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남보다 앞서라?

  • 입력2005-05-24 16: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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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보다 앞서라?
    요즘아이들을 보면 정말 측은하다.

    인생의 선배로서 유위유망한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줘야 마땅할 터인데 한숨부터 나오는 것은 어인 일인가. 잠자리나 쫓아다니며 뛰놀아야 할 초등학교 학생들이 학원을 다니는데, 서너 개는 기본이고 많은 경우는 밤늦도록 열 군데도 넘게 쏘다녀야 한단다. 중학생, 고등학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방학 중에도 1주일 내내 아침 8시부터 새벽 2, 3시까지 학원 순례를 해야 한단다. 한마디로 아이들을 ‘잡는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나?

    설마 세상의 부모들이 사랑하는 자식들을 잡으려고 작심한 것은 아닐 터인데, 내가 보기엔 분명히 잡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내가 뭘 잘못 본 것이거니 반성해봐야 한다.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고결한 신념체계를 목하 실천에 옮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한동안 고심했다. 답은 지극히 단순, 명료하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 혹은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자식 사랑 앞에서 말을 잃는다.

    자식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무언가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싶고, 인생의 낙오자가 된 자식을 보고 뒤늦게 후회하느니 힘이 들더라도 지금 뒷바라지를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꿈에도 아이들을 잡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는 파출부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열성은 결코 맹자의 어미에 뒤지지 않는다. 그뿐인가. 자식을 세계인으로 키우기 위해 기꺼이 이산의 아픔을 감내하는 기러기 아비들을 보라.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의 혁혁한 미래를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에든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그들의 바람이 모두 성취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치로 보건대, 모든 사람이 다 남보다 앞설 수는 없으니 그게 좀 문제다. 공부를 많이 하건 적게 하건 일등과 꼴찌는 있게 마련이다. 어차피 그럴 바에야 주위 풍광도 구경하면서 다 같이 천천히 걸어가면 좋으련만, 한 놈이 더 차지하겠다고 뛰기 시작하면 다른 놈도 덩달아 뛰지 않을 수 없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떼거리를 지어 빨리 달리면 모두 그만큼 더 행복해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행복과 불행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경쟁과 우열이 존재하는 한 모두 똑같이 행복해지는 법은 없다.

    영화관에서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더 잘 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면 뒤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일어서서 영화를 봐야 한다. 촌지는 원래 주는 것이 아닌데, 어떤 사람이 특급대우를 받겠다고 촌지를 주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주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특급대우 해달라는 소리를 못한다. 하는 수 없이 촌지를 또 인상해야 한다. 그러면 남들도 올릴 것이다. 결국 시종일관 똑같은 서비스를 받으면서도 비용은 점점 증가한다. 남보다 앞서야겠다는 경쟁의식은 대체로 이와 같은 부작용을 낳기 쉽다.

    ‘선의’와 ‘경쟁’

    생물학적 차원에서 ‘생존’은 경쟁이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밀림에서는 다른 놈보다 강하고 빠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삶’이 반드시 경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선의(!)의 경쟁으로 인해 인류의 문명이 이만큼이라도 진보할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문명이 진보한 만큼 세상은 더욱 살풍경해졌다는 비판을 생각하면 경쟁의 효용성에도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선의’와 ‘경쟁’은 양립하기가 어렵다. 경쟁에서 선의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악마에게서 자비심을 구하는 만큼이나 난망한 일이다. 공정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진정으로 선의를 가진 사람이 남이 취할 수도 있는 재화를 가로채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남보다 더 먹으라고 부추기기보다는 남과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라는 가르침이 어느 모로 보나 훨씬 실속 있다. 그래서 도덕책에도 그렇게 씌어 있지만 속 깊이 공감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모든 부모가 이렇게 가르칠 줄 안다면 이 세상은 훨씬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바람이 백면서생의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섭섭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이제 자식들이 남보다 앞서길 바라는 세상 부모들의 포원(抱願)을 인정하자. 인정하되 남보다 앞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생각해봐야겠다.

    남보다 앞서는 사람, 그래서 남보다 더 많은 재화를 차지하는 사람은 그만큼의 책임과 의무를 진다. 저 혼자 잘나서 남보다 더 차지한다고 강변한다면 이미 더 차지할 자격이 없다. 경쟁 세상에서는 경쟁을 통해 더 차지하는 사람을 가려낸다. 그것은 사회적 차원의 약속인데, 이 약속에는 이미 책임과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괜히 더 주는 것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만큼 더 주는 것이다. 세상엔 공짜가 없고, 근거 없는 특권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책임과 의무 중에 가장 근본적인 것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잊혀진 원칙이다.

    남보다 덜 차지하는 노동자나 농민이 도덕적으로 부실할 때 그 파급 효과는 더 차지하는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런데 남보다 더 차지하는 사람이 도덕적으로 부실하면 그 영향력은 그들이 차지하는 크기에 비례한다. 권력과 돈과 명예를 가진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모두 남보다 더 차지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세상 부모들은 자식이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비난할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에게 가장 요구되는 도덕성을 길러주기 위해 어떤 배려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지도층의 부패가 망국의 지름길임은 역사가 가르치는 바다. 크고 작은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그들이 잘나고 똑똑한 만큼 도덕적이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못나고 둔한 사람이 반드시 더 도덕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나친 경쟁의식과 이것의 한 변종인 성취욕이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것 같다.

    성취욕이란 개인이나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도를 넘으면 재앙이 된다. 비틀린 성취욕을 가진 이에게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의 삶은 삶이 아니요, 설사 목적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는 즉시 또 다른 목표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은 언제나 수단의 삶이요 희생의 삶이다.

    외아들 귀에 못이 박이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며 희생한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어미는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 원죄 때문에 어미 노릇 제대로 하기 힘들고 자식도 아들 노릇 제대로 하기 힘들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공부해서 어려운 자격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내가 어떻게 공부했는데…”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바라는 것이 많아진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신양명한 모든 사람이 이렇게 보상심리의 노예가 된다면 그 사회는 이권 다툼의 각축장이 된다.

    경쟁 사회에서 남보다 앞서기 위해 분투하는 것은 장한 일이다. 그러나 그 분투가 아름다운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라면, 그에게는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다. 오늘의 희생 위에 건설되는 내일이란 언제나 너무 초라한 법이다. 그래서 목적을 성취한 후, 감격에 겨운 순간이 지나가면 일시적으로 공허감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그리고 지난 희생의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 많은 것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 누구보다, 그 어느 때보다 도덕이 요구되는 때에 더 차지할 궁리에 골몰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만족을 얻는 법을 배우지 못한 그들은 자신의 성취를 스스로 비하하면서 또 다른 내일의 영광에 목을 매는 것이다.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時現今 更無時節)’이라는 선가(禪家)의 경구가 있다. 오직 이 순간뿐 다른 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과거는 지나간 현재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다. 지금 만족할 수 없으면 앞으로도 영원히 만족할 수 없다.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노력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라는 충고가 아니다.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현실이 도처에 있음을 잘 알고 있는데 어찌 참고 살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저 말의 진의는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더라도 현실에서 도피하지 말고 그 고통까지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포기하거나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현실을 인정하고 직시하는 삶이다. 현재를 수단이나 희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순간 자체가 목적인 삶을 살 때 비로소 삶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지금 여기에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남보다 앞서고 싶은 생각도 없고, 앞서기 전에 이미 행복하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반드시 남을 행복하게 해준다. 이것이 참된 의미의 앞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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