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북한, 3대 권력승계 공식절차 시작됐다

‘김정철 후계’ 명시한 학습자료,北 최전방부대 배포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09-08 1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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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3대 권력승계 공식절차 시작됐다

    김정철이 9년 전 스위스에서 유학할 무렵 찍은 사진. 2004년 12월 일본 후지 TV가 공개한 것이다

    지난7월초 조선인민군출판사가 제작한 ‘학습제강’이 국가정보원 대북파트에 입수됐다. 복수의 정부 관계자들은 “북한 권력승계의 의미 있는 진전을 보여주는 이 문서는 현재까지는 비무장지대를 담당하는 ‘민사행정경찰’ 부대에만 배포된 것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제강’이란 인민군 병사들에게 ‘이러이러한 내용을 교육하라’는 뜻에서 일선부대에 배포되는 표준화된 강연자료. 제강의 전문은 국정원 안팎의 관계자들에게도 공개되지 않았다. 대신 극소수의 분석요원이 문서를 정밀 검증해 그 내용을 요약한 보고서만이 국정원 내부 전산망에서 공유됐고, 관계부처에도 극히 제한된 이들에게만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의 강연자료가 이렇듯 엄격하게 처리된 것은, 여기에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로 차남 김정철이 지목됐음을 확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은 김정철의 품성과 자질, 사업 영도에서의 탁월함 등을 강조하고 있다는 이 학습제강은, 특히 김정철을 실명으로 거론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인민군 강연자료에 김정철의 실명이 거론됐다는 것은 2002년 배포된 이른바 ‘고영희(김정철의 생모) 개인숭배’ 관련 제강에서 정작 고영희의 실명이 드러나지 않은 점과 비교해볼 때 매우 의미심장하다.

    평양 내부자료 유출 엄격해져

    문서의 성격상 중국 등지로 나온 인민군 관계자에게서 입수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국정원 내부 보고서는 출처나 입수경위, 정확한 입수시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분석에 걸렸을 시간을 감안하면 입수시점은 대략 지난 봄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 한 관계자는 “제강의 배포시점은 2월16일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그간 정보당국 내에서도 잠정적인 형태로만 알려졌을 뿐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던 이른바 ‘3세대 후계구도’ 문제는, 김정철로 권력승계가 확정됐으며 이에 대한 공식절차가 시작된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본다는 설명이다. 향후 인민군 전방부대에 대한 첩보수집 등을 통해 더욱 분명해지겠지만, 더는 ‘후계자 김정철’의 위상에 대해 이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한 북한 연구자는 “제강을 통해 공식적으로 거명할 수 있다는 것은 친(親)김정철 세력을 모아 육성하는 작업이 꽤 진행됐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원로나 군부의 이견이나 반발을 염려할 필요가 없을 만큼 이미 상황이 진척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 제강의 내용을 꼼꼼히 따져보면 앞으로 김정철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될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견해다.

    특히 군에 강연자료를 배포하는 단계라면 이미 조선노동당 조직 내에서는 심도 깊은 교육이나 검토가 끝났다고 봐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당 내부에서는 이미 제강과 같은 내용의 자료가 회람됐으리라는 것. 고영희에 대한 개인숭배도 1998년 최전방부대를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2002년부터 학습제강이 전군으로 전파됐음을 감안할 때, 최근의 ‘김정철 제강’ 역시 조만간 전 인민군 부대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전했다.

    평양 또한 후계구도를 기정사실화하는 내부자료가 만들어짐에 따라, 이 자료의 국외 유출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북한 관련 연구자는 최근 평양을 방문한 소식통의 말을 전하며 “인민대학습당 등 내부자료를 볼 수 있는 시설에서 자료의 열람 및 복사절차가 매우 엄격해졌다”고 전했다. 이전에는 하루 정도면 끝나던 심사나 검토작업이 일주일 이상 걸리는 등, 아예 내부자료가 외부에 나가는 것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김정철의 사업체계 구축하자”

    북한, 3대 권력승계 공식절차 시작됐다

    김정일의 처이자 정철, 정운 형제의 생모인 고영희. 2004년 5월 사망했다.

