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日 역사교과서, 전범(戰犯) 후손이 만든 왜곡의 전범(典範)

한국, 일본 식민지배 덕분에 타율과 종속의 역사 청산?

  • 글: 안병우 한신대 교수·국사학 bwahn@hanshin.ac.kr

    입력2005-04-22 1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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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역사의 시작은 고조선이 아니라 낙랑군이다’
    • ‘일본의 안위가 위태로워졌기에 아시아를 침략했다’
    •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
    • 4월5일 일본 문부과학성이 검정한 후소샤(扶桑社)판 역사교과서의 역사 날조 사례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日 역사교과서, 전범(戰犯) 후손이 만든 왜곡의 전범(典範)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는 4월5일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정부가 교과서 검정제도를 이용해 우경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이 거세다. 한국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하 새역모)이 만든 교과서는 몇몇 문구를 수정하는 정도로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한국사의 일부를 잘못 서술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속에 도사린 역사관이 더 심각한 문제다. 새역모의 교과서는 역사 교육을 통해 침략전쟁을 긍정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의식을 심어주고, 그 결과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 발전을 부정하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역사왜곡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다. 우리는 한국사의 자주성을 옹호하려는 폐쇄적·소아적 민족주의 관점에서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아니며, 일본의 장래와 동아시아 전체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문제로 삼는 것이다.

    일본 역사교과서의 한국사 왜곡은 그 뿌리가 매우 깊다. 1980년대 초반 우익이 제2차 교과서 공격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반발을 사서 교과서를 만들 때 이웃 국가를 배려한다는 근린제국 조항이 만들어지고, 일제의 주변국 침략 사실이 교과서에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난징 대학살은 1984년 중학교 교과서부터, 군위안부는 1994년 고등학교 교과서부터 차츰 수록되기 시작했다.

    교과서 개선에 위협을 느낀 자민당은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에 대한 서술의 총괄적인 검토를 목표로 역사검토위원회를 설치하고, 1995년 8월 검토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론은 ‘대동아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자존·자위의 전쟁이며 아시아 해방전쟁이었고, 일본은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난징 대학살과 위안부 등은 날조’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의 교과서는 있지도 않은 침략이나 가해 사실을 서술하고 있어 새로운 ‘교과서 분쟁’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역사인식을 국민의 공통인식으로 만들기 위해 학자들이 국민운동을 전개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결론에 입각해 1996년 제3차 교과서 공격이 시작됐다. 운동의 중심은 자유주의사관연구회였다. 이들은 교과서 공격에 그치지 않고, 아무것에도 구애하지 않는 역사관을 반영해 새 교과서를 직접 발행하겠다는 목표를 내걸고 1997년 1월 새역모를 결성했다.

    비역사학자들이 결성한 새역모

    새역모의 핵심은 역사학자가 아니다. 초대 회장 니시오 간지(西尾幹二)는 전기통신대학의 독문학 교수이고, 핵심인물인 후지오카 노부카쓰(藤岡信勝)는 도쿄대 교육학 교수였고, 지금은 탈퇴했지만 선전부장 노릇을 한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善紀)는 저명한 만화가다. 의식만 치열한 비역사학자들이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새역모의 역사관은 자유주의사관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들은 일본의 역사관을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고 규정한다. 자학사관은 패전 후 승전국 미국이 강제한 죄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며, 좌익이 그러한 역사관을 전파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죄의식에서 해방된 아무것에도 구애하지 않는 역사관, 즉 자유주의사관을 갖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새역모의 역사관은 실제로는 황국사관의 재판(再版)이다. 그들은 천황을 중심에 놓고, 국가주의를 견지하며,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에 걸친 자국의 침략과 지배의 역사를 찬양한다. 고대사에 진무(神武)천황에 관한 설화를 강조하고, 교과서의 대미를 쇼와(昭和) 천황 인물 칼럼으로 장식함으로써 천황을 역사의 중심에 놓았다. 그 칼럼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국민과 함께 걷다

    종전 직후 천황과 처음 회견한 맥아더는 천황이 목숨을 구걸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황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는 국민이 전쟁 수행에 즈음하여 행한 모든 결정과 행동에 대해 전체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을 당신이 대표하는 여러 나라의 재결(裁決)에 맡기기 위해 방문했다”는 것이었다. 맥아더는“나는 커다란 감동으로 흔들렸다. 죽음을 수반할 정도의 책임, 분명히 천황에게 돌아가서는 안 될 책임을 떠안으려는, 이 용기에 가득찬 태도는 나의 뼛속까지 움직였다”(‘맥아더 회상기’)고 쓰고 있다. 패전 후 천황은 일본 각지를 순행하며 일본의 부흥에 힘쓰는 사람들과 친히 말씀을 나누고 격려하셨다. 격동하는 쇼와 시대를, 국민과 함께 걸으신 생애였다.

