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황우석 교수의 알려지지 않은 어린 시절

새벽별 이고 쇠죽 끓이던 어머니가 ‘밤샘 연구’의 교본

  • 김승훈 동아사이언스 기자 shkim@donga.com

    입력2005-11-10 1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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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부여에서 ‘어린이 황우석’을 만나 보니 내 아이도 세계적인 학자로 길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우린 학비가 없어 중학교 진학을 고민하거나, 세 평짜리 방에서 가족 여덟 명이 뒤척이며 지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환경이 좋다고 해서 모두 그처럼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황우석의 어린 시절’을 통해 적어도 내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는 얻을 수 있다. 어린 황우석이 지닌 뚝심의 원천을 찾아본 현장 르포.
    황우석 교수의 알려지지 않은 어린 시절
    부여(扶餘). 찬란한 백제 왕조의 낙일(落日)이 아로새겨진 고도(古都). 부여 하면 최인호의 소설 ‘잃어버린 왕국’이 떠오른다. 그는 부여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을 단서로 백제의 역사를 복원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역사의 복원과 재구성은 하나의 실마리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실증한 것이다.

    국보급 과학자로서 전세계에 ‘바이오 코리아’의 이름을 드날리는 황우석(黃禹錫·53) 서울대 수의과대학 석좌교수. 그를 이해하는 코드는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다. 휴머니즘, 조국애, 리더십, 근면, ‘찍소’ 정신(우직한 소처럼 일관되게 일을 추진한다는 뜻)…. 하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황우석의 어린 시절’을 관통하지 않고는 맥을 추스르기 어렵다. 나무의 성(盛)한 외관을 받쳐주는 게 튼튼한 뿌리이듯, 개인의 위대함도 근본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작가 최인호가 무령왕릉을 단서로 백제의 마지막 역사를 되살려냈듯, 부여에서 만난 어린 시절의 황우석을 실마리로 오늘의 황우석을 생생하게 양각해보자.

    三代가 모여 산 초가삼간

    충남 부여군 은산면 홍산2리 계룡당(鷄龍堂) 마을. 인접 군(郡)인 청양군에서 발원한 칠갑산 자락에 61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계룡당’이라는 별칭은 마을 지세(地勢)가 닭 벼슬과 용 꼬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마을 뒤로는 녹음이 드리운 산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고, 앞으로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냇물이 흘러간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동양화 한 폭을 보는 듯 정감이 넘친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 이름도 정겹다. 우렁창세기, 승적골, 말두덤골, 산재당골, 파래골…. 어디서 연유한 이름인지는 모르지만 예부터 마을 사람들이 불러온 이름이다.

    황 교수가 살던 집은 마을 초입에서도 한참 더 들어간 곳에 있다. 꼬불꼬불 길을 돌고 돌아 들어가면 가장 위쪽에 두 채의 집이 있다. 위쪽에 있는 집은 이미 허물어져 옛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다(옛날 그 집에는 황 교수의 절친한 고향 형이자 친구인 이광희 이장이 살았다). 아래쪽에 그나마 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곳이 황 교수의 생가다. 담벽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위태위태하다. 녹이 슨 대문은 긴 세월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건듯 부는 바람에 삐걱삐걱 불협화음을 자아낸다.

    초가삼간. 부엌 한 칸에 방 두 칸짜리 전형적인 옛 집이다. 이 작은 집에 삼대가 모여 살았다. 황 교수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다섯 형제와 지내던 방은 각각 2~3평 남짓. 좁다. 누우면 몸을 뒤척이기에도 비좁을듯하다.

    “우석이와는 놀지 말아라!”

    황 교수의 선조인 창원(昌原) 황씨 문중 사람들이 계룡당 마을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 광해군 때라고 한다. 다른 황씨 문중과 달리 황 교수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했다. 할아버지도 독자였고, 아버지는 3대 독자였다. 다행히 황 교수 아버지 대에 와서 많은 자녀를 뒀다. 3남 3녀, 여섯 명이나 낳았다.

    고향 형이자 친구인 이광희 계룡당 마을 이장 덕분에 부여에 살던 어린 황우석을 그려낼 수 있었다. 면사무소 직원이나 인근 동리 사람들은 이광희 이장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황우석의 어린 시절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고 했다.

    이광희 이장은 황 교수보다 두 살 위다. 당시 시골에서 한두 살 차이는 친구로 통했다고 한다. 이 이장도 황 교수를 동생이라기보다는 친구로 대했다. 하지만 황 교수는 이 이장을 꼬박꼬박 형이라 부르며 형으로서 존경했다. 호칭이야 어찌됐든 두 사람은 지금까지 가장 친한 친구로 우정을 나누고 있다.

