 ‘동북아 균형자론’의 진앙과 파장

“이 문제만큼은 제 판단대로 하겠습니다. 다른 말씀 마십시오!”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04-21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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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 본인의 ‘인식의 흐름’이 있었던 거죠.”
    •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동북아 균형자론’의 배경을 묻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관계자가 던진 말이다. 주의 깊게 살펴볼 대목은 이러한 인식이 ‘LA 발언’ 전까지 2년여 동안 외교안보 분야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 바가 없었다는 것.
    • 과연 어떤 흐름이, 어떻게 발전했다는 것일까.
    • 또 이 흐름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의미하며, 어디로 가는가.
    노무현 ‘동북아 균형자론’의 진앙과 파장
    지난해 11월12일의 ‘LA 발언’, 3월8일 ‘전략적 유연성’ 발언, 그리고 3월23일 발표된 ‘한일관계 관련 국민에게 드리는 글’. 노 대통령이 최근 공식화한 새로운 외교안보전략을 살펴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부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목하는 세 개의 핵심 발언이다. 이는 지난해부터 현재까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세 현안, 즉 북핵 문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 최근의 한일관계와 각각 관련되어 있다. 이 현안들에 관한 대통령의 고민을 모두 담고 있는 것이 3월22일에 나온 이른바 ‘동북아 균형자론’이라는 것이다.

    눈여겨볼 것은 이 핵심 발언이 대부분 대통령 본인이 직접 구술하거나 작성한 문서 형태로 나왔다는 점이다. 우선 주무부서인 외교통상부는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해 발언 이후에 그 배경을 확인하러 나서는 혼선을 겪기도 했다는 것이 외교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안보 관련 사안에 있어 대통령 연설원고를 준비하는 NSC도 이 발언들과 관련해서는 자체적으로 작성한 원고가 폐기되는 등 이전 같은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일부 관련부처 당국자들의 경우 배경설명이 대통령의 본의와 차이가 있다는 질책을 받기도 했다는 것.

    이런 상황은 “대통령의 최근 생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청와대 관계자들이 “그런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것과도 연관된다. 최근의 발언은 한마디로 대통령 본인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한 정부 당국자는 일련의 발언이 대통령 한 사람의 결심이라는 관측이 많다는 지적에 “꼭 그렇지는 않다. 토론과정을 통해 끼친 부(負)의 영향도 영향 아니겠나” 하고 반문했다. 앞에서 주도해 이끈 사람은 없고 다만 뒤에서 잡아끌어 오히려 정교화할 수 있게 만든 경우라는 뉘앙스다.

    이는 ‘동북아 균형자론’을 놓고 이후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이 언론과 접촉하면서 밝힌 배경이나 해석에서 미묘한 차이가 발견되는 것만 봐도 분명해진다. 한마디로 ‘그게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대통령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부(負)의 영향’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통령의 질타

    지난해 12월, 4개월여간의 숨돌릴 틈 없던 해외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노무현 대통령이 외교안보 분야 주요 정부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11월12일 이른바 ‘LA 발언’ 이후 한국 외교의 나아갈 방향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보고를 받는 자리였다. 브리핑이 끝나자 대통령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 보고서가 어떤 경로와 논의과정을 거쳐 올라온 겁니까.”

    대통령의 심상치 않은 어조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 보고서에 비전이 있습니까? 국민들이 이해하겠습니까? 일관성이 있습니까? 장관님들께서는 아랫사람이나 특정부서의 일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직접 고민해주십시오.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고서의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평가에 참석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들어 외교안보 관련 사안과 관련해 보좌진의 인식을 질타하는 발언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11월12일 미국 LA 국제문제협의회(WAC) 초청 오찬에서 “북한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북한에 대한 미국의 무력행사와 봉쇄정책에 단호히 반대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언급한 ‘LA 발언’은 그 정점이었다.

    LA 발언의 경우 사전에 NSC와 관계부처에서 작성해 보고한 연설 초안은 대부분 폐기됐다. 연설을 닷새 앞둔 11월7일 기존의 원고를 원점으로 돌린 대통령이 95% 이상 새로운 연설문을 두 시간여에 걸쳐 구술한 것. 대통령의 구술은 오랜 기간에 걸쳐 생각한 듯 막힘이 없었다고 윤태영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전했다(2005년 1월6일 ‘청와대 브리핑’).

