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마주보고, 쳐다보고, 내려다보니 부부 금실은 어느새 쑥쑥…

  • 김광화 농부 flowingsky@naver.com

    입력2005-04-25 16: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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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대체 여자들은 왜 그 모양이냐!” “정말이지, 남자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 그렇게 ‘들’자가 들어가면 ‘들’에 속한 모든 이가 들고일어난다. 실은 자기 아내, 자기 남편 흉을 보고 싶은데 눈치가 보여 일반화해버리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이런 싸움은 박진감이 있고, 싸움 뒤에 남는 게 있다. 각 가정의 특성이나 사람마다의 기질, 그리고 성장과정이 숨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주보고, 쳐다보고, 내려다보니 부부 금실은 어느새 쑥쑥…

    아내랑 작두질 :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큰일난다.

    우리 부부는 부부싸움을 잘 한다. 나름대로 부부싸움 전문가다. 이렇게 말했더니 아내는 전문가가 아니란다. 싸울 때마다 남편에게 당하기만 하고 제대로 싸우지 못했단다. 그렇다면 나만 전문가라 해야 맞겠다. 남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나는 자칭 부부싸움 전문가다. 산골로 들어온 이후 참 많이도 싸웠다. 지금도 여전히 싸운다.

    그러나 싸움의 성격이나 내용은 달라지고 있다. 우선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갈등이 생기면 우리 부부는 잠을 못 잔다. 서로 이해될 때까지 시간을 두고 싸운다. 밥 먹다가도 싸우고, 새벽에도 싸운다. 상대방의 잘못을 깨우쳐주기 위해 싸우기도 하지만 자기 세계를 찾기 위해서도 싸운다. 그 과정에서 서로 많이 알게 됐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시비는 싸울 것도 없이 그냥 눈에 보인다. 이럴 때는 웃음으로 넘어간다. 또 언제 싸움을 거는 게 유리한지, 싸움을 통해 잃는 것과 얻는 것이 뭔지도 어렴풋이 안다.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한다면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으려 한다. 더 나아가 손자병법에 나오듯,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을 익히고 있다.

    “서로 딴 곳을 바라보니 각자 길을 가자”

    우리 부부싸움의 가장 큰 갈림길은 서울을 떠나려 할 때였다. 그전에도 싸울 이유는 많았지만 싸움을 피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길을 가자고 뜨겁게 맹세했기에 사소한 갈등은 애써 무시했다. 싸우고 싶을 때도 많이 참았다. 하지만 서울을 떠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는 일이 아닌가. 아내는 서울 태생이고, 30여 년을 서울에서 살았다. 게다가 아내는 도시생활을 나름대로 잘했다.



    결혼할 때 했던 ‘맹세’는 세월의 흐름 속에 빛이 바랬다.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서로 딴 곳을 바라보니 각자 길을 가자”고 했다. 격렬하게 싸웠다. 아내는 “이혼은 안 된다”고 했다. 대신 “3년을 내 ‘소원’대로 살아보고, 그때 이혼을 하든 말든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울며 겨자 먹기로 나를 따라 시골에 왔다.

    부부 사이의 신뢰가 바닥에 가까운 상태에서 경남 산청의 산골생활이 시작됐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과연 이 길이 옳은 길인가’ 하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내 몸은 알 수 없는 고통에 휘말리곤 했다. 한번은 기침이 심하게 났다. 가까운 진주 경상대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가슴 엑스레이와 가래 검사를 했지만 결핵이라는 단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기침을 6개월 동안 했다. 그러다가 저절로 나았다. 참 신기했다. 그동안 몸 안에 쌓인 이물질이 기침을 통해 배설되지 않았나 싶다.