    황우석 교수의 알려지지 않은 어린 시절

    부여군에 있는 황우석 교수의 생가.

    황 교수 집과 이 이장의 집은 붙어 있었다. 아랫집에 황 교수가 살고, 윗집에 이 이장이 살았다. 아래윗집에 살다 보니 서로 속속들이 알게 됐다. 동고동락하며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학교도 같이 다니고 방과 후 멱을 감거나 고기 잡는 것도 함께했다. 당시 고향 마을에 남아 있던 풍습인 보름밥 훔쳐 먹기도 함께했다.

    황 교수는 초등학교 시절 여자 동창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다. 어릴 때도 지금처럼 단아한 얼굴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지녔다. 귀공자풍의 용모가 여자아이들의 호감을 샀나 보다. 하지만 그 호감이 혐오의 화살로 돌변해 황 교수의 가슴을 찌르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대부분이 가난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도 빠듯했다. 1950∼60년대 농촌에서 배 불리 먹는 집이 드물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밭일을 하거나 땔감을 구해야 했다. 공부할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 황 교수를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은 다 먹고 살 걱정 없는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자기 자식이 가난한 집 아이인 황 교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부모들은 노발대발했다. 우석이에겐 말도 걸지 말라고 했다.

    가난으로 빚어진 웃지 못할 에피소드는 그 밖에도 많다. 그 무렵 학교에서 반장이나 부반장이 되는 아이, 그리고 상장을 받는 아이는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부잣집이나 지역 유지의 자녀였던 것이다. 하지만 황 교수는 그런 사정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공부했고, 덕분에 졸업식 때 당당하게 초등교육회장상을 받았다. 이광희 이장의 회고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우석이는 어릴 때부터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집념이 대단했습니다. 소 꼴을 베러 갈 때도 책은 꼭 챙겨 갔어요. 소를 풀어놓고는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봤어요. 늘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짬짬이 시간 날 때마다 책을 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죠.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 때니 밤에 공부하려면 호롱불 밑에서 해야 했는데, 그것도 기름을 아낀다고 일찍 꺼야 했습니다. 집안일을 도우면서 공부한다는 것, 어린 나이에 쉽지 않은 일이죠. 초등학교 6년 동안 딱 두 번 결석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몸이 약해졌기 때문이었어요.”

    물론 황 교수를 키워낸 것은 가족의 사랑이었다. 조부 황태희 옹은 유학자였다. 공맹(孔孟)에 조예가 깊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선비였다. 식언(食言)과 가식이 없었다. 옳지 않은 길은 가지 않았으며,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굽히지 않았다. 윗사람은 공경하고, 아랫사람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했다.

    항렬로 치면 황우석 교수의 아저씨뻘 되는 황동주씨는 “어른에게 깍듯하게 행동하고 옳은 것은 초지일관하는 황 교수의 ‘심지’는 할아버지에게서 영향받은 것”이라고 귀띔했다.

    어릴 때부터 황 교수의 몸에 밴 예의범절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경호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고향에 내려가는 요즘, 황 교수는 동네 초입부터 마을 어른이 눈에 띄면 바로 차에서 내려 뛰어가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를 올린다.

    할아버지는 손자 우석에게 삶을 살아가는 가치관과 휴머니즘을 싹트게 해줬다. 할아버지는 한의학에도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변변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가난한 환자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돌봐줬다. 집 주위에는 약재로 쓰이는 나무나 약초를 심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의술(醫術)이 아닌 인술(仁術)을 행한 것이다. 황동주씨의 얘기다.

    “옛날 그 집에는 책이 엄청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석이 조부께선 그 책들을 아낌없이 나눠줬습니다. 동네 선비는 물론 멀리서 말을 듣고 찾아오는 가난한 선비들에게도 책을 나눠줬죠.”

    조부의 이웃 사랑은 그대로 황 교수에게 전해진 듯하다. 황 교수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적극적으로 남을 돕는다’ ‘사교성이 강하다’ ‘협조심이 강하다’ 등 그의 따뜻한 심성을 엿볼 수 있는 문구들이 눈에 띈다.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어린 우석의 여린 마음의 불씨 하나가 훗날 60억 인류의 삶을 뒤바꿀 거대한 불길로 일어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아버지의 요절

    황우석 교수의 알려지지 않은 어린 시절

    황 교수의 어릴 적 모습을 담은 사진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겨우 고교 졸업사진만 한 장 구했다. 가난 탓에 사진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한 듯하다.

