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빨고 씻고 버무리다 보니 잊힌 내 반쪽이 꿈틀대네!

  • 김광화 농부 flowingsky@naver.com

    입력2005-10-26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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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50세는 인생의 반환점이자, 새로운 삶을 시작할 나이다. 농부 김광화씨는 자신의 잠자던 여성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했다. 빨래하기 전엔 옷감을 살피고, 설거지가 지겨울 땐 노래를 부르며, 식구를 생각하며 음식을 만들다 보니어느새 수다스러운 아줌마가 됐다. 무뚝뚝한 남성에서 섬세한 여성으로 변화하는 살림법 大공개!
    빨고 씻고 버무리다 보니 잊힌 내 반쪽이 꿈틀대네!

    아이들과 김밥을만들고 있다. 어릴 때부터 살림을 익히지 않으면 남자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큰아들’이다.

    나는오래 살고 싶다. 시골에 살자면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데 어째 나는 그 반대다. 해가 갈수록 욕심이 더 많아진다. 자유롭고 싶고, 평화롭고 싶다. 뭐든지 다 해보고 싶고, 원(願)을 남기고 싶지 않다.

    그러자면 오래 살아야 하리라. 아니, 오래 살고 싶다. 아내는 사는 만큼 살고 싶단다. 어쩌면 내가 아내보다 오래 살지 모른다. 옛말에 ‘과부 삼년에 은이 서 말이요, 홀아비 삼 년에 이가 서 말’이라 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이가 서 말이 되는 홀아비’가 되고 싶지 않다.

    내년이면 내 나이가 오십이다. 평균수명이 부쩍 길어지고 있다. 1970년에는 63세였는데 2003년에는 76세란다. 70세에 죽으면 평균수명도 못 살았으니 억울하겠다. 현대의학과 자연의학을 잘만 소화한다면 평균 100세까지 사는 것도 어렵지 않은 시대가 올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나이 50이란 인생의 반환점으로서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여성이 오래 사는 비결, 꼼지락거리기

    수명과 관련된 통계를 볼 때마다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적으로 오래 산다고 한다. 대체 그 이유가 뭘까. 오래 살고 싶으니 그 비결(?)이 아주 궁금하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그 까닭을 찾다가 언뜻 떠오르는 게 있다. 여성은 하루 종일 꼼지락꼼지락 무언가를 한다. 칠순을 넘기신 우리 어머니는 물론이요, 팔순이 넘으신 장모님도 늘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한다. 그건 한마디로 살림살이다. 어쩌면 이게 오래 사는 비결의 하나일지 모른다. 나도 살림살이를 익히고 싶다. 나이 들어서도 살림을 잘 한다면 ‘이’는 사라지고 ‘은’이 저절로 굴러온다는 옛 사람들의 말씀을 믿고 싶다.



    먼저 ‘이’가 안 생기게 하자면 빨래를 잘 해야겠다. 한동안 식구들 빨래를 아내가 다 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내 옷만큼은 내 손으로 빤다. 계기는 가뭄이었다. 지독한 가뭄이 든 적이 있다. 집으로 끌어들여 먹던 옹달샘이 말라버렸다. 먹을 물조차 없으니 물이 잘 나오는 곳을 찾아다니며 물통으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씻고 걸레를 빠는 데 쓸 물은 냇물을 경운기로 실어날랐다. 빨래는 급하지 않으니 쌓여만 가고 아내 얼굴은 굳어만 갔다. 경운기로 물을 실어나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못할 짓이다. 기름 사서 걸레 빠는 꼴이 아닌가.

    몸이 지쳐갈 무렵 답이 보였다. 집안에는 물이 없지만 냇가에는 그래도 물이 흐른다. 타는 속을 비웃기라도 하듯 소리 내며 흐른다. 그래, 냇가에서 빨래를 하자. 아내에게 흔들리는 내 모습을 가리고 싶었다.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해보니 할 만했다. 물소리가 너무나 정겹다. 이런 소리가 바로 생명의 소리구나 싶다. 가뭄에 물이 귀해서도 더 그랬을 것이다. 물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가뭄에 대한 걱정도 삶에 대한 잡다한 고민도 잊었다.

