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호

수능 치른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 편지

“조르바에서 장길산까지… ‘手不釋卷’을 가슴에 새겨라”

  • 최영록 성균관대 홍보전문위원 goodjob48@hanmail.net

    입력2005-11-30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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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가 건넨 편지 한 통에 가슴 뭉클한 적이 있는가. 여기, 평생 책 욕심을 부리며 살아온 한 아버지가 지난해 수능시험을 치른 아들을 위해 써내려간 독서 편지가 있다. 아들의 손에서 한시도 책이 떨어지지 않길 바라는 아버지는 자신의 체험을 곱씹으며 동서고금의 보석 같은 명저 40여 권을 추천한다. 올해 수능을 치른 수많은 아들, 딸에게도 뜻 깊은 지침서가 될 듯하다.
    수능 치른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 편지
    큰아들! 잠든 네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참 준수하게 생겼구나. 어제는 광명시민회관에서 수능 끝낸 고3생들 위로 축제가 있었다며? 아무튼 큰일 치르느라 욕 많이 봤구나. 너는 망쳤다고 투덜대지만, 그래도 모의고사 성적은 나올 것 같다니 그걸로 위안을 삼자.

    이제 내년 3월이면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는구나. 하지만 아직도 넘어야 할 고개는 많다. 가군, 나군 중 가고 싶은 대학을 정해야 하고 논술과 면접시험을 통과해야 하니 마음 놓기는 아직 이르구나.

    수능 치른 날, 친구들과 밤 12시에 운동장에 모여 모의고사 문제지를 태웠다지? 그동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그랬을까 싶다. 그 나이에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을까. 그것을 다 억누르고 공부에만 매달린 1년이란 세월이 참으로 지긋지긋했을 게야.

    우리 때는 수능을 ‘예비고사’라고 했는데, 시험이 끝나자마자 술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의 고향 전주는 맛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술의 고향이기도 하지. 한벽루 옆 천변에 죽 늘어선 선술집에선 오지그릇에 민물고기(피리, 붕어, 모래무지 등)와 실가리(시래기)를 넣고 끓인 ‘오모가리’라는 독특한 안주를 내놓았다. 거기에 막걸리 한두 잔 걸쳐봐라. 세상이 다 내 손 안이다.

    우리 때는 별 놀거리가 없어 막걸리를 밝혔을 테지만, 너희에겐 놀거리가 얼마나 많으냐. PC방, 노래방, 찜질방…방이란 방은 다 있고 당구장, 볼링장, 어디를 못 가랴. 집에선 컴퓨터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쟁놀이도 실컷 할 수 있고.



    책 욕심, 술 욕심, 친구 욕심

    잔소리이긴 하지만, 시험을 치른 지금은 해방감에 들떠 일탈을 꿈꾸고 있을 때만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 이 새벽 모처럼 자판을 두들긴다.

    아들아, 어느 시간이라고 소중하지 않을 때가 있으랴만 올 1년만큼 네 인생에서 중요한 해는 드물 것이다. 대학과 무슨 공부(전공)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뿐 아니라 네 인생관도 어느 정도 확립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올겨울은 시(時)의 고금(古今), 양(洋)의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고전(古典)을 최대한 많이 읽기 바란다. 물론 친구들과 스키도 타고 싶고, 여행도 하고 싶을 것이다. 또한 여학생과 데이트도 하고 싶겠지. 그런 것들은 부디 대학시절로 미루자.

    책은 흔히 마음의 양식이라고 한다. 지금 두뇌활동이 가장 왕성하고 기억력이 팔팔할 때 읽는 몇 권의 책은 평생 마음의 재산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서 빨리 좋은 책을 집어들 일이다.

    다행히 너는 초·중학교 때 그래도 책을 제법 읽은 편이었지. 그것은 앞으로 치를 논술시험 같은 데도 보탬이 될 게다. 하지만 아비의 욕심이긴 해도 난 그동안 읽은 페이지를 모두 네 앞에 펼쳐 보이며 그대로 읽으라고 강요하고 싶은 심정이란다.

