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파란의 ‘방랑주먹’ 방배추

“살인 빼고는 안 해본 짓 없고, 북극 빼고는 안 가본 곳 없수다”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5-05-24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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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의 ‘방랑주먹’ 방배추
    그의 직함을 무어라고 붙일까. 협객? 깡패? 혁명가? 노동자? 방랑자? 한창 잎 고운 경기도 의왕시 외곽 오메기 마을을 나오면서 나는 새삼 곤혹스러웠다.

    ‘방동규’란 원 이름보다 ‘방배추’란 별명으로 세간에 알려진 사람.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1년쯤 전이다.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 ‘백기완의 경호대장’ ‘독일 광부’ ‘파리 낭인’ ‘명동 양장점 사장’ ‘긴급조치 위반 수배자’ 같은 흥미진진한 이력을 들은 후 흥분해서 그에게 전화했다.

    “아, 먹고살기도 바쁜데 지나간 이야기 주절거릴 틈이 어디 있소? 나는 상품가치 없는 사람이야. 딴 데 알아보쇼!”

    두말도 못 붙이게 거절을 당했다. 1년 후 그는 상당히 유연해져서 “그때 너무 매몰차게 거절했지. 술 할 줄 알거든 우리 한잔 합시다” 했다.

    서울로 나올 날짜를 뒤적거릴 여유를 주지 않고 나선 김에 방배추 선생이 산다는 오메기 마을로 달려갔다. 방배추, 그를 뭐라 불러야 할까. 청바지에 운동화, 흰 티셔츠에 야구모자를 쓰고 나타난 그는 낯빛이 희고 콧대가 곧고 치열이 가지런했다. 이목구비가 시원하고 깨끗했다. ‘최고 주먹’은커녕 털털하게 차리고 나선 최고경영자 같았다.



    “난 막노동꾼이에요. 공사판을 찾아다니며 등짐을 지지. 그런데 요즘은 나이 많다고 잘 안 써주려고 그래. 며칠 전이 칠순이라고 애들이 그러대. 난 평생 생일을 안 쇠요. 부모한테 생일상을 못 차려드린 놈이 제 생일을 차려먹겠어? 살아계실 때 담배 한 개비라도 노나(나눠) 피고 눈이라도 한번 맞추고 그래야 효도지, 죽은 다음에 무덤을 암만 크게 하면 뭘 해. 다 자기 사치지. 우리 어머닌 산소도 없어요. 그냥 화장해서 산에다 뿌려버렸어. 아, 답답하게 왜 납골당에 가둬놔?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게 풀어드려야지.”

    술 한잔 앞에 놓더니 대뜸 어머니 얘기부터 시작한다. “선생도 나중에 그렇게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고 싶으신가 보죠” 묻자 지갑에서 가톨릭대학이 발급한 ‘시신기증 등록증’을 꺼내 보인다.

    “내 팔뚝 둘레가 45㎝라고. 남편 있거든 집에 가서 한번 재봐요. 보통 사람은 30㎝가 안 되는데 이걸 그냥 썩혀버리면 아깝잖아. 뭐가 들었나 갈라서 들여다봐야 할 거 아냐. 간 같은 거도 쓸 만하면 남들 떼주고…. 요새는 행려병자도 드물어서 의과대학에서 실습할 시신도 구하기 어렵다더군.”

    나는 그와 술 한 병을 앞에 놓고 종일 마주앉아 있었다. ‘지금 마시면 낼 아침까지 쉬지 않고 마시는’ 술 실력이라는데, 그는 주량을 조절할 줄 알아서 내가 대작할 수 있을 만큼만 마셨다.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

    이튿날 나는 또다시 오메기에 가서 저물 때까지 이야기했다.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마침 비가 와서 이야기는 끝도 없이 풀려나갔다. 말 잘하기로 소문난 유홍준도 같은 자리에서 방배추가 입을 열면 “지방방송은 고만 끌랍니다” 하고 물러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과연 헛된 이름이 없다 싶다. 비분강개가 있고 찬란한 추억이 있고, 씁쓸한 자성과 통쾌한 액션이 있고, 무엇보다 장면 전환이 빠르고 내용이 드라마틱했다. 아쉽다면 멜로가 없다는 점이랄까.

    “나는 평생 연애란 걸 못해봤어. 이상하게 그게 잘 안 되데. 여자 앞에만 가면 쩔쩔매고 손목 한번 못 잡아보는 거야. 소설가 황석영이 내 얘기를 몇 번 쓰려고 했는데 연애사건이 없어서 재미가 없대. 그러면 매상이 잘 안 오른다며?”

    그는 떠돌이였다. 일생 한 가지 일에 매달리지도 않았고 한곳에 정착해 살지도 않았다. 천부적으로 주먹이 셌다. 일부러 싸움판을 벌인 적은 없는데 주먹 쓸 일이 가끔 생겼다. 영 마땅찮고 시시껄렁하게 굴면 한 대 패줬더니 방배추의 주먹이 무섭다는 소문이 떠르르해졌고, 나라 안 힘깨나 쓴다는 자들이 그와 겨루기 위해 서울로 찾아왔다. 할 수 없이 싸움이 벌어졌고 그는 번번이 이겼다.