    흐르는 물에 빨래를 헹군다. 휘휘 헹군다. 딴 세상이다. 냇가에는 물을 아껴 써야 한다는 억압이 없다. 자유이고 해방이다. 빨래에서 나온 땟물이 흐르는 물에 섞이면서 금방 깨끗해진다. 물이란 참 놀라운 생명이다.

    그날 이후 틈틈이 손으로 빨래를 하게 되었다. 다음 글은 어느 해 겨울, 적어둔 빨래 일기다.

    옷 같은 삶, 옷 같은 사람

    저녁에 가마솥 물을 떠와 목욕을 하고 난 뒤 그 물로 빨래를 한다. 속옷 먼저. 물이 따끈하니 때가 잘 빠진다.

    가장 큰 빨래는 겨울 점퍼와 바지. 옷 무게만 해도 가볍지 않다. 물까지 먹으면 보통 무게가 아니다. 옛날 어머니는 장사였다는 생각이 든다. 온 식구 빨래를 당신 혼자 다 하셨으니. 겨울옷은 지나치게 두툼해서 여성이 손으로 빨래하는 건 정말 힘들다. 하지만 내게는 ‘몸 만들기’에 좋은 일거리다.

    우선 ‘섬세한 몸놀림’이 필요하다. 빨기 전 옷감을 잘 살핀다. 어디에 얼룩이 있는지. 옷 구석구석을 다 손으로 주무를 수 없기에 물에 넣기 전에 잘 봐둔다. 그 부위를 비누질하여 솔로 살살 문지른다. 그 다음은 몸과 옷이 가장 자주 만나는 목, 손목, 발목 둘레도 빤다. 그런 다음 큰 그릇에 옷을 담고 발로 주무른다. 돌아가며 주섬주섬. 뒤집어 자작자작. 오른발, 왼발 교대로 찰싹찰싹 꾹꾹.

    빨래 헹구기는 ‘온몸운동’이다. 바지는 헹구다가 바지 위를 잡고 번쩍 들고 일어선다. 다시 돌리다 번쩍 치켜들기를 서너 번. 한결 허리가 부드러워진다. 허리뿐 아니라 배 가슴 목 양손을 다 쓰니 온몸운동이다.

    빨래를 짜는 것은 근력운동. 먼저 빨래를 높은 곳에 걸쳐둔다. 웬만큼 물기가 빠지면 물이 있는 부분만 두 손으로 비틀며 짠다. 보디빌딩 하는 것처럼 자세를 잡아본다. 몸놀림이 부족하기 쉬운 겨울, 손빨래로 근력을 다진다. 보디빌더가 무대 위에 올라선 것마냥 한껏 잔뜩 자세를 잡는다. 한번 힘을 주고는 잠시 그대로 멈췄다. 마지막으로 배에 힘을 주며 짠다. 누가 보는 사람 없나.

    겨울밤이라 밖은 춥다. 빨래집게로 줄에 매단다. 손발이 얼얼하다. 다 널고 집 안으로 돌아오며 올려다보는 밤하늘. 무수한 별. 집 안으로 들어오니 긴장된 몸이 풀리며, 그제야 가슴으로 찬 기운이 느껴진다.

    내 몸을 따스하게 감싸는 옷. 누군가를 따스하게 감싸 안을 수 있다는 건 행복이리라. 옷을 빨며 옷 같은 삶, 옷 같은 사람을 생각해본다.

    위의 글은 일기라 삶의 한순간일 뿐이다. 빨래하는 건 어느 정도 되지만 다 마른 빨래를 개어 제자리에 넣어두는 일은 아직 엉망이다. 대충 넣어두니 막상 꺼내 입으려고 찾을 때 고생한다. 온 서랍장을 다 뒤지는 게 다반사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내 옷에서 이따금 홀아비 냄새가 난다 한다.