    싸워서는 안 될 때

    몸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나는 아내에게 다시 싸움을 걸었다. 나는 좀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 다른 곳으로 터를 옮기자고 했고, 아내는 불투명한 앞날에 자신을 또다시 던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다시 “각자 자기 길을 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아내는 완강히 반대했다. “남편감은 어디서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도시에서 몸이 망가져 있을 때 나는 아내 눈치를 많이 보았다. 집안 경제를 거의 아내가 꾸렸기에 아내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아내에 대한 내 존경심은 애정이 아닌 비굴함에 더 가까웠다. 내가 왜소했기에 아내가 커 보인 셈이다. 나는 내 힘으로 서고 싶었다.

    전북 무주로 터를 옮겨 농사를 지으면서부턴 격렬하게 싸우는 대신 자주 싸웠다. 그동안 참아온 싸움을 원 없이 했다. 산골에서는 부부가 대부분 함께 지낼 수밖에 없다. 아침에 일어나 같이 아침밥 먹고, 같이 일 나가 같이 점심 먹고, 해 떨어지면 같이 집으로 돌아와 같이 저녁을 먹은 후 같이 잠자리에 든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으니 상대방에게 자신을 숨길 수 없다. 도시에서는 미처 몰랐던 부분들을 속속들이 알게 된다. 이상하게도 장점은 잘 안 보이고 단점은 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더 자주 싸운다.

    둘 다 농사일이 서툰 것도 싸움의 이유가 됐다. 자기 방식이 옳다고 우기고 관철하려고 한다. 나는 아내가 심은 고추 모종 간격이 좁다고 하고, 아내는 내가 심은 간격이 너무 넓다고 한다. 아내가 꼼꼼히 김을 매면 나는 그러다가는 지레 지친다고 잔소리를 한다(김매기할 때는 기세가 강한 풀을 먼저 제거하는 게 중요하다). 아내는 시골생활이 답답하니 어디 이웃집이라도 가끔 가고 싶어했고, 나는 할 일이 태산인데 놀 시간이 어디 있냐고 눈치를 주었다. 생활이 단조롭다 보니 또 부부싸움을 한다. 농사와 자연을 통해 배우고 깨닫는 게 없다면 같이 붙어 지낸다는 것 자체가 지옥일 수도 있다.

    그렇게 자주 다투지만 싸워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작두질처럼 위험한 일을 아내와 함께할 때 그렇다. 작두의 긴 칼날은 보기만 해도 섬뜩하다. 작두질을 혼자 하면 속도가 나지 않는데 둘이 하면 힘이 안 들고 일이 서너 배는 빠르다. 내가 칼날을 들면 아내가 볏짚을 칼날 안으로 밀어넣는다. 아내의 손이 안전한지 확인하면 다시 내가 작두 손잡이를 온몸으로 누른다. 어느 한 순간이라도 부부 사이에 호흡이 안 맞으면 손목이 잘릴 수 있다. 잔뜩 긴장하니 부부싸움은 생각조차 못한다. 작두질하다가 중간에 서로 마음이 안 맞으면 다른 일을 먼저 해야 한다.

    ‘들’자 끼고 하는 부부싸움의 치유력

    싸우고 싶지 않은 때도 있다. 농사를 시작하기 위해 못자리를 준비할 때의 일이다. 진달래꽃이 피기 시작하면 볍씨를 물에 담근다. 그리고 한 열흘쯤 지나면 싹이 나올 듯 말 듯한다. 그럼, 씨앗이 고루 잘 터 올 한 해 우리네 생명을 잘 꾸리게 해달라고 마음을 모은다. 마당을 쓸고, 손톱 발톱을 깎고, 목욕을 하고, 속옷을 갈아입는다. 방안에 군불을 따끈따끈하게 때고 볍씨랑 한방에서 잔다. 이때는 싸움은 고사하고 말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는다. 꿈속에서도 생명이 싹트는 순간을 함께한다.