    파란의 ‘방랑주먹’ 방배추
    “50년 전만 해도 주먹세계가 요즘 같지 않았어. 싸움에 지면 깨끗하게 승복하고 나이에 상관없이 무조건 형님으로 모셨어. 1대 1로 대결하지 떼거리로 달려들지 않았다고. 영웅끼리 만나서 자웅을 겨룬다고 할까. 삼국지 같은 싸움이고 뒤가 아주 깨끗했어. 요즘은 칼이 발달해서 찌르면 되니까 주먹이고 뭐고 상관없게 돼버렸잖아. 짧은 시간에 세상이 달라지는 건 좋은 게 아냐. 뭐든 천천히 변해야 하는데 말이야.”

    주먹 방배추가 싸움에 진 건 지금껏 딱 한 번뿐이다. 17대 1의 불리한 대결이었고 그것도 뒤에서 벽돌로 머리를 후려치는 바람에 정신을 잃어서 그런 거지 정식으로 앞에서 주먹을 휘둘렀다면 결코 질 싸움이 아니었다.

    “내가 미련해서 암만 싸움이 불리해져도 도망을 갈 줄 몰라. 도망가는 대신 ‘그래 오늘 내가 죽는 날이구나, 이왕 죽을 바엔 남자답게 멋있게 죽자’는 마음을 딱 먹어. 내가 그렇게 자학적인 구석이 있어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렇게 마음먹고 주먹을 날리면 상대방은 몇 미터 날아가서 뻗어버리는 거지. 우스운 일도 많아. 날 앞에 두고 지가 배추라고 하는 자를 평생 7~8명은 만났을 걸. 꺼덕거리면서 길을 막고 ‘너 나 몰라? 나 배추야!’ 이러는 거야. 합기도, 태권도, 격투기 합해서 20단이 넘는다는 놈도 겁날 게 하나도 없지. 나보다 센 놈이 나를 팔고 다니겠어요?

    첨엔 왜 이러십니까, 그러면서 물러서지. 뒷주머니에 포켓북이나 꽂고 다니고 얼굴이 희고 그러니까 내가 무슨 책상물림처럼 보이나 봐. 따귀를 치고 멱살을 잡아뜯고 별짓 다하는 걸 가만 보고 있다 정 참을 수 없으면 주먹을 올리는데…. 그런 코끼리만한 놈들도 단 한 방에 뻥뻥 나가떨어지는 거야.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거지. 뛰어난 야구선수는 방망이에 공이 맞을 때 홈런인 줄 미리 안다더군. 주먹이 들어가는 감으로 이 놈이 한방에 뻗겠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거든.”

    백기완한테 뺨 맞고 친구 돼

    백기완 선생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의 핵심이다. 열아홉에 백기완을 만나 지금껏 의기투합하며 지낸다. 자신의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꿔놓은 친구이고 스승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전쟁 끝난 직후 경신고에 다시 가서 역도부를 만들어 건들거리고 다니는데 주변에서 자꾸 백기완이를 만나보래. 찾아갔지. 갔더니 눈깔에 빛이 나면서 쳐다보는데 만만찮아. ‘배추, 너 세다면서? 혼자서 몇 놈이나 자신 있냐?’ 그래. ‘한 열 명은 문제없지’ 했더니 이 자식이 대번에 내 귓방맹이를 올려 붙인단 말야. 조선 천지에 내 또래 중 날 때리는 놈은 아무도 없었거든. 그러면서 ‘너하고 안 놀아. 가, 이 새끼야’ 이런단 말야. 하도 같잖아서 가만 있었더니 목소리를 척 깔면서 ‘임마, 사내자식이 한번 소리를 지르면 삼천만이 울고 웃어야지, 기껏 열댓 명이나 패면서 힘쓴다고? 넌 조자룡이만도 못해, 새끼야’ 이러는 거야.

    뭐, 아프지는 않았어. 그저 좀 따끔따끔하고 그랬어. 주먹이 세련되고 힘을 제대로 쓰는 놈 같았으면 내가 반 죽여놨지 그냥 두나. 이런 맹랑하고 괘씸한 놈을 봤나 싶으면서 일단 뒤돌아 나왔어. 그런데 집에 와서 가만 생각해보니 그 말이 옳은 것 같아. 열댓 명이나 패갖고 무슨 소용 있겠냐, 그 말도 옳아. 이튿날 다시 갔지. 가서 꼬리를 내리고 ‘같이 놀자!’고 했지.”

    옆에서 본 백기완은 인간이 어찌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콩을 튀겨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먹는 게 밥이고, 책을 읽으며 길을 걷느라 전봇대에 부딪혀 걸핏하면 코피를 흘렸다. 하루에 영어 단어를 100개 외고 수학문제를 100개씩 풀었다. 초등학교 5학년 중퇴 학력으로 영수학원 영어 선생 노릇을 했다. 나이는 한 살 어렸지만 친구라기보다 스승이었다.

