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쉰 넘어 빛 본 ‘대기만성’의 전형, 韓紙작가 전광영

“나를 향한 온갖 거부(拒否)가 나를 키웠다”

  • 글: 이지은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05-04-25 11:4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30년 가까운 무명 시절을 보내고 작품 한 점당 10만달러가 넘는 세계적 작가로 우뚝 선 사람. 후배들이 초대전을 할 때 대관 전시를 해야 했던 신세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오늘의 작가’가 된 사람.
    • 한지 작업으로 유명한 전광영 화백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대가’가 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늘 곁에서 발버둥치던 그를 우리가 애써 외면해왔는지도 모른다.
    쉰 넘어 빛 본 ‘대기만성’의 전형, 韓紙작가 전광영
    멀리서는 극히 절제된 미니멀리즘 작품으로 보인다. 마치 조약돌이 깔린 강변 같기도 하고, 가을날 누렇게 익은 논 같기도 하다. 삭막하게 갈라진 달 표면 같고, 아니면 구멍이 뻥뻥 뚫린 채석장 같다. 구획된 평면 속에 사방으로 뻗은 선과 색의 농담은 묘한 리듬감을 준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고서에서 나온 한지로 정성스럽게 싼 스티로폼이었다. 한자와 한글이 언뜻언뜻 보이는 이런 것 수천개가 캔버스에 빽빽이 붙어 있다. 서로 끌어당기듯 밀어내고, 튀어나오듯 파고든다. 그렇게 촘촘한 조각들에서 풍겨나오는 한국적인 정감이 아주 현대적으로 드러난다. 한지 작업으로 유명한 전광영(全光榮·61) 화백의 한지 오브제 ‘집합(Assemblage)’ 연작이다.

    이 연작에 세계는 열광했다. 해외의 미술평론가들은 “소립자를 연상시키는 개체들을 모아 화면을 이루는 동양적인 방법과 군집을 이룬 개체들에서 느껴지는 삶의 유비(類比)라는 서양철학이 더해진 작품”이라며 극찬했다. 보통 100호짜리 크기에는 7000여 개의 한지조각이 들어가는데, 한지를 쌀 때 사용하는 실 역시 한지를 꼬아 만든 종이실이다. 즉 한 작품을 만드는 데 7000번 싸고 꼬고 붙이는, 그래서 2만 번 이상의 수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순백의 공간에 대형 붓으로 뻘건 줄 두 개를 그어놓고는 완성됐다는, 극단적으로 단순한 미니멀리즘 작품에 허탈해한 사람들, 특히 서구인들은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이 같은 노력과 그 속에서 나온 진정성에 ‘오 마이 갓!’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놀라게 한 건 또 있다.

    “여기에 사용된 한지는 모두 100년은 된 고서에서 나온 것들이죠. 논어, 맹자, 법전, 의전, 시문이나 소설, 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들이 담겨 있어요. 이 작품 앞에 서면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나이 지긋한 선비부터 서당의 어린 학생까지, 애환 많은 아낙네부터 볼이 빠알간 규방 소녀까지 말이지. 그들의 손때가 묻은 책으로 만들었으니까요. 그 다양한 역사의 결과물들이 촘촘하게 한자리에 모인 거야. 이런 동양의 정신을 ‘집합’해서 쌌다고 말해주면 다들 감탄합니다.”

    이 작품은 30년 가까이 ‘안 팔리는 작가’로 살아온 전 화백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후배들이 번듯한 화랑의 초대를 받아 전시회를 열 때도 쌈짓돈을 털어 화랑을 대관해 작품을 발표해야 했던 그다. 하지만 ‘집합’ 연작을 선보인 1995년 이후 전혀 다른 인생 행보를 보인다.



    1995년 LA 국제전시회를 뜨겁게 달군 현지 언론의 반응, 1997년 시카고 아트페어(여러 개의 화랑이 한 곳에 모여 미술 작품을 판매하는 것) 매진, 이후 참가한 13회 아트페어 모두 전 작품 매진, 1999년 뉴욕 맨해튼 중심가 킴포스터 화랑과 전속작가 계약,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선정, 해외 개인전 다수 유치, 2006년 6월 세계 10대 갤러리 중 하나로 꼽히는 영국 런던 애널리 주다 갤러리에서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대규모 회고전 예정…. 현재 그의 웬만한 작품은 한 점 가격이 10만달러가 넘어가는데도 국내외 컬렉터들이 사지 못해 안달이다.