    미국으로 출발할 때까지 원고를 확인하지 못한 일부 참모들은 도중에 연설 내용을 확인하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설 내용이 부시 대통령 재선 이후 힘을 ‘재충전한’ 미 행정부 네오콘의 대북 강경기조를 비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급히 면담을 요청해 발언을 만류하려 한 참모도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실제로 발언 직후 일부 고위관계자는 “북한과 미국에 모두 전략적 결단을 요구한 것”이라며 발언의 충격파를 줄이려 애쓰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해 9월22일 모스크바대 연설이나 12월7일 소르본대 연설도 외교안보 실무진의 사전준비 없이 노 대통령이 직접 연설문을 구술한 것이다. 특히 노 대통령이 “EU(유럽연합)와 같은 평화와 공존의 질서를 동북아에서 만들어가는 데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겠다”고 밝힌 소르본대 연설 내용은 LA 발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숙명적 관계’와 ‘전략적 관계’

    12월 회의에서 노 대통령의 강도 높은 질책은 이러한 상황과 맥이 닿아 있다. 한마디로 노 대통령은 참모들의 인식이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는 것. 대통령이 부쩍 ‘역사공부’를 강조하는 한편, 100여 년 전 구한말의 상황, 특히 러일전쟁에 관한 역사서적을 추천하며 외교안보 분야 보좌진에게 일독을 권한 것이 이 무렵부터다. 이후 3개월가량 대통령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던 듯하다고 한 청와대 관계자는 전했다. 담배가 부쩍 늘고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는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이 이 시기에 ‘전략적 관계’와 ‘숙명적 관계’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한국 중국 일본은 서로 나라를 침략하고 침략당하며 항상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아온 ‘숙명적 관계’라는 것. 반면 미국과 러시아는 때로는 동북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지만 때로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전략에 따라 들고날 수 있는 ‘전략적 관계’라는 설명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이러한 인식틀은 최근 이뤄진 주요 외교안보정책 결정의 배경을 설명해주는 키워드다.

    “대통령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일 문제 등 일련의 발언에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에는 전술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으냐는 질문을 받고 노 대통령이 남긴 답이다. 대통령은 왜 현 상황을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그 상황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 발언을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부 당국자들은 대부분 “전략적 유연성 문제일 것”이라고 답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란, 주한미군의 목적이 북한의 남침 억제를 벗어나 한반도 이외지역의 상황에 투입될 수 있도록 좀더 유연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러한 주한미군의 역할 변경이 필연적으로 중국의 경계심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는 것. 대만해협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주한미군이 이에 투입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비상한 상황

    잠시 2월 무렵,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청와대 회의를 들여다보자. 이 회의에도 역시 정부 외교안보 관련 부처 고위 관계자가 모두 참석했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 미국과 중국 모두를 상대로 카드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관련 논의를 지켜보던 대통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 문제만큼은 제가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 뜻을 따라주십시오. 다른 의견은 이제까지 들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서늘하리만큼 단호한 대통령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LA발언 당시만 해도 대통령의 거침없는 ‘독자행보’를 만류하던 일부 참모들은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몇몇 관계자는 “이후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한 ‘전략적 유연성’ 발언이나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의 ‘동북아 균형자’ 발언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기하는 참모들이 없었던 것은 이날 대통령 의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해 대통령이 이처럼 강한 어조로 이야기한 것은 그간 진행된 관련 논의의 내용이 불만족스러웠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한미 간에 이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4월부터 열린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FOTA) 회의였다. 문제는 주한미군과 관련해 최대 현안일 수밖에 없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국민이나 주변국의 시선을 의식해 2003년 내내 ‘비공개’로 처리하고 되도록 논의를 미루는 것이 한국 대표단의 입장이었다는 점.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지난해 12월 공개한 FOTA 회의록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협상팀은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해주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여러 차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2003년 말에는 담당부서인 외교부 북미국이 청와대의 승인 없이 이를 문서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2003년 말 이전에 이 사안의 중대성에 대해 상세히 보고받은 적이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자세한 내용은 ‘신동아’ 2005년 1월호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논쟁의 실체’ 참조).

