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압제에 항거하고 독재에 저항하며 써내려간 자유·정의 100년사

  • 글: 성기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5-04-22 1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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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촌 김성수 선생(오른쪽)이 내세운 ‘교육구국’이라는 고려대학교의 건학이념은 일제 식민통치는 물론 광복 후에도 좌우갈등과 민족분단, 독재정권의 탄압 등 무수한 시련에 도전하면서 100년 역사를 지탱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 2005년 5월5일 고려대 개교 100주년에 즈음해 그 피어린 史草를 펼쳐본다.
    압제에 항거하고 독재에 저항하며 써내려간 자유·정의 100년사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이하 보전)가 설립된 1905년,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탈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을 묵살하고 2차에 걸친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고문(顧問) 정치를 감행함으로써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근대적 지식과 실력을 갖춘 인물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대두됐다. 특히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이 절실해졌고 보전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지어졌다.

    보전을 설립한 이는 대한제국의 내장원경(內藏院卿)이던 이용익 선생이다. 내장원(內藏院)은 대한제국의 황실 재정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보전 설립에 고종 황제의 의지가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당시 ‘황성신문(皇城新聞)’에는 ‘고종 황제가 보전을 특립(特立)하였고 재정 지원을 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보성전문학교의 ‘보성’이라는 이름을 고종이 하사했다는 사실도 근현대사에서 고려대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고려대는 바로 이러한 점을 일제가 식민지배를 위해 세운 관학(官學)이나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여타 사립학교와는 다른 건학 정신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보전이 설립된 직후부터 고려대가 걸어온 길은 순탄한 적이 별로 없었다. 당장 설립자 이용익 선생이 을사조약 체결 후 해외로 망명하면서 경영난에 빠져버렸다. 고종의 최측근 중 한 명인 이용익 선생은 1905년 9월 고종에게서 모종의 임무를 부여받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 러시아 등을 돌며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벌이다가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망했다.



    이용익의 망명 직후부터 보전 경영의 실질적인 책임은 손자 이종호에게로 넘어갔다. 이종호는 안창호, 이동휘 등이 주도한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에 적극 참여했을 정도로 독립운동 진영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그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를 보낼 때도 자신의 집에서 안창호 등과 회합을 가졌을 정도로 독립운동을 깊숙이 후원하고 있었다.

    압제에 항거하고 독재에 저항하며 써내려간 자유·정의 100년사
    2대 교주(校主)인 이종호에게 학교가 넘어간 이후에도 황실은 계속 재정을 지원했다. 그러나 반일세력과 황실의 잦은 연락을 감지한 일본이 황실 재산을 정리해 국고로 이관함으로써 황실을 무력화하려 했다. 이렇게 일본이 민족교육의 자금줄을 죄면서 한때 보전의 관립화(官立化)설도 제기됐다.

    그러나 학생들의 저항 때문에 관립화 기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문제는 1910년 경술국치에 즈음해 교주 이종호가 해외 망명길에 오르면서 생겨났다. 이 당시에는 보전 1회 졸업생이 중심이 돼 천도교측의 의암 손병희와 꾸준히 접촉한 끝에 그가 경영 책임을 이어받음으로써 일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3·1 독립운동의 핵심인물인 손병희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됨으로써 보전은 다시 한 번 난관에 봉착했다.

    그 후 1921년에 천도교와 김기태, 김원배 등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경영의 모체가 된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가 설립되고, 다음해 4월 조선교육령에 의해 전문학교 인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경영의 재정적·법적 기반을 굳혔다.

    仁村과 民立대학의 꿈

    약 10년이 지나 1929년에 비롯된 세계적 경제공황의 여파로 보전은 또다시 심각한 재정난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곤경에서 고려대를 건져내 오늘날과 같은 발전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 1932년부터 경영 책임을 맡은 인촌 김성수 선생이다. 당시 김성수 선생은 이미 중앙중학교와 동아일보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1932년에 운영난에 처한 보전을 인수한 인촌은 민립대학의 꿈을 펴기 위해 북악산 기슭, 현재의 성북구 안암동에 새 교사(校舍)를 세웠다. 이로써 ‘민족을 위한 민족의 대학’을 설립한다는 그의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다.