    침략과 전쟁을 찬미하는 모습은 이번 개정판에서 새로 설정한 ‘역사의 명장면’ 5개 가운데 4개가 전쟁에 관련된 것이라는 점, 가미카제 출격을 환송하는 여학생 사진을 게재한 것, 러일전쟁에 무려 4쪽을 할애하여 자랑한 것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다.

    새역모는 식민사관으로 한국사를 바라본다. 식민사관은 일본이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역사관으로,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이 두 축을 이룬다. 한국은 고대로부터 자율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중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며, 조선 후기까지 고대 사회의 수준에 머무르며 스스로 근대화할 능력을 갖지 못했는데, 조선의 근대화가 일본의 역사적 사명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곧 식민사관이다.

    타율성, 종속성 강조

    특히 새역모의 교과서는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서술됐다. 부록으로 실은 연표에 고조선은 없고 낙랑군을 제일 첫머리에 적어 한국 역사가 낙랑군에서 시작한 것으로 기술했다. 이는 한국 역사가 중국이 설치한 군현의 지배에서 비롯됐다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별로 관계가 없는 대방군을 ‘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외전의 각주에서 설명하면서, 그 중심지를 서울 근처라고 했다(27쪽 이하는 모두 신청본의 내용). 그러나 대방군의 중심지는 황해도 봉산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리고 지도에선 낙랑군이 한반도 서부 한강 남쪽까지 영역을 확장한 것으로(26쪽) 그려놓았다.

    타율성과 종속성을 강조하는 관점은 임나일본부설에서 볼 수 있다. 한반도 남부에 야마토 조정의 거점인 임나가 있었다고 여러 곳에서 서술했는데, 검정과정에서 ‘야마토 조정의 거점’이라는 표현은 삭제됐다. 그러나 여전히 임나일본부설을 바탕에 깔고 있다. 임나에 관한 서술은 분량이 늘고, 항목별 제목(‘신라의 대두와 임나의 멸망’ ‘백제를 도와 고구려와 싸우다’)까지 등장했으며, 내용도 보강했다. 지도에는 가야의 전 영역과 마한까지(전라도)를 임나로 표시하고 있다(32쪽). 한반도의 국가들을 중국의 조공국으로 표현했다. 본래 신청본에서는 신라는 당의 복속국(42쪽), 조선은 중국·청의 복속국(148쪽, 163쪽)으로 서술했는데, 검정과정에서 조공국으로 수정됐다. 2001년에도 조선을 복속국으로 표현했다가 자체 수정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새역모의 속내를 또 한번 드러낸 것이다.

    요컨대 새역모 교과서에 따르면 한반도의 북부는 중국의 지배 아래, 남부는 일본의 지배 아래 역사가 시작됐고, 한국은 중국의 조공국, 즉 속국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일제 강점기 식민사관의 타율성론과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사를 서술하는 것은 한국이 외국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국가임을 강조하여 일제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고, 식민지배를 통해 조선을 중국에서 해방시켜주었다고 강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선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정식 국호인 ‘조선’ 대신 ‘이조(李朝)’로 표현한 것과 조선을 오키나와 및 에조치(홋카이도)와 같은 항목에서 기술하여, 마치 조선이 오늘날 일본의 일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 데서 엿볼 수 있다. 즉 34절 ‘쇄국하의 대외관계’라는 장에 ‘조선 유구 하이지(朝鮮 琉球 蝦夷地)’라는 항목을 설정하고, 막부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단절된 국교를 회복한 사실과 장군이 바뀔 때마다 조선에서 통신사가 온 사실 등을 서술했다(106쪽).

    이러한 서술은 통신사를 조공 사신인 것처럼 규정하는 것과 맞물려 조선이 일본의 속국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뿐 아니라 오키나와나 에조치처럼 메이지유신 후에 일본 영토가 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대단히 고약한 의도를 깔고 있다.

    임진왜란은 여전히 침략이 아니라 ‘출병(出兵)’으로 표현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 사람들이 당한 피해에 관한 서술을 검정 신청본에는 모두 삭제했다가 검정과정에서야 다시 살려냈다. 새역모의 전쟁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새역모 교과서에는 일본의 안위가 위태로워졌기 때문에 아시아를 침략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조선반도와 일본’이라는 칼럼이 그러한 역사인식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칼럼에 의하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조금 떨어져 바다에 떠 있는 섬나라’ 일본의 독립과 ‘일본을 향하여 대륙으로부터 팔처럼 돌출되어 있는’ 조선반도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두 나라의 지리적 관계는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옛날부터 조선반도에서 중국 등의 선진 문명이 일본에 전해졌다.