    설거지 할 힘은 남겨둔다

    빨래는 살림살이 가운데 한부분이다. 살림의 근본은 누가 뭐라 해도 먹고 치우는 일이다. 그런데 겪어보니 이 일은 보통이 아니다. 살림과 삶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니 달리 보면 삶의 근본이 안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내가 말하지 않아도 머리로는 안다. 집안일을 함께 하는 게 좋다는 걸. 내가 힘들면 아내도 힘들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돈을 중심에 놓고 사는 삶이 아니라면 살림살이에 대한 역할 분담은 달라져야 했다. 아내가 요리를 하면 설거지는 내가 하는 식으로.

    하지만 설거지가 몸에 배는 데는 또 다른 과정이 필요했다. 먼저 주문(呪文)을 만들고 외워야 했다. ‘밥 먹고 나서 바로 힘쓰는 일을 하지 마라. 가볍게 산책하듯 설거지하는 게 내 몸에도 좋으니라.’

    그런데 더 큰 장애물은 다른 데 있었다. 설거지라는 게 한두 번 하고 말 일이 아닌 것이다. 사는 날까지 날마다 해야 한다. 그것도 하루에 서너 번씩. 이게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일이다. 대신 안 하면 바로 표가 나는 일이기도 하다. 날마다 하는 일치고는 보람이 너무 없다.

    설거지가 지겨우니 별의별 궁리를 다 했다. 우선 아내에게 부탁해서 요리하는 중간에 나오는 설거지거리는 되도록 쌓아두지 말고, 요리하는 자리에서 바로 해달라고 했다. 칼도마며 큰 그릇은 요리하는 틈틈이 설거지가 가능하니까. 그 다음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먹은 밥그릇과 숟가락은 스스로 닦자고 했다. 한동안 잘 되다가 아이들이 요리에 재미를 붙이면서 설거지를 안 한다. 누군가 요리를 하면, 치우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하길 바란다. 그게 우리 식구 사이의 예의이기도 하다.

    설거지도 자꾸 하다 보니 요령이 붙고, 꾀가 난다. 수세미를 왼손에, 그릇은 오른손으로 바꾸어 잡는다. 덜 지겹다. 수저통을 멀리 놓고 옆구리 근육의 움직임을 천천히 느끼면서도 해본다. 기분에 따라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면서 씻는다.

    설거지를 몇 해 하다 보니, 몇 가지 정리되는 게 있다. 우선 가장 어려운(?) 일은 아무래도 시간 확보다. 일이 바쁘다 보면 솔직히 개수대에 설거지거리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간다. 사실 설거지 시간이야 기껏 5분 남짓이다. 알게 모르게 삶을 자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집 밖의 일을 너무 힘들게 하면 설거지는 고사하고 꼼짝도 하기 싫다. 그러니 하루 일을 마칠 때쯤에도 ‘설거지 할 힘’은 남겨두려고 노력한다.

    그 다음은 너무 잘 먹는 것도 문제다. 배부르게 먹으면 설거지하기가 싫다. 밥상과 내가 분리되면서 밥상을 돌아보는 것조차 싫다. 그 틈을 게으름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럴 때는 대부분 한상 잘 차린 뒤끝이라 설거지거리도 보통 때보다 더 많다. 그러니 더 하기 싫다. 설거지를 힘들지 않게 하려면 알맞게 먹어, 몸을 가볍게 해두어야 한다.

    두부는 사치스러운 음식?

    설거지하면서 아내 요리법에 대해 가끔 시비를 건다. ‘꼭 불에다가 익혀야 하나. 너무 복잡하지 않나. 음식이 남았다. 음식을 버리는 것도 일이잖아.’ 남이 한 요리에 평을 하고 잔소리하기는 쉬워도 손수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다 한두 가지 요리야 하겠지만 늘 밥상을 책임진다는 건 두려운 일에 가깝다. 설거지가 ‘단순 노동’에 가깝다면 요리는 생명 그 자체다. 영양이 있어야 하고, 맛이 좋아야 하며, 제철에 나는 신선한 것들로 상을 차려야 한다. ‘집안의 큰아들’로서 받아먹는 건 쉽지만 막상 하려면 전문분야라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해오던 일상이 있기 때문에 요리에 다가가는 데는 긴 호흡이 필요했다.