    이쯤 되면 FOTA에서 협상실무를 담당했던 외교부와 국방부로서는 이 문제의 결정방향에 대해 할 말이 없을 법도 하다. 전략적 유연성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미 2사단과 용산기지 재배치 문제는 이미 상당부분 미국측 구상대로 논의가 마무리되어 국회비준까지 마쳤고,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로 한 한미안보정책구상(SPI) 회의도 2월부터 시작됐다. 최고지도자 차원의 분명한 공개 언급이 없다면 주변국들이 FOTA에서 보인 한국측의 어중간한 태도가 최종 방침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대통령이 말한 ‘비상한 시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이 문제의 ‘핵심 당사자’인 중국측은 한국의 입장과 주한미군의 역할 확대 문제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터였다. 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29일 라오스에서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3’ 정상회의 당시 중국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했다는 후문이다. 이미 서해 근처에 새로 배치되는 미군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관해 중국측이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노 대통령이 3월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이 문제를 분명하게 짚은 것은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일부에서 주한미군의 역할 확대를 둘러싸고 여러가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며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리 국민이 동북아시아의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날의 연설문 역시 대통령이 상당 부분을 직접 구술했고, 특히 전략적 유연성 관련 부분을 삽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본인의 의지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실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대통령의 발언이 이때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LA 발언’에서도 “미군의 자유로운 운용은 지원해야 하겠지만, 이것이 전략적 유연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동북아 상황과 관련해 이처럼 분명하게 거부의사를 밝힌 것은 공사에서의 연설이 처음이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원칙으로 지켜나갈 것”이라는 문장에서는 노 대통령의 강한 결심을 읽을 수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의 이와 같은 결심을 앞서 언급한 ‘전략적 관계’와 ‘숙명적 관계’라는 키워드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국이 동북아에서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 분명한 견해를 밝히지 않을 경우 이는 ‘숙명적 관계’인 중국을 자극하게 된다는 것. ‘전략적 관계’인 미국과의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숙명적 관계’인 중국의 위험을 감수하다가는 전쟁에 휘말리는 극단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더욱이 ‘동북아 평화체제’라는 최종 목표를 이루기가 불가능하다는 논리다.

    대통령이 화가 난 까닭

    ‘동북아 균형자론’과 관련해 대통령의 인식에 영향을 준 또 하나의 결정적인 변수는 일본의 움직임이다. 역시 ‘숙명적 관계’인 일본이 최근 보여주는 움직임은 매우 우려할 만하다는 것이다. 사실 일본과의 관계 경색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 정부 관계자의 말이다. 독도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도 4월5일로 예정돼 있던 교과서 검정 문제와 관련해 심각한 상황이 올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다는 설명이다.

    이 ‘예정된 갈등’을 앞당긴 것은 2월23일 다카노 요시유키 주한 일본대사의 “독도는 일본 땅” 발언 파문이다. 주재국 수도 한복판에서 주재국의 영토에 대해 이렇듯 강한 발언을 쏟아내는 일은 심각한 외교적 결례일 뿐 아니라 분명한 도발의지와 시나리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정부 관계자는 이 무렵 청와대를 긴장시킨 또 하나의 사건으로 2월26일 서울 외교부청사에서 열린 한미일 6자회담 수석대표 실무회담을 지목한다. 6자회담 조기개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와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대사, 사사에 겐이치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미국과 일본이 보여준 태도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는 것.

    당초 청와대는 북·미 불가침조약과 양자대화 등 북한이 원하는 사안을 6자회담에서 논의하는 방안을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회담에 앞서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하기는 어려우나 회담장에서는 그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다는 방안으로 북한을 설득하자는 카드였다.

    그러나 수석대표 실무회담에서 일본측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와 ‘가짜유골’ 문제를 언급하며 대북 경제제재 필요성까지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등 초강경 방침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측도 회담 재개를 위한 어떠한 전제조건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기존 태도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회담 재개와 관련해 일본이 미국측과 입장을 완전히 일치시킨 형국이었다.