    그러나 몽골처럼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이 조선반도에 도달한 적도 있기 때문에 일본은 중국과 조선반도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메이지 신정부는 정권수립 후 곧 조선과 국교를 맺으려고 했지만, 청나라에 조공하고 있던 조선은 외교관계 체결을 거절했다.

    日 역사교과서, 전범(戰犯) 후손이 만든 왜곡의 전범(典範)

    4월9일 한 중국 시민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항의시위를 벌이던 중 베이징 주재 일본대사관에 돌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은 청나라만이 아니었다. 청나라보다 더 두려운 대국이 부동항을 찾아서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로 러시아였다. 조선반도가 동방에서 영토를 확대하고 있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다면 일본을 공격하는 절호의 기지가 되고,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해진다고 생각했다. 조선이 다른 나라에 침범당하지 않는 것은 일본의 안전보장에도 중요했으므로 근대화를 시작한 조선에 군제(軍制)개혁을 원조했다. 그렇지만 청은 조공국의 계속적인 소멸을 중국 중심 동아시아 질서의 붕괴 위기로 파악했고, 최후의 유력한 조공국인 조선만은 잃지 않으려 일본을 적으로 간주하게 됐다. 그리하여 일본이 청,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됐다(163쪽)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청이 조선을 잃지 않으려 했고, 러시아가 조선을 지배하려 했기 때문에 전쟁을 하게 됐다는 논리다. 일본은 전쟁 책임이 없고, 조선의 문호개방과 근대 개혁을 지원한 ‘선한 이웃국가’였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새역모 교과서는 침략전쟁을 방위전쟁으로 왜곡할 뿐만 아니라 전쟁 자체를 미화했다. 러일전쟁에 대해 “근대국가로 탄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유색인종의 나라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대국 러시아를 이긴 것은 식민지가 된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줬다”(168쪽)고 서술했다.

    태평양전쟁도 일본에 대한 미국과 서구의 경계와 압박, 인종차별 때문에 일어난 ‘자존자위’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미국은 문호개방, 기회균등을 외치면서도 일본이 독자적인 경제권을 갖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고, 중일전쟁에서는 장제스(蔣介石)를 공공연하게 지원했다. 일본은 석유 수입처를 찾아 인도네시아를 영유한 네덜란드와 교섭했지만 거절당했고, 미·영·중·네덜란드 4개국이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ABCD(미국·영국·중국·네덜란드) 포위망을 형성한 것이 태평양전쟁의 원인(201~203쪽)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일본의 승리가 동남아시아나 인도 사람들에게 독립의 꿈과 용기를 북돋워줬고, 구미 세력을 배제한 아시아인에 의한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전쟁의 명분으로 내걸게 됐다고 호도했다. 현지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구미 각국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의 군정에 협력했다(206~207쪽)는 서술도 빼놓지 않았다.

    이 부분의 서술은 2001년 교과서보다도 훨씬 개악된 것이다. 일본어 교육, 천황숭배와 신사참배에 대한 현지인의 반발, 베트남인 아사(餓死)사건 같은 불리한 사실은 일절 기술하지 않고, 패전 후의 배상과 대동아공영권론에 대한 비판도 싣지 않았다. 반면 새로운 자료를 보강해 식민지 해방전쟁의 이미지를 강화했다.

    새역모의 교과서는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지배로 인해 고통받은 사실과 저항한 사람들은 철저히 무시했다. “병합 후에 조선총독부가 철도와 관개시설을 정비하고 토지조사사업을 개시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노력했다”고 서술한 내용이 검정 과정에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이러한 일들을 한 것으로 수정되었다. 식민지에서 일본이 벌인 경제활동이 일차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필요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에서 식민지 개발을 미화했다.

    또한 한국인의 저항을 무시했다. 3·1운동 이후 한국인의 저항에 관해 전혀 서술하지 않아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상을 전달할 우려가 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실시된 전시 동원정책에 저항한 한국인의 움직임을 이전에는 조금이나마 언급했지만 이번에는 아예 빼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전시동원 정책에 관한 서술에서 강제성을 약화시켜 마치 한국인이 일본의 침략정책에 호응한 것처럼 묘사했다.