    농사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부부싸움은 여전하다. 주도권 다툼을 하면 둘 사이에 풀리지 않고 응어리지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이웃을 만나면 쏟아져 나온다. 이웃의 힘을 빌려 자신이 옳다는 걸 밝히려 든다. 발도 잘 안 닦고 잔다든가, 살가운 정이 없다든가 하며 시시콜콜 흉을 본다. 이웃이 있는 자리에서는 체면 때문에 크게 싸우지 못한다. 그러나 모두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잘 가라는 인사를 끝내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아내와 싸운다.

    가끔은 집단으로 부부싸움을 한다. 여성 한 편, 남성 한 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는다. 말투부터 시비조다.

    “도대체 여자들은 왜 그 모양이냐.”

    “정말이지, 남자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렇게 ‘들’자가 들어가면 ‘들’에 속한 모든 이가 들고일어난다. 실은 자기 아내, 자기 남편 흉을 보고 싶은데 눈치가 보여 일반화해버리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이런 싸움은 박진감이 있고, 싸움 뒤에 남는 게 있다. 각 가정의 특성이나 사람마다의 기질, 그리고 성장과정이 숨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들’자를 끼고 하는 부부싸움은 상처를 입기보다는 치유효과가 있다.

    이웃과 어울리다 보면 잘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농사를 안 해보던 사람이 농사를 지으니 농사에 얽힌 무용담이 많다. 떠벌리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릴 정도다. 같은 평수에서 누가 고추를 더 많이 땄는가, 퇴비를 어떻게 만들면 거름 효과가 좋은가, 누구네는 산토끼가 콩을 다 먹었다는 둥 모이면 이야기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술이라도 한잔 들어가면 더 떠벌린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잠재욕구가 거침없이 나온다.

    내가 떠벌리면 아내가 찬물을 쫙 끼얹는다. 아내가 장광설을 늘어놓으면 내가 딴죽을 건다. 사실 떠벌리는 내용이란 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내가 “고구마를 600kg이나 수확했다”고 자랑하면 아내가 “에이, 500kg 좀 넘지” 한다. 그냥 잘나고 싶어 과장한 것뿐인데 아내는 그냥 넘어가지 못 한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지 않은가. 아주 유치하게 싸운다.

    많고 많은 싸움은 따져보면 그 바탕엔 먹고 자는 일이 깔려 있다. 산골생활에 적응하기까지 먹고 자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우리 식구는 처음에는 마을의 빈집을 빌려 살았다. 시골집이 내게는 고맙고 소중했지만 아내는 시간이 흐를수록 힘들다고 했다.

    “밥해 먹기 불편하다. 너무 춥다. 간단한 목욕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집 좀 고쳐달라.”

    아내가 그런 불평을 자주 했지만 나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내 몸에는 우리 어머니의 삶이 강하게 각인돼 있다. 어머니는 허름한 시골집에 시집와 마을 공동 샘에서 물 길어다가 밥하고, 냇가에서 빨래를 했고, 농사일도 다 하면서 좁은 방에서 자식 다섯을 키웠다.

    반복된 불만에도 내 귀가 열리지 않자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내가 이혼하자고 큰소리치곤 했는데 막상 아내가 집을 나가니 내 자신이 정말 초라했다. 아내가 해 준 밥 먹고, 잠만 자던 집이 다시 보였다. 처마 서까래랑 부엌 천장이 검게 그을린 데다 여기저기 거미줄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이면 식구들이 다 집 안으로 모이곤 했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식구들 빈 자리가 더 커보였다.

    마주보고, 쳐다보고, 내려다보니 부부 금실은 어느새 쑥쑥…

    ‘나도 집을 지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준 까치집.