    이날 저녁 회담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크게 분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이 과연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짜 유골’ 문제의 경우 일본에서 실시한 DNA 검사결과에 대해 국제학계의 의구심과 함께 일본 우익의 ‘음모론’까지 등장하고 있었다.

    2월 말 대통령이 느낀 이러한 분노는 수차례 회의를 거쳐 3·1절 기념사에서 ‘사과’와 ‘반성’ ‘배상’처럼 이전과는 사뭇 다른 표현을 사용하며 일본을 압박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3월7일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는 직접 한일관계를 의제로 제시하기도 했다.

    힐 대사의 일본 방문

    3월 들어 본격화하기 시작한 긴장감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3월10일 일본을 방문한 크리스토퍼 힐 대사 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 지명자와 관련된 소식이었다. 힐 대사와 면담한 일본 외무성 고위관계자가 독도 문제와 관련해 미국측이 일본의 손을 들어주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힐 대사는 당초 6자회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특히 청와대는 이때의 방문이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과의 미중 협의 직후 이뤄지는 것이라 미일 양국의 입장 조율 결과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힐 대사에게 독도 문제를 언급했다는 것은, 일본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보다는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지역 내 세력확장을 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의 힘을 빌려 독도 문제에 접근하려는 일본의 태도는 청와대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3월16일 ‘다케시마의 날’을 지정하는 시마네현의 조례 통과로 수면으로 떠오른 한일 갈등은 이튿날 NSC 상임위원회의 이른바 ‘대일 신(新)독트린’ 발표를 통해 ‘강경대응’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러한 흐름의 배경에 그간 일련의 사건으로 일본을 ‘재평가’하기 시작한 청와대의 판단이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하다.

    사안의 미묘함이 달랐기 때문인지, 일본 관련 사안은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비해 참모들의 움직임도 빨랐다는 것이 청와대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즈음 매주 열리는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는 계속해서 한일관계가 중심 의제였다. 3월17일에는 앞서 본 것처럼 “일본의 행태는 해방의 역사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NSC 상임위원회 성명이 나왔고, 18일 저녁에는 대통령이 직접 전 주일대사들과 문정인 동북아시대위원장, 관련 부처 장관을 초대해 만찬을 열고 관련 주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이 무렵 NSC 정책조정실에는 이와 관련해 일본 문제에 경험이 풍부한 외교관들을 중심으로 태스크포스팀이 구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3월20일 청와대를 예방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에게 노 대통령이 예정시간을 한참 넘겨가며 독도 문제를 ‘강의’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부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이 자리에서 한 말은 단순한 ‘역사 강의’가 아니라 미국 정부에 이 문제와 관련해 분명한 의견을 촉구하는 강도 높은 것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라이스 장관은 이 자리에서는 물론 이후 기자회견에서도 독도 문제와 관련해 분명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 뒤 노 대통령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한일관계 관련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올리고 “‘외교전쟁’에 가까운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언급한다. 한일관계의 본격적인 긴장상태가 공식화하는 시점이었다. 한 NSC 관계자는 “이때가 비로소 대통령이 상황인식을 완성하고 결심을 굳힌 때인 것 같다”고 전했다.