    ‘점유율 10%’를 노리며

    새역모의 당면 목표는 올해 교과서 채택 점유율을 10%까지 끌어올려 일본 교과서 시장에서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4년 동안 절치부심 노력했다. 2001년 채택전에서 참패한 후 조직을 개편해 니시오 간지가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고, 다나카 히데미치(田中英道)가 회장, 다카하시 시로(高橋史朗)와 후지오카 노부까쓰가 부회장이 됐다. 부회장을 늘려 체제를 보강한 것. 현 회장인 야기 히데츠구(八木秀次)도 이사로 취임했다.

    또한 회원 늘리기 운동을 전개했다. 매년 회원을 배로 늘려 올해에는 8만명을 확보, 채택전을 전개한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성공하지 못해 회원수는 오히려 계속 감소했다. 2003년 6회 총회 당시의 회원은 5회 총회에 비해 440여 명이나 줄었다. 그렇지만 ‘찬동자’는 70명이나 늘어 346명이 됐다.

    한편 새로 개교하는 중고일관교(中高一貫校)의 교과서 채택에 총력을 집중, 2002년 8월 에히메현(愛媛縣)에서 새역모 교과서가 채택됐다. 이에 고무되어 새역모는 이듬해 5월 ‘중고일관교대책본부(中高一貫校對策本府)’를 설치했고, 지난해 8월 도쿄에서 다시 채택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 지사가 적극적으로 지원한 결과였다. 새역모의 분위기는 고조됐고, 이를 올해 교과서 채택활동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들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북한을 악마로 만들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사건을 주권과 인권 유린행위로 규정하고, 야기 히데츠구 새역모 이사가 집필한 후소샤의 공민교과서에 이 사건을 서술했다.

    한편 검정제도와 채택제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는 작업도 추진했다. 검정기간에 신청본을 외부에 누출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조항을 신설하고, 채택과정에서 현장과 시민의 의견을 배제하며, 채택지구를 세분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이면에서 지방 교육위원회로 하여금 암암리에 새역모 교과서를 홍보하게 하는 작업도 진행해왔다.

    교과서 자체의 개선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교과서 자체에 문제가 많아 채택에 실패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개정 교과서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판형을 크라운판으로 확대하고 도판과 사진, 만화를 적극 활용했으며, 서술 기법의 향상을 꾀해 훨씬 세련된 교과서를 만들어냈다.

    교육기본법·헌법 9조 개정이 장기 목표

    새역모가 노리는 중장기 목표는 일본 우익의 목표와 일치한다. 교육기본법과 헌법 9조의 개정을 통해 보통 국가, 즉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일본의 교육기본법은 패전 후 미국이 만들어준 것이다. 군국주의 체제 아래 황국신민을 양성하던 전체주의 교육이념을 부정하고, 개인 중심의 교육관에 입각해 개개인의 발전과 성장을 중시하는 교육이념을 담고 있다. 여기에 근거해 학습지도 요령도 만들어진다.

    새역모는 이러한 교육기본법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교육기본법 개정을 추진하는 ‘새로운 교육기본법을 요구하는 모임’의 핵심이 바로 새역모의 임원과 찬동자들이며, 다카하시 시로 새역모 부회장이 사무국장이다. 이들은 교육과 교육행정에 대한 국가의 관여도를 높이고, 개인보다 집단과 국가를 우선하며, 남녀평등을 부정하고 전체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육기본법을 개정하려 한다. 이를 바탕으로 교육 내용을 결정하는 학습지도 요령도 우익의 주장대로 개악하려 한다. 교육기본법 개정은 연립여당인 공명당의 반대로 일단 유보됐지만, 이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포기하고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는 평화헌법을 개정해 군대를 보유하고, 자유롭게 해외에 군대를 보내 작전범위를 확대하며, 마침내 독자적 판단으로 전쟁을 할 수 있게 만들려는 것이 이들의 장기 목표다. 자민당은 올해 헌법개정안을 만들 예정이며, 개정안에는 천황의 존재와 군대 보유를 명시할 것이라고 한다. 헌법 개정을 주도하는 것은 자민당과 ‘일본회의(日本會議)’라는 우익단체인데, 새역모는 사실상 일본회의의 ‘역사분과’ 역할을 맡고 있다.