    “1997년 시카고 아트페어에서 처음으로 작품이 다 팔렸을 때 스태프들에게 저녁을 샀어요. 시카고에 있는 중국음식점엘 갔는데, 디저트로 포춘 케이크가 나오잖아. 그런데 그 안에 ‘오늘부터 너의 운명은 완전히 바뀐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었어요. 그후 늘 그 메시지를 지갑 속에 넣고 다녔습니다. 마치 부적처럼 나를 지켜주는 것 같거든.”

    아버지 가슴에 못박은 아들

    경기도 판교, 자그마한 야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작업실에서 만난 전광영 화백은 지갑에서 종이조각을 꺼내들며 잠시 회한에 잠기는 듯했다. 비주류에서 주류로 들어선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 같다는 그의 삶은 계속되는 거부와 끝없는 외로움, 그리고 실낱 같은 희망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거부는 아버지에게서 시작됐다. 세상에서 가장 천한 짓이 ‘딴따라’와 ‘환쟁이’라고 믿은 아버지는 환쟁이가 된 아들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분이셨어요. 내가 태어났을 땐 강원도 홍천에서 내로라하는 유지셨지. 벽돌공장을 크게 하셨는데 직원이 50여 명이나 됐을 만큼 규모가 꽤 컸어요. 외아들인 나를 안고 ‘잘 봐라, 앞으론 네가 이 공장을 경영할 것이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그런데 난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장래희망을 적어내라고 했을 때도 ‘화가’라고 썼지. 하지만 집에선 절대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였어요. 중학교 1학년 때 미술선생님이 내게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하니까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와 미술선생님을 혼냈을 정도였지. 아버지를 회유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실패했어요. 하지만 나도 고집이 있거든. 고등학교 졸업하고 무작정 홍익대 미대에 원서를 냈어요. 그렇게 아버지랑 완전히 틀어지게 됐지.”

    집안이 왈칵 뒤집어졌다. 아버지는 학비며 생활비를 한푼도 대주지 않았다. 그러면 돌아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4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조달했다. 또 그렇게 모은 돈으로 1969년 미국 필라델피아로 유학까지 떠났다.

    “미국에 있는 13년 동안 아버지와 전화 두 통, 편지 두 통 주고받은 게 전부였어요. 아버지는 돈을 보내주긴커녕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신 적도 없었죠. 한 번은 부둣가에서 막일을 하고 들어와 쓰러져 자는데, 전화가 온 거야. ‘헬로’ 하고 받으니까 아버지가 ‘이놈의 자식아, 뭐가 헬로야, 이 정신 나간 놈아!’ 하며 마구 퍼붓더라고. 아무 말도 안하고 듣기만 하다가 조용히 끊었지. 그날 밤 베갯잇을 눈물로 흥건히 적셨어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무명작가였던 전 화백은 생활고를 면하기 위해 미술학원을 운영해야 했고 그런 그를 아버지는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후에도 전시장을 찾기는커녕 아들이 그린 그림 한 점을 제대로 봐준 적이 없었다. 그런 시아버지에게 늘 잘했던 아내가 한번은 울먹이면서 “당신, 아버님 친자식 맞아?”하고 물어왔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2년 전 임종하기 전에도 끝내 그를 외면했다.

    “돌아가시기 두 시간 전에 당신의 손자인 내 아들에게 유언을 남기셨어요. 내 손을 뿌리치며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을 땐 ‘당신 가슴에 얼마나 피가 맺혔으면 저러실까’ 싶어 눈물이 왈칵 나더라고. 화가를 천직이라 생각하지만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니 ‘내가 과연 인생을 잘 살아온 것인가’ 싶었죠.”

    두 번의 자살 기도

    두 번째 거부는 미국 사회로부터였다. 전 화백에 대한 아버지의 거부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미국 사회의 거부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명문으로 꼽히는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그림을 그리려면 돈이 필요했다. 당장 끼니가 걱정이었다.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밤마다 쓰레기통을 뒤져 먹다 버린 빵 조각을 주워 모았다. 남의 입이 닿은 자리를 가위로 잘라내고 먹었다. 아내는 고맙게도 참 맛있게 먹어줬다.