    백기완과 어울려 학생자진녹화대, 자진계몽대를 조직해 헐벗은 산에 숱한 나무를 심고 송충이를 잡고 농촌계몽을 다니며 청소를 하고 한글을 가르치고 영농법을 강의했다. 그러다 보니 장준하, 함석헌, 계훈제 선생과 만날 일도 자주 생겼고, 전국에 퍼져 있던 반독재·민족운동 하는 사람들과 서로 긴밀히 얽혔다. 돈은 최소한 먹고살 만큼만 벌고 나머지 정열은 모조리 사회에 바치면서 사는 방식에 공감했다.

    “난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

    방배추 선생은 그때 받아들인 이데올로기를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있다. 평생 노동판에 몸을 굴리며 정신의 연단을 멈추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폐해에 물들지 않으려 애썼다. 돈을 좇지 않고 지위를 탐하지 않는 데 따른 자유를 누렸다. 곤궁했지만 자랑스럽고 소리 높여 다른 사람을 꾸짖어도 부끄러울 일이 없었다.

    “딴 사람이 볼 때는 또라이지. 그러나 일생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거든. 겉으로 뭐라고 변명하고 미화해도 창피하고 치욕스러웠던 걸 자기 자신만은 알잖아? 다행히 우리 여편네가―이북에서는 다들 여편네라고 그러는데, 이제는 그 뭐라나, 아내라고 불러야 한다며?―날더러 돈 벌어오라고 조르지를 않아. 당신은 맘만 먹으면 돈을 벌 사람인데 뜻이 있어 막노동을 하고 있다고 이해해준단 말이야. 난 사실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야. 어머니가 하도 소원을 하시는 바람에 딸린 식구가 생겨버렸어. 의무가 생겼으니 감당이야 하지만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이 늘 있지.

    요새 기완이는 걸핏하면 내게 충고해. 싫고 좋은 게 뭐 있냐, 대충 살라고 그래. 그럴 수야 없지. 그 새끼 소리 빽빽 지르고 잘난 척하고 맘에 안 드는 구석도 있지만, 그래도 그중 안 변하는 인간이 백기완이야. 친구라고 할 만한 놈은 기완이밖에 없어.”

    그는 개성에서 태어났다. 부잣집 맏아들이었다. 어느 정도 부자였냐 하면 일제강점기에 개성 전체에 자가용이 두 대밖에 없던 시절, 그의 집에는 단추를 누르면 뚜껑이 열리는 하늘색 자동차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조부가 돈 번 얘기를 전설인 듯 재미있게 들려줬다. 불과 100년 전 이야기가 이렇듯 전설같이 느껴지는 건 우리가 워낙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뜻일 게다.

    ‘임꺽정’에 매료되다

    방배추는 어려서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고 거기 나오는 인물에 매료된다. 대여섯 번 되풀이해 그 책을 읽었다. 조부는 임꺽정의 처남인 황천왕동이와 비슷한 데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똑같이 문맹자였고 황천왕동이가 개성서 서울까지 하루에 걸어다녔듯 할아버지도 개성과 원산을 하루 만에 걸어다녔다.

    아이가 울면 다른 지방에서는 ‘순사 온다’ ‘곶감 온다’ 하지만 개성사람들은 ‘곽지 온다’고 말해 아이 울음을 그치게 했다. 곽지란 임꺽정에 나오는 곽오주의 다른 이름으로 우는 애를 보면 찢어 죽이는 성질 사나운 인물이었다. 임꺽정의 산채가 있는 청석골은 마령산맥 줄기이니 개성에서 멀지 않았을 게다.

    주먹 방배추 선생의 인격과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어린 시절 읽었던 두령 임꺽정의 사상과 기운 세고 의지력 강한 할아버지의 이력이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물론 조부의 기질이 DNA에 녹아 그에게 흘러들기도 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하면 몸을 팔아 살 수밖에 없는 거잖아. 우리 할아버지는 열다섯에 아라사(러시아)로 가려고 했대. 노동자, 농민이 평등하게 살 수 있다는 세상을 찾아가고 싶었던 거지.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핏줄이 약간 왼쪽으로 흐르나 봐. 당시 개성의 특유한 풍습 중에 섣달 그믐날이면 집집마다 깃발을 달고 거기에 빚진 사람 이름을 써놓는 게 있었대. 우리 증조부가―조부의 아버지니까 증조부 맞지?―천하의 망종이라 깃발마다 증조부 이름이 안 적힌 곳이 없었다는군.

    할아버지는 그 수모와 창피를 탈출하고 싶었던 거지. 솥을 팔아 간신히 차비를 마련해 떠났는데 평양까지도 못 가서 증조부에게 도로 잡혀 내려왔대요. 밑천은 없지 먼 나라로 도망갈 길은 끊겼지, 생각다 못해 보부상을 따라다니는 일을 했다는군. 장돌뱅이가 된 거지. 좋게 말하면 유명한 개성상인과 한패가 된 거지.