    아버지는 너도 알다시피 책 욕심(書耽), 술 욕심(酒耽), 친구 욕심(友耽)으로 살았구나. 앞으론 호(號)를 ‘삼탐(三耽)’이라고 해야겠다. 늘 책이, 술이, 친구들이 고팠다. 이 욕심들은 단지 술만 과도하게 탐하지 않는다면 나쁠 게 없을 거다. 이제 너도 술 마시는 것을 배워야 하리라. 언제 한번 나와 술 한잔 하자꾸나. 모름지기 술이란 향기롭지만 과음하면 실수하기 쉽고 몸에 해가 되나니 항상 분수를 지켜 몸에 알맞게 마실 일이다.

    아버지는 손에서 한시도 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수불석권(手不釋卷)’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또한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는 말도 마찬가지란다. 앞으로 너도 그러하기를 진정 바라는 마음으로, 이 겨울 네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을 줄줄이 읊어보겠다. 진지하게 참조하기를 빈다.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고등학교 때부터 어느 책이 좋은 책인가 한눈에 알아보는 감각이 있었다. 그때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읽거나 영자 시사지 ‘타임’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구겨넣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너도 이미 읽었지. 어른을 위한 동화, 이 책이 얼마나 마음에 들던지, 원문(原文)으로 보려고 프랑스어를 배워 어설프게나마 읽은 적도 있다. 한울아,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란다. 여우가 왕자를 사귈 때 한 말을 기억하니?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느 정도씩 길들여져야(tame) 하는 거라는. 가슴 조이며 만남을 기다리는 여우, 코끼리를 삼켜 중절모같이 보이는 보아뱀, 발코니에 제라늄꽃이 활짝 핀 광경, 철새들의 다리에 끈을 묶어 저 B-612라는 소혹성에서 날아온 어린 왕자의 앙증맞은 여행. 별나라에 홀로 두고 온 장미와 인간들의 여러 유형.

    아버지는 그 무렵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얼마나 심취했던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로 오자마자 청계천 헌 책방을 뒤져, 지금도 서가에 소중하게 꽂혀 있는 포켓북 원서를 구했다. 그때가 1976년이니 벌써 30년이 다 됐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월든’과 ‘소로’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나의 ‘책 볼 줄 아는 눈’이 떠올랐구나. ‘소로의 월든과 장자(莊子) 사상의 연관관계’에 대한 졸업논문을 쓰려다 중도에 그만둔 것이 지금도 몹시 아쉽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소로만 파고들었다면 대한민국에서 2등 가라면 서운한 전문가가 됐을 터인데.

    함석헌 선생과의 만남

    수능 치른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 편지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펴낸 함석헌 선생.

    그 다음에 눈에 띈 책이 ‘영원한 들사람(野人)’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였다. 지금도 나는 그 책을 발견한 것은 로또 당첨 같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흥안령 마루턱에 우뚝 선 부리부리하고 활 잘 쏘는 우리 배달민족의 원조 할아버지들, 만주벌판을 향해 사자후를 내지르고 말을 타고 달리던 모습을 상상해보라. 최근 중국이 벌이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 웬 말이냐. 그 장면은 민족의 시원(始原)을 말할 때, 지금도 어디서고 인용하는 ‘절창(絶唱)’이다. 그때는 그 구절을 욀 정도였으니, 아버지의 말만 믿고 그 장면만이라도 꼭 찾아 읽도록 하려무나. 반만년 역사의 우리 민족이 왜 이렇게 뒤틀린 역사를 지니게 됐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민족의 맏형 고구려의 어이없는 멸망, 외세 당나라와 결탁한 좀생이 신라의 통일 청사진, 김부식의 사대주의, 묘청의 용틀임 등 고난의 역사가, 수난을 당한 여왕이 드러내고자 하는 뜻을 읽어내도록 해라.

    그때는 함석헌 선생이 내는 ‘씨의 소리’라는 얄팍한 월간지를 받아보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너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졸시(拙詩)를 투고해 게재되는 환희도 맛봤구나. 동시대에 이런 훌륭한 분이 또 계실까 싶었다. 꼭 서울로 진학해 선생에게 세상을 배우고 싶었단다. 그 욕심으로 그나마 공부를 좀 해서 소원을 풀었구나.

    처음 선생님 강의(노자 도덕경)를 듣는데 어찌나 마음이 떨리던지. 지금도 생각난다. 명동의 전진상교육관, 서대문의 선교원, 이대 후문 독지가의 집. 이후 선생님의 팬이 되었단다. 흩어진 그 잡지를 거의 다 구하고 그분의 저작이라면 다 사 모았다. 용케도 1960년대에 나온 ‘수평선처럼’이라는 유일한 시집까지 갖게 됐으니.