    틈나는 대로 요리를 해보자. 그렇게 마음먹으니 틈틈이 요리 관련 책도 보게 되고, 영화를 보면 요리 장면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아내가 하는 요리에 대해서도 새삼 호기심이 살아났다. 요리법 하나를 물으면 아내 입에서 열 가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새삼 아내가 커 보인다. 아내 이야기에 너무 빠져들면 주눅 들기도 한다.

    이웃집에 가서 밥을 먹으면 밥상에 오른 반찬 하나하나에 관심이 많이 간다. 이웃 음식은 평소 안 먹어 보던 음식이라 호기심을 더 자극한다. 재료는 무얼 썼는지? 양념은 어찌 만들었는지? 그렇게 관심을 보이면 이웃에게 점수 따는 데도 유리하다.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한번은 저 멀리 울산에 갔다가 한주(7) 어머니한테 순두부 만드는 법을 배웠다. 간수를 쓰지 않고도 순두부가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간수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다. 바닷물이 오염됐다는 둥 화학 처리한 간수는 어쩌고저쩌고….

    나는 두부가 사치스러운 음식이라 생각했다. 콩을 심고 가꾸는 건 그렇다고 치고 도리깨로 두드리다가 낟알로 흩어지는 콩을 밭고랑에서 하나하나 주워 모은 콩. 두부를 만들자면 콩이 너무 헤프다. 그리고 시간도 품도 많이 든다. 그동안 우리 집에서는 주로 콩을 간 생비지로 요리 해 먹었다. 그러던 차에 한주네서 배운 무간수 순두부는 내 앞날에 뭔가 큰 변화를 가져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호기롭게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자니 살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콩물에서 비지를 걸러낼 베주머니가 어디 있는지, 쓸 만한 냄비? 식초는? 그 하나하나마다 아내 힘을 빌려야 했다. 요리한답시고 온갖 살림살이 다 꺼내고 수선을 떨며 순두부를 만들었다. 간수 대용으로 만든 염촛물을 붓고, 순두부가 되기를 기다렸다. 아, 엉기는구나. 그 감동이란! 맛을 보지 않아도 충만감이 밀려왔다.

    이것이 순두부다!

    그 다음부터 마음이 내키면 식구들에게 한턱 내듯 순두부를 만들었다. 아내 도움을 받으면 순두부로 손님을 치를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그런데 ‘즐거운 문제’가 생겼다. 먹어본 손님들이 만드는 법을 자꾸 알려달란다. 그럼 아내 대신 내가 나서서 막 자랑을 한다. 그렇지만 손님 질문이 이어지면 금방 내 바닥이 드러난다.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요리법을 인쇄해둔 종이를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넘겨준 인쇄물이 제법 많다. 웰빙 바람에다가 집에서 누구나 손수 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기가 좋은가 보다. 이참에 한주 어머니가 알려준 요리법을 간단히 설명할까 한다.

    빨고 씻고 버무리다 보니 잊힌 내 반쪽이 꿈틀대네!

    끓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그릇 위로 솟구치는 순두부. 손수 해봐야 실감이 난다.

    무간수 순두부 만들기재료 : 불린 콩 500g, 물 3컵 , 소금 2큰술, 식초 3큰술(마른 콩 500g일 때 콩 불리는 물과 콩물 받아내는 물 합해서 4.5컵, 산도가 낮은 유기농 식초를 쓸 때 3.5 또는 4큰술)

    도구 : 믹서, 베주머니, 큰 그릇

    만들기1. 마른 콩은 적어도 8시간 정도 미리 물에 담가 불려놓는다.2. 불린 콩과 콩 불린 물을 믹서에 다 넣고 곱게 갈아낸다.3. 갈아낸 콩물을 베주머니에 넣고, 큰 그릇에 밭는다.4. 밭아낸 콩물을 끓인다. 끓이면서 나무주걱으로 계속 저어줘야 눋지 않는다. 거품이 조금씩 생기는데 걷어내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이때 불을 끈다.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금세 넘치기 때문이다.5. 간수 대용으로 염촛물을 만든다(염촛물 : 물 400cc, 소금 2큰술, 식초 3큰술. 콩물을 끓이기 전에 만들어놓으면 좋다).6. 끓인 콩물을 5분 정도 식힌 후 염촛물을 부으며 주걱으로 잠시 적당히 저어준다. 너무 많이 저으면 응고가 잘 안 된다.7. 다시 5분 이상 기다리면 콩물이 엉기어 굳는다. 이것이 순두부다.