    ‘선의’의 한계

    노 대통령은 그간 일본을 향해 몇 차례 유화적인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지난해 7월 말 제주도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 당시 “임기 동안에는 한일 과거사 문제를 공식 의제나 쟁점으로 제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언급하는가 하면, 12월 일본 이부스키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는 “한국이 자꾸 역사 문제를 끄집어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할 때 한일 우호친선에 도움이 될지 다소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의에 의한 외교’라는 대통령의 의지는 일본 정부 관계자들의 반복되는 망언과 독도 관련 움직임, 역사왜곡 등을 통해 철저히 무시당했다는 것이 청와대의 인식이다. 더욱 강경한 자세로 직접 문제를 제기하고 긴장을 감수하면서라도 싸워야 일본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뿌리뽑을 수 있다는 인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이와 같은 방향전환 역시 ‘전략적 관계’와 ‘숙명적 관계’의 틀 속에서 분석해볼 수 있다. 상당기간의 관계악화와 그로 인한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일본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는 논리다. 더욱이 ‘전략적 관계’인 미국과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숙명적 관계’인 일본의 탈바꿈을 좌시할 경우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 일본이 계속 우경화한다면 ‘동북아 평화체제’라는 지향점을 도저히 공유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한편 ‘선의에 의한 외교’가 갖는 한계를 절감한 것은 북핵 문제와 관련한 미국과의 줄다리기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고 관련 부처 당국자는 설명한다.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 등을 통해 우리 정부가 ‘선의’를 보였지만 미국은 회담 재개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청와대 내부에서는 한미 간의 긴밀한 공조, 특히 다른 사안에서 미국측을 배려함으로써 북핵 문제를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그간의 전략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는 대통령의 생각과도 거리가 멀지 않았다. 참모들이 권하는 대로 해서 제대로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얼굴 붉히더라도 할말은 하는 외교” “따질 것은 따지는 외교” 등의 발언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분석이다.

    한 사람의 고민?

    이와 같은 상황인식을 반영해 전체적인 그림으로 나온 것이 바로 3월22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나온 ‘동북아 균형자’ 발언이라고 정부 당국자는 전했다. 여기에는 장차 중국과 일본이 동북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형국이 될 공산이 큰데, 동북아에서의 전략적 유연성 인정이나 일본의 우경화 좌시는 필연적으로 이 갈등구조에서 한국이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동북아 균형자론’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함으로써 분쟁을 막고 동북아에서 협력의 질서를 만드는 주창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참여정부가 동북아 질서의 최종 지향점으로 밝혀온 다자안보공동체 구상으로 연결된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와 같은 다자안보기구를 지역 내에 형성함으로써 평화체제 구축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사실 다자안보공동체 형성을 통한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표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간에는 이러한 목표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모멘텀 이후의 과제로 제시돼왔지만, 북핵 문제가 장기화하고 주변 안보상황이 긴박해짐에 따라 그 준비작업을 먼저 시작하는 것으로 선후가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 정부 당국자의 설명이다.

    청와대 관계자들의 발언을 종합하면 앞서 살펴본 상황변화 외에 대통령이‘결심’하게 된 부수적인 배경으로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첫째는 지난해 탄핵정국 돌파와 총선 압승 이후 회복된 자신감, 둘째는 2년간의 경험과 고민을 통해 외교안보 분야에서 얻은 자기확신, 마지막으로는 임기 3년차를 맞이하는 지금까지 외교안보 분야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현실 등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동북아 균형자론’의 가장 큰 문제는 이처럼 논의의 상당 부분이 대통령 한 사람의 생각을 통해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참모들이나 관련 부처의 역할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사전에 충분한 검토나 전략적 로드맵을 완성하고 공식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문제는 한일관계보다는 전략적 유연성이나 균형자론과 관련된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외교부 직원의 1%도 전략적 유연성 발언이나 균형자론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와 같은 관측에 대한 청와대 관계자들의 공식설명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종석 NSC 사무차장은 4월14일 ‘중앙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동북아 균형자론’의 작성과정과 관련해 “노 대통령과 참모들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동북아시아 구조, 정세,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 미래 비전을 집중 토론했다”고 밝혔다.

    엇갈리는 설명들

    그러나 이는 학계를 중심으로 ‘균형자’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과 혼선만 살펴봐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학문적으로 볼 때 균형자(balancer)라는 말은 17, 18세기 유럽을 관찰하며 형성된 ‘세력균형이론’에서 나온 것으로, 국가간 군사력의 균형이 깨질 때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고 힘의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이 국가 저 국가를 옮겨 다니면서 군사연합을 바꾸어 균형을 맞추는 나라를 의미한다. 이러한 틀에 맞춰 참여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을 읽으면 ‘한국이 미국을 떠나 중국에 붙는다’는 식의 해석이 나오게 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균형자론에 대한 청와대의 설명이나 인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174쪽 긴급좌담 ‘동북아 균형자론 어떻게 볼 것인가’ 참조). 그러나 이렇듯 중대한 외교안보 사안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 그대로 사용된 것은 사전검토가 충분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미리 문제의 소지를 제거하는 과정이 부족했거나 혹은 아예 없었던 것 아니냐는 반문이다.