    논밭에서 일하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너무 나만 생각해온 것이다. 막상 식구들이 떠나니 “집이 불편하다”는 아내 말이 새삼 귓전을 맴돌았다. 벽창호 귀가 뚫리는 순간이었다. 며칠 뒤 아내가 돌아오자 부랴부랴 부엌에다가 목욕을 할 수 있게 공간을 마련하고, 헌 싱크대를 마루에 놓아 서서 밥할 수 있게 했다. 하루 정도에 끝날 일이었다. 아내는 많은 걸 바란 게 아니었다. 자기 말을 무시하는 내가 못마땅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 앞에서 ‘나 때문에 고생이 많다,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목구멍에서 올라오지 않았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이를 고백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것 같다.

    어쨌든 이 싸움을 고비로 고민을 많이 했다. 보금자리란 뭘까. 도시에서 살 때, 집이란 상품으로서의 기능이 컸다. 돈으로 집을 사고팔거나 집을 늘려가는 것이 재미였다. 그래서인지 시골에 오자마자 먼저 집을 짓는 것에 대해 돈 낭비라 생각했다. 집보다는 농사를 잘 지어 경제적인 자급을 이루고자 했다. 집도 돈 주고 마련하기보다는 손수 지을 힘이 있을 때 짓고 싶었다.

    귀농 이웃들이 하나 둘 집을 지어 나갔지만 내게는 절실함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다 부부싸움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손수 짓기에서 ‘여건에 따라 짓기’로. 이웃 집 짓는 곳에 들러 가끔 일손도 거들면서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했다.

    농사 틈틈이 토끼장, 닭장, 오리장을 지어보니 재미가 있었다. 내 손으로 톱질, 망치질해서 만든 작은 동물 집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가 집터 곁에 염소막을 짓게 되었다. 염소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기에 원두막처럼 지었다. 다 짓고는 원두막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기분이 좋았다. 염소 대신 내가 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내 집을 손수 짓는 건 여전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까치가 집 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암수 두 마리가 사이좋게 둥지를 트는 모습. 기계 장비 하나 안 쓰고 부리로만 지은 제 새끼 키울 정도의 작은 집. 바로 저거다 싶었다. 작은 집! 그거라면 나도 짓겠다. 장비도 있고, 팔 다리 다 쓸 수 있고, 이웃도 많지 않은가. 명색이 대학 졸업자인데 까치보다 못하랴.

    집을 짓는다는 것에선 아내와 쉽게 합의했지만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됐다. 우선 몇 평으로 지을까. 아내는 20평쯤으로 짓고 싶어했다. 집을 짓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지을 때 제대로 짓자고 했다. 나는 12평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방 한 칸에서도 몇 해를 살지 않았나. 대부분 시골집들이 열두어 평 정도이지만 그 집에서 자식 대여섯 낳고 다 키웠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집을 늘려가면 되지 않나. 그리고 내 손으로 집을 짓자면 한 평 늘려 짓는만큼 내 몸이 고단해진다. 내 손으로 흙을 더 넣어야 하고, 양 어깨로 나무를 더 져야 한다. 물론 돈도 더 든다. 게다가 ‘소박한 삶’이라는 고상한 이데올로기도 끌어안고 싶었다.

    아들 ‘무위’와 딸 ‘자연’

    이러한 차이를 좁히는 데 1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다. 아내와 내 머릿속에 집이 수십 번도 더 지어졌다가 다시 허물어졌다. 결국 17평으로 어렵게 합의를 본 후에는 부부가 합심해서 집을 지었다. 이때만큼은 까치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부부 사이가 됐다.

    내게 집짓기는 부부 관계를 치유하는 첫걸음이었다. 설계는 아내가 했다. 도시 아파트 생활과 시골집 경험을 살려 우리 식구에 맞는 설계를 했다. 설계 도면을 여러 번 그리고 지워가며 보금자리에 대한 꿈을 이루어갔다. 나 역시 터를 닦고, 뼈대를 올리면서 신들린 듯 일했다.