    짐을 끌고 다음 장으로 갈 때 보부상들은 도적을 피하려고 대개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할아버지는 일부러 혼자 다녔다는군. 도적을 만나면 서넛 정도 때려눕히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때려눕히고는 반대로 도적들이 그동안 모아놓은 재물을 압수해오는 거지. 당시는 은행도 없으니까 돈이 모이면 다 독에 쌓아두고 그랬잖았겠어? 할아버지는 9년 기한으로 돈을 모았는데 그동안 밥을 사 먹은 적이 거의 없었대요. 주인집이 마차를 20대 거느린 큰 보부상이었으니 물론 식사비를 따로 줬겠지. 그걸 아끼려고 만날 쉰 떡만 사 먹었다는군.”

    “아니, 쉰 떡도 팔아요?”

    간간이 그렇게 추임새를 넣으며 나는 방 선생을 지켜봤다. 하얗게 빛나는 머리칼, 다른 사람 두 배 넘게 떡 벌어진 어깨 위로 잡티 한 점 없이 맑은 피부, 순진하다고 해도 좋을 깨끗한 눈빛. 역사 속에서 문득 빠져나온 인물과 마주앉은 기분이었다. 일찍이 어떤 책에서도 읽어보지 못한 근대사의 구체적 얘기가 일흔인 방배추 선생에게서 줄줄이 흘러나왔다.

    “쉰 떡을 왜 파는가 하면 씻어서 풀 쑤라고 파는 거지! 그걸 헐값에 사서 배를 채워가며 돈을 벌었대. 쉰 떡을 먹었으니 뱃속이 미식거릴 거 아냐. 그럴 때는 소금섶(짚 가마니)을 설기설기 썰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그걸 씹었다는군. 짭조름하니까 속이 가라앉는 거지. 그러다 물주가 세상을 뜨면서 땅은 아들한테 주고 달구지 20대는 영식이(할아버지 이름)한테 주라는 유언을 남겼대요. 요즘 같으면 트럭 20대가 갑자기 생긴 거 아냐.

    그렇게 9년간 번 돈을 들고 집에 돌아온 할아버지는 5층짜리 빌딩을 사고 정미소를 차렸어. 배고팠던 사람은 돈을 벌면 맨 먼저 쌀 찧는 정미소를 차린다고. 거기서 쌀이 만날 나오거든. 나 어려서는 남들 굶주릴 때도 노상 입쌀만 먹었어. 이북은 보리밥이 아니라 조밥이거든. 친구집에 가서나 조밥을 봤지, 우리집에선 잡곡을 안 먹었다고.

    그리고 또 농민모 공장을 차렸어. 일할 때 쓰는 밀짚모자를 농민모라고 불렀지. 가죽신발 만드는 편리화 공장도 세웠어. 그러고도 돈이 남아 삼포(인삼밭)를 샀어. 빚투성이 알거지 상놈 집안 자손이 10년 만에 떼부자가 된 거야. 할아버지가 자수성가한 거지. 당시에는 자수성가란 말의 의미가 제법 괜찮았다고. 친일을 한 것도 아니고 사기 쳐서 번 돈도 아니고 오로지 근검절약해서 모은 돈이었거든.”

    “싸움은 직관이야, 도(道)라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뭘 했을까. 사람이란 다 비슷하다. 아무리 영웅호걸도 자식에겐 약하게 마련이어서 조부는 아들을 교육하는 데 섶을 씹어가며 모은 돈을 투자한다. 덕분에 방배추 선생의 부친은 일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는 엘리트가 된다. 그러나 ‘일본놈’ 밑에서 일하는 게 싫어 다시 오사카대 공대 기계과로 진학한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기계를 이용한 공업발전이 필수라고 여겼던 거야. 아버지는 나중에 기계를 수입해 서울에다 메리야쓰 공장을 차렸어. 우리집이 메리야쓰 공장 원조인 거지.”

    부친은 유도 고단자에 검도, 격기(태권도), 육상, 수영에 두루 능한 어른이었다. 아들 방동규에게 어려서부터 유도를 가르쳤다. 꾸짖을 일이 있어도 혼내는 대신 유도의 동작으로 메다꽂았다. 자연히 낙법을 몸에 익히게 됐다.

    “‘적당히 알아서 깔아’ 하면 날 인제 거기 메다꽂는 거야.”

    따로 배울 필요 없이 아버지에게 유도의 기초를 다 배웠다. 부잣집 도령이니 남들이 나무판에 타이어를 잘라 붙인 게다를 신고 다닐 때 할아버지 공장에서 만드는 가죽구두를 신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이만저만 기고만장했던 게 아니야. 책 많이 읽고 주먹 세고 집에 돈 있고 하니까 남들 우습게 보고 말야. 지금도 그때의 나쁜 습관이 남아 있는지 모르지.”

    소학교 5학년 때 한번은 중학교 3학년생 셋이 하교길을 가로막았다. 요즘 말로 하면 불량서클 아이들이었는데 돈을 뺏으려고 부잣집 아들 어린 방동규를 붙잡은 것이다. 막다른 골목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 아니, 피하기는커녕 어린 동규는 겁 없이 “돈? 왜 내가 너네들에게 돈을 내야 해? 있어도 못 줘” 하고 버텼다. 잠깐 동안 셋 중 하나는 이빨이 부러지고 하나는 코뼈가 내려앉고 하나는 도망을 쳤다.