    그래도 학교를 다닐 때는 나았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불법 체류자가 됐다. 영주권이 없어 늘 이민국을 피해 다녀야 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이민국에서 전화 한 통 걸려오면 월급도 못 받고 도망쳐야 했다. 그는 지금도 전화 기피증이 있다. ‘이민국입니다’ 하는 전화일 것 같아서다.

    변기와 빨래 건조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남의 집 지하실에 세들어 살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흙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지치면 그대로 누워 잠을 잤다. 어느 날엔가는 지하실에 빗물이 흘러들어와 그림이 망가진 채 둥둥 떠다녔다. 온몸에 맥이 탁 풀렸다. 살아갈 용기도 없었다. 첫아이가 황달에 걸려 여러 번 실신하는 데도 불법 체류자 신세라 병원에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전 화백 자신도 중병에 걸렸다가 간신히 회복했고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다.

    당시 그는 빛에 몰두했다. 빛의 영롱함과 색의 오묘함을 추상회화로 표현했다. 그런데 지나치리만큼 밝은 빛, 화사한 색에 집착했다.

    “그림이 침울해 보이면 대개 ‘걱정이 있냐’고 묻잖아요. 그런데 정말 미국에서 죽도록 고생할 때 그린 작품들이 모두 밝고 명랑했어요. 내 작품 속의 밝음이 내 내면의 욕망이었기 때문이죠. 눈을 뜨면 힘들고 괴로운데, 눈을 감으면 무지개를 볼 수 있었거든.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환상적인 꿈을 꾼 거지. 그 욕망들이 바로 밝은 빛, 구원의 빛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림이 좋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고 필라델피아와 뉴욕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뒤떨어지진 않았지만 앞선 예술을 따라가기에 급급했을 뿐 그만의 독특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그마한 동양 젊은이에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한계를 느꼈다. 한국으로 돌아가 자신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 싶었다. 내 나라에서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1982년, 전 화백은 유학을 떠난 지 13년 만에 귀국길에 오른다.

    국내 화단의 거부

    하지만 더 큰 거부, 너무도 뼈아픈 거부가 전 화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국내 화단으로부터의 거부였다. 그를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시절만 해도 계보라는 게 있었어요. 그 안에 끼지 못하면 안 되거든. 바로 화단의 이단아로 내몰리게 되죠.”

    그는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조선일보’ 정중헌 논설위원은 ‘화단의 이방인 전광영의 My Way’에 이렇게 썼다.

    쉰 넘어 빛 본 ‘대기만성’의 전형, 韓紙작가 전광영

    한 작품을 만드는 데 700번씩 싸고 꼬고 붙이는, 2만번 이상의 수작업이 필요하다. 이 같은 노력과 그 속의 진정성이 바로 세계인을 매료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해외유학파는 프리미엄이 붙던 시절이었으나 이마저도 그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그도 남들처럼 그룹전에도 참여하고 공모전 입상으로 이름을 얻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맥으로 다져진 조직의 틀 속에 들어가 위계질서에 순응해야 한다. 특히 그가 나온 미대는 국내 화단에서 수적으로 우세했고 조직도 막강했다. 그 조직의 리더는 전광영에게 자신의 인맥에 가담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몇 가지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것이 그를 화단의 이방인으로 내몰고 처절한 고독과 좌절을 겪게 할 줄은 그도 미처 몰랐다.”

    그럼에도 전 화백은 1978년부터 1990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열었지만 화랑이나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추상작품이다 보니 팔리지도 않았다. 당시 미술인 인명사전에조차 그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부끄럽지만 그땐 정말 미술가의 길에 들어선 것을 너무나 후회했어요. 아버지 밑에서 사업을 했으면 나도 벤츠 타고 폼 잡으면서 부사장 노릇이라도 했을 텐데. 나이도 경력도 떨어지는 후배가 정식 화랑에서 초대전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겨우 대관을 해서 전시를 했으니…. 그러다보니 주머니에 만원짜리 한두 장이 없어서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어. 집사람에게 미안했어요. 내가 돈이 없다고 하면 집사람이 어디서든 꿔가지고 왔거든.”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였다. 미국과 한국에서 모두 인정받지 못했다는 자괴심에 그는 정말 미술계를 떠날 생각을 했다. 아내에게 “이제부터 동대문시장에 나가 리어카 끌고 수건 장사라도 하자”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배수진을 친 후에 딱 한 번만 더 도전해보기로 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왜 안 되는지, 무엇을 하면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1989년, 부인과 함께 무작정 길을 떠났다. 6개월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자아 탐구에 몰두했다.

