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세계 新 7대 불가사의’의 비밀

욕망, 신앙, 사랑, 쾌락, 희생, 의혹, 불완전이 안겨준 값진 선물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5-06-29 13:0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지구상에는 도저히 인간이 만들었다고 믿기 힘든 것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불가사의’라 부른다.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불가사의는 어떤 것일까. 전세계를 대상으로 지구촌 새 7대 불가사의를 뽑기 위한 인터넷 투표가 진행 중이다. 기간은 2006년 12월24일까지. 현재 모두 101점의 문화유산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중 ‘톱7’을 소개한다.
    ‘세계 新 7대 불가사의’의 비밀

    ‘백색 대리석의 진혼가’란 별명이 붙은 아그라의 타지마할. 샤 자한이 왕비 뭄타즈 마할을 기려 지은 대리석 묘당이다.

    시드니올림픽 개막을 코앞에 둔 2000년 9월15일. 스위스 출신의 캐나다 영화제작자이자 저술가이고 항공기 조종사인 베르나르 웨버는 ‘신(新) 세계 7대 불가사의’를 선정하기 위해 인터넷에 홈페이지(www. new7wonders.com)를 개설했다.

    웨버는 이에 앞서 1999년 고대 그리스 학자들이 당시 여행자들을 위해 작성한 7대 불가사의 목록을 오늘의 세계에 맞게 재정비하고자 ‘신 세계 7대 불가사의 기금’을 창설했다. 홈페이지 개설은 그 첫 사업이었던 것. 웨버는 홈페이지 오픈행사를 통해 ‘문화유산은 우리의 미래(Our Heritage is Our Future)’라는 모토를 내걸었다.

    웨버가 모델로 삼은 ‘고대 7대 불가사의’는 기원전 225년경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의 수학자 필론이 목록을 작성한 것으로 ▲이집트의 대(大)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空中)정원(지금의 이라크 소재)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터키)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영묘(터키) ▲로도스 섬의 거상(그리스)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이집트)다. 이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피라미드가 유일하다.

    필론은 불가사의 목록을 작성하면서 왜 일곱 가지로 한정했을까. 이에 대해 그가 언급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7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다. 행운의 숫자라고도 하지 않은가. 성서에도 성스러운 일은 7과 함께 등장하며, 천지창조도 7일에 걸쳐 이뤄졌다. 일곱 가지는 사람들이 기억하기에도 좋다. 그보다 더 많으면 외우기가 힘들고 더 작으면 내용이 부실하기 십상이다.

    ‘고대 7대 불가사의’와 지금 진행 중인 ‘신 7대 불가사의’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차이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고대의 것은 한 사람이 작성한 것인 데 반해 21세기의 것은 정보화 시대의 요구에 맞게 사이버 투표를 통해 전세계 수천만명이 결정한다는 점이다. 또한 고대에는 그리스인이 주로 여행하던 동(東) 지중해의 것을 대상으로 삼은 반면, 오늘날엔 전세계에 산재한 인공축조물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와는 별개로 피라미드가 21세기형 7대 불가사의에 포함될 수 있냐 하는 점도 관심 사안이다. 만일 포함된다면 고대인과 현대인 사이에 일정한 공통분모가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사이버 투표결과를 보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중국·인도 투표율 1, 2위

    당초 네티즌의 투표는 2005년 12월24일까지, 결과 발표는 2006년 1월1일이었으나 많은 이가 관심을 보이자 그 기간이 1년씩 연장됐다. 앞으로 1년 반 이상의 시간이 남은 셈이다. 지금까지 투표에 참여한 네티즌은 1800만명을 넘어섰다. 그들의 국적도 228개국에 이르러 명실공히 세계인이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2005년 5월8일 현재).

    나라별로 참가자 수를 보면 중국이 전체의 40.50%로 1위를 달리고 있고, 이어서 인도(21.22%), 페루(7.92%), 터키(5.92%), 멕시코(5.32%), 미국(2.87%), 독일(1.72%), 홍콩(1.25%), 예멘(1.23%), 칠레(1.2%)가 뒤따른다. 11위는 캐나다. 12위부터는 참가율이 1%미만이다.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라면서도 0.1468%라는 저조한 참가율로 32위를 기록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0.2%·23위), 알바니아(0.16%·28위), 미국령 사모아(0.15%·30위)도 우리보다 참가율이 높다.