    1981년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 유도의 창시자 고태문의 딸 고영희 사이에서 태어난 김정철은 1990년대 중반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에서 유학한 후 1999~2000년 무렵부터 노동당 조직지도부 중앙기관지도과 책임부원으로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자리는 김 위원장이 대학졸업 후 후계수업을 시작하던 1966년 무렵 맡았던 자리이기도 하다. 김 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이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직함을 갖고 있는 것과 비교해봐도 김정철의 후계자적 위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김정철이 형 김정남을 제치고 후계구도에 본격 진입한 것은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이 사망한 2002년 이후라는 것이 정설이다. 국내외에서 김정철을 주목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02년 8월과 9월 조선인민군출판사 등에서 발행한 강연 및 해설담화 자료들이 2003년 외부에 전해지면서부터. 김정철과 동생 김정운의 생모 고영희를 우상화하는 내용이 담긴 이 문서들은 그에게서 태어난 아들 가운데 한 명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김정일 위원장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02년 배포된 ‘고영희 개인숭배’ 문건에서는 김정철은 물론 고영희 본인의 이름도 명확히 거명되지 않았다. 현재까지 국내에 알려진 세 건의 관련 문서에서는모두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를 가장 몸 가까이에서 보좌해드리시는 존경하는 어머님” 같은 식으로 우회적으로 지칭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는 달리 최근의 제강에 김정철의 실명이 나왔다는 것은 권력승계 작업이 3년 전의 ‘사전준비’ 차원이 아니라 ‘내부 공식화’라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권력승계 준비작업과 관련해, 정성장 세종연구소 남북한관계연구실 연구위원이 7월18일 한국정치학회보(2005년 여름호)에 게재한 ‘김정일 시대의 북한의 후계 문제 : 징후와 후계구도’ 논문에는 주목할 만한 내용이 실렸다. 김정일 위원장이 환갑을 맞은 2002년경부터 평양의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사무실에 “김정철 동지의 사업체계를 세우자”는 구호가 걸려 있다는 증언이 그것이다. 조직지도부는 김정일 위원장이 권력을 공식 승계하기 전까지 비서를 맡았으며 현재는 비서가 공석인 조선노동당의 최고 핵심부서. 또한 구호가 걸린 시기는 공교롭게도 앞서 설명한 ‘고영희 제강’이 배포된 시점과 일치한다. 이 시기부터 북한 내부적으로는 김정철에 대한 후계구도 준비작업이 궤도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김정철의 현재 위상과 관련해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의 근거가 되고 있는 또 한 가지 징후는 2003년 리을설, 김철만 등 쟁쟁한 군부원로들을 대신해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된 ‘백세봉’이라는 인물에 관한 것이다. 북한의 최고위직급인 국방위원은 인민군 원수도 자리를 넘보기 어려운 실세 중의 실세. 눈여겨볼 것은, 순식간에 당과 군의 요직을 겸직하는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2003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기 전까지의 경력이 확인되지 않는 데다 이후 TV 등에 한번도 얼굴이 공개된 적 없는 이 인물의 이름이 범상치 않다는 점이다.

    국제문제조사연구소 이기동 연구위원은 ‘백세봉’이라는 이름이 ‘백두산 세 봉우리’의 약자일 수 있으며, 이는 백두산 3대 장군(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을 가리키는 것으로 백세봉은 백두의 혁명전통을 이어받은 인물, 즉 후계자 자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정철의 대외용 가명일 수 있다는 것이다.

    수년 내 당 중앙위 통해 선포할 듯

    김정일 위원장의 승계 과정을 돌이켜보면, 1969년대부터 당 조직지도부에서 ‘훈련’을 받던 김 위원장은 1972년 김일성 주석의 환갑을 계기로 ‘혁명 1세대’의 ‘낙점 동의’를 받는다. 이듬해 9월 당 중앙위 비서국 회의에서 ‘지도자’로 공식 선출된 것으로 알려진 그는, 당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 선전담당 비서 겸 선전담당부장으로 임명되어 확고한 2인자 자리를 굳힌다. 이러한 권력장악이 마무리된 1974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으로 선출, ‘당과 인민의 지도자’로 발표되었다. 이후 ‘노동신문’ 등을 통해 ‘당중앙’이라고 호칭된 그는 사실상 김일성 주석과 공동으로 정권을 운영해 갔다.

    북한, 3대 권력승계 공식절차 시작됐다

    김정일 위원장 가계도 (출처 :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논문)

    이와 비교해보면 김정철에 대한 승계는 현재 낙점 단계를 지나 권력장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에 나온 제강은 권력장악작업이 중앙당을 거쳐 군에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향후 전군을 거쳐 지방관료계층까지 이 같은 작업이 완료되면, 우선 조직지도부장 등 핵심요직에 임명되어 권력장악을 가시화하고 다시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등에서 공식추대절차를 밟아 대내외에 후계자로 선포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 같은 전망은 김정일 체제가 향후 안정적으로 유지될 때에만 실현 가능하다. 지난해 있었던 장성택 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직무정지나 용천 폭발사고 등이 시사하는 것처럼 후계문제를 둘러싸고 평양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핵문제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 사이의 갈등, ‘레짐 체인지’로 상징되는 미국의 대북 압박이 어떤 형태로 영향을 미칠지도 주목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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