    “온양 민속박물관에만 서른 번 이상 갔어요. 넋 놓고 있다 보니 아낙네들이 방아 찧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노비들이 신세 한탄하는 소리도 들렸고. 제주도에 가선 똥통 앞에서 하루 종일 생각에 잠기기도 했죠. 그러면서 아, 내가 똥통이나 오줌통을 져나르는 한국 사람이구나, 그런 내가 자유의 여신상을 그린다고 했으니 누가 나한테 주목을 했겠나, 이젠 정말 내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갑자기 어린 시절 한약방을 하던 큰아버지댁 풍경이 떠올랐다. 한약방에 주렁주렁 달려 있던 한약 봉지. 약재를 넣은 다음 하나씩 정성스럽게 싸서 끈으로 매놓은 한약 봉지를 들고 가는 아낙네. 그 봉지 속 한약재를 정성스럽게 달이는 모습. 결론은 ‘정성’, 그리고 한국인만의 ‘정’이었다.

    “서양은 ‘박스문화’예요. 규격에 맞춰야 완벽한 모양이 나오지. 100온스 박스에 10온스 치약을 10개 넣으면 딱 맞아요. 하나도 더 넣을 수 없지. 하지만 보자기는 달라요. 더 들어갈 수도, 덜 들어갈 수도 있어요. 한국에는 전세계에서 유일한 보자기 문화가 있거든. 시집간 딸에게 친정어머니가 뭔가를 정성스럽게 한아름 싸주는 보자기, 그 속에 하나라도 더 담고 싶은 마음, 울퉁불퉁하지만 한없이 들어가는 정(情) 말이에요.”

    처음엔 신문지를 도톰하게 묶은 후 한지로 정성스럽게 쌌다. 제법 한약 봉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수천개를 만드니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스티로폼을 선택했다. 가볍기도 했지만 썩지 않는 만큼 오래 보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스티로폼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삼각형을 만든 후 종이로 싸고 묶은 그 작은 ‘보자기’를 캔버스 위에 차곡차곡 부착하는 입체적인 부조화를 창안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전광영만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만든 작품들로 1989년 전시를 했다. 하지만 마지막 거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미술평론가 이일 선생이 와서 보더니 ‘너, 사고 치겠다’ 하더군요. 그 한 마디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어요. 언론에서도 전혀 다뤄주지 않았고. 또 예전에는 회화작업을 할 때 친구들이 소품 하나씩은 사줬는데, 이 요상스런 작품은 거저 준다고 해도 가져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과거처럼 좌절감이 몰려들지 않았어요. 지금까지도 이렇게 고생했는데, 얼마나 더 나빠지겠냐. 딱 5년만 더 고생해보자. 아마 남이 아닌 나를 표현했기에 그런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아.”

    형편은 더 나빠졌다. 작품 활동만 하다간 정말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서울 강남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했다. 미국에서 유학한 중견화가가 직영하는 미술학원. ‘강남 엄마’들의 구미에 딱 맞았다. 학원은 나날이 번성했다. 1990년대 중반엔 강사가 33명이나 됐다. 그의 미술입시학원 운영은 지금까지도 미술계의 비판을 사고 있는 ‘과거사’다.

    “글쎄요. 내가 미술학원을 안 했으면, 그래서 돈 한푼 없었으면 한지 작업을 제대로 해낼 수 있었을까요? 오히려 미술학원을 통해 내가 얻은 게 훨씬 많아요. 작품 활동도 꾸준히 했지. 그 무렵 나는 다른 작업 스타일을 다 버리고 한지 작업에만 몰두했어요. 그런데 작품을 만들어서 꼭 팔아야겠다는 부담감이 없으니까 좋은 작품들이 나오더라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니 진정한 작품이 탄생한 거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1990년대 중반쯤 미술학원을 그만뒀어요. 학원이 가장 잘되던 때였지만. 나는 작가거든. 미술학원 운영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고.”

    1995년 그의 인생 항로를 뒤바꾼 인연을 만나게 된다. 박영덕화랑 박영덕 대표와의 만남이다. 전 화백은 지인의 소개로 박영덕화랑의 고객이던 한 여성을 알게 됐다. 미술학원 옆에 붙어 있던 작은 작업실을 찾은 그 여성은 작품을 보더니 “신선하고 좋다”고 했다. 며칠 후 박영덕 대표로부터 “한번 찾아가겠다”는 연락이 왔다.