    압제에 항거하고 독재에 저항하며 써내려간 자유·정의 100년사

    1960년 4월18일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해 3·15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이고 있는 고려대생. 이 시위 이후 학교로 돌아오던 고대생들이 깡패에 피습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4·19혁명의 도화선이 타오른다.

    실제로 재단에 출연한 것은 인촌이 아니라 그의 양부 김기중과 생부 김경중이다. 김기중은 500석 규모의 전답과 6000여 평의 대지를, 그리고 김경중은 5000석 규모의 전답을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기증함으로써 재정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교육구국(敎育救國)’을 앞세운 인촌의 대학 설립 의지는 ‘민족적 대사업’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3·1운동 직후 거족적으로 일어난 민립(民立)대학 설립 운동이 일본의 압력으로 실패하자 인촌은 자력으로라도 민립대학을 설립할 뜻을 품었다.

    인촌은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한 직후에는 구미 각국의 대학 시설과 운영 방식을 살펴보기 위해 무려 2년간의 해외 시찰에 나섰다. 이 과정에 인촌은 영국의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를 보전의 이상으로 삼았고, 고려대 본관 건물(사적 285호)은 미국의 듀크 대학 건물을 참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촌은 훗날 부통령까지 지낸 정치인답지 않게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검소하고 소탈한 면모를 보여 많은 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43년 보전에 입학한 이중재 전 의원은 “입학원서를 받으러 가던 날 원서 교부장소를 몰라 교정에서 잡초를 뽑고 있던 노인에게 길을 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당시 교장인 인촌이더라”고 회고했다. 그만큼 그에게는 카리스마보다 인(仁)과 덕(德)으로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는 말이다. 말수가 적으면서도 탁월한 용인술을 보여준 인촌의 풍모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교정 풀 뽑던 仁村

    게다가 인촌의 용인술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4·19혁명 당시 고려대 학생처장을 지낸 현승종 전 국무총리는 “교수들이 좌우로 갈려 격론을 벌이다 분위기가 과열되더라도 발언을 자제시키기보다는 ‘자유토론을 계속하라’며 격려하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1940년경에는 고려대를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으로 승격시키려 애썼으나 오히려 일제의 탄압만 더해질 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말기로 접어든 1944년 4월에는 드디어 학교 이름마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됐고, 이른바 해외 개척을 위한 실과교육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광복 후 인촌의 오랜 숙원은 마침내 달성되어 1946년 보전을 기초로 하여 정법대학·문과대학·경상대학의 3개 단과대학으로 편성된 종합대학으로 ‘고려대학교’를 새로 설립했다.

    6·25전쟁 중에는 초대 현상윤 총장이 납북되고 학교도 잠시 그 기능을 잃었으나 1951년 피란지 대구에 임시교사를 마련하고 유진오씨가 총장서리에 임명되어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피란 중에도 고려대는 이학계의 학과와 농과대학을 신설하는 등 규모를 확장했고, 1953년 8월 환도한 뒤부터 종합대학으로서 기구를 확충하고 교육의 내실화를 위해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자유·정의·진리’로 대표되는 고려대의 교육이념은 1955년 개교 50주년을 맞으면서 탄생했다. 이는 ‘교육구국’이라는 건학정신을 계승하고 인간성과 진리라는 보편적 휴머니즘 정신을 담아 ‘세계 속의 한국 대학’으로 나아가겠다는 지향성을 분명히 한 계기였다는 것이 고려대측의 설명이다.

    6·25 전쟁 이후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은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대통령 연임의 길을 열어놓았고, 자유당은 권력남용과 야당 탄압으로 국민적 지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이 3·15 부정선거를 일으키고 그해 4월 마산에서 발견된 김주열군의 처절한 죽음이 알려지자 국민의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구 지역의 고교생 시위를 제외하고는 서울에서 대규모 항쟁이 일어날 조짐은 별로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 당시 ‘고대신문’은 ‘행동성이 결여된 기형적 지식인을 거부한다’는 사설을 내보내 학생들에게 ‘학문을 한다는 것을 핑계로 사회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말 것’을 촉구했고, 고려대생들은 각 단과대학 대표들을 중심으로 ‘거사’ 준비에 나선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이른바, ‘4·18의거’의 시작이다.

