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라면 생각

  • 입력2005-06-30 1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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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면 생각
    주말오후 ‘기아 체험’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라면 생각이 났다. 기아까지는 아니지만 먹을거리가 턱없이 부족하던 어린 시절, 라면은 끼니를 때우던 제2의 쌀이었다. 저물녘,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라면 서너 개씩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오던 친구들을 만나곤 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집이 우리집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부엌 찬장에 라면 서너 개씩 놓아두지 않은 집이 없지만 예전에는 그런 여유도 없었다. 사들고 가는 라면 개수를 보면 자연스럽게 그 집 식구수도 가늠되던 시절이었다.

    입 하나 줄여도 시원찮은데 그 무렵 우리집은 그야말로 군식구들로 넘쳐났다.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촌들이 운전을 배우고 기계를 다루는 기술을 익힐 동안 우리집에 기숙했다. 서울이란 낯선 곳에서 그들에게 비빌 언덕이란 우리집밖에 없었다. 우리집은 비록 변두리이기는 하지만 서울에 있는 마당 딸린 번듯한 집으로 아버지 명의였다. 어머니와 아버지 쪽 사촌들은 서로 일면식이 없었지만 같은 방을 썼다. 말투는 물론 성격도 다르니 한 방을 쓰기가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사촌들이 어느 날부터 불쑥불쑥 상대편 사투리를 내뱉어 사람들을 웃겼다.

    아버지의 박봉으로 군식구들 입까지 감당하긴 어려웠다. 밥상에 밥보다 라면이 올라오는 횟수가 많아졌다. 때마침 국가 정책으로 혼분식(混粉食)이 장려되던 참이었다.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서양 사람처럼 키가 큰다는 말이 돌았다. 우리집은 낱개 포장된 라면을 사지 않았다. 다섯 개가 한 묶음인 덕용 포장의 라면을 한 끼에 두 봉지나 끓였다. 냄비에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석유 곤로 옆에 앉은 어머니는 열 봉지의 라면을 일일이 반으로 분질러 놓았는데 그 양이 만만치 않았다.

    여름이면 석유 곤로에 끓이지만 겨울이면 연탄불에 끓였다. 라면 열 개를 끓일 수 있는 커다란 알루미늄 냄비가 집에 있었다. 직경이 길어 아궁이에 겨우 들어맞던 그 냄비는 아파트로 이사 오던 어느 해에 어머니가 미련 없이 버렸다.

    화력이 세지 않아 연탄불에 올려놓은 라면은 한쪽에서는 삶아지면서 한쪽에서는 불어터지기 시작했다. 밥상에 올라오면 라면의 특색인 꼬불꼬불한 면발은 거의 풀어져 있었다. 대청 마루 가득 앉아 김치 하나를 반찬으로 뜨거운 라면발을 후루룩거리던 얼굴 검은 사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내 곁에는 라면이 있었다. 학교 매점의 라면 맛은 특이했다. 주문을 받고 일일이 끓여낼 시간이 없었기에 면을 미리 삶아뒀다가 손님에게 낼 때 따로 끓여둔 라면 국물을 부어줬다. ‘스프’를 같이 넣고 끓이는 라면 맛과 대번에 차이가 났는데, 아직도 나는 가끔 이런 방법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다. 면발에서 우러나는 기름기를 버리기 때문에 느끼한 맛이 줄어든다. 라면 한 그릇에 여러 명의 여학생이 달라붙었다. 머리를 박고 허겁지겁 라면을 먹었다. 꼬불꼬불한 면발을 입으로 빨아들이다가 하얀 교복에 라면 국물이 튀는 일이 다반사였다.

    꼬불꼬불한 면발은 라면의 특성이다. 곱슬곱슬하게 파마한 머리를 보고 아이들이 ‘라면 머리’라고 불렀다. 라면 생산 과정에서 라면을 날라주는 컨베이어의 속도를 라면이 나오는 속도보다 느리게 하면 가닥이 꼬불꼬불 위로 겹쳐 올라간다고 한다. 이렇게 면발을 꼬불거리게 만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부피가 줄어 포장하기에 편리하다. 영양가를 높이면서 유통 기간을 늘리려면 튀김 공정에서 빠른 시간에 기름을 많이 흡수해 튀겨야 하는데 꼬불꼬불한 면의 빈틈으로 수분이 재빨리 증발한다. 또한 그 틈으로 뜨거운 물이 스며들어 조리 시간을 짧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

    나는 우리 학교 매점 라면을 좋아했다. 한눈에도 눈이 어두워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늘 라면을 끓여내셨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매점을 둘러싼 괴괴한 소문이 돌았다. 라면과 함께 인기 메뉴이던 오징어 튀김을 만들면서 할머니가 오징어 다리를 튀긴다는 것이 그만 눈이 어두워 쥐꼬리를 튀겼다나 어쨌다나. 이런 근거 없는 소문도 라면 인기를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다.