    현재 선정 대상에 올라 있는 축조물은 모두 101점. 그중 26점이 1% 이상의 지지율을 획득한 상태다. 나머지 85점은 지지율이 극히 미비하다. 아쉽게도 한국의 문화유산은 이 투표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다.

    ‘세계 新 7대 불가사의’의 비밀

    중국 네티즌의 몰표 덕분에 신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만리장성. 조망이 좋은 바다링에는 케이블카가 운행된다.

    현재 ‘지지율 톱10’을 살펴보면 1위 중국의 만리장성(지지율 10.92%), 2위 티베트의 포탈라 궁전(8.45%), 3위 인도의 타지마할(7.93%), 4위 로마의 콜로세움(6.94%), 5위 멕시코의 치첸이차 피라미드(6.28%), 6위 이스터 섬의 인물 석상(5.98%, 칠레), 7위 피사의 사탑(5.93%), 8위 에펠탑(5.02%), 9위 페루의 마추피추(3.86%), 10위 모스크바의 붉은광장과 크렘린(3.38%)이다.

    20위권 안에는 베르사유 궁전(2.98%, 12위), 알함브라 궁전(2.81%, 13위), 앙코르와트(2.79%, 14위), 자유의 여신상(2.74%, 15위), 바르셀로나의 성 가족교회(2.61%, 16위),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2.74%, 17위),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2.47%, 18위),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1.97%, 20위) 등 대부분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들이 포함돼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101점 가운데도 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대신 이집트의 다른 문화유산 몇 점이 포함돼 있으나 그 지지율은 극히 낮다. 이집트 네티즌의 참가율이 0.0199%로 81위를 기록할 정도로 저조한 데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전체 참가자의 40%를 차지하는 중국 네티즌은 자국의 문화유산 2점을 각각 1, 2위에 올려놓았다.

    최근 들어서는 인도의 참가율이 최고를 달린다. 이런 현상은 지난해 12월1일, 여배우 아시와라 라이가 참석한 가운데 타지마할에서 화려한 이벤트를 벌인 것을 계기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우리 문화유산을 세계에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사례다.

    ‘신 7대 불가사의’ 선정 작업에 참가하고 싶다면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투표(vote)’를 클릭하고 자신이 원하는 문화유산을 기입하면 된다. 최대 일곱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한편 웨버는 신 세계 7대 불가사의 선정 작업이 끝나면 선정된 축조물을 수록한 DVD를 만들어 청소년 교육자료로 배포할 계획이다. 나아가 ‘세계 7대 자연물 불가사의(7 natural wonders of the world)’와 ‘세계 7대 기술 유산 불가사의(7 technical wonders of the world)’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럼 지금부터 전세계 네티즌에게 높은 지지율을 얻은 ‘톱7’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 불가사의가 여행 가이드로 마련됐다는 점을 고려해 필자의 경험을 살려 여행 가이드 형태로 구성해 보았다.

    1. 만리장성(The Great Wall Of China)

    중국 네티즌의 몰표 덕분에 1위를 차지한 만리장성은 길이가 무려 6000km나 되는 어마어마한 성이다. 너무 길어 한눈에 그 전체를 다 볼 수 없을 정도다. 대개의 관광객은 베이징 북방 80km 거리에 있는 바다링(八達嶺)에 올라 그 일대를 둘러보는 것에 만족한다. 이곳은 1987년 ‘베이징 16경(景)’의 하나로 선정된 데 이어 1992년에는 만리장성의 백미로 지정됐을 만큼 명소다. 교통이 편리하고 풍광도 뛰어나다.

    그곳에서 만리장성은 남과 북으로 나뉜다. 북성은 잘 지어졌고 경관이 아름답다. 성벽은 폭이 넓어 말 4필이 함께 달릴 수 있을 정도다. 그 길을 따라 오르면 총안(銃眼)이 있는 여장(女墻·성 위에 낮게 쌓은 담)과 돈대(망루), 봉화대를 볼 수 있다. 어떻게 이 높은 곳에 이토록 높고 튼튼한 성벽을 끝도 없이 축조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해발 888m 지점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직접 ‘장성에 오르지 않은 이는 진짜 사나이가 아니다’고 쓴 만리장성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이 비석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어떤 이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까지 걸어서 오르는 일은 쉽지 않다. 나이든 사람이나 아이들, 그리고 시간에 쫓기는 여행객들은 케이블카로 대신한다. 케이블카로는 정상까지 10분이면 족하다. 하지만 장성의 이모저모를 보고 싶다면 힘들더라도 제 발로 걸을 것을 권한다.