    비슷한 문제는 일부 언론에서 사용한 ‘남방 3각동맹 탈피’라는 용어를 둘러싸고도 발생한다. ‘동북아 균형자론’이 나온 직후 몇몇 청와대 관계자는 “용어상 문제가 있지만 굳이 반박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일정 부분 부합하는 면도 있다”고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이후 다른 관계자들은 공식적으로 이 말이 잘못된 것이라고 부인하고 나섰다. 한 마디로 ‘동북아 균형자론’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 사이에서도 인식이 엇갈리고 있는 것.

    실제로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발언 이후 다양한 경로로 언론과 접촉해 비공식 브리핑을 가졌지만, 서로 뉘앙스가 다른 대목을 여럿 확인할 수 있었다. 한 관계자는 균형자론을 북핵문제와 연관시켜 설명하고 다른 관계자는 이를 부인하는 식이다. “동북아 균형자론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대통령 본인에게 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이러한 혼선 때문이다.

    특히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동북아 균형자론’에 관해 해설한 자료는 3월30일 NSC 사무처가 발표한 개괄적인 내용의 한 장짜리 설명서가 전부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발간된 ‘동북아 평화체제’나 2004년 3월 나온 ‘평화번영과 국가안보’처럼 수십쪽짜리 책자로 외교안보정책 기조를 설명해온 것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북아 균형자론’이 매우 긴박한 상황인식에서 나온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이 앞서서 문제를 제기하면 정부 당국자들은 겨우겨우 따라가는 형국이다. 이는 3월30일 업무보고에서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외교부의 역량이 미치지 못할 때 대통령께서 명쾌한 지침을 주셔서 앞길을 가르쳐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한다”고 한 언급만 봐도 분명해진다. 사실 ‘동북아 균형자론’은 ‘새로운 비전이 충분히 준비됐다’는 내부 판단보다는, 전략적 유연성이나 일본의 우경화 가속화 같은 상황으로 인해 대통령이 나서서 급박하게 공개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전했다.

    ‘전략지도’라는 말

    ‘동북아 균형자론’에 담긴 절박한 상황인식에 충분히 공감할 만한 대목이 있음에도, 일정부분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동북아 균형자론’의 파급효과나 파장을 사전에 충분히 분석하고 그 대응책을 체계적으로 준비한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앞으로의 ‘로드맵’이 확인되지 않는 것이다.

    외교부는 말할 것도 없고 NSC 관계자들 역시 “(로드맵은) 지금 작성하고 있다”고 말할 뿐, 구체적인 문서가 ‘동북아 균형자론’ 발언 이전에 보고된 적은 없다고 전한다. ‘동북아 균형자론’의 지향점이라는 ‘동북아안보공동체’와 관련해서도 그 구체적인 개념 적용을 담당하는 동북아시대위원회의 보고서는 4월 초순까지 대통령에게 제출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초기 2년을 돌아보면 외교안보정책에서는 이전 정부와 크게 다른 점을 보여주지 못했다. ‘동북아 균형자론’을 기점으로 새로운 비전을 마련하려 했다면, 지난 2년간 내부적으로 이를 충분히 검토하고 단순한 방향이나 원칙 수준이 아니라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을 수립한 뒤, ‘자 이제 준비가 완료됐으니 시작해야겠다’는 식이어야 했다는 비판이 남는다. 이와 관련해 한 청와대 안보관련 자문위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애초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NSC를 설계한 것은 바로 그러한 고민과 준비를 맡을 조직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지금의 NSC는 그 기능을 충분히 수행해내지 못한 면이 있다. 그동안 참여정부의 외교가 강온 전략을 오가는 듯 보인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대통령이 요즘 자주 사용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전략지도’라는 말이다. (정해진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어떤 장애물이 예상되는지, 이것을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지, 그 과정에 감수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등을 미리 점검하고 분석하는 것을 말한다. 아직까지 ‘동북아 균형자론’에서 확인할 수 없는 것, 그렇지만 국민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그 전략지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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