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호

제발 책을 좀 내버려둬!

  • 글: 김현미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5-04-26 10: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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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 책을 좀 내버려둬!

    수많은 ‘권장도서’.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강요하면 책읽기가 재미없어진다.

    문제1. 다음 책들의 공통점을 찾으시오.

    ‘놀다보면 수학을 발견해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 ‘안네의 일기’ ‘소설 동의보감’ ‘개미제국을 찾아서’ ‘완장’ ‘상록수’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문명의 충돌’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정답. 2005년 서울시교육청 독서지도 매뉴얼 추천도서(초등~고교1학년).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했으니 다음 문제는 쉽게 맞힐 수 있을 것이다.

    문제2. 다음 책들의 공통점을 찾으시오.



    ‘구운몽’ ‘무정’ ‘토지’ ‘설국’ ‘일리아스·오디세이’‘안나 카레니나’ ‘삼국유사’ ‘다산문선’ ‘주역’ ‘우파니샤드’ ‘국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군주론’ ‘리바이어던’ ‘에밀’ ‘국부론’ ‘과학혁명의 구조’ ‘이기적 유전자’….

    정답. 2005년 서울대가 발표한 권장도서 100선 중.

    서울대 권장도서 목록에 이광수의 ‘무정’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광수 소설 ‘무정’ ‘유정’ ‘사랑’은 중학생용 필독도서 아니었나?

    기자는 중학생 때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면 지금 읽는 게 낫다. 대학생이 되면 유치해서 못 읽는다”는 선배들의 조언에 박계주의 ‘순애보’까지 함께 읽어치웠다. 조숙함과는 거리가 먼 여중생의 눈에도 소설 속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름답기보다 픽 웃음이 나왔는데, 요즘 대학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목록 중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보니 아리스토텔레스 전작 번역이라는 ‘무모한’ 시도를 하고 있는 한 출판사가 떠올랐다. 철학 전문의 그 출판사는 지금까지 2쇄를 딱 한 번 찍어봤고 그나마 대부분 창고에 쌓여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서울대 권장도서에 들었으니 이번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전작이 빛을 보려나. 서울대 도서목록의 나머지는 이미 읽었거나, 필요한 부분만 읽었거나, 읽다가 너무 지루해서 포기한 책들이다.

    시험 때문에 읽는 괴로움

    갑자기 독서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비슷비슷한 권장도서 목록이 쏟아진다. 학교는 물론이고 기업체에도 CEO가 권하는 도서목록이 있다. 친절한 CEO들은 직접 책을 구입해서 직원들에게 한 권씩 나눠주기도 한다. 책을 대량 구매해주니 고맙기 짝이 없으나 CEO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직원들이 ‘마땅히’ 봐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사절이다. 방송사에서 매달 한 권의 도서를 선정해 대대적으로 책읽기 운동을 펼쳤을 때 반갑기보다 불편했던 이유는, 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아직도 안 읽었니?” 식으로 묻는 게 폭력적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떤 권장도서 목록을 봐도 읽어서 해로운 책은 없지만 안 읽는다고 큰일날 책도 없다.

    그런데 권장도서 목록만으로는 부족한지 요즘은 ‘독서 이력철’을 만든다, 성적에 반영한다, 대입 전형자료로 쓴다 말이 많다. 지난해에는 한 독서운동 단체가 주최한 ‘제1회 독서능력시험’이 논란 속에 치러졌다. 400여 권의 책을 10단계로 나누어 그 내용에 대한 시험을 치르게 하고 성적에 따라 인증을 해준다. 결국 특정 책을 반드시 읽어야만 하고, 그것도 시험이 요구하는 방식에 맞춰 읽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방식은 읽는 즐거움을 고려하지 않았다. 독후감 숙제를 위해 책을 읽어야 하는 기존 독서교육보다도 더 나쁘다. 이렇게 되면 누구도 취미란에 ‘독서’라고 쓰지 않을 것이다. “공부가 취미”라는 말처럼 재수 없게 들리니 말이다. 하긴 권장도서 목록에 오르는 순간 그 책은 재미없어진다. 수많은 목록을 들춰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제발 책을 좀 내버려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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