    그때 아버지는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 신론’이라는 한자투성이의 엄청 두꺼운 책을 독파했다. 보기만 하면 머릿속에 스캔한 것처럼 쏙쏙 입력이 될 때니까 국사시험은 늘 100점이었다. 통사(通史) 성격으로 돼 있는데,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어 좋았구나. 시간이 되면 고전이 된 이 책도 봤으면 좋겠다. 최근 일조각에서 이 책을 재편집해 발간했더라. 이기백 선생의 아버지께서 아들 둘을 앉혀놓고 유언을 했단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을 하며 살라”고. 하여 이기문 선생은 평생 국어에 천착해 학문의 일가를 이뤘고, 이기백 선생은 역사공부를 하여 대가가 되었다는구나. 훌륭한 집안이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이때, 대하소설을 읽도록 하자. 가장 먼저 읽을 책은 역시 조정래의 ‘아리랑’(12권)과 ‘한강’(10권), ‘태백산맥’(10권) 3질(帙)이다. 자, ‘민속의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최명희의 ‘혼불’(10권)은 또 어떠냐. ‘민족의 대서사시’ 박경리의 ‘토지’(17권)는 이미 고전이 됐다. ‘우리말의 보고’ 홍명희의 ‘임꺽정’(10권)도 봐야 한다. 황석영의 ‘장길산’(10권)은 지난번에 읽었지? 이것만 해도 50권이 훌쩍 넘는다.

    이 시대 ‘왕구라’ 황석영은 실천하는 지식인이다. 통일을 위해 옥살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분의 소설집 중엔 좋은 게 많다. ‘오래된 정원’ ‘손님’ ‘무기의 그늘’도 눈여겨봐야 한다.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청바지 문화를 이끈 작가 최인호가 있다. 지금은 스님이 되고 싶다며 엄살을 피우는데, 집에 있는 ‘길 없는 길’(4권)도 읽도록 해라. 불교, 유교도 소설을 통해 우선 얼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아리랑-태백산맥-한강

    김지하 선생의 생명사상이나 동학연구가 어려우면 다음에 읽어도 된다. 단지 시 1만편이 무슨 대수냐는 고은 시인의 ‘만인보’ 같은 것은 심심풀이로 읽어라. 그러니 놀 틈이 언제 있겠냐. 날밤을 여러 날 새워도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

    ‘불굴의 한국인’ 조정래는 말한다. “일본인들의 죄악상은 잊지도 말고 용서도 말아야 한다”고. 너, 토하젓이라고 아느냐. 민물새우로 담근 젓갈인데, ‘아리랑’을 보면 너무나 분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단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박정희식 개발 독재 속에 묻힌 그늘진 보통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어찌 그것이 옳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아리랑-태백산맥-한강으로 연결 귀착되는 한국의 근대사, 어디 정사(正史)만이 역사더냐. 소설이 몇 배 더 곡진하다.

    명창이자 국창이던 박동진옹은 말했다. “판소리는 전라도 사투리로 혀야 혀, 그 말이 아니면 맛이 안난당께”라고. 전라남·북도의 사라져가는 무수한 방언을 조정래는 고스란히 올려놨구나. 이문구가 충청도 사투리를 살려 ‘관촌수필’ 등에 고대로 남겨놓았듯이.

    ‘원조 보수’ 이문열의 ‘삼국지’는 아예 보지 말자. 차라리 집에 있는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나 장정일이 옮긴 것을 읽어라. 저 유명한 일본의 60권짜리 만화 삼국지는 페이지가 닳았지. 이제 글로 새롭게 보도록 하라. 제갈량의 ‘출사표’도 다시 읽으면 새 맛이 난다. 일생을 살면서 최소한 다섯 번은 읽으라는 고전이다.

    자, 틈틈이 한자공부도 하자. 고사성어의 유래와 뜻을 몇 개나 쓸 줄 안다고 생각하니? 50개? 50개만 정확히 알아도 많이 아는 거겠지. 이 겨울에 300개쯤은 제대로 익혀야 한다. 최근 좋은 책을 사왔다. ‘살아있는 한자교과서 1, 2’(휴머니스트 간). 학습서이지만 정말 재미있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의 어원을 아는 것은 기쁨 아니냐. 제발 바라건대 나와 같은 생각이길. 할 일은, 읽을 책은 많고 시간은 별로 없다. 깊은 겨울밤도 책 몇 줄 읽다 보면 금세 새벽이 오고 만다.