    산골에서 손수 집을 짓자니 많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터 고르기, 설계, 상하수도 공사, 자재 조달, 사람 섭외. 대부분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이다. 산골은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사람이 적은 데다가 제각기 자기 일이 있고 그 일은 누가 대신해주기 어렵다. 이래서 필요한 분야만 따로 사람을 부르는 게 쉽지 않다. 목재 짜맞추기나 지붕 올리는 큰일에는 이웃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집이 완성되자면 순서에 따라 일이 연결돼야 한다. 그때마다 이웃을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럴 때는 사돈에 팔촌까지 생각이 난다. 멀리서 누가 와주더라도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단순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치기 십상이다. 결국 내 몸을 의지하는 수밖에.

    손수 집을 지어보니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미닫이문과 여닫이문은 절반 가량을 직접 짰다. 도시 살 때 쓰던 장롱 대신 붙박이장을 두 개나 만들었다. 내 안에 그런 힘이 숨어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바닥을 맴돌던 부부 사이의 신뢰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도배할 때는 한 사람이 풀칠하면 또 한 사람이 붙여 나갔다. 서로 마주보고, 쳐다보고, 내려다보면서 합심해서 했다.

    마주보고, 쳐다보고, 내려다보니 부부 금실은 어느새 쑥쑥…

    식구가 함께 아래채를 짓는 모습. 자연이랑 아내는 벽돌을 쌓고, 무위와 나는 구들방 기초 작업을 했다.

    방 세 개 가운데 하나를 먼저 도배하고 서둘러 이사 왔다. 이게 어떤 집인가. 방 하나에 네 식구가 지내는데도 꿈만 같았다. 나무 기둥 하나, 벽돌 한 장, 차에서 내리고, 세우고, 쌓던 과정이 떠올랐다. 함께했던 얼굴들이 스쳐지나간다.

    그러니 집짓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아내에 대한 신뢰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신혼이 다시 오나 싶게 그해 겨울을 잘 지냈다. 그러나 집짓기는 부부 관계 치유의 시작에 불과했다. 봄이 되면서 새로운 갈등이 시작됐다.

    이 글을 쓰면서 우리 집 두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너희가 아무래도 글에 등장해야겠는데 이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냥 본이름을 써도 되겠니?”

    그러자 딸이 “글쎄요. 그건 좀 그런데” 한다.

    “사실, 아빠가 너희들 이름 지을 때는 사전을 뒤적이며 끙끙 앓다가 결국 이름을 못 짓고 다른 사람한테 부탁했거든. 지금은 너무나도 짓고 싶은 이름이 있어.”

    “뭔데요?”

    “무위자연(無爲自然). 무위와 자연.”

    “그럼, 난 자연이네요. 자연이 여자 이름 같으니까. ‘스스로 그러하다’ 좋네요.”

    그러자 아들이,

    “아빠, 무위가 뭐예요.”

    “응, 억지로 하지 않아도 다 이루어진다는 말이지. 일을 안 하는 것 같은데 다 이루어진다, 뭐 그런 뜻이야. 보기를 들어볼까. 아빠가 겨울에 땔감 하러 산에 가잖아. 그때 지게 작대기를 안 가지고 가는 거야. 산에서 내려올 때는 지게 작대기가 필요하잖아. 그때마다 하나씩 만들어서 오는 거야. 그러다 보면 겨우내 토마토 지지대를 다 마련한 셈이지.”

    “공부를 재미삼아 하다보면 저절로 배워지는 거랑 같다, 이 말이지요?”

    “그래, 그래. 보통은 일을 말하는데 공부도 되겠다. 어때, 네 이름으로?”

    “좋아요. 무위! 박력이 있어요.”

    자연이는 열여덟 살, 무위는 열한 살 이다. 지금은 두 아이 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아내와 내가 종일 함께 생활하듯 아이들은 공부, 일 모두 함께한다. 물론 우리 부부싸움에도 아이들이 끼여든다.

    지금은 쉽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둘지 말지 고민하던 몇 년 전에는 부부싸움이 진지했다. 농사나 집짓기 때와는 다른 양상으로 싸움이 번져나갔다. 산골의 긴긴 겨울. 부부싸움도 길고 끈질기게 계속됐다.