    “박영덕화랑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였어요. 대관 전시만 하던 무명작가에게 그런 인물이 관심을 보인다고 하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내 작품을 본 박 대표는 아주 놀라워하는 눈치였어요. 그러더니 한 달쯤 후에 박영덕화랑에서 전시를 하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왔어요. 정말 눈물이 나도록 기뻤지. 그렇게 해서 다시 ‘집합’ 연작을 선보이게 됐습니다.”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해 7월, 그의 작품은 박영덕화랑을 통해 LA 국제전시회에 진출, 국제무대에서 먼저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카고 아트페어에 출품해 매진 기록을 세운 후 뉴욕 첼시의 신흥 화랑 킴포스터 갤러리 초대전에서도 출품작 19점이 다 팔리는 ‘기적’을 낳게 된다. 게다가 갤러리가 전시 경비 일체를 부담하고 전세계로 작품을 홍보해준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전속계약까지 맺었다.

    전 화백이 이처럼 해외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이유는 그만의 독창성에 있다. 종이작업은 많지만 한지, 특히 고서에서 나온 한지로 스티로폼을 싸서 붙여나가는 방식은 세계에서 유일했다. 종이 특유의 질감과 색채가 다양한 뉘앙스를 연출하고, 특히 한지가 뿜어내는 소박한 정서가 현대적인 조형성과 어우러져 은은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당시 평론가 오광수씨는 “종이의 속성에 자신의 상상력을 부과해 시공을 넘어서는 정서의 공감대를 형성한다”고 평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전 화백이 한지에 한국의 혼을 담아 표현했다는 데 있다.

    “서구인들은 한지를 그저 종이의 일종으로 보겠지만,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다르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한지를 봅니다. 천장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닥지’를 봤고 문풍지와 문창지를 넘나들었죠. 우리 생활의 일부, 아니 전체인 겁니다. 그런 혼이 사람들을 감동시킨 거죠. 난 작품에 사인을 할 때마다 늘 ‘한국 한지(Korean mulberry paper)’라고 적어놓아요.”

    문화에 무지한 ‘문화대국’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면서 그는 마침내 국내 화단으로부터도 인정을 받게 된다. ‘화단의 이방인’에서 ‘미술관급 작가’로 급부상한 것. 그렇다면 이젠 그를 밀어내던 그 모든 거부는 끝난 것일까.

    지난해 겨울 한 원로 작가의 칠순 잔치가 있었다. 전 화백을 비롯해 300∼400명이 참가했다. 삼삼오오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누구 하나 그에게 와서 앉으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5분쯤 서 있다가 원로 작가에게 인사만 하고 돌아나왔다. 성공을 거둔 후엔 노골적인 시기와 질투가 쏟아졌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서 한국의 작가 그룹에 기피증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만나는 한국 작가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

    그의 작업 스타일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졌다. 전 화백은 작품을 만들 때 조수 네 명의 도움을 받는다. 한지로 스티로폼을 싸서 종이로 묶고 붙이는 일을 조수들이 하는 것이다. 전 화백은 아이디어를 내고 작업의 전체적인 방향을 디렉팅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작가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작품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비판한다.

    쉰 넘어 빛 본 ‘대기만성’의 전형, 韓紙작가 전광영

    그는 온갖 역경 속에서도 실낱 같은 희망이 되어준 소중한 가족, 특히 항상 힘이 되어준 아내가 너무 고맙다고 한다.

    “내가 할 일은 아이디어를 내는 겁니다. 싸고 묶고 붙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단순 작업을 위해 오랜 시간을 쓸 필요는 없거든.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데만도 시간이 너무 모자라요. 그런 논리로 따지면 캔버스나 패널도 작가가 직접 만들어야 해요. 나는 어디를 가든 사진을 1000장 넘게 찍으며 아이디어를 구상해요. 다이너마이트로 구멍을 뚫은 돌, 떡갈나무의 갈라진 모습을 보면서도 어떻게 작품으로 표현할지 고민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술적 상상력과 아이디어죠.”