    가볍게 손을 탁탁 털고 집에 와서 아무 말 않고 있었는데, 저녁에 그한테 맞은 중학생들의 부모들이 들이닥쳤다.

    “우리 아버지가 괴상한 사람이야. 동규야 나와봐라, 하셔. 아버지가 가만 보니 나는 쪼그맣고 걔네들은 중3이니 덩치가 어른만하거든. 그때는 순진한 시절이라 웬만큼 싸워도 고발하고 그런 것 없었어. 아버지는 되레 그 부모들을 혼내는 거야. 요 쪼만한 새끼한테 큰놈 셋이나 덤벼서 얻어맞은 게 창피하지도 않냐는 거지. 무슨 낯으로 여기까지 찾아왔냐니까 다들 얼굴을 슬슬 문지르며 가버려. 그리고 어머니한테 여보, 여기 쇠고기 몇 근 사와 애 좀 구워줘, 하시는 거야. 그때가 해방 직후라 쇠고기가 귀할 때거든. 교육적으로는 어떨지 모르나 우리 아버지 기분은 괜찮았을 거야. 어린 놈이 중학생들과 3대 1로 싸워서 이겼잖아?”

    일흔 노객이 악동 같은 장난기를 얼굴에 가득 담고 웃어댄다. 중1 때 그는 서울로 이사해 경신학교로 전학한다. 역도부에서 몸을 단련했는데 워낙 기초체력이 좋고 몸이 빨라 육상선수로도 활동한다. 수영도 잘해 평영선수로 전국대회에도 출전한다. 그의 키는 172㎝인데 당시 신장 그대로다.

    “나는 싸움을 잘했지, 경기에는 소질이 없었어. 선천적인 직감으로 혼자 몸을 움직이는 게 좋지, 룰을 지켜야 하는 게임은 마땅찮았어. 단체로 하는 구기 같은 건 아주 싫어해. 협동이 잘 안 돼. 주먹이 세니까 남들은 권투하라고 권했지만 링을 쳐놓고 규칙에 맞춰 싸우는 건 딱 질색이야. 싸움과 경기는 전혀 다른 거지. 싸움은 직관이야. 어떻게 보면 그게 바로 도(道)라고!”

    싸움이 도라! 새로운 주장인데 방배추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설득력이 있다. 한번도 싸움으로 돈을 뜯은 적 없고, 조직을 만들어 남을 위협한 적 없이, 몸 안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기운을 뭉쳐뒀다 도리에 맞지 않는 인사를 응징하는 데만 썼다. 그러니 그를 깡패라 부르는 건 가당찮다. 요즘도 그는 몸을 만드는 데 하루 한 시간을 어김없이 바친다. 아침마다 체육관에 나가 근력운동으로 근육을 다듬고 적절한 유산소 운동을 한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졸라 벗겨놓은 맨몸은 청년처럼 아름다웠다.

    “날마다 몸의 극한을 경험하지 않으면 인간이란 금방 망가져. 운동을 하다보면 아주 참기 어려운 순간이 오거든. 그 고통은 불과 5분 남짓이야. 그 순간을 이기고 나면 그 다음은 아주 쉬워져. 죽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생각해보면 남영동 분실에서 당한 고문도 마찬가지였어. 전기고문, 그게 그냥 찌릿찌릿한 거지 뭐 별거 있냐고! 금방 지나가 버리는 거지. 다만 먹물들이 미리 머리로 생각하는 두려움, 그게 더 큰 공포인 거지. 아무리 지독한 고통도 5분 이상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나서는 겁이 없어졌어. 이젠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아.

    난 민주투사도 아니고 민족깡패도 아니야. 아, 고문 몇 번 당했다고, 징역 몇 달 살았다고 민주투사야? 민주투사라는 건 민(民)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지. 반정부 운동 잠깐 했다고 민주투사 이름 달고 호의호식해도 되는 거야? 나야 그저 몸을 단련하는 사람이지. 스님들 참선하는 것과 비슷한지도 모르지.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으니 나는 인생에 실패한 건지도 몰라. 그렇지만 성공이 도대체 뭐지? 미국식 자본주의를 따라가며 돈 많이 버는 게 성공이야? 벼슬을 얻어 걸치려 권력 주변에 똥파리처럼 달려드는 게 성공이야? 나는 남에게 굽실거린 적 없이 언제나 내 몸 움직여 노동해서 깨끗한 밥 먹고 살았어. 내가 그런 자부심은 좀 있지. 이 나이에도 몸으로 밥 벌어먹는다는 자부심!”

    그는 중학(요즘의 중고등학교)을 다섯 군데나 옮겨 다니며 해방 후의 혼란, 좌우 이념대립, 전쟁을 온몸으로 겪어낸다. 미국에 대한 반감은 일찌감치 생겼다. 미군이 이 땅에 와서 저지른 못된 짓을 숱하게 목격했다. 그래선지 미국이 만든 자본주의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무한경쟁이 그는 도무지 마땅찮았다.