    나는 숫자에 약하다. 솔직히 이 요리법만 보고 그대로 하자면 지금도 머리가 굳을 정도다. 몇 번을 그대로 따라 하다가 이제는 대충 한다. 집에서 자주 쓰는 컵에 콩을 담고 무게를 재어보니 200g이다. 마른 콩 한 컵을 밤새 물에 불리면 두 컵 정도 된다. 우리 네 식구가 한 끼 먹기에 넉넉한 양이다. 물도 대충 가늠한다. 불린 콩을 믹서에 갈 때는 물이 콩보다 넉넉하다 싶게 한다.

    곱게 가는 것도 기준이 없다. 지금도 아내는 내가 가는 걸 지켜보고 좀더 오래 갈아야 한단다. 곱게 갈수록 비지가 적게 나오고 맛도 부드럽단다.

    염촛물을 만들 때 물과 소금과 식초의 비율이 중요한데 주의할 것은 식초다. 식초만 잘 쓰면 순두부는 어렵지 않다는 걸 알았다. 염촛물과 단백질이 만나 엉기는 작용이 너무 신기해서 나름대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본 결과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건 순두부가 진행되는 과정이다. 염촛물을 넣고 저으면 엉기기 시작하는 게 눈에 보인다. 그러면 위의 요리법대로 5분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먹기 시작한다. 식사를 시작할 때와 끝날 때쯤 순두부의 엉김 상태가 다르다. 순두부가 살아 움직인다고나 할까.

    그 다음엔 순두부를 먹기 위한 준비가 있다. 먼저 따끈따끈한 순두부 자체의 맛을 즐긴다. 그러고 나서 소금 간을 맞추어 가며 몇 숟갈 더 먹어본다. 순두부만의 맛을 즐긴 다음, 양념을 만들어 넣는다. 우리는 양념으로 고추기름을 쓴다. 만드는 법은 고춧가루 반 술에 참기름 한 술 해서 잘 섞는다. 여기에 들깨가루를 넣고 함께 갠 다음 이를 순두부에 넣고 먹는다.

    사실 내가 요리한다고 호들갑을 떨어봤자 기껏 하루에 한 가지 정도다. 아직은 요리에 관심이 있고 배우고 있다고 해야 맞는 말이겠다. 그럼에도 느끼는 점은 아주 많다. 누군가 그랬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맨 먼저 내 음식 버릇이 얼마나 들었는지를 자각하고 있다. 40여 년 ‘이 땅의 여성들’이 차려주는 밥상에 인이 박여 있다. 두 손, 두 발, 그리고 혀도 멀쩡한데 할 줄 아는 요리라고는 사실 얼마 안 된다. 농사란 따지고 보면 요리 재료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마지막 그 하나인 요리는 먼 나라 이야기였던 셈이다.

    이제는 ‘내가 먹는 요리는 내가 하는 게 좋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생각일 뿐. 밥상 전체를 관장하기는 고사하고 하루 한 가지 반찬조차 꾸준히 하기가 쉽지 않다. 아내가 차리는 밥상에 길이 든 것이다. 일을 하다 배가 고프면 요리 재료를 준비해야 하는데 잘 안 된다. 배가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다가 어느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진다. 그럼 밥상을 떠올린다. 요리 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건 요리 실력이나 시간 이전의 문제이다. 요리 전문가에 따르면 요리는 재료가 7, 기술이 3이라 한다. 우리는 농사를 짓기에 재료는 풍부하다. 시간만 잠깐 내면 못할 게 없다. 농사철에는 바쁘다 치고 시간이 많은 겨울이라고 요리를 열심히 한 적이 없었다. 결국 내 결론은 단순해진다. 요리는 어릴 때부터 익혀야 하는 버릇이라고.