    자연이가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이었다. 당시 아이들 담임선생님이 자주 하던 얘기가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였다. 분위기가 그러니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아이 상당수가 가까운 도시로 유학을 간다. 그렇다면 우리 자연이도 다시 도시로 가야 한단 말인가. 그럼, 우리는 뭔가. 흙에 뿌리내리고 싶은 바람이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리는 것이다. 이참에 아이들 교육문제를 뿌리째 뽑고 싶었다.

    “밖에 나가 싸우세요!”

    바쁜 농사일이 끝나고 긴 겨울에 들어갔다. 자녀교육에 답을 얻고자 공부를 했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니까 우선 법 공부를 했다. 교육법을 공부하고, 교육법 시행령도 보고, 헌법도 읽어보았다. 나중에는 대법원 판례까지 검토할 정도로 열심히 파고들었다. 그 결과 의무교육이란 아이가 행복하게 배울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임을 알았다.

    사실 문제는 부모다. 부모가 아이 교육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가. 그렇다고 말할 부모가 얼마나 될까. 나도 자신이 없다. 공부가 필요했다. 교육철학에서부터 대안교육까지 닥치는 대로 연구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과서를 보고, 현대 물리학에서 심신 상관의학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이 자신에게 소중한 공부를 스스로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병아리 크는 모습이나 곡식 자라는 걸 보면서도 그런 믿음을 확인했다. 알에서 갓 깨어난 병아리들이 얼마나 열심히 모이를 찾아 먹는지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다. 병아리도 잘하는데 우리 아이들이라고 못할 리가 없지.

    마주보고, 쳐다보고, 내려다보니 부부 금실은 어느새 쑥쑥…

    무위(왼쪽)랑 자연이가 마주보며 공부하는 모습이 예뻐서 찰칵! 보통은 따로 공부하는데 이날은 특별했다.

    모를 촘촘하게 심으면 웃자라 병에 걸리거나 비바람에 쉽게 쓰러진다. 곡식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음껏 자랄수록 튼튼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좋은 여건이 아닌가.

    하지만 아내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고 했다. 아내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다면 부모가 감당할 몫이 너무 크다며 걱정했다. 공부도 공부지만 친구 관계나 사회성이 형성되지 않을까 불안해했다.

    교육의 성과는 농사나 집짓기와 달리 눈에 당장 드러나는 게 아니다. 먼 앞날을 바라보고 이뤄지기 때문에 이 문제를 푸는 부부싸움 역시 지루하게 진행됐다. 아이들이 힘들어했다. 자연이는 “내 문제로 엄마 아빠가 싸우면 돌아버리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우리 집 문은 한지 문이다. 안방에서 나는 웬만한 소리는 아이들 방까지 다 들린다. 큰소리가 나면 자연이는 “있을 곳이 없다”고 했다. 무위는 한술 더 뜬다. 부모가 다투는 큰소리 때문에 귀에 딱지가 앉겠단다. 부모 싸움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나서서 말릴 수도 없다. 각자 나름대로 교육철학과 방법론을 내세워 싸우기 때문에 아무나 중재할 수 없다. 교육에 관한 한 아내는 전문가였다. 나는 교육 전문가는 아니지만 자기 치유 과정을 거치며 잃어버린 ‘아버지 자리’를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이전에는 아이들 양육이나 교육을 거의 아내에게 떠맡겼다. 나는 상관하지 않았고, 아내가 고민이 있어 이야기 좀 하자 해도 아내 입만 쳐다볼 뿐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러다가 겨울에 공부 좀 했다고, 내가 밀어붙이듯 나오니 아내는 논리를 떠나 우선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내가 사회성과 친구문제에 대해 입이 아프도록 이야기하면 아내는 자신을 흔드는 걸로 받아들였다.