    아버지 황혁주씨는 멋쟁이였다. 늘 개량 한복 차림에 담뱃대를 윗주머니에 꽂고 다녔다.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곪고 있었다. 하루 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데, 6남매를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할지 막막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건 자녀들 공부시킬 여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일찌감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을 거드는 큰딸과 큰아들. 그 아이들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했으랴. 그리고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둘째아들과 둘째딸, 곧 초등학교에 들어갈 셋째아들(황 교수)과 막내딸까지…. 특히나 머리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둘째아들을 생각하면 한숨만 늘었다.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그런 걱정들이 아버지를 조금씩 죽음의 문턱으로 몰고간 듯하다.

    황 교수가 다섯 살 나던 무렵,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밭일을 나갔다. 하지만 그날이 황 교수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보리밭을 매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당시로선 원인도 몰랐지만, 오늘날로 치면 뇌출혈이었다.

    황 교수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재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한 집안의 기둥을 잃은 슬픔보다 더 큰 아픔은 가난이었다. 어머니와 형, 누나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일했다.

    그런 형편이니 어린 황 교수에게 따로 관심을 기울일 리 없었다. 그랬기에 어릴 때부터 자기 문제는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도 혼자 감내하며 이겨 나갔다. 자신의 자잘한 문제를 어머니나 형제에게 말해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 말수가 줄어들고 조용한 성격의 아이로 커나갔다.

    어머니 조용연씨는 가난한 산골 마을로 시집와 육십 평생 허리 한번 제대로 펴보지 못했다. 잠시라도 손을 놀리면 식구 중 한 명에게 돌아갈 밥이 줄었다. 남편이 세상을 등진 뒤에는 전보다 더 부지런히 일했다. 샛별이 여린 빛을 발하는 새벽녘에 일어나 맨 먼저 쇠죽부터 끓였다. 소는 집안의 보배였다. 사람은 굶어도 소를 굶겨서는 안 되었다.

    농촌에서 소가 참으로 귀하던 시절이었다. 부잣집이 아니고서는 소를 가질 수 없었다. 황 교수네는 운 좋게도 부잣집 소를 한 마리 얻어와 키울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소유는 아니었다. 3년 정도 정성 들여 키운 소가 새끼를 낳으면 어미소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새끼소를 갖는다는 조건으로 받아온 배냇소였다. 소 한 마리면 자식들 세 끼 먹일 양식은 구할 수 있었기에 어머니는 애지중지 소를 키웠다.

    소가 먹고 나서 사람이 먹는다

    쇠죽을 끓여 소에게 먹이고 나면 식구들 밥을 준비했다. 희멀건 죽이었지만 그것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식구들 다 챙겨주고 남는 게 있으면 어머니 몫이었다. 없으면 한 끼쯤 건너뛰는 게 예사였다. 아침을 먹고 집안 정리가 끝나면 밭이나 논으로 나가 일했다. 산에 올라가 소 먹일 꼴도 베었다. 오후 내내 쉴 틈 없이 일했다. 밤에는 방 한 귀퉁이에서 늦게까지 새끼를 꼬거나 가마를 쳤다. 그러다 꼬부랑잠을 잤다. 어머니의 하루 일과는 그렇게 끝났다. 그 생활이 육십 평생 이어졌다.

    젊어 고생한 흔적은 몸에 그대로 남는가 보다. 어머니는 지금도 허리를 펴지 못한다. 그런 어머니를 곁에서 보고 자란 황 교수였기에 부지런함이 몸에 밸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잠깐의 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는 꼼꼼한 사람으로 자랐다. 요즘 황 교수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를 보낼 수 있는 것도 어린 시절 본 어머니의 삶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황 교수에겐 위로 두 명의 누나와 두 명의 형이 있고, 아래로 여동생 하나가 있다. 큰누나 인숙씨는 현재 보은에 살고 있고, 큰형 규석씨와 둘째형 중석씨, 동생 인애씨는 서울에 살고 있다. 둘째누나 인순씨는 부여 능곡리에서 수박 농사를 지으며 산다.

    형제들은 어려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참고 견뎌내며 살았다. 그러기에 다들 말수가 적었다. 그러나 황 교수의 배움에 대해서만은 잠자코 있지 않았다. 집안의 한 사람만이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둘째형 중석씨의 도움이 컸다. 동네에서 똑똑하기로 소문났지만 가난으로 일찍이 배움을 포기해야 했기에 배움을 향한 자신의 열망을 동생을 통해 이뤄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형제가 분가해 고향을 떠났지만 둘째형만은 고향에 남아 어머니를 모시며 농사를 지었다. 가을 걷이를 하고 나면 황 교수가 몸을 기탁하고 있던 당숙어른 댁으로 쌀을 보냈다.