    하지만 이젠 이런 거부들이 고맙다고 한다. 그렇게 완강히 반대했던 아버지가 없었으면, 독창성의 중요성을 알려준 미국에서의 뼈아픈 수련기간이 없었으면, 그를 배척했던 한국 화단이 없었다면 자신은 ‘그저 그런 작가’가 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분노가 치밀고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지만, ‘이젠 내게 할 일이 있다’며 마음을 달랜다. 그리고 그 분노의 화살을 조금 더 큰 데로 돌린다. 예술에 대해 기초적인 관심조차 없는 우리 사회를 향해서다.

    “중국이나 일본보다 우리나라 미술가들의 실력이 떨어지지 않아요. 하지만 왜 세계적인 작가는 그 두 나라에서 더 많이 나오는 걸까. 내가 뉴욕에서 개인전을 할 때 총영사관이나 기업 해외법인 관계자들은 거의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일본 작가가 하면 난리가 나요. 대사, 영사뿐 아니라 도요타 같은 대기업 관계자들까지 다 나오지. 화랑 입장에서 어느 나라 작가를 밀어주고 싶겠어요? 또 그렇게 ‘똑똑한’ 비평가들도 전시회엘 안 다녀요. 비평가들이 좋은 작가를 심으면 화랑가가 물을 주고 국가가 브랜드화해서 키워야 하는데 전혀 못하고 있지. 화랑들도 너무 상업화했어요. 돈만 생각하니 청년, 중견작가를 키우겠어요? 외국 작품을 들여오면 이문이 남는데.”

    그는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 미술을 만들어냈듯 한국 미술의 중흥을 위해선 기업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그런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기업가도 있지만, 상당수는 미술을 제대로 향유하는 문화를 체화하지 못한 것 같다고 했다. 자기만의 뚜렷한 성향을 가지고 주말마다 전시회를 다니면서 안목을 높인 후 작품을 구입하는 외국 컬렉터들과 달리 한국의 컬렉터 상당수는 전시장 근처엔 가보지 않은 채 요즘 뜨는 작가들의 작품만 구입하려 하는 등 단지 ‘투자’의 개념으로만 미술품을 바라본다는 것.

    전 화백은 작가들 또한 뼈저린 자성을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작품 활동보다는 계보 형성에 더 신경을 쓰고 해외 거장들의 작품을 ‘완벽하게’ 카피하는 데만 열중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대기업 사옥을 짓는 건축가 중에 국내 작가가 없는 것도, 청계천 상징조형물 제작자로 미국 작가가 선정된 것도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제 막 반환점을 통과한 마라토너

    전 화백은 오는 11월 국제갤러리 개인전과 내년 6월 애널리 주다 갤러리 회고전을 앞두고 있다. 사실 그는 세계적 화랑에서 40년 작품 인생을 총망라하는 중요한 전시를 앞두고 있어 국제갤러리 개인전을 미루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은퇴하기 전 내 손으로 세계적인 작가 한 사람을 만들고 싶다”며 그와 전속작가 계약을 맺은 국제갤러리 이현숙 대표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요즘 그는 정신없이 바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자신이 갖은 역경을 겪은 것도 모두 하나님 뜻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역경 속으로만 몰아넣지 않았다”고 한다. 소중한 가족을 통해 실낱 같은 희망도 함께 준 것이다. 전 화백에게 가족, 특히 부인 김인숙씨가 차지하는 자리는 남다르다.

    “부잣집 아들로 알고 결혼했는데, 완전히 ‘꽝’을 잡은 거지. 집사람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단 한번도 내게 미술을 그만두라고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좌절할 때마다 ‘지금은 힘들지만 앞으론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당신을 믿어’라며 힘을 줬죠. 지금은 어디를 가도 꼭 집사람과 함께합니다. 덕분에 집사람이 비행기를 탄 게 130번쯤 돼요. 병원에 갈 때도, 옷이나 물건 하나 살 때도 같이 가요.

    며칠 전엔 막내딸아이가 집사람에게 그러더군요. ‘엄마, 나 어릴 때 연필깎이 비싼 거 샀다고 아빠한테 혼난 거 기억나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거지? 지금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정말 미안하고 또 고마웠어요.”

    그는 자신이 ‘이제 막 반환점을 통과한 마라토너’라고 했다.

    “다시 질주해야죠. 하지만 뛰는 모습이 과거와는 다를 거예요. 지금까지는 장애물에 부딪혀가며 험난한 레이스를 펼치느라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어요. 이젠 완주하는 그날까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여생을 사는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인터뷰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