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청와대, 부시 대통령의 ‘탈북자 출신 기자 단독면담’ 만류

美 면담 강행은 ‘北 인권 문제, 내 식대로 하겠다’ 시그널?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06-27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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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부시 대통령의 ‘탈북자 출신 기자 단독면담’ 만류

    부시 미 대통령이 6월13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탈북자 출신 ‘조선일보’ 기자 강철환씨를 환영하고 있다. 이 사진은 백악관이 제공했다.

    5월중순, 국가정보원에 민감한 첩보 하나가 보고됐다. 워싱턴발 첩보는 백악관과 관련된 것이었기에 주목도가 매우 높았다. 요지는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탈북자 출신인 강철환 ‘조선일보’ 기자를 단독으로 면담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5월17, 18일 이틀간 열리는 ‘부시 2기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 전망’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강 기자가 워싱턴을 방문하는 일정을 활용할 계획이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1992년 탈북해 조선일보에 입사한 강철환 기자는 북한민주화운동본부 대표를 겸임하며 국내외에서 적극적으로 북한인권운동을 펼치고 있는 ‘중견급 인사’. 국정원의 첩보는 워싱턴의 북한인권 운동가들이 두 사람의 면담을 주선할 것이라고 전했다. 강 기자가 프랑스 언론인인 피에르 리굴로씨와 함께 영어로 출간한 ‘평양의 어항 : 북한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10년’이라는 책을 부시 대통령이 탐독했다는 사실은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정부로는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첩보였다. 1990년대 이래 적잖은 탈북 인사들이 미국을 방문해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부시 대통령이 직접 탈북인사를 만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더욱이 4월28일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 워싱턴을 방문해 6월 중순 한미정상회담을 열기로 협의하고 돌아온 상황이었다. 정상회담을 한 달도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백악관이 ‘탈북자 출신의 조선일보 기자’를 만나려 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했다.

    그런 까닭에 국정원으로부터 첩보를 보고 받은 청와대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이를 만류하려고 애쓴 것으로 전해진다. 미 행정부의 한 관계자는 “강 기자와의 면담추진과 관련해 한국정부에서 다양한 경로로 부정적인 의견을 전해왔다”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는 면담 사실이 알려지면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 이후 가뜩이나 예민해진 평양이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는 것. 한편 이 관계자는 “청와대 입장에서는 북한인권 관련 의제가 정상회담 테이블에서 비중 있게 거론되는 것 역시 달가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관측을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그러한 첩보가 있었다는 것과 정부에서 대책을 준비한 것은 사실”이라며 관련 내용을 부인하지 않았다. 정상회담의 성공에 매우 큰 의미를 두고 있었던 만큼 회담에서 양국 정상의 견해차를 심화시키거나 결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소들은 사전에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설명이다.



    결국 백악관측이 염두에 두었던 5월 중순의 면담계획은 더는 진행되지 않았다. 강 기자는 5월 중순 예정대로 워싱턴을 방문했지만, 미 국무부와 국방부 관계자들을 만나 북한과 관련한 대화를 나눴을 뿐 백악관은 방문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정상회담 파트너인 한국측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백악관의 입장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6월10일 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짤막하게 의견을 주고받았지만 비중 있는 대화는 오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와는 별도로 한국 정부는 강철환 기자의 5월 워싱턴 체류기간 내내 혹시 백악관 면담이 이뤄지지 않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강 기자는 “가기 전부터 국정원측에서 ‘누구를 만나기로 했느냐’고 묻더니, 체류기간 내내 끊임없이 연락하며 일정을 물어왔다”고 말했다. 특히 이때 만난 미국 정부 관계자들의 소속과 신분에 대해 유난히 궁금해하더라는 것이었다.

    한 번은 배려했지만…

    그러나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결국 부시 대통령은 정상회담 사흘 뒤인 6월13일, 강 기자를 백악관 집무실로 초청해 40여 분간 면담을 했다. AP뉴스를 통해 타전된 이 소식에는 백악관에서 제공한 면담 사진이 포함돼 있었다. 이는 백악관이 강 기자와의 면담을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음을 의미한다. AP뉴스에 따르면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은 그 책을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a compelling story)라고 생각했으며 북한의 인권 상황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결국 백악관의 이러한 면담 실행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측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만류’ 의사를 들어주기는 했지만, 향후 한국을 의식해 아예 북한 인권문제를 관심사에서 제외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공개 신호로 해석될 수 있는 까닭이다. 정상회담 사흘 뒤, 40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한 면담은 다분히 한국 정부에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번 면담이 갖고 있는 외교적 의미는 그리 간단치 않다. 부시 대통령이 탈북자와 면담한 사실을 알게 될 경우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알고 있을 백악관이 이를 강행하고 심지어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북한을 달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화 제스처를 보여줄 마음이 없음을 시사한다.

    전략적 상황판단을 중시하는 라이스 장관 등 참모들에 비해 부시 대통령의 대북관은 훨씬 원론적이고 비타협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악관의 이러한 자세와 ‘가급적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교류·협력 및 각종 인도주의적 지원을 통해 북한의 인권이 실질적으로 개선되도록 노력한다’는 한국측 입장 사이에 놓인 적잖은 차이가 딜레마를 던지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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