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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행정부, 6·25 이튿날부터 원폭 투하 검토

美 비밀문서로 본 6·25전쟁 원자탄 사용계획

  • 글: 이흥환 미국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트루먼 행정부, 6·25 이튿날부터 원폭 투하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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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주재한 트루먼은 다섯 가지 지시사항을 하달한다. 그 가운데 네 번째가 바로 “공군은 극동지역 소련 공군기지 전체를 쓸어버릴 수 있는(wipe out) 계획을 수립해야 함. 이는 실행을 위한 지시가 아니라 계획수립을 위한 지시임”이라고 되어 있다. 소련 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할 경우 핵 공격을 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였다. 서던캘리포니아대 역사학과의 로저 딩먼 교수는 ‘6·25전쟁 시기의 원자탄 외교(Atomic Diplomacy During the Korean War)’라는 글에서 “회의 참석자 가운데 누구도 대통령의 지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밴던버그는 자국 영토가 공격당하지 않는 한 소련이 드러내놓고 6·25전쟁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워싱턴은 중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북한은 러시아의 종속국이지 중국의 종속국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미국의 핵 능력은 소련을 능가했다. 미국은 핵폭탄 300여 개를 비축하고 있었고, 소련 내 목표물을 향해 핵폭탄 공격을 할 수 있는 폭격기도 29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소련이 1950년 말까지 비축한 핵폭탄은 10~20개였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 당시 미국은 본토 바깥으로는 한 대의 전략 폭격기도 내보낸 적이 없었고, 미 전략공군사령부(SAC·Strategic Air Command)도 모스크바에 대한 핵공격을 준비하는 데 최소한 3개월의 시간이 걸린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폭격기가 발진할 적절한 전진기지가 없고, 미 본토 바깥에서 작전하는 데 필요한 폭격기에 연료공급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즉각 사용할 수 있는 핵무기가 한반도 인근에는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트루먼 행정부는 6·25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이튿날부터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전쟁수행계획에 포함시켰으며, 이 계획은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로 바뀐 뒤에도 유지됐다. 6·25전쟁에서 원자탄은 언제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였지, 사용 여부의 문제가 아니었다. 원자탄의 사용시기와 방법, 사용지역(한반도 안이냐 아니면 중국이나 소련이냐) 등에 내부 이견이 있긴 했지만, 미 군부 지도부든 정치권 지도자든 원자탄이 군사·외교·정치적 면에서 6·25전쟁에 임하는 아주 유용한 도구라는 점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정치 드라마의 소도구



워싱턴에서 핵무기는 군사용 전략병기의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6·25전쟁에서 원자탄은 민주당 트루먼 행정부가 공화당 보수파와 맥아더를 상대로 펼치는 숨막히는 정치 드라마에서 써먹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소도구였다.

트루먼이 핵공격 계획 수립을 결정한 이후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핵무기 사용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합참 내부에서는 맥아더에게 권한을 줘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결국 브래들리는 합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트루먼의 백악관이나 애치슨의 국무부, 심지어 펜타곤 군부도 맥아더를 신뢰하지 않았다. 우선 대규모 병력 투입으로 6·25전쟁 확대를 주장하는 맥아더는 외교·군사전략에서 유럽을 우선시하던 트루먼 행정부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더구나 결정적인 전황이 아닌데도 맥아더가 핵무기를 사용하는 그릇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도 있었다.

한국에서의 원자탄 사용 여부 및 시기와 방법 등을 놓고 트루먼의 참모들은 심하게 엇갈리는 의견을 내놓았다. 국무부 정책수립팀(PPS·Policy Planning Staff)은 머리를 맞댄 끝에 “모스크바나 베이징이 전쟁에 개입해 군사적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 한해 원자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핵무기 비축고를 관장하는 특수무기 프로젝트 팀장은 “북한군에 의해 미군이 한반도에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소극적 사용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1950년 7월, 연합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나고,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키고 중국과대만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대만해협에 7함대를 배치시킨 전술도 별 소용이 없었다. 7함대 사령관은 중국의 대만 침공을 막으면서 동시에 6·25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불평했다.

7월 중순, 원자탄 사용을 줄기차게 주장하던 밴던버그 공군참모총장과 신중론을 펴던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함께 도쿄로 날아가 맥아더를 만난다. 콜린스는 이때 ‘군사목표물에 대한 원자탄 사용’이라는 제목의 작전참모부 보고서를 읽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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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흥환 미국 KISON 연구원 hhlee0317@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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