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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④

소련의 북조선 독자정권 구상과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반발

  • 전현수 경북대 교수·사학 jeonhs@mail.knu.ac.kr

소련의 북조선 독자정권 구상과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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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평양에 도착한 치스차코프는 평양관구사령관을 불러들여 일본군 무장해제 계획을 협의했다. 치스차코프는 조만식을 비롯한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대표들과도 접촉했다. 29일 소련군 지도부는 건준(建準)측과 공산당측 대표들을 소집해서 건준과 공산당이 1대 1로 합작해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할 것을 요구했다. 건준이 이를 받아들이자,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수립할 것”

소련군의 점령정책은 함흥과 평양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좌우세력의 연합에 기초해 한국인의 행정권 접수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러한 방식은 소련군이 새로 진주하는 지역에 순차적으로 적용됐다. 좌우합작의 방향으로 개조한 자치기관에 행정권을 위임하는 소련군의 점령정책은 일제 붕괴 이후 북한 각지에 출현한 자치기관들에서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민족주의자가 다수를 점했던 사정을 고려하면 좌익의 강화에 기여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소련군은 진주와 함께 잘 준비된 점령정책을 실천에 옮겼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소련군이 점령지역인 북한에서 실천에 옮겨야 할 정책은 그때까지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

문제는 9월20일 스탈린의 ‘지령’을 통해 일거에 해결됐다. ‘지령’은 소련군이 북한 점령정책을 수행하는 데 반드시 따라야 할 강령과 같은 방침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열거했다. (1)북한 영토 내에서 소비에트나 소비에트 정권의 다른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 제도를 도입하지 말 것. (2)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해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협력할 것. (3)적군이 점령한 북한의 각지에서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단체가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지 말고 그 활동을 원조할 것. (중략) (7)북한의 민간 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탈린은 북한에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하는 소련군의 대북한 정책방향을 명확히 하고 있다. 스탈린은 이 정권이 ‘소비에트 정권’이 아니라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이어야 함을 명시했다. 그리고 이 정권이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의 지도에 따라 북한사회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변혁사업을 추진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동경대 교수 와다 하루키는 이 지령을 “스탈린이 처음부터 북한 단독 정권의 수립을 지시했음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문서”라고 평가하고, “이 지시가 내려간 시점부터 분단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1945년 8월말 소련 제25군의 전 부대는 북한 각지에 배치됐다. 소련군대가 진주한 지역에는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주민의 경제·문화생활을 정상화하며 군부대에 대한 식량, 생필품, 연료의 체계적인 보급을 보장하기 위한 경무사령부가 설치됐다. 경무사령부는 6개의 도, 85개의 군, 7개의 시에 설치됐다. 소련은 ‘주민들 사이에서 경무사령부의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88특별여단에서 근무한 한국인 대원들을 경무사령관의 부관이나 보좌관으로 혹은 보안대원으로 배치했다. 김일성과 최용건은 평양에, 김책은 함경남도에, 박성철은 함경북도에 배치됐다.

무소불위, 소련 민정청

점령지역에서 군사·민사 당국의 대표자인 경무사령관은 행정·경제·정치 영역에서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했다. 경무사령관은 법령의 효력을 지닌 명령·지시를 내리고 이에 따르지 않는 자는 소련군에 대한 적대행위자로 간주해 처벌할 수 있었다. 경무사령관은 또 친일적인 정당·사회단체의 해산과 그 재산의 몰수 및 경찰서, 헌병대 근무자들과 일본 군대 군무원들의 의무적인 등록을 명하거나 총포, 도검, 폭발물, 라디오방송기의 소지와 제조를 금할 수 있었다. 통행시간 제한, 우편·전신검열, 거주이전의 제한 권한도 경무사령관에게 부여됐다.

경무사령관은 일본군 군사장비뿐만 아니라 일본군이나 일본인 소유의 원료창고, 양곡, 연료, 공장·제조소 설비, 산업·상업기업소 토지, 유가증권, 기타 귀중품의 보관과 이용에 대한 모든 권한을 보유했다. 반소(反蘇) 선전을 분쇄하고 적대분자를 적발하는 일은 경무사령관의 중요한 정치활동이었다. 집회나 회의는 소련군 대표의 참가 없이는 개최할 수 없었고, 연주회나 연극 공연도 경무사령부의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이전 체제에서 발간된 신문은 모두 폐간됐고, 라디오방송은 경무사령관의 명령·지시를 전달하는 것 외에는 이용이 엄격히 제한됐다.

그러나 소련군 사령부는 민정업무 수행에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군부대를 지휘하는 고유 업무 처리에 여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민정 업무를 할 만한 경험과 지식을 갖춘 전문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스차코프는 연해주군관구사령관 메레츠코프에게 경험 있는 전문가들로 전담기구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1945년 11월 50명의 장교단을 통솔하는 민정담당 부사령관에 로마넨코 소장이 임명됐다. 로마넨코 밑에는 정치행정부, 산업부, 재정부, 상업조달부, 농림부, 보건부, 사법검찰부, 경찰통제지도부가 조직됐다.

민정담당 부사령관 기구는 1947년 5월까지 존속했으며, 이후 북한 주재 소련민정청으로 개편됐다. 소련민정청은 13개 부에 78명으로 구성됐다. 민정청은 소련 제25군 정치부와 연해주군관구 정치부 산하에 있던 보도국, 군사검열부, 라디오방송편집부, 조선신문(朝鮮新聞) 편집부의 사업도 지도했다. 6명의 도 고문을 비롯해 총원 971명으로 구성된 6개의 도 경무사령부와 85개의 군 경무사령부, 총원 45명으로 구성된 3개의 시 경무사령부와 경비소대가 민정청의 통제를 받았다. 시경무사령부 경비소대 성원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모두 1182명이 민정청 통제를 받으며 활동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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