    혀를 살리면서 되찾은 기억

    몸에 밴 버릇을 고치자면 고리가 필요하지 싶다. 내 경우엔 길든 내 혀를 살려야 한다. 맛을 본다는 건 그 음식이 ‘맛있다, 맛없다’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바로 자신의 몸에 맞는가 하는 점이다. 아내가 식구들 생각해서 요리 하지만 맛의 미묘한 부분은 아내 자신의 혀에 달려 있다. 내 혀와 아내 혀는 깊이 따져보면 다르다. 몸이 다르듯 다르다. 성장과정이 다르고 먹어온 음식이 다르기에 다른 게 당연하다.

    내 혀가 조금씩 살아나면서 잊힌 기억이 하나 되살아난다. 나는 자라면서 장마가 지면 개울이나 물꼬에서 미꾸라지를 잡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얼큰한 추어탕을 맛있게 끓여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민물고기를 먹을 때 느껴지는 약간의 비린맛을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아내는 민물고기에서 나는 특유의 맛 때문에 잘 먹지 않는다. 결혼 초에는 나를 배려한다고 미꾸라지를 사다가 몇 번 추어탕을 해주었다. 그러고는 아내도 나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혀로 느끼는 미묘한 차이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굳어진 거다.

    알밤 샐러드 맛 보실라우?

    아내는 아내대로 할말이 많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요리를 다 못하고 식구들 입맛에 맞추려고 나름대로 애를 쓴다. 우선 요리하기 전에 식구들 의견을 자주 물어본다. 아이들은 의견이 분명한 편이다. 떡볶이를 한다면 무위는 “맵지 않게 해주세요”, 자연이는 “매워야 맛있어요” 한다. 그러니 때로는 한 가지 요리를 하는 데도 두세 번 더 손이 간다. 어찌 보면 번거롭다. 그렇지만 혀가 살아난다 생각하면 자기 요리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얼마 전에 내가 잘 아는 분이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수술과정에서 충격적인 일이 밝혀졌다. 의학책을 보면 어른의 소장 길이는 보통 4∼5m라 한다. 그런데 이 분의 경우 소장 길이가 2m 정도라 했다. 대신 대장이 보통 사람보다 길었다. 사람마다 먹는 게 달라야 한다는 걸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그러고 보니 내 뱃속도 궁금해진다. 그렇다고 배를 가를 수는 없다. 대신에 내 몸에 자주 귀를 기울이는 수밖에. 요리를 통해 혀를 살리듯 코도 눈도 살리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좌충우돌하는 내 요리를 눈요기 삼아 하나 소개해본다. 이름 붙이기를 ‘알밤 샐러드’.

    새벽에 일어나 알밤을 주웠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밤이 적다. 하늘다람쥐도 더 극성인 듯하다.

    샐러드에 넣을 채소를 준비했다. 솎음배추와 시금치 두 포기. 이것만 가지고는 뭔가 심심할 것 같다. 둘러보니 들깨 꼬투리가 영글고 있다. 조금 따 먹어보니 향기가 입안을 거쳐 뱃속까지 퍼진다. 꼬투리를 세 개 땄다. 너무 많이 넣으면 맛이 지나치게 강할 것 같다.

    알밤을 까고 나서 채소를 씻는데 아내가 한마디 한다. 내가 너무 힘차게 씻는단다. 그럼 채소가 다 물러버린단다. 왠지 잔소리가 듣기 싫다. 내 식대로 팍팍 씻고 힘차게 헹군다.

    빨고 씻고 버무리다 보니 잊힌 내 반쪽이 꿈틀대네!

    살림에 눈을 뜨니, 이웃 아줌마들과 어울리는 게 어색하지 않다.