    아버지는 군대 첫 휴가 10일을 받아 ‘장길산’ 10권을 다 읽고 귀대하는데 기분이 좋아 웃음이 절로 나더라. 뭔가 충만한 듯하여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을 너는 아느냐. 우리 집을 둘러봐라. 읽을 책은 수두룩하다. 좋은 책이 얼마나 많냐. 이런 책도 꼭 읽어라.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러시아 사람으로 귀화한 한국통, 친한파인데, 한국 문화에 대한 비평이 적확하다 못해 아프기까지 하다.

    나이가 들어가니 고전이 왜 고전인지를 이제야 알겠더라. ‘춘추필법(春秋筆法)’, 사마천의 ‘사기’는 제대로 읽어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삼국유사’도 정독할 일이다. 역사는 거울이다. E. H 카란 역사학자가 말했던가. “과거, 현재, 미래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역사”라고. 그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다.

    아직은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 있다. 헬렌 니어링, 스콧 니어링 부부가 쓴 ‘조화로운 삶.’ 이 책은 나중에 네 가치관이 확실히 바로 섰을 때 읽어라. ‘오래된 미래’라는 책은 들어봤니? 티베트의 어느 순진무구하여 행복하던 마을에도 이미 저 몹쓸 서구의 개발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고 한다.

    지금 당장 권하고 싶은 것은 마하트마 간디의 자서전이다. 간디는 비단 인도의 현자가 아니라 전 인류의 스승이다. 네가 얼마 전 고3인데도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돌베개)를 다 읽었다고 해서 무척 기뻤다. 백범의 애국심은 본받아야 할 게 어디 한두 가지랴. 그분의 통일정신 맥을 장준하 선생이 잇고, 현재도 백기완 선생(‘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란 책을 추천한다)이란 분이 열변을 토하고 있다.

    젊은 날을 풍요롭게 한 ‘예언자’

    시간이 허락된다면 10년 전에 한 가족여행을 다시 하고 싶다. ‘남도 1번지’ 문화유산 답사. 유홍준 선생이 시키는 대로 한 일주일, 너희는 어려 기억이 가물거리겠지만 그땐 너무 행복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고 외친 그분은 문화재청장이 됐단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도 읽자. 만날 딱딱한 책만 읽으면 질리니까 운문(韻文)도 읽어야 맛이다. 사람 탓할 것 없이 작품으로만 미당 서정주나 섬진강 시인 김용택, ‘우체국’ 시인 안도현의 작품도 틈틈이 읽어라. 아 참, ‘그리스 로마신화’는 새로 읽어야 한다. 이윤기 선생의 책 몇 권이 집에 있을 것이다.

    또 있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아느냐. 아비의 머릿속에 조르바는 언제나 신화에나 나오는 거인 같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흑백영화 시절 앤터니 퀸이 열연했다. 원초적 본능의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 유감없이 보여준다. 사업이 망한 후 고기를 구워 먹으며 날렵한 춤을 추는 앤터니 퀸을 또 얼마나 좋아했던지,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실실 웃음이 피어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고려원에서 전집 발간), 그는 크레타섬을 지중해의 보물로, 아니 세계의 명소로 만든 큰 작가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도 읽어야 한다.

    또 있다. 레바논의 시인이자 화가인 칼릴 지브란. 잠언집 같은 ‘예언자’를 펴들라. 예언자가 하는 말마다 다 시(詩)더구나. 그들은, 그 책들은 내 젊은 날을 풍요롭게 했다.

    나는 우리 아들이 이념적으로 편협한 사고방식을 갖길 결코 원치 않는다. 이런저런 분야의 책을 읽다 보면 네 주관이 서게 돼 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그래도 이 분야의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이 서면 무소의 뿔처럼 그 길로 혼자 가라. 당당히 가라.

    아비는 내일이면 50인데 이제야 앞으론 역사책과 한문서적만 읽겠다고 마음을 정했구나. 온갖 짬뽕에 잡탕은 괜히 소화불량만 유발한다는 것을 지금 알았으니, 한심하다면 무척 한심한 편이겠지.

