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KAL기 폭파, 최은희·신상옥 납치 주도 기관 북한 ‘35호실’ 비밀요원 서울망명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10-24 14: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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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L기 폭파, 최은희·신상옥 납치 주도 기관 북한 ‘35호실’ 비밀요원 서울망명

    작전부, 대외연락부, 통일전선부 등 북한 정보기관이 모여 있는 평양의 노동당 3호 청사 위성사진.

    ‘신동아’는 북한의 대외공작기관인 35호실 소속 요원 Y씨가 올해 초 서울로 망명해 국가정보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복수의 정부 관계자와 탈북자 단체 등에 따르면, Y씨가 3개월가량 서울 인근의 국정원 안전가옥에서 조사를 받았으며 현재도 국가정보원의 면밀한 보호를 받고 있다. 구(舊)소련권 국가에서 위장신분으로 활동했던 Y씨는 공식적으로 대사관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공개요원(서구 정부기관에서는 이를 ‘화이트’라 일컫는다)이 아니라, 철저히 민간인으로 위장한 채 정보수집과 공작활동을 진행하는 비공개요원(이른바 ‘블랙’)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40대 중반인 Y씨는 평양의과대학을 졸업한 외과의사로 해외에서도 의사로 신분을 위장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초반 해외에서 활동할 공작원을 물색하던 35호실 관계자들에 의해 발탁된 Y씨는 이후 1년여 동안 ‘밀봉교육’을 받고 해외로 파견되어 주로 구소련권 국가들에서 정보수집 및 공작활동을 해왔다. 1990년대 초반은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구소련 지역에 대한 첩보역량을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북한 정보당국이 이 지역에서의 정보망 강화에 힘을 쏟던 무렵. 그때껏 긴밀하게 진행되던 구소련 정보기관들과의 ‘업무협조’가 어려워지자 자체 조직을 활성화하던 시기다.

    Y씨는 이후 10여 년간 35호실 본부의 지령을 받으며 활동하다가 지난해 말 서울 망명을 결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처와 자녀를 동반해 ○○○ 주재 한국공관에 망명을 신청한 것. 이후 수주일간 현지 대사관에 거처하던 Y씨 일가는 올해 초 국정원 요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뒤 3개월가량 안전가옥에서 조사와 진술을 마친 Y씨는 봄부터 국정원의 보호 아래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며 서울살이에 적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Y씨가 소속돼 있던 35호실은 해외공작을 담당하는 부서로 한국의 국정원 해외파트에 해당한다. 창설 당시 ‘조사부’로 불리던 35호실은 1980년대 초반 북한이 대외공작부서를 전면개편하면서 ‘대외조사부’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980년대 말 대외정보조사부로 확대 개편됐다. 정보당국 관계자들은 ‘대외정보조사부’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으며 현재는 ‘35호실’로만 통칭되고 있다고 전했다.

    “KAL기 사건 관련 ‘내부 정보’ 확인”



    해외 현지 정보수집이 주요 임무인 35호실은 우리에게도 낯익은 이름이다. 1987년 KAL858기 폭파사건을 일으킨 김현희와 바레인공항에서 사망한 김승일이 35호실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태생으로 동남아시아 국가를 거쳐 1984년 한국으로 건너온 전 단국대 교수 무하마드 깐수(한국명 정수일)를 포섭한 것도 35호실이다. 1978년 홍콩에서 납북됐다가 1986년 미국으로 탈출한 최은희·신상옥 부부에 관한 공작도 35호실 요원들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 300명 내외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35호실은 내부 요원을 훈련해 해외로 내보내 정보수집과 공작활동을 벌이고, 해외인사를 포섭, 제3국을 경유해 한국으로 침투시키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이외에도 북한 노동당 내에는 대남침투 실행부서인 작전부, 고정간첩을 담당하는 대외연락부, 공개적인 대남활동을 책임지는 통일전선부가 있다. 이들 기관은 평양 모란봉구역 전승동에 있는 노동당 3호 청사에 본부가 있어 ‘3호 청사’로 통칭되지만, 35호실 본부는 당 중앙위원회가 있는 창광거리의 노동당 본청사에 자리잡고 있다).

    해외에 나가 있는 35호실 요원의 경우 대사관 직원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활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사원 신분으로 위장한 채 활동하는 경우도 흔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지역과 베를린, 파리 등 유럽의 주요 도시에 공작거점을 두고 있던 35호실은 1990년대 이후 북미와 구소련 지역에서 역량강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Y씨의 망명으로 한국 정보당국은 북한의 최근 해외 공작활동의 방향과 흐름에 관해 구체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전언이다. 당초 정보당국은 그가 망명을 타진해옴에 따라 북한의 해외 정보활동 전반에 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3인1조, 5인1조 형식으로 훈련 초기부터 밀봉교육을 하는 35호실의 요원 운용 특성상 Y씨가 정보당국에 제공할 수 있는 정보는 현지 공작원들 사이의 연락체계와 조직구성, 본부와의 통신형태 등 세밀한 부분에 집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활동경력이 10년이 넘는 Y씨가 구소련 지역 조직망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인물인 만큼, 한 지역을 맡은 북한의 해외공작팀이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는지에 대해 완벽에 가깝게 파악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국정원측이 내심 흡족해 하는 것은 35호실 본부에서 Y씨에게 중점적으로 수집을 요구했던 정보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를 바탕으로 예전과는 달리 경제분야에 대해 점차 관심이 증대되는 북한 정보당국의 분위기나 구소련권 국가들과 북한 정보당국 사이의 정보 협력이 어느 수준에서 이뤄지고 있는지를 추론할 수 있게 된 점도 수확으로 꼽힌다.

    또한 Y씨는 KAL858기 사건 등 여전히 ‘미심쩍은 대목’이 남아 국정원측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35호실 관련 주요 사건에 대해서도 상당량의 정보를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KAL기 사건이 1987년에 발생한 만큼 그후에 35호실에 몸담은 Y씨가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은 아니지만, 훈련 및 활동과정에 본부로부터 확인한 관련 정보를 국정원측에 제공했다는 것.

    그간 ‘KAL기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는 의혹이 여러 차례 제기됨에 따라 난감한 처지였던 국정원으로서는, 사건의 얼개를 고스란히 재확인해주는 또 다른 형태의 ‘내부자 정보’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4년 10월 출범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올해 안에 KAL기 사건 관련 조사를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을 밝혀놓은 상태다.

    “북한 해외정보망은 붕괴 중”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현희, 정수일 등 몇몇 35호실 요원이 한국 정보당국에 의해 검거된 적은 있지만, 자발적으로 망명을 결심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1996년 아프리카 잠비아에서 태권도 교관으로 위장한 채 정보수집활동을 벌이다가 귀순한 차성근씨가 노동당 작전부에서 차출된 35호실 소속 요원이었다.

    그러나 정보당국 관계자들은 “아프리카에서 활동했던 외교관이나 공작원은 1990년대 적잖은 수가 귀순했지만, 구소련지역에서 활동하던 요원의 망명은 의미가 사뭇 다르다”고 평가했다. Y씨의 망명을 통해 북한의 해외 정보수집 역량이 아성이던 구공산권 지역에서조차 악화일로를 걷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

    관계자들은 “평양본부의 열악한 지원체계와 불안정한 권력 내부상황 등으로 말미암아 북한의 해외 공작원들이 ‘충성’을 다하지 않고 있으며, 곳곳에서 누수와 조직붕괴가 이어지는 상황이라는 Y씨의 진술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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