    나는 잃어버린 양육권을 되찾고자 했고, 아내는 자신과 아이 사이에 형성된 질서를 그대로 이어가고 싶어했다. 대부분 권력 투쟁이 그렇듯 나는 틈만 나면 아내를 흔들었다. 그래도 아내는 꿈쩍도 안했다. 그런 아내가 미웠다. 무거운 집안 분위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갈등이 끝없이 이어지는 나날.

    취학의무 유예원 낸 무위

    나중에는 나 자신이 답답했다. 내가 자각한 ‘소중한 깨달음’이 아내에게조차 다가가지 못하다니. 그때 반짝이며 스치는 생각. 이럴 게 아니라 아이들 의견을 들어보자. 의외로 아이들이 똑 부러지게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자연이는 아내에게 “제 문제니까 제게 맡겨주세요” 했고, 내게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하고 말했다. 무위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엄마 아빠는 제발 싸우지만 마세요!” 하고 볼멘소리를 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부부싸움 안 하는 게 자녀교육의 첫걸음이 아닌가. 자연이는 중학교를 두 달 다니다가 스스로 그만뒀고, 무위는 초등학교를 다니다 말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취학의무 유예원’을 냈다.

    휴, 이제 정말 부부싸움이 끝나는가. 그 이후 소소한 싸움은 있었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워낙 든든히 버티고 있어 싸움 자체가 쉽지 않다. 요즘은 무위의 힘이 부쩍 커졌다. 집 안에서는 큰소리 내는 것조차 어렵다. 아내와 내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리가 조금 커지면 무위가 경고 신호를 보낸다.

    “삐리리, 삐리리….”

    그런데도 소리가 커지면 반응이 다르게 온다. 소리가 커지는 데는 어떤 감정이 실려 있게 마련이다. 덩달아 무위 말에도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만 좀 하세요.”

    그래도 싸움이 계속되면 무위도 큰소리를 친다.

    “밖에 나가 싸우세요!”

    ‘자연이의 가설 3’

    한번은 아내랑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아이들 눈치가 보여 나가서 싸우기로 합의했다. “어디서 할까요, 언제 할까요.” 부부싸움하면서 마치 무슨 이해집단 사이에 사전 협상하듯 조율했다.

    집 옆 공터. 아무도 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서로 마주보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쏟아냈다. 점점 어깃장을 놓았다. 춥고 바람도 부는데 화해할 수 없었다. 이야기는 점점 천방지축으로 흘렀다. 아이들 눈치볼 게 없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막 해댔다. 한 시간쯤 다투었지만 결론이 없었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봅시다”가 결론이었다.

    그러나 소득은 있었다. 무위가 말한 ‘밖에 나가서 싸우라’는 뜻을 좀 알았다고나 할까. 아이들을 위해서는 밖에서 싸우는 게 좋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역설을 발견한 게 큰 소득인 셈이다.

    부부싸움을 하면 무위는 우리에게 직격탄을 날리지만 자연이는 제법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왜 싸우는가에 대해 자연이가 쓴 글을 그대로 옮겨보자. 자연이가 스스로 이름붙이기를 ‘가설’이란다. 다음은 자연이가 세운 몇 가지 가설 가운데 부부싸움과 관련이 있는 셋째 가설이다.

    “싸움은 건강이 안 좋을 때 한다. 이 가설은 내가 직접 싸우면서(^^:) 혹은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다. 싸움엔 공통분모가 있다. 지쳤거나 피곤할 때 싸운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싸울 때는 아니면 삐치거나(-_-;) 잔소리를 퍼부을 때는, 몸이나 마음이 안 좋은 상태일 때다. 피곤하거나 긴장한 뒤끝이거나 몸이 아프거나.