    ‘세계 新 7대 불가사의’의 비밀

    티베트의 포탈라 궁전. 나무와 돌로 지어졌다.

    이곳에선 바다링 주위의 산세와 그 산세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장성의 위용이 발 아래 펼쳐진다. 장성은 서쪽으로 달리다 타클라마칸 사막 속의 자위관(嘉틾關)까지 이어진다. 장성 축조의 목표는 단 하나, 북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다.

    만리장성의 역사는 중원을 통일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 때부터 시작된다. 그가 제국의 경계를 확고히 하고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차단하겠다는 목적에서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동원, 춘추 6국(國)이 제각기 쌓은 성벽을 하나로 연결해 만리장성이란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성은 명(明)왕조가 크게 손보고 증축한 것이다. 명나라야말로 북방 몽골족과 여진족을 상대로 생존을 건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생존을 향한 욕망보다 더 강한 에너지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장성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2. 포탈라 궁전(Potala Palace)

    티베트라 부르는 지역은 중국 남서부에 있는 티베트족 자치구, 즉 시짱(西藏) 자치구를 가리킨다. 위도 상으로는 그리 높지 않지만(북위 27∼37。), ‘세계의 지붕’이라 부르는 히말라야 산맥에 자리잡고 있어 매우 춥고 건조하다. 그 중심도시 라사는 해발 3800m라 숨쉬기도 힘들다. 이런 곳인데도 해마다 많은 사람이 라사를 찾는다. 포탈라 궁전을 보기 위해서다. 라사는 신선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만년설 덮인 산꼭대기를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는 포탈라 궁은 한 폭의 그림처럼 환상적이다, 순례객과 관광객은 이 궁전을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길게 줄을 선다.

    포탈라 궁은 역대 달라이라마가 지내면서 집무를 보던 곳으로, 달라이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할 때까지 정교일치 국가이던 티베트의 정치·종교 중심지였다. 이 궁전은 7세기에 손챈 캄포 왕이 당나라 태종의 딸 문선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티베트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운 인물이다.

    그러나 초기 궁전의 원형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지금의 궁전은 17세기경 달라이라마 5세가 재건한 것이다. 달라이라마란 종교와 정치의 수장을 일컫는 말. 그는 활불(活佛)을 통해 태어난다. 티베트 불교는 활불을 믿는 밀교다.

    궁전은 밖에서 보면 13층 구조이지만 실제는 9층이다. 높이 117m, 동서 길이 360m, 총면적은 10만㎡가 넘는다. 이래서 ‘수직의 베르사유’란 별명이 붙었다. 방도 1000개나 된다. 벽은 두께 2∼5m의 화강암과 나무를 섞어서 세웠다. 궁전 안의 벽은 온통 벽화로 채워져 있다. 돌과 나무로만 지은 건물이라는 데도 오랫동안 그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놀라울 따름이다.

    궁전 초입에는 백궁(白宮)이 있다. 벽이 모두 흰색으로 칠해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궁에서 가장 큰 동대전(東大殿)은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공간이고 백궁 꼭대기의 일광전(日光殿)은 달라이라마의 개인 저택쯤 되는 곳이다. 그 안에는 달라이라마의 옥좌와 집무실, 회의실, 행정관청이 들어서 있다.

    백궁 옆의 홍궁은 종교의식이 치러지던 곳으로, 한마디로 종교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 속에 미라 처리가 된 달라이라마의 유해가 안치돼 있는 영탑(靈塔)이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홍궁의 회랑 벽면과 천장은 원과 사각형이 교차하며 그 속에 부처와 연꽃이 그려진 만다라로 채워져 있다. 만다라는 티베트 불교의 우주관을 중생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그 속에 등장하는 상징물이나 구조는 진리의 세계를 축소해놓은 것이다. 홍궁에는 만다라 외에도 많은 양의 경전과 서적, 공예품이 보관돼 있어 그야말로 티베트 문화의 상징이자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3. 타지마할(Taj Mahal)

    ‘백색 대리석의 진혼가’ 또는 ‘세계 최대의 사랑의 기념탑’이란 별명을 가진 타지마할은 16세기 북인도를 지배한 무굴 왕조의 제5대 왕인 샤 자한이 사랑하던 왕비 뭄타즈 마할을 기려 축조한 것이다.