    너도 알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를. ‘숲 속에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한 길은 풀이 무성하고, 한 길은 길이 잘 나있었다…’ 어쩌고 하는. 가지 않은 길은 항상 두렵긴 하지만, 또 언제나 미련이 남는 길이다. ‘그 길로 갈 걸’ 하며 말이다.

    대학생활을 앞둔 너에게 부담될 정도로 이 책 저 책을 말했다만,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하늘의 별처럼 부지기수다. ‘재수 없게’ 서울내기인 너는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의 모습도 잘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조만간 시골 할아버지댁에 다녀오너라. 찬바람 쌩쌩 부는 한 밤, 마당에 홀로 서보라. 하늘을 우러러봐라. 북두칠성이, 카시오페아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 왜 북극성이 거기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봐라. 등짝이 썰렁썰렁한 바람소리도 들어보고 온몸으로 심호흡을 하며 그 서늘함도 느껴보도록 해라.

    너는 벽에 걸린 달력 문구를 유심히 보지 않았겠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참한 글을 쓴 쇠귀 신영복 선생의 휘호 말이다. ‘夜深星逾輝(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 그 진리를 음미하면서 말이다. 아, 몽골 벌판에 텐트 치고 자다 일어나 보면 바로 눈앞에 별이 대롱대롱 달려 있다는데, 너랑 언제 그곳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부자간에 팔베개를 하고 인생을 하염없이 얘기하고 싶은데.

    내가 읽은 책들을 네가 고스란히 차례대로 읽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단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를 너에게 그대로 펼쳐 보이고 싶다. 그것은 너의 재주와 능력이 아비를 훌쩍 뛰어넘을 것 같아서다. 아비는 재주가 없었다. 욕심도 없고 노력도 안 했다. 늘 반성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내가 치열하지 않았구나, 이래가지곤 될 일도 안 된다, 치열은 곧 열정이다…. 왜 그렇게 욕심이 없었을까. 조금만 노력했으면 글도 잘 썼을 터인데.

    주변의 자극이 없어서였다고? 그건 비겁한 말이다. 모든 것이 결국 나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랑하는 아들, 너만은 결코 나를 닮지 않기를 소망한다. 치열해라. 어영부영해서는, 어리버리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너무 짧다.

    너도 알지? 30년이나 사귄 아버지 친구가 아비의 그런 나약한 점을 가장 싫어하여 불편하게 된 것을 말이다. 그나마 이젠 기억력도 떨어지고 집중력도 형편없단다. 아비도 한때는 ‘한 총기’ 했었다. 천자문을 12일 만에 다 외워 책씻이를 했는가 하면 소동파의 ‘적벽부’, 도연명의 ‘귀거래사’,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바둑정석 1000개(1년새 10급에서 1급이 됐지)도 줄줄 외웠다.

    한울타리를 이뤄라

    아들아, 명심해라. 좌우명(座右銘)이라고 알지? 앉은 자리 옆에 경계하는 글을 새겨놓고 늘 보면서 그 뜻을 되뇌는 것을 말한다. 우(禹)임금은 목욕탕 반석에 ‘일신일신 우일신(日新日新 又日新·나날이 새로워라)’이라는 좌우명을 새겼다지. ‘소년이로 학난성 일촌광음 불가경(少年易老 學難成 一寸光陰 不可輕)…’ 어쩌고 하는 한시를 아느냐. 소년(젊은 시절)은 금세 늙고 배움은 성취하기가 어려우니 매우 짧은 시간도 결코 가벼이 여기지 말라, 촌각을 다투며 공부에 힘쓰라는 뜻이다.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 우리 앞에 놓인 시간이 무한대 같지만 실은 유한대임을 알아야 한다.



    너에게 기대를 걸고 부담을 주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네 인생은 네 것이지만, 처음에 길을 잡을 때 방향등을 제대로 잡고 가면 훨씬 더 수월할 것이고, 그만큼 성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너에게 죽는 순간까지 도움을 주는 사람이니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큰 성취 있길 바란다.사랑한다. 아들아. 네 이름처럼 ‘한울타리’ ‘큰 우리’ ‘공동체’를 이루어라.2004년 11월19일못난 아비, 신새벽에 비원(悲願)처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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