    “아니 똑같이 축구를 하다가도 잘하는 놈은 수십억을 벌고 못하는 놈은 설렁탕 한 그릇도 맘대로 못 먹게 돼서야 그게 옳은 사회입니까? 돈을 벌면 선, 못 벌면 악이라는 논리 아닙니까. 평화를 위해서 남의 나라를 침략한다고요? 그런 허무맹랑한 논리가 어디 있어? 달걀로 바위치기라지만 나 한 사람이라도 그런 소리를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친구들이 ‘아니, 너는 청바지 입고 야구모자 쓰고 꼭 양놈처럼 차리고 다니면서 미국 욕을 하냐?’고 그래요. 미국이 만든 건 다 외면하는데 내가 이 청바지 하나만은 애용해. 질기고 계절 상관없고 아무 데나 앉을 수 있고 낡고 해져도 멋으로 그런 줄 알거든.”

    농민모 쓴 꼴이 배추장사 같다고…

    개성집에 살 때 친척뻘인 청년이 해방 후 철도노조 활동을 했다. 당시 노동조합 하는 이들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반대하면 다 빨갱이지. 정부에 반대해도 빨갱이, 주인에게 대들어도 빨갱이, 일본에 대들어도 다 빨갱이였어.”

    그러니 청년은 자연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고 애인집에 숨어 있다 푸른 배추밭으로 도망을 쳤다. 허허벌판에 청년이 뛰어갔고 마주 오던 미군이 청년을 향해 총을 여러 발 쐈다. 살점이 튀고 붉은 피가 낭자하게 배추밭을 물들이는 것을 어린 동규는 지켜봤다.

    “집에 돌아와 낮에 본 얘기를 했더니 아버지가 그 미군이 나쁜 놈이라고 말하대. 전쟁도 아닌데 남의 나라 사람에게 총을 쏘는 것은 나쁜 짓이다. 남의 나라에 군인이 주둔하는 것은 이유가 뭐든 침략군이라는 거야.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는 거지. 어릴 때 들은 그 말이 일생 내 가슴에 꽉 박혀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됐단 말야. 물론 나도 그 소리가 옳다고 공감을 했으니 그렇겠지만.”

    곧 6·25가 터졌다. 1935년생이니 그의 나이 불과 열다섯이었다. 전쟁 초기엔 양식을 가지러 아버지와 함께 개성집을 드나들었다. 장단에서 봉동 거쳐 개성으로 이어지는 신작로에 흰 옷 입은 피난민이 빼곡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미국 비행기가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그 피난민을 단숨에 갈겨버렸어. 아버지가 나를 끌고 근처 강냉이밭에 엎드려 우리만 겨우 살아났지. 잠시 후 소달구지 수십 대가 와서 시체를 차곡차곡 실어내는 것을 내가 다 봤다고. 그후 하늘에서 삐라가 떨어졌어. 오래 걸리지도 않아. 인민군이 농민으로 위장하고 진군하는 것을 소탕했다는 내용이야. 미군의 민간인 학살은 노근리에만 있었던 게 아니야. 아마 전국적으로 일어난 일일 걸.”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누가 미군부대 하우스 보이로 취직을 시켜준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당시 하우스보이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었으나 굶어죽어도 미군들 심부름을 할 수 없다는 자존심이 어린 소년의 가슴에 이미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대신 막노동을 했다. 나중에 피난지를 순천으로 옮겨가서는 길에서 군밤과 뻥튀기를 팔았다.

    “순천만 해도 아직 뻥튀기도 없고 껌도 몰랐어. 부산에서 아예 뻥튀기 기계를 사와서 장사꾼에게 팔았지. 물건 떼러 갈 때는 뱃삯을 아끼느라 순천에 흔한 돝(돼지)고기를 가져가서 부산에 팔고…. 돼지고기가 잘 상하는 물건이라 연구하다 내장을 빼고 숯을 채워 꿰매면 상하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해냈어. 내가 안 해서 그렇지, 장사 수완이 있나봐. 우리는 서울 수복 전에 한강을 밀도강해서 들어왔거든. 피난 가서 내가 번 돈을 세어보니 동대문시장 점포 다섯 개를 살 수 있는 돈이야. 점포 하나가 당시 30만환 할 때였거든.”

    화란 노동자에게 반해

    동대문시장에 점포를 사자고 말했더니 아버지는 돌연 아들 뺨을 올려 붙인다. 공부해야 할 놈이 돈 벌 궁리나 해서 되겠냐는 것이었다. 다시 경신학교에 들어간다. 머리 기르고 농민모 쓰고 다니는 꼴이 배추장사 같다고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 ‘배추’였다. 그 무렵 백기완을 만나면서 돈 버는 삶의 방식을 완전히 버린다.

    물려받은 땅을 작인에게 자진 분배할 정도로 진보적인 성향이던 아버지는 결국 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가 홍익대학에 입학하던 해 자결해버린다.

    “사연을 다 얘기할 수는 없어. 구질구질하게 사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을 선택하신 거겠지.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그렇게 가버린 무책임한 아버지에게 원망이 많았지.”