    1960년 4월18일.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는 이 악랄한 현실을 어찌 방관하랴’(당시 4·18 선언문 일부)고 외치며 거리로 나선 고대생의 행렬은 1000명을 훌쩍 뛰어넘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뚫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한 학생들은 당시 유진오 총장의 설득으로 학교로 돌아오던 도중 깡패들에게 피습당한다. 이른바 고대생 피습사건은 4·19혁명의 직접적 동인을 제공하는 한편, 1970~80년대로 이어지면서 고려대가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학생운동의 선봉에 서는 계기를 마련한다.

    1970년 50대의 젊은 교수 김상협이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캠퍼스에는 새로운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김 총장은 ‘지성과 야성을 겸비한 전인적 인간의 형성’을 고대생의 지표로 내세웠고 이는 곧 1970년대 초반 고대생들의 내면을 지배하는 정신적 원천이 되기도 했다. 이 당시 고려대는 ‘불이 꺼지지 않는 24시간 살아있는 대학’을 내걸고 교육개혁에도 박차를 가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에는 유신반대 운동이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1호부터 9호를 선포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강제로 탄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와중에 1975년 4월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해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리고 교내 시위와 집회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학교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사태가 발생한다. 긴급조치 7호는 한 대학의 시위를 이유로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이를 통해 대학의 문을 닫게 한 최초의 사건이다.

    교수 시국선언의 시발점

    1970년대 들어 고려대의 가장 큰 변화는 뭐니뭐니 해도 우석학원을 합병해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이 과정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이 탄생했다. 1980년에는 조치원 분교(현 서창 캠퍼스)를 인가받아 제2 캠퍼스 시대를 열었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대학은 학원자율화 열기에 휩싸였다. 교수협의회가 결성됐고 총학생회가 부활됐다. 1985년에는 당시 김준엽 총장이 민정당사 농성 학생 처벌과 기말시험 거부사건에 대한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문교부와 갈등을 빚은 끝에 사표를 낸 사실이 알려지자 정경대, 문과대 교수들과 학생들이 사학에 대한 문교부의 교권 침해를 성토하며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1987년 6월항쟁에서도 고려대는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 4·13 호헌조치 발표 직후 고려대 교수 30명이 서명해 발표한 ‘개헌 문제에 관한 우리의 견해’라는 시국성명서는 교수 시국선언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1990년대 들어서는 연구중심 대학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내걸고 국제학술교류를 늘리고 연구지원 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인촌 김성수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인촌기념관을 개관하고 산학연 종합연구단지(Korea Techno Complex)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 초의 일이다.

    서구에 비해 일천하기 짝이 없는 우리 대학의 역사에 비춰볼 때 고려대의 100년 역사는 교육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1905년 창립 당시부터 고등교육기관으로 출발한 고려대는 100년의 역사를 온전히 채운 한국 최초의 대학이라고 일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대는 지난 2000년부터 100년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후 자료 수집과 정리에만 2년을 투자했고 2년의 집필 기간을 거쳤다.







    이렇게 방대한 작업을 거쳐 펴낼 100년사 관련 자료는 모두 14종 16권이나 된다. 3권으로 펴낼 ‘고대 100년사’는 200자 원고지 1만5000매 분량으로 2400쪽에 이른다. 그 밖에 ‘고대 법대와 한국법학’ ‘고대 문화사’ ‘고대 학생운동사’ 등 8종이나 되는 각 부문사도 눈길을 끈다. 고려대의 100년사 정리 작업은 척박한 우리나라 대학사의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데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고려대가 ‘행동하는 지성’, ‘지성과 야성의 조화’, 그리고 ‘자유·정의·진리’ 등과 같은 교육이념을 내세우며 독자적 학풍을 형성해온 것도 ‘교풍(校風) 부재’의 한국 대학 현실에서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는 고려대 출신 인사들이 그동안 사회 각계에서 커다란 응집력을 갖고 활동해온 것과도 무관치 않다.

    그러나 고려대는 이제 과거의 이러한 역사를 더이상 ‘기득권’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최근 대학 사회에 화제를 뿌리고 있는 ‘글로벌화 전략’은 그러한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가장 보수적인 색채를 띠던 ‘100년 역사’의 학교가 한국 대학의 ‘변화와 개혁’을 이끌겠다고 출사표를 던지고 나선 것이다. 100주년의 역사를 또다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긴 고려대의 미래화 전략이 어디로 향할지 관심을 모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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