    알밤을 토막 내 옹기그릇에 담았다. 들깨 꼬투리는 잘게 썰고 시금치는 손으로 뜯어 그릇에 넣었다. 참기름, 깨소금 넣고 한번 뒤섞는다. 그 다음 솎음배추를 칼 대신 손으로 툭툭 끊어 넣었다. 소금 살짝. 다시 한번 뒤섞었다.

    채소가 숨이 죽자 어딘지 밋밋해 맛이 없어 보인다. 뭘 더 넣을까. 샐러드를 한다고 했으니 소스가 필요하겠다. 병조림 토마토를 소스로 얹었다. 붉은빛이 풀빛이랑 어울린다. 그런데 아무래도 밤을 너무 적게 넣었다. 이 음식은 알밤을 씹는 맛이 기본인데. 알밤이 적으면 나중에는 채소만 남지 싶다. 밤을 몇 알 더 까서 넣었다. 제법 색깔도 살아난다.

    먹어보니 그런 대로 씹히는 맛이 좋다. 자연이가 먹어보더니 깻잎을 넣었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들깨 꼬투리 맛이라고 자랑했다.

    점차 샐러드 그릇이 비워지면서 달그락달그락. 옹기 그릇 긁는 소리가 상쾌하다. 내가 만든 요리가 담긴 그릇에서 나는 소리는 더 잘 들린다. 하지만 무위는 밥을 다 먹을 동안 알밤 샐러드에는 젓가락 한번 안 댄다. 아내가 만든 생선요리를 주로 먹고 있다.

    내 감정이 복잡해진다. 갑자기 생선이 보기 싫다. 아내와 무위에게 ‘배신감’도 든다. 돈이 아니라면 저 생선 대신에 내 요리를 먹을 텐데….

    그런데 알고 보니 무위는 샐러드를 아주 잘 만들지 않는 한 입에 대지 않는단다. 그 다음날은 아침부터 바쁜 일이 있어 부랴부랴 집안으로 들어오니 밥상이 거의 다 차려져 있다. 그냥 먹기 뭐해 알밤을 몇 알 까서 그릇에 그냥 담아놓았다. 그랬더니 무위는 그 알밤을 먼저 먹는 것이다. 이럴 수가! 아이가 씹는 알밤 소리가 그렇게 맑게 들릴 수 없었다. 전날 만든 알밤 샐러드는 입에도 안 대던 녀석이 ‘알밤 반찬’은 다람쥐처럼 잘 먹는 것이다. 오드득오드득. 내가 요리한답시고 설치고 만든 요리란 아직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일 뿐. 식구 모두를 만족시키자면 갈 길이 멀다.

    요리를 배우겠다고 마음먹으니 아내는 물론 우리 어머니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주부가 다 내 선생님이다. 예전에는 아내 이외 다른 여성을 만나면 대화가 어려웠다. 대화는 고사하고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보는 것조차 못했다.

    잠자던 내 반쪽이 깨어나다

    이제는 요리하는 사람과 제법 대화가 된다. 대화라기보다 내가 물어보는 게 많다고 해야 정확하겠다. 한 가지를 묻고 답을 들으면 묻고 싶은 게 더 많아진다. 그러다 보면 점점 상대방 얼굴을 또렷이 보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처음 만난 여성의 얼굴도 또렷이 기억한다.



    덩달아 성격도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주부들과 조금씩 소통하면서 수다스러워지는 것 같다. 남자의 세계에서 잘 하지 않는 대화를 시시콜콜 나누게 된다. 아이 키우는 이야기에서 살림살이에 이르기까지. 그런 이야기에 빨려들다 보면 상대 여성이 오래 전부터 사귀던 친구처럼 느껴진다.

    내 몸 어딘가에 숨어 있던 여성성이 살아나는 걸까. 우리 어머니가 몸으로 물려줬지만 그동안 잠자고 있던 또 다른 내 반쪽이 꿈틀댄다. 앞날은 누구도 모른다. 지금의 나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야말로 늙음을 늦추는 길이 아닐까. 살림살이가 첫걸음임을 확신하며, 물 묻은 두 주먹을 부드럽게 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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