    여름이면 원산 위 송전 별장으로 바캉스를 떠나 해수욕을 즐기던 부르주아이던 어머니가 졸지에 5남매를 거느린 가장이 됐다. 백기완과 함께 전국을 떠돌며 나무를 심고 계몽운동을 다니다 4·19와 5·16을 맞은 그는 서른이 되던 해 다 접고 독일로 광부가 되어 떠난다. 지하 2000m, 높이 1m가 채 안 되는 갱내에서 하는 일이었다. 서너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유치한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기억상실증을 거기서 겪었어. 낙반사고로 뇌를 다친 거지. ‘대한민국’ ‘방동규’라고 말해도 뜻은 알지만 그게 나랑 무슨 연관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 한 조가 된 광부 중에 화란 놈이 있었는데 그 녀석이 내 기억을 살려줬어. 보름 동안 매일같이 와서 사고 당시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거야. 크리스마스가 되면 늘 그놈이 생각나. 독일 노동자는 우리와는 달랐어. 죽을 때까지 자기는 광부라고 생각하니 그 일을 좋아하고 동지의식이 강해. 우리는 땅을 파면서도 아무도 그 일을 평생 직업이라고 생각 안 하니까 다 외톨이고 자부심이 없거든. 나는 팔 힘이 좋았으니 자부심을 가진 노동자가 되고 싶었어. 그 화란놈에게 감동해서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졌지.”

    3년 광부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려니 왠지 억울해서 프랑스로 갔다. 파리에 대한 동경이 없었다곤 할 수 없다.

    “프티 부르주아 같은 생각인데, 공부가 하고 싶었어. 첨엔 그냥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는 노숙자 생활을 했어. 센 강변에서 집시들과 함께 잠자고. 말이 노숙자지 거지지 뭐. 그래도 좋았어. 자유롭고 거칠 것이 없었지.”

    동양인 떠돌이의 주먹이 세다는 소문을 듣고 싸움을 걸어온 그곳 스페인 갱 두목을 좍 뻗게 만들기도 했다.

    “부하를 한 200명 거느린 놈인데 부두목이 돼달라고 하대. ‘내가 두목이 되고 네가 부두목이 돼라’ 하면서 거절했어. 대신 그 동네 어느 찻집에서도 공짜로 차를 마시게 됐지.”

    어학연수도 받고 프랑스 영화를 자막 없이 볼 정도가 되자 별안간 서울이 그리워졌다. 꿈에 어머니가 여러 번 보였다. 파리 생활 4년 만에 돌아왔다. 당시 파리는 맥시가 유행이었다. 맥시코트를 입고 머리를 어깨까지 기르고 김포에 내린 그를 기자들이 둘러싸고 사진을 찍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파란의 ‘방랑주먹’ 방배추

    ‘방랑 주먹’ 방배추는 일흔의 나이에도 ‘몸으로 밥 벌어먹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간다.

    “그때가 1970년이었는데 서울에 전차가 없어졌대. 그새 3·1빌딩이 생겼더라고.”

    돌아온 그는 전혀 엉뚱하게도 충무로에 고급 옷가게를 차린다. “나는 살인 빼고는 안 해본 일이 없고 북극 빼고는 안 가본 곳이 없다”는 말은 방배추의 인생을 요약하기에 딱 맞는 문장이다. 노라노인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양재학원에 등록했다. 남자는 방배추 하나뿐이었다. 디자인과 재단은 물론 재봉질과 바느질도 직접 했다.

    “내가 소인배라서 쓸데없이 완벽주의자야. 신호등도 꼭 지키고 신발도 가지런히 놓는 그런 한심한 짓을 한다고! 그러니 세발뜨기 같은 바느질도 아주 잘하지. 그때는 앙드레김이 아직 없을 때거든. 전국순회 패션쇼도 했다고. 고급 양장점 원피스 한 벌이 3만원 할 때 우리 집은 12만원을 받았어. 그래도 자가용 몰고 와서 서너 벌씩 한꺼번에 해가는 사람이 있더라고. 남정임, 윤정희, 김수미 같은 영화배우도 드나들고 사단장 여편네들도 단골로 왔지.”

    간첩혐의로 고문

    그러나 ‘살롱 드 방’은 1년 만에 문을 닫는다. 돈 잘 버는 방배추를 찾아와 밥을 얻어먹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불러내면 성격상 안 나가지 못했고 나가면 술에 진탕 취해버렸다.

    “내가 태생적으로 돈에 대한 집착이 없어요. 물건 간수도 잘 못해. 부자들이 거들먹대도 조금도 부럽지가 않아. 그저 가소로울 뿐.”

    사람들은 배추가 파리에서 소르본 대학을 졸업했다고 수군거렸다. 집에 ‘소시에 테 애니멀’이라는 책을 꽂아뒀더니 동물사회학을 전공했다고도 했다.

    “아니라고 하면 ‘겸손해서 그렇다’고들 한단 말이야. 거 참 사람이 맥없이 억울해지는 경우가 많아.”