    황 교수의 모교인 대전고등학교 김원명 교감의 말을 통해서도 황 교수를 향한 중석씨의 마음씀씀이를 엿볼 수 있다. 김 교감은 “객지에서 고생하는 황 교수를 위로하고 힘이 돼주기 위해 둘째형이 대전으로 올라와 황 교수와 함께 생활했다”고 말했다. 다른 형제들도 자신의 몫을 희생해가며 황 교수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

    ‘물과 고기’

    황우석 교수의 알려지지 않은 어린 시절

    황우석 교수가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격려해준 추강 황용주 선생 추모비 앞에 선 황 교수(앞줄 왼쪽에서 세번째)와 추강 선생의 제자들.

    사람은 살아가면서 인생의 큰 전기를 맞이할 때가 있다. 삶이 송두리째 바뀔 만한 계기가 어느 한 순간은 찾아온다. 황 교수에게도 그런 전기가 찾아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앞둔 때였다.

    황 교수는 배우고 싶었다. 더 깊게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망설였다. 그런 그에게 배움의 길을 터준 사람이 있다. 바로 당숙어른인 추강(秋岡) 황용주(黃龍周) 선생이다.

    황우석 교수의 조카뻘 되는 황정익씨(한국황씨종친회 부여군 회장)는 황 교수와 추강 선생의 관계를 ‘물과 고기’에 비유했다. 추강 선생은 황 교수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황 교수 집에 찾아왔다. 황 교수 어머니를 만나 집안에서 단 한 사람만이라도 배워야 한다며 황 교수를 계속 공부시키라고 권했다. 그리고 황 교수를 자신이 데리고 있으면서 공부시키겠다고 했다. 추강 선생의 확고한 권유와 실질적인 도움 덕분에 황 교수는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어렵사리 배움의 길이 열린 황 교수는 열심히 공부했다. 대전서중학교와 대전중학교 두 곳에 동시에 합격했다. 그 중에서 3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는 대전서중을 택했다. 추강 선생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다. 방 두 칸짜리 월세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추강 선생은 황 교수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방 한 칸을 내줬을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학비를 대줬다.

    황 교수의 청소년기를 곁에서 지켜보며 정신적 힘이 돼준 추강 선생. 그는 훌륭한 교육자로 주변에서 신망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공주농고와 공주초등교원양성소를 수료한 후 1948년 모교인 은산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전에 살던 계룡당 마을을 떠나 부여군 구룡면으로 옮겨왔다. 계룡당 마을과는 지척이었다.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젊은이들은 그를 사숙했다.

    전직 ‘인민위원장’의 후원

    6·25전쟁이 일어나자 논산과 부여엔 공산주의 세력이 맹위를 떨쳤다. 부여군에서는 추강 선생이 살던 구룡면 일대가 특히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폐해가 극심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추강 선생이 그 난을 피해가긴 어려웠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강권에 의해 인민위원장 완장을 차게 됐다.

    그후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서울이 수복됐다. 부여군에서 활개를 치던 공산주의자와 부역자들은 북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추강 선생은 고향 마을에 남았다. 강압에 의해 인민위원장이라는 완장을 찼을지언정 사람들을 괴롭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에선 보복의 혈투가 벌어졌다. 공산주의 완장을 찼던 사람들을 색출해 엄벌에 처했다. 추강 선생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위기를 피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황 교수의 집이었다. 황 교수 어머니는 추강 선생의 딱한 처지를 알고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그를 집 천장에 숨겨줬다. 훗날 이야기지만 그때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해 추강 선생은 황 교수를 거둬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추강 선생은 대전에서 교편을 잡다가 1998년 4월 세상을 떴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그의 덕과 학식을 흠모해 지난해 4월 고향 마을에 추강 황용주 선생 훈도불망비(薰陶不忘碑)를 세웠다. 고희를 넘긴 제자들이 50여 년 전의 옛 스승을 기리기 위해 불망비를 세운 것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사례다.

    추강 선생은 돈이 없어 공부를 못 하는 아이가 있으면 월급을 털어 대신 수업료를 내주고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재우며 공부시켰다. 아이들이 가난 때문에 배움을 포기하는 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고자 했다.

    황 교수는 한학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인자한 성품을 지녔던 추강 선생 밑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큰 가르침을 받았다. 주위의 모든 것에 쉽게 물드는 청소년기에 황 교수가 추강 선생 밑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로부터 진정한 교육자의 길이란 어떠한 것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부여에서 만난 황우석’은 오늘의 황우석을 양각(陽角)하는 단서였다. 말보다는 온몸으로 그를 대변하는 고향 산천과 그 시절의 사람들 속에 오늘의 황 교수가 투영돼 있다. 오랜 침묵의 세월이 흘러도 역사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해준 무령왕릉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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