    싸움을 피할 방법이 있다. 싸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양쪽 다 좋은 상태가 아닐 때. 이 경우는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리학자에게 물어보든가 그냥 싸우시라. -_-;; 그렇지만 한쪽이 멀쩡할 때는 그 사람이 받아주면 된다. 말은 쉽지만 보통은 같이 짜증이 나서 싸우기 쉽다. 상대방이 피곤하고 내가 멀쩡할 때는, 처음에는 받아주다가 결국 나까지 짜증이 나서 받아주는 것이 힘들 때, 나는 ‘내가 싱싱하니까 받아줘야지’하고 생각한다. 그러면 괜히 내가 아주 좋은 일을 하는 것 같고, 참을 만하다. ^^*”

    자연이의 글을 보며 정리되는 게 있다. 부부싸움은 부부 사이, 성격, 태도, 성장 과정, 가치관, 습관이 다른 게 빌미가 되어 일어난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사람이 다 다르기에 누구하고나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름이 싸움으로 번지는 그 바탕에는 자연이 말대로 몸이나 마음이 안 좋은 상태였음을 자주 확인한다.

    식구는 소중한 ‘몸 공동체’

    아이들과는 피를 나눴지만 아내는 헤어지면 남이다. 그런 점에서 가족 공동체는 어느 정도 불안정하다. 가족을 넘어 서로 좀 더 건강하게 묶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난번 ‘자기 권력’에 이어 말을 하나 더 만들어보았다. ‘몸 공동체.’ 사실 몸 공동체란 말을 넓게 풀어보면, 살아 있는 한 누구나 몸 공동체다. 우리가 먹는 곡식 역시 몸 공동체다. 곡식이 사람 몸이 되고, 사람이 다시 곡식을 돌본다. 물 한 방울, 공기 한 모금이 모두 우리 몸이다. 이 몸은 흙에서 나고, 흙으로 돌아간다.

    사회나 국가도 몸 공동체다.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거나 나라끼리 전쟁이라도 하면 우리는 두려움에 숨죽인다. 그것들이 우리 몸을 알게 모르게 억압한다. 반면 용기 있는 이웃의 따뜻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몸 공동체를 더욱 가깝게 느끼는 건 아무래도 식구끼리다. 같이 먹고, 같이 일하고, 같이 자는 식구. 식구 한 사람 몸에 따라 다른 식구들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가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우선 집안 분위기부터 무겁다.

    아내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당장 아이들부터 표가 난다. 먹고 자는 게 흐트러진다. 아내가 오래 아프면 아이들 몸이 약해지고, 나 역시 쉽게 지친다. 무위가 감기에 걸려 오래도록 안 나으면 식구가 다 몸살을 앓는다.

    우리 부부가 싸우면 자연이와 무위도 배워서 싸운다. 싸움 방식도 닮는다. 어른이 비겁하게 싸우면 아이들끼리도 그렇게 한다. 내가 아내를 윽박지르듯 하면 자연이는 무위를 억압한다.

    우리 부부가 늦게까지 일을 하면 아이들 역시 잠을 안 잔다. 글 쓴다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 무위는 게임을 하고 싶어한다. 부모가 웃으면 그 웃음이 아이들에게 이어지고 다시 시너지 효과를 내며 돌아온다. 부모가 건강하면 아이들이 그 기운을 받는다. 집안 분위기가 화목할 때 자연이가 여행을 떠나면 걱정이 안 된다. 이메일이나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기운을 주고받을 수 있다. 식구란 몸을 몸답게 해가는 소중한 몸 공동체인 셈이다.

    이 글을 쓰고 나서 아내에게 보여주니,



    “당신이 부부싸움 전문가라고 하니 싸울 의욕이 안 나네요. 나는 아마추어니까 상대가 안 되잖아. 기죽어.”

    그러자 곁에서 듣고 있던 무위가 하는 말,

    “괜찮아요. 엄마가 기죽을 정도는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네가 보기에 엄마 아빠 가운데 누가 더 잘 싸우는 것 같니?”

    “둘 다 똑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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