    그의 이력을 무슨 수로 일일이 짚어내랴. 한때는 절에 가서 행자노릇을 했고, 또 한때는 중기를 끌고 중동에 건설노동자로 나섰고, 또 한 시절은 중국 칭다오에서 직원 3000명을 거느린 큰 회사의 사장 노릇도 했다. 중국 내 외국인 회사로는 둘째가는 규모였고 공장도 원활하게 굴러갔으나 사업주와 배짱이 안 맞아 그만둬버렸다. 또 한시절은 철원에 가서 땅을 10만평이나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그 무렵 어머니가 권한 사람과 단 한 번 만나 결혼했다.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개간할 때는 하루에 삽을 일곱 자루나 부러뜨렸어. 혼자 힘으로 1년 만에 밭 5만평, 과수원 3만평, 논 2000평을 만들었지. 민통선 안의 땅이었는데 땅임자가 나를 턱 보더니 ‘자네, 내 아우 하려나?’ 그래. 보니까 괜찮아. 그러자고 했더니 ‘일어나서 절해라’ 그러더라고. 거기서 우리 방그레를 가졌지(첫딸 이름은 방그레, 둘째딸은 방시레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고 자급자족하는 공생을 꿈꾸던 방배추가 개간한 ‘노느메기 밭’에는 별의별 곡식이 종류대로 심겼고 별의별 재야인사가 수시로 드나들었다. 갓 시집온 새댁은 술 담그기에 이력이 났다.

    그는 머잖아 당국의 주목 대상이 되고 마침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다. 말도 안 되는 간첩혐의가 덮어씌워져 자백을 강요받는다. 그 과정에 고문을 당했다. 첫눈에 몹시 가지런해 보인 그의 치열은 실은 고문받을 때 모조리 뽑혀 나간 치아를 대신한 의치였다. 그러나 그는 고문 얘기 하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민주투사도 아니고 고문을 자랑해서 벼슬할 것도 아니고…. 조직이 있어, 성명서를 발표하길 했어? 이유도 없이 잡혀간 나 같은 사람 이야기는 그저 술안주거리일 뿐이지.”

    만삭이 된 아내까지 대구 대공분실로 끌려가는 꼴을 당했다. 차라리 특공대를 조직했다고 거짓 자백하고 사형을 당할까 하는 유혹이 생길 정도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뱃속 아이를 유복자로 만들기 싫다는 의지가 그를 버티게 했다.

    “결혼한 덕을 봤다니깐. 지금 같으면 죽는 게 두렵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그래도 젊다고 죽는 게 싫었던가 봐.”

    “각하,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제5공화국 시절 그는 다시 한 번 남영동 대공분실로 잡혀간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어떤 친구의 도주를 도왔다는 죄였다.

    “유명한 이근안을 그때 만났어. 박정희 때와는 사뭇 다르더라고. 청와대 쪽을 향해 거수경례를 딱 붙이면서 ‘각하,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이 지랄을 하더라고. 내가 벗겨놓으면 몸이 좀 좋아? 민주투사라는 놈들이야 언제 노동을 해봤나. 벗겨도 몸이 비리비리한 게 여편네들 같잖아? 그런 치들만 보다가 내 몸을 보더니 이놈들이 아주 좋아서 환장을 하는 거야. 나중에 들은 건데 김근태를 고문하던 놈은 걸핏하면 ‘너도 방배추처럼 한번 당해볼래?’ 했다지.”

    그러나 다 지나간 일, 그는 지금 평온하고 담담하다. 자본주의의 한계와 맹점을 설파하고 자신의 무정부주의적 이상을 펼칠 때만 목소리가 커질 뿐이다. 그는 지금 뜨내기 노동자다. 의왕시 변두리에서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집을 세 얻어 살고 있다.

    왕년의 화려했던 주먹 방배추, 그가 초라한가? 아니다. 불안해 보이는가? 전혀 아니다. 5공 시절 대통령비서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듯, 지금도 달콤한 유혹 따위는 단호하게 거부할 것이다.

    루쉰(魯迅)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큰딸 그레는 지금 다롄(大連)대학의 미술교수로 있다. ‘살찐 여자들이 바닥에 자빠져 있는’ 작품으로 지난해 중국인민예술대회에서 입상했다.

    “이게 뭐냐? 했더니, 아버지가 더 잘 알잖아요, 그래. 비대한 자본주의가 자폭하는 모습을 그린 거지. 내가 다 잃어도 그 애 하나 건진 거야.”

    작은딸 시레도 언니가 있는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다. 방동규 부부는 어쩌면 자식을 따라 곧 중국으로 가게 될는지도 모른다.

    “나와 배짱이 젤 잘 맞는 게 아랍인과 중국인이거든. 순진하고 인정 많고 꼭 일제시대쯤의 우리 모습 같단 말야.”



    그는 어쩔 수 없는 방랑자고 이단아다. 체 게바라나 안중근같이 싸우다 죽고 싶었다. 권력을 얻은 스탈린보다 신념을 굽히지 않다 죽은 트로츠키의 삶을 진정한 성공이라고 믿는다.

    “권력이나 돈 주변에 얼쩡거리는 놈들, 다 쥐 아니면 쥐새끼들이지. 지들이 쥐니까 인간이 다 쥐인 줄 알아. 호랑이 같은 인간도 있는 거라고! 호랑이가 쥐새끼를 내려다보면 얼마나 가소롭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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