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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方外之士 (20)

보학(譜學) 연구가 서수용

“팔고조도(八高祖圖) 그려보면 우리 모두 친척이죠”

  •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사진 김형우 기자

보학(譜學) 연구가 서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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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호남은 1960년대 후반부터 지역감정으로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접어든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시작됐다. 박통의 공과(功過)가 있는데, 그 과(過)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지역감정의 조장, 즉 ‘호남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이후로 5·6공을 거치면서 계속 영남 출신 대통령이 배출되자 이 지역감정은 골이 깊어진 감이 있다. 호남 사람들은 박통에서부터 YS정권에 이르기까지 35년 동안 차별받았다고 생각한다. 즉 지역개발, 인사, 교육, 행정 모든 분야에서 호남은 소외됐고 낙후됐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물론 광복 이전까지 한반도에서 물산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던 호남이 상대적으로 낙후된 것은 ‘영남 정권 35년’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 소외감이 지금 호남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깊숙이 박혀 있다. 그러다보니 일부 호남인들에겐 ‘호남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 1000년이 넘는 동안 계속해서 영남에 눌려 살아왔다’고 하는 ‘호남피해사관(湖南被害史觀)’으로까지 비약될 정도다.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영남이 계속 패권을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조선왕조의 왕가는 전주 이씨다. 조선왕조가 전주(全州)에 관향(貫鄕)을 둔 전주 이씨 이성계에 의하여 개창됐지만 후기로 오면서 안동 김씨가 세도를 쥐고 안동 사람들이 계속해서 요직을 다 점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는 안동 김씨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 집안의 정치, 사회, 문화적 영향력은 지대했다. 안동이 바로 영남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안동이라는 관향 때문에 안동 김씨를 경상도와 연결하는데, 따지고 들어가면 안동 김씨들은 서울 사람들이다. 족보에만 관향이 ‘안동’으로 기재되어 있을 뿐 실제로 거주한 곳은 서울, 구체적으로 서울의 장동(莊洞)이다. 장동은 경복궁의 서북쪽을 가리킨다. 지금의 청와대 근처인 청운동과 옥인동 근방이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이 쓴 ‘겸재의 한양진경’(동아일보사 刊)에 보면 당시 장동에 자리잡고 살던 안동 김씨들의 화려한 저택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대표적인 저택이 청풍계(淸風溪)다. 현재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의 골짜기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절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청운초등학교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저택을 비롯한 몇 개의 터로 분할됐다.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는 의미를 지닌 청풍계는 서울에 살던 안동 김씨들의 본거지였다. ‘안동 김씨 200년 집권과 60년 세도의 산실’이었다. 김상용은 바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친형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대청(對淸) 강경파에 속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대청 강경파는 이후 전개된 당쟁사에서 명분과 아울러 권력도 잡았다. 그가 청나라에 잡혀갈 때 지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는 인구에 회자되는 시다. 안동 김씨의 기반은 바로 이 걸출한 두 형제가 세간에 이름을 날리면서 시작된 것이고, 그 기반이 서울의 장동 일대였다. 엄밀하게 말하면 ‘안동 김씨’가 아니라 ‘장동 김씨’라고 해야 맞다. 실제로 ‘장김(莊金·장동 김씨)’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호남 차별 35년, 영남 차별 200년



한국의 족보에 기입하는 관향 또는 본관(本貫)이라는 용어는 한번 경주 김씨면 그 사람이 평양에서 300년을 살았더라도 족보와 묘비명에 ‘경주 김씨’라고 기재한다. 이를 읽는 사람이 보면 경주에서 살았던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실제로는 평양 사람이지만 외부인들은 경주 사람으로 인식한다. 안동 김씨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 후기 안동 김씨의 패권과 세도는 경상도 사람들이 누린 게 아니라 서울 사람들이 누린 것이다. 대략 170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 모든 인물과 권력, 재력이 집중됐다. 물론 수도이니까 예전부터 집중되는 현상은 있었지만 ‘장김’을 비롯한 노론 일당의 집권이 계속되면서 서울 집중에 가속도가 붙었다. 예전에는 정권교체가 자주 이뤄져 실권한 당파 사람들은 지방에 내려가 살았다. 교체가 되면 이긴 당파는 서울에 살았지만 패한 당파는 낙향하여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200년 동안 승리한 당파는 기호(畿湖)에 기반을 둔 노론(老論)이다. 기호학파가 서울을 점령했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정권투쟁에 패해서 지방으로 몰린 당파는 경상도에 근거를 둔 남인(南人)이다. 경상도 남인, 즉 영남학파는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산촌에서 대략 200년 동안 고픈 배를 부여잡고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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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사진 김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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