    22년간 막대한 돈과 인력을 들여 완성한 타지마할은 양파 모양의 지붕과 동서남북 네 곳에 마치 경비병처럼 서 있는 미라레트(첨탑)가 인상적이다. 건물은 좌우로 기막힌 대칭을 이루는데, 그 앞 긴 연못에 비쳐 좌우상하로 환상적인 대칭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건물은 온통 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졌지만 눈이 부시진 않다. 눈에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는 투명한 하얀색이라 그런 것 같다. 묘당에 오르기 위해선 신발을 벗어야 한다. 맨발에 닿는 대리석 촉감은 무척이나 부드럽다. 이 하얀 대리석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햇빛을 그대로 받아들여 특유의 색깔을 빚어낸다. 새벽녘에는 보랏빛과 분홍의 장밋빛, 그리고 억제된 황금빛을 머금으며, 이른 아침 안개가 피어오를 때에는 건물 전체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고, 낮에는 화사한 흰색을 토해낸다. 그러나 가장 환상적인 정경은 보름달이 비치는 밤에 드러난다.

    사리를 걸친 인도 여성들은 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춤을 추듯 사뿐히 걷는다. 그 모습도 아름답다. 벽을 자세히 보니 꽃과 아라비아 서체가 새겨져 있다. 덕분에 단조롭지 않다. 이게 이슬람의 미학인 듯싶다. 묘당 뒤로는 야무나 강이 흐른다. 그곳에선 빨래하는 여인들을 볼 수 있다.

    영묘의 내부로 비치는 빛은 격자창을 통해 순화돼 훨씬 부드럽다. 마할 왕비와 샤 자한의 석관은 그 아래 지하에 있는데 모두 상아빛을 발한다. 왕비의 것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어 여성의 것임을 나타냈고, 왕의 것에는 그런 게 없다. 그렇지만 ‘피에트라 두라’라 부르는 상감세공의 손길이 가해져 고급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4.콜로세움(Coloseum)

    ‘세계 新 7대 불가사의’의 비밀

    80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된 로마의 콜로세움. 로마시대에 시민의 오락장소였다.

    로마시대의 문화유산이 집중돼 있는 팔라티노 언덕 아래의 포로 로마노(로마 광장)와 이웃한 콜로세움은 로마 땅 위에 건설된 최대 규모의 축조물이다. 정식 명칭은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 그런데 콜로세움으로 바뀐 것은 원래 이 자리에 네로 황제의 거상, 즉 콜로소(Colosso)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은 플라비스 왕조가 로마 시민에게 오락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80년에 걸친 공사 끝에 축조한 원형 투기장이다. 지름이 긴 곳은 188m, 짧은 곳은 150m, 둘레가 527m, 높이가 57m로 수용인원이 5만명에 달한다. 당초 4층 구조였다고 하나 지금은 2층 또는 3층만 남은 곳이 더 많다.

    육중한 벽체 사이로 난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당초 마루였던 바닥은 없어지고 그 아래에 설치돼 있던 야수들의 우리만이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고 있다. 마치 해골을 보는 듯하다. 객석 한쪽에는 그때 희생된 기독교도를 기리기 위해서인지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많은 사람이 높낮이 심한 객석을 가로질러 그곳으로 간다.

    당시에는 뜨거운 햇볕을 막기 위해 이 극장에 천막을 씌워 실내극장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 기술도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콜로세움은 언뜻 보면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는 커다란 그릇 같은 느낌을 준다.

    5. 치첸이차 피라미드(Pyramids of Chichen Itza)

    멕시코 만을 향해 고개를 내민 유카탄 반도의 중심도시 메리다에서 버스로 2시간 정도 달리면 치첸이차가 나온다. 이곳은 8~13세기 번성했던 마야 문명 의 중심지다. 그 가운데서도 명물은 거대한 계단식 피라미드로, 흔히 카스티요(에스파냐어로 城) 또는 쿠쿨칸 피라미드라고 한다.

    쿠쿨칸은 ‘깃털 달린 뱀’이란 뜻. 유카탄 반도에서 가장 흔한 게 뱀이다. 마야인들은 이 뱀을 땅의 비옥함을 상징한다고 하여 신과 같은 존재로 모셨다. 그래서 뱀의 형상을 한 피라미드를 축조했던 것이다.

    ‘세계 新 7대 불가사의’의 비밀

    마야인이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축조한 피라미드. 카스티요 또는 쿠쿨칸 피라미드로 불린다.