    헌법 개정과 군대 보유는 신(新)미일동맹을 바탕으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다시 패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 경제·군사 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의 대결 구도를 명확히 하고,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전략에 동참하려는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군국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01년에 참패한 이후 복수를 노리며 칼을 갈아온 새역모의 공격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마침 독도 영유권 문제와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동시에 불거져 우리 국민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두 사안의 중첩이 역사교과서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두 문제는 내적으로는 깊이 연관되어 있지만, 대응책은 달라야 한다. 독도 문제는 영토 문제로서 가부(可否)가 분명한 문제이고, 역사왜곡 문제는 공동 연구와 상호 협의 등을 통해 인식의 차이를 좁혀야 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후소샤를 비롯한 단체들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하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전략으로는 수정 요구와 채택 저지운동이 있다. 수정은 정부 차원과 민간 차원에서 모두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공개적인 수정 요구는 내정간섭이라는 비난을 초래할 수 있고, 2001년의 경우에서 보았듯 큰 효과도 없다. 정부는 비공개적으로 수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판단한다.

    이미 공식적으로 검정이 끝났기 때문에 이제 일본 정부에 수정을 요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출판사에서 자체 수정하도록 요구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은 학계와 시민단체의 몫이다. 수정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검정 통과본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문제점을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학문적 차원에서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계와 시민단체는 함께 4월 말에 수정을 요구할 계획이며, 각기 분석 작업을 진행해 4월11일 내용 분석 심포지엄을 열었다.

    학계는 한국사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등을 중심으로 역사학연구단체협의회를 조직하여 대응에 나섰으며, 여러 시민단체가 항의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성명을 발표하고 심포지엄이나 기자회견을 여는 것에서부터 항의집회를 개최하거나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하는 것까지 운동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2001년에 조직된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는 일본의 시민단체들과 협력해 2001년의 교과서 채택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으며, 그 성과를 바탕으로 올해의 채택전에 대비해왔다. 지난해 8월 한·중·일 3국의 시민단체 대표자들이 모여 전략회의를 개최했고, 1월에는 에히메, 히로시마, 도쿄, 오사카를 방문하여 전략을 숙의했다. 운동본부는 4월5일 검정 결과 발표에 맞춰 한·중·일 3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동성명서를 채택했다. 교과서 내용을 분석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수정을 요구한 후, 채택 국면에 들어가면 채택지구를 정밀하게 분석해 채택을 저지하기 위한 각종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그 가운데는 홍보물 제작과 배포는 물론 일본 전국 순회 캠페인, 자매결연을 하고 있는 한국과 중국의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단체를 활용해 일본의 지방자치단체에 해당 교과서를 채택하지 말도록 요구하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역사교과서의 왜곡은 채택 저지 운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결국은 한일 양국이 상호 이해를 증진하고 공통의 역사 인식을 가져야 해결할 수 있다.

    양국 정부가 2002년 3월에 구성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도 결국 그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교육과 교과서 문제를 다루지 못하는 원천적 한계를 안고 출범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사례에서 보듯 정부 차원에서 한일간 역사교육과 교과서 문제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검토하고, 교과서와 역사교육에 반영하게 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어렵다.

    2001년보다 유리하지 않다

    민간 차원에서는 역사교육을 주제로 다양하게 교류하고 있다. 역사 교사들이 여러 갈래로 한일간 교류를 지속해왔고, 서울시립대도 교과서 공동 개발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왔다. 역사학회와 한국역사연구회를 비롯한 한국의 대표적인 학회와 역사학연구회 등 일본의 대표적인 학회가 2001년 도쿄회의를 시작으로 매년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있고, 한일역사가회의도 2001년부터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차원의 상호 교류를 통해 학회간, 대학간 교류를 활성화하여 역사 인식의 차이를 좁혀감으로써 새역모 같은 우파 역사교과서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청소년과 교사 교류를 통한 상호 이해의 확대와 심화, 그리고 공동의 교과서 개발이나 교과서 서술의 기준을 마련하는 일은 장기적인 과제라고 하겠다. 운동본부는 2002년 3월 중국 난징(南京)에서 일본교과서의 문제점을 분석하는 학술회의를 개최하면서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근현대사 부교재를 개발하기로 합의하고, 작업을 추진해온 결과 올해 5월에 출판할 예정이다. 3국의 학자와 교사가 함께 쓴 최초의 이 교과서는 새역모의 교과서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올해 상황은 2001년보다 한국에 유리하지 않다. 일본의 정·관계와 언론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새역모를 지원하고 있으며,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 등으로 사회 전체의 분위기도 우경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와 학계, 시민단체가 각자의 위치에서 새역모 교과서 채택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와 시민단체, 그리고 중국과도 연계해야 하며, 국제사회의 여론에도 호소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채택전에서 성공한다면, 그것은 새역모에 타격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기본법과 헌법 개정 등 일본의 우경화 추세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증진하는 데에도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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