    그 무렵 여의도광장으로 롤러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타러 다니던 아이들 사이에서 ‘컵라면’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바로 익혀 먹을 수 있다는 컵라면을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와 맛을 보았다. 그때는 라면 용기가 컵이 아닌 사발 모양으로 나와 ‘사발면’이라고 불렀다. 통학 시간만 왕복 세 시간이 걸리던 학교까지 오면 점심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배가 고팠다. 매점에 비치된 보온통의 물은 늘 미지근했다. 그 물에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다가는 수업 시작종이 울리기 일쑤였다. 설익은 라면맛을 혀가 기억하고 있다. 라면은 면발도 중요하지만 역시 국물맛과 냄새가 한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후반, 이른바 라면 우지(牛脂) 파동으로 나라 안이 들썩였다. 라면을 튀기는 기름으로 공업용 쇠기름을 사용했다는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때문에 1963년 처음 라면 시장에 뛰어들어 승승장구하던 라면 회사는 이후 부진을 면치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 회사의 무죄가 밝혀졌지만 이미 다른 회사에 시장의 주도권을 내준 뒤였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라면은 반으로 부러뜨려 끓이지 않아도 되었다.

    라면의 원조국이라는 일본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라면집이었다. 삿포로, 오사카, 도쿄의 라면집에서 ‘라멘’을 맛보는 동안 ‘역시 라면은 우리 라면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우리 라면이 인기가 있어 슈퍼마켓에서 심심찮게 그것을 볼 수 있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간 라면 한 봉지를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일본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때 생각은 하기도 싫다고 한다. 이집 저집 다 처지가 어렵던 터라 자식을 맡기면서도 친척들은 쌀은커녕 돈 한 푼 보태주지 않았다. 어머니 허리만 휘었다. 우리집을 거쳐 간 사촌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가정을 꾸렸다. 사촌 중의 한 명은 매일 라면만 주는 것이 질렸는지 어머니에게 밥과 반찬 좀 달라고 투정을 부렸다고 했다. 고향 여행길에 그 사촌을 만났는데, 그 시절을 돌이키며 감사하다면서 용돈을 내놓더라고 했다.

    라면을 먹던 시절, 라면으로 부족해서 한 사촌은 기름기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퇴근을 해서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기껏해야 열아홉, 스무 살이었으니 먹고 싶은 게 참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참 나이 어린 서울 사촌동생인 내게 가끔 100원짜리 동전을 쥐어주곤 했다. 그렇게 받은 돈으로 나는 학교 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사는 재미에 들렸다. 그때 그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의 산업 일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움직인 것의 8할이 라면이었다. 그래서 라면 생각을 하면 그 오빠들 생각이 난다.

    1963년 많은 농민이 일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었다. 농민은 노동자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쌀값을 내리고 쌀을 대체할 식량을 찾았다. 그때 ‘삼양라면’이 출시됐다. 라면은 왜 꼬불꼬불한가요? 아이들의 질문에 반찬 없이 라면발을 후루룩거리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구불구불한 것이 인생이라고.

    영남대 박현수 선생과 대화하다 라면 이야기가 나왔다. 라면은 인스턴트 음식으로 부담 없이 빨리 먹을 수 있지만 라면에 담겨 있는 그 시절의 생활상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박 선생과 절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라면의 인기를 보고 힌트를 얻었다. 이탈리아 수사의 도움을 얻어 마카로니 공장을 열었는데 결과는 뻔했다. 공장은 얼마 안 가 문을 닫고 말았다.

    요즘도 라면을 먹고 먹지만 옛날 그 맛이 나지 않는다. 대형 마트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알루미늄 냄비를 사다 라면을 끓여 보았다. 학이 그려진 상표의 그 냄비가 분명한데 그때 그 맛이 아니다. 그때 냄비들은 하나같이 찌그러져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냄비를 바닥에 내려뜨려 운두가 조금 찌그러졌다. 그래도 그 맛이 아니다. 아무래도 음식이란 그릇도 그릇이지만 불이 중요한 모양이다. 화력이 센 가스불로 끓이니 그 맛이 나지 않는 것이다.



    학교 근처에는 분식집이 있게 마련이다. 가게 앞을 지나다가 분식집 창문에 라면이라고 적힌 글자를 보면 나도 모르게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요즘 라면만큼 변화무쌍한 음식이 없다. 콩나물을 넣고 햄, 치즈를 넣고 김가루를 뿌리고 볶고 튀기고 우리 아이는 심지어 우유를 부어 먹는다. 하지만 가장 맛있는 라면은 역시 달걀만 푼, 노란 단무지를 반찬으로 먹는 그 라면이다. 그때 라면 그릇에 머리를 디밀고 라면을 먹던 그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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