    쿠쿨칸 피라미드의 기다란 돌난간은 뱀의 몸통을, 정상에 있는 제단의 들보는 뱀의 꼬리를 상징한다. 난간 입구엔 입을 크게 벌린 뱀 머리가 조각돼 있다. 뱀은 해마다 춘분과 추분에 오후 4시경 약 10분간 마치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린다고 한다. 태양이 피라미드 바로 위를 비추면서 그런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

    쿠쿨칸의 피라미드에는 네 방향에 각기 91개의 계단이 설치돼 있다. 이 모두를 합치면 364개, 여기에 정상의 계단 하나를 더하면 365개. 태양력의 한 해 날짜와 꼭 맞아떨어진다. 이처럼 뛰어난 천문학과 건축술을 가졌던 마야인들은 우주의 안정적인 운행을 기원하며 인간의 신선한 피를 태양신에게 바쳤다.

    재미있는 것은 그 희생자를 뽑는 방법이다. 하키와 비슷한 공놀이를 벌여 승리한 팀에서 가장 힘센 자를 골라 그의 가슴에서 뜨거운 심장을 꺼내 바쳤다. 당시 사용한 경기장은 물론 뜨거운 심장을 올려놓던 차크몰도 남아 있다. 강요가 아닌 자발적 참여로 희생제를 치렀다고 하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들은 비가 내리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면 비의 신에게도 제물을 바쳤다. 세노테란 샘에 처녀와 어린아이 또는 전쟁 포로들을 산 채로 던져 넣었다고 한다. 미국의 고고학자 톰슨이 세노테의 밑바닥에서 이들의 유골을 발견했으니, 물증까지 확인된 셈이다.

    쿠쿨칸 피라미드와 경기장, 차크몰, 세노테 등이 남아 있는 치첸이차는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희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외치는 듯하다.

    6. 이스터 섬의 인물 석상(Statues of Easter Island)

    ‘세계 新 7대 불가사의’의 비밀

    남태평양의 절해고도 이스터 섬에 세워진 특이한 형태의 모아이(인물석상). 누가 왜 이 석상을 만들어 세웠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남미 대륙에서 3700km나 떨어진 이스터 섬은 1722년 4월6일 네덜란드의 야곱 로헤벤 선장이 부활절 아침에 발견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곳에 사는 원주민은 ‘큰 섬에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라파누이라 부른다. 섬이래야 제주도 크기의 10분의 1정도이고 해안선의 길이도 60km밖에 안 되며, 주민은 칠레 본토에서 나온 공무원까지 합해 2800명 남짓인데도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이곳에 있는 모아이(Moai)라 부르는 특이한 인물석상 때문이다. 모아이는 해안선을 따라 여러 곳에 1000여 개가 흩어져 있는데, 대개 바다를 등지고 있다.

    ‘아우’라 부르는 사각의 제단 위에 올려져 있는 모아이는 높이가 4∼8m에 이르고, 무게는 20t을 넘는 게 대부분이다. 생긴 모양 또한 예사롭지 않다. 이마는 앞으로 툭 튀어나왔고 매부리코에다 입술은 얇고 입은 꼭 다물고 있다. 잘 기른 턱수염에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길다. 두 팔은 양 허리에 붙어 있고, 두 손은 배꼽 아래에서 맞잡고 있다. 머리 위에는 검은 몸통과는 달리 붉은색 모자가 씌워져 있다. 어디를 보나 영락없는 백인의 모습이다. 170cm 내외의 키에 몽골리안의 용모,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의 원주민 라파누이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섬 한쪽 끝에 자리잡은 라노라라쿠에는 만들었다가 세우려던 곳으로 미처 옮기지 못한 채 버려진 듯한 모아이가 수도 없이 흩어져 있다. 이는 어느 날 갑자기 모아이 제작이 중단됐음을 말해주는 물증일 터. 그것도 외부의 어떤 요인에 의해서. 그렇다면 전쟁이 그런 결과를 만든 것은 아닐까.

    또 하나 궁금한 것은 모아이의 귀가 왜 그토록 길게 만들어졌느냐는 점이다. 이스터 섬과 함께 모아이의 존재를 서방세계에 널리 알린 노르웨이의 인류학자이자 해양학자인 토르 헤이에르달은 “긴 귀는 귀족 또는 지배 계급임을 알리는, 다시 말해서 고귀한 신분임을 증명하는 표시 내지는 상징”이라고 했다.

    7. 피사의 사탑(Tower of Pisa)

    1971년 8월2일, 아폴로 15호에 승선한 우주인 스콧은 갈릴레이가 한 것과 똑같은 실험을 달에서 했다. 그 장면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지구의 시청자들은 공기가 없는 달에서 가벼운 깃털과 무거운 망치가 동시에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콧은 “이것은 갈릴레이가 옳았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세계 新 7대 불가사의’의 비밀

    갈릴레오의 낙하 실험으로 유명한 피사의 사탑. 뒤로 보이는 건물은 대성당이다.

    갈릴레이는 미켈란젤로가 사망하고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1564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피사는 이탈리아반도 북서부 해안 가까이 있는 도시로, 중세시대 제노바, 베네치아 등과 같이 해상 무역을 통해 번성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는 흔히 ‘피사의 사탑’이라고 부르는 종탑이 있다. 이 탑은 신기하게도 비스듬히 기울어져 금세 무너질 듯하면서도 그 오랜 세월 무너지지 않고 있다. 또 갈릴레이가 이곳에서 ‘물체는 질량과 관계없이 동시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갈릴레이의 이 실험은 얼마 전 미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10가지’ 가운데 하나로 뽑혔다.

    갈릴레이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어느 날 갈릴레이가 종탑에 올라갔다. 종탑 밑에는 곧 있을 흥미로운 실험을 구경하려고 모인 사람들의 환호성으로 시끄러웠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교수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들 앞으로 질량이 다른 두 개의 쇠 구슬을 떨어뜨렸다. 두 개의 쇠 구슬은 동시에 땅에 떨어졌다. 갈릴레이는 그렇게 낙하하는 물체는 질량과 상관없이 등가속도 운동을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했다.

    갈릴레이가 살던 시대에는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가 물체의 질량에 비례한다는 게 상식이었다. 사람들은 10배 무거운 물체가 10배 빨리 떨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그 상식을 깨뜨려버렸다.

    중세 도시국가 피사는 팔레르모 해전에서 사라센 함대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아르노 강변의 ‘캄포 데이 미라콜라(기적의 언덕)’에 3개의 건축물을 짓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두오모 광장이 조성됐고 광장에는 대성당과 세례당, 종탑이 차례로 들어섰다.

    두오모 광장의 주인공인 대성당이 완공된 것은 1118년이다. 이어 1153년에는 원통형 건물에 돔 구조의 지붕을 이고 있는 세례당이 지어졌고, 종탑은 제일 마지막에 세워졌다. 세례당과 종탑은 피사 대성당의 부속 건물이다. 종탑 안에는 음계가 서로 다른 7개의 종이 매달려 있다.

    종탑의 재료는 최고급 대리석. 대리석 산지로 유명한 이탈리아지만 여기에 쓰인 것은 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들려온 것으로 세계 최고의 질을 자랑한다. 이것만 보아도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시작한 공사인지 알 수 있다.

    지상 8층 구조로 계획된 종탑 공사를 위해 먼저 모래와 진흙 그리고 조개껍데기로 바닥을 다졌다. 공사 착수 5년째로 접어들 무렵이다. 아직 3층밖에 쌓지 않았는데 탑이 기울기 시작했다. 남쪽 지반이 북쪽보다 훨씬 물렀기 때문이다. 공사는 일단 중단됐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쪽과 북쪽의 대리석 기둥 두께를 다르게 해서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늘어난 무게 때문에 종탑이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공사가 또다시 중단됐다. 이렇게 공사는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다. 1278년에 7층까지 쌓아올렸을 때의 경사도는 약 1。였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공사는 계속됐다. 1360년 꼭대기의 종탑을 완성해, 무려 200년 가까이 계속된 대공사가 마무리됐다. 그러나 탑은 이미 남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진 뒤였다. 탑은 그후로도 매년 1mm씩 기울있다.



    그동안 탑이 기울어져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38년에 한 차례 대대적인 공사를 했다. 1990년 1월, 탑의 수직 기울기가 4.5m에 이르자 더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된 시 당국은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1993년에는 남쪽으로 기울어진 탑을 바로세우기 위해 북쪽 면에 600t의 납덩이를 묻었다. 다시 1995년에는 철선으로 탑과 바닥을 묶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탑을 더욱 기울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모두 걷어내고 다시 960t의 납덩이를 묻었다. 남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남쪽 땅에서도 흙을 파내고 지름 21cm의 빈 관을 묻었다.

    당시 공사를 맡은 부를랜드 교수는 “피사의 사탑은 이제 기우는 것을 멈췄다. 이는 지난 7세기 만에 이룩한 개가다. 탑은 앞으로 300년 동안은 끄떡없이 버틸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이처럼 위태로운 상태에서도 수백년 동안 용케 무너지지 않고 버